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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0
    [독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2)
    겨울철쭉

[독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쁘리모 레비는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면서, '침묵과 죽음'을 자신의 마지막 증언으로 남겼다. 서경식은 불가리아 출신의 지식인 츠베땅 토르도프를 인용해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와 구제의 서사로, 그 모든 것은 증언을 듣는 우리에게는 명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불가해한 질문을 던진다. 불가해한 질문에 직면한 그가 죽음으로서 우리는 그 질문에 내던져진다. 오히려 그 이유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서경식은 말한다.

글과 여행을 통해서 쁘리모 레비를 찾아가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또 등장한다.

효율적인 학살을 통한 절멸(노동력이 없는자)이거나 "노동을 통한 절멸"(노동력이 남은자)이라는 프로젝트, 이 아우슈비츠는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과 닮은 행위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끔찍하지만 우리와 같이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 아이히만과 같은 "독일인들", 그들도 인간의 일부라면,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는 인간 자체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181쪽)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순은 쁘리모 레비와 같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생존자의 삶을 갉아먹는다. 오히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피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린다.

레비에게 "독일인"은 그런 존재다. 그들 전체를 인종주의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압도적인 다수가 공범인 행위를 볼 때, 그들이 행한 폭력이 취한 독일적 형식(식사나 노동의 양식, 오락의 취향, 언어감각, 나치식 농담의 센스까지!)을 볼 때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다수의 독일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도된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변명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다. 스스로의 기억도 조작된다. 마치, 레비가 수용소에 I.G.파르벤의 화학공장에서 만난 민간인 뮐러 박사가 자신이 레비와 "우정을 쌓았다"라고까지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그래서 레비의 죽음은, 피해자는 결코 잊을 수 없고 매순간 노출되는 모순에, 가해자는 오히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잊고-잊고자하고 "이제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현실을 대면시킨다. 역설적이다. 독일에서, 일본에서 이미 그런 목소리가 높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이스라엘과 미국은 눈감는다. 어떻게 가해자들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피해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일까?


[△ 사진은, 독일에 갔을 때 찍은 베를린 인근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처형장]

한편, 서경식은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이 왜 벌어졌는지를 물으면서, 그 질문을 유럽인인 쁘리모 레비에게도 되돌린다. 나치의 행위는 "중세 이후의 반유대주의, 히스테리컬한 패권욕과 식민지 획득욕,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우생사상, 인종주의 그리고 '효율'에 대한 물신숭배와 테크놀로지 신앙, 이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하여 폭발한 것"이면서 동시에,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경로와도 연관된다. 독일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유럽의 "바깥"에서 행한 행위를 유럽의 "안"으로 돌리게 되었다.

좀더 부연하자면,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독일이 영국 헤게모니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과) 벌인 경쟁 과정으로 이 시기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독일은 부족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시장을 확대하는 등 내부로 확장의 방향을 추구한다.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힐퍼딩과 레닌이 비판한) 금융과두제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영역의 확장"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활공간의 확장"이라는 나치식의 구호가 등장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독일 내부에서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키고 소수자를 절멸하는 정치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곧이어 인근 국가들에 대한 전쟁으로 나간다. 1차 대전은 식민지 재분할 요구이 성격이 강했지만 2차 대전에서 독일은 유럽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고자하고 보다 더 직접적인 유럽의 문제가 된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의 역사 자체가 만들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야만"이 유럽의 문제가 된 이때, 비로소 근대 유럽의 이념으로서 "인간"의 보편성을 둘러싼 자기모순이 드러난다. 쁘리모 레비조차 아우슈비츠를 묘사하면서 (비유럽적인 것으로서) "아만", "야만적인 피그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서경식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문명인가'를 물어야하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다른 책에서처럼 서경식의 장점은, 쁘리모 레비라는 사람을 그의 시간과 공간에 고립된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글을 쓰는 자신의 삶에 불러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쁘리모 레비는 "간첩"협의로 고문받고 투옥된 서승, 서준식 두 형제를, 디아스포라이자 그 투쟁과 고난에의 "외부"에 있다고 느끼는 저자 자신을 만난다. 팔레스타인을 만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우리도, 쁘리모 레비를 그리고 서경식을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김상봉)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고통을 통해 타인과 연대할 수 있기 위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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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경식은 일본과 독일의 상황을 비슷하게 진단한다.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자학사관"을 넘어서자고 선동하는 것처럼, 독일에서도 "수정주의 사관"은 아우슈비츠를 다른 테러독재, 학살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독일에서는 적어도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한 시도들이 의미있게 지속되고 학살을 용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금기가 더 강하다.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관"과 같은 곳은 일본에는 없는 것이다.

여행기에서 베를린에 대한 느낌에서 쓴 것처럼,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힘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으로 느꼈다. 일본도 그럴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폭주"라는 말이 일본에서 어떤 어감인지 느끼게 되었다.

이 책에는 일본인들이 2차 대전은 잘못된 정치인과 군인들이 "폭주"[暴走]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기도 한)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에바"는 통제불가능하게 "폭주"한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이다.(그래서 에바의 전원장치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폭주를 '구속'하는 장치이다.) 독일인들이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이 경우에는 훨씬 약하게 드러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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