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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박영근

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 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 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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