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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적음] '독립'에 대한 니체의 글

 

"독립한다는 것은 극소수 사람의 문제이다: - 그것은 강자의 특권이다. 독립을 시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독립해야만 하는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에 대한 훌륭한 권리를 가지고, 그가 강할 뿐 아니라 자유분방한 상태에 이를 정도로 대담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는 미궁으로 들어가며, 삶 자체가 이미 동반하고 있는 위험을 천 배나 불리게 된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길을 잃고 고독에 빠져 양심이라는 동굴의 미노타우루스Minotaurus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위험 가운데서도 결코 사소한 위험이 아니다. 그러한 사람이 밑바닥으로 내려간다고 할때, 이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하게 된다 : - 따라서 그는 되돌아올 수는 없다! 그는 사람들의 동정으로도 되돌아올 수 없다!--"  <니체, '선악의 저편', 책세상,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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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읽기(視其所以...)

視其所以시기소이 觀其所由관기소유 察其所安찰기소안 人焉廋哉인언수재 (爲政위정)
사람의 행동을 보며, 왜 그렇게 했는가를 생각해보고, 그 행동의 결과로 누가 평안하게 되는지를 살펴본다면, 사람이 어찌 자신의 본모습을 숨길수있겠는가?

***  행위 그 자체(所以소이)는 충분히 꾸며보일 수있다. 행위를 하게된 이유(所由소유)야 그 속을 들여다볼수 없고 단지 미루어짐작할뿐이다. 분명히 드러나는것은 행위의 결과가 누구를 평안케하는가(所安소안)이다. 행위자(혹은 친한사람)인가? 아닌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도움줄수있는 힘있는사람인가?

 

누군가는 소안所安을 행위자의 마음이 평안했는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닌것 같다. 공자가 평소 말한 바람직한 사람의 모습은 '수기이안인修己以安人'이다. 스스로는 공부하고,성찰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사람을 평안케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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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읽기(仁)

先難而後獲, 可謂仁矣 선난이후획 가위인의 (雍也옹야)
고단한일은 남보다 먼저하고 이득되는일은 남보다 뒤에하면 '仁인'이라 할만하다

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 선의인 (學而학이)
말을 번지르하게하고 얼굴빛을 꾸미는 사람에게는 '仁인'이 없다

剛毅木訥 近仁 강의목눌 근인 (子路자로)
굳세고 의지가 강하며, 질박하고 말을 아끼는 사람이 '仁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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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비마이너]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아닌 할 수 있는 것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와
스스로 계획하고 부딪혀 보는 것이 참된 자립생활의 길
2011.01.04 21:01 입력 | 2011.01.05 23:54 수정

이글은 지난 2일 폐렴 증세로 숨진 고 우동민 활동가가 지난해 6월 고인이 활동하던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식지 '네 바퀴로 보는 세상'에 직접 쓴 글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40대 미혼 남성이다. 매일 오전 7시 반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 갈 길 바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동료들과 “좋은 아침~”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일하다 틈틈이 커피 한잔에 사색도 하고, 보고서가 잘못되면 팀장에게 질책을 듣기도 하며, 일과 후 치킨에 맥주 한잔 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난 여느 직장인들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내가 다른 것은 조금은 느리게, 적잖이 불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사무실 동료들은 날 이렇게 부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는 동민 씨’. 장애를 가지고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인생 여정,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싶어, 장애를 핑계로 집안에만 있는 것이 싫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는 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고자 한다.

 

 

 

 

1968 년 10월 24일, 난 서울 면목동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부모님께선 비록 없는 살림이지만 건강한 남자아이가 태어나서 무척이나 기뻐하셨으리라…. 하지만 태어난 지 3일째 되던 날 갑작스레 고열이 났고, 가진 것 없는 부모님은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시고 아이의 열이 내리기만을 곁에서 지키셨다.

 

그 순간이 내가 지금까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된 순간이다. 그렇게 여섯 살 때까지는 일어설 힘도 기어다닐 힘도 없어서 집에서 누워서 지냈고, 바깥세상 구경은 할 수가 없었다. 여섯 살 이후부터 나에게도 차츰 근력이란 게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그 렇게 문밖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나날이 커지던 어느 날,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고 그 틈을 타서 난 생애 처음으로 집 밖으로의 첫걸음, 아니 첫 포복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탈출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모진 매질을 당한 후에 난 밖에 나가기를 포기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저 고분고분 말 잘 듣고 부모님께 폐 안 끼치는 아들로서….

 

 

이 후 남들 다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도 없이 스물다섯 살까지 착한 아들로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옆집 아주머니의 제안으로 안산의 한 시설에 입소하게 된다. 지금 근무하는 센터에서 나의 또 다른 별명은 ‘한 달 용돈 만 원’인데, 시설에서의 한 달 용돈이 3만 원이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만큼 시설에서는 돈 쓸 일, 특히나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할 일이 극히 적어서 어떤 일을 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나 또한 다른 시설 입소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후 5년, 서른 살의 나는 - 비록 친한 친구에게 떠나보내야 했지만 - 시설에 갓 입소한 스무 살의 여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틋한 감정도 키워 보았다. 또 시설 관리자의 권유로 ‘보치아’라는 뇌성마비장애인들을 위한 스포츠를 접한 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지만, 선수로도 활동하게 되면서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지금 센터에서 보치아 담당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5 년간의 시설생활과 그 후 5년간의 그룹홈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사회에 나와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채 겪었던 정립회관 비리척결 투쟁, 활동보조서비스 쟁취 투쟁. 그것도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내 나이 이제 불혹을 넘었지만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될까 자문해본다. 그저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들을 해나가면서 마지못해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쇼 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자 감옥 안에서 치밀한 준비를 해나갔고, 결국엔 탈옥에 성공해서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긴 채 두 팔을 벌려 자유를 만끽한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복수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자유로움 그 자체에 집중했을 것이다. 난 주인공처럼 감옥과 같은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은 내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들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 지만 앤디가 감옥을 나가고 싶어했듯이 나도 마음속 감옥에서 나가고 싶은 꿈, 늦기 전에 혼자 힘으로 외국에 나가 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도 막연한 꿈일지 모르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자리를 지키면서 틈틈이 노력해 보련다. 언젠가는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비록 그것이 진정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라도, 시도에 의의를 두련다. 스스로 계획하고 부딪혀 보는 것이 참된 자립생활의 길이기에….

 

 

 

 

ⓒ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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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왕삼매론중에서...

오랫만에 읽어보았슴...

 

<<보왕삼매론중 일부>>

 

몸에 병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격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배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것을 헌신처럼 버려라"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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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비마이너] 25년만에 시설에서 '탈출'했지만…

25년만에 시설에서 '탈출'했지만…
활보 없어 '상처'투성이, 소득보장 미약해 '앞날 캄캄'
장애등급재심사 받으면 활동보조 대상자에서조차 탈락될 가능성 커
2010.08.10 14:05 입력 | 2010.08.10 20:53 수정

▲지난 4월 중순께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정승배 씨가 집으로 가고 있다.

 

2010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탈시설한 뒤 자립생활을 시도하는 중증장애인의 현실은 어떨까? 정승배(31세) 씨의 이야기로 그 답을 알아보자.  

 

지난 4월 중순께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한 정 씨는 다섯 살에 장애인생활시설에 입소해 25년 동안 장애인생활시설은 물론 정신병원, 노인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정 씨는 실제로는 뇌병변장애가 있지만, 시설에서는 그들의 편의 등을 위해 지체지적장애 1급으로 등록했다.

 

"일곱 살에 장애를 비관해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라고 말할 만큼 세상과 장애에 대해 민감했던 정 씨. 그는 입소할 때 '오백만 원만 주면 평생 있도록 해주겠다'라고 약속했던 시설에서 그동안 계속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요구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결국 스물아홉 살 때 생활비를 재촉하는 원장과 크게 싸우고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

 

하지만 정 씨의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대신 원장과 마찰을 일으킨 정 씨에게 사람들은 정신장애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여러 시설을 전전하던 중, 마지막으로 있던 정신병원에서는 한 달 내내 방에 홀로 갇혀 알 수 없는 약을 먹어야 했다. 

 

정신병원에서 다시 전라도 지역의 한 노인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정 씨는 '탈출'을 결심하고, 전부터 알고 있던 장애인인권단체 전화번호를 간호사실 컴퓨터로 몰래 찾아 "시설에서 나가고 싶다"라며 도움을 청했다. 이후 정 씨는 면회를 온 장애인권활동가들과 함께 서울로 '탈출'했다. '탈출'을 '납치'로 오해해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정 씨의 자립생활은 시작됐다.

 

▲'장애인주거복지 및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사업' 대상자로 선정된 정승배 씨가 주거지원을 받아 현재 살고 있는 집.

 

한동안 다른 동료 중증장애인의 집과 체험홈 등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정 씨는 5월 하순께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는 '장애인주거복지 및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사업' 대상자 1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돼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원룸에 입주하게 됐다.

 

일단 자립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인 주거 공간이 해결됐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시설에서 나온 지 넉 달이 되어 가지만 아직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을 가능성도 적다는 것.

 

"내가 뇌병변장애인이 아니라 지체지적장애인이라는 것을 (지역사회로) 나오고서야 알았다"는 정 씨는 뇌병변장애인으로 등록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현재 활동보조서비스 신규 신청 등을 위해 의료기관에서 장애등급 판정과 장애등급 심사를 위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그러나 정 씨는 등급이 하락해 1급으로 대상자를 제한한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 씨는 휠체어를 손으로 잡고 밀면 어느 정도 보행이 가능한데, 뇌병변장애인의 경우 보행이 불가능해야 1급 판정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해 일주일에 6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지만, 식사와 세면 등 일상생활을 원활히 수행하기에도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지원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 자원봉사자가 와서 2~3시간 집안일을 도왔을 뿐이다. 그나마 이런 지원도 언제 중단될지 모른다. 

 

"어느 때에 활동보조서비스가 가장 필요하냐?"라는 질문에 정 씨는 밥솥을 열어 보여줬다. 그는 "내가 쌀을 물로 씻으면 다 쓸려 보내기 때문에 씻지 않고 밥을 했다"라면서 "밥을 공기에 담을 때에도 다 흘리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이 담아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 씨는 허벅지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혼자서 라면을 삶아 먹다가 뜨거운 물을 흘려 화상을 입었다"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하지만 상처는 허벅지뿐만 아니었다. 턱에도 혼자 면도를 하다가 난 상처가 있었다.

 

▲쌀을 물로 씻기 어려운 정승배 씨가 물에 씻지 않고 한 밥을 보여주고 있다.

▲활동보조인 없이 혼자 식사와 세면을 해결하다가 턱과 허벅지에 난 상처들.

 

활동보조서비스 뿐만 아니라 소득보장 문제 또한 정 씨의 자립생활을 가로막고 있다. 정 씨는 현재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고 아무런 지원도 없지만,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 

 

차상위계층에 속해 장애인연금 대상자이지만 급여를 받아도 월 9만 원에 불과하다. 현재 몇만 원 가량의 후원비와 함께 원룸 관리비와 쌀 등을 지원을 받고 있지만, 이 지원 사업이 끝나면 결국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냐?"라는 물음에 정 씨는 "일자리를 구해 남의 도움 없이 생활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장애인주거복지 및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의 조사랑 활동가는 "주거지원 사업 대상자로 현재 14명을 선정했지만, 승배 씨 등 2명만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나와 주거지원을 받았고, 나머지 대상자들은 장애등급심사 등으로 서비스를 받으려면 몇 달 이상 소요돼 현재 시설에서 나오지 못하고 서비스 신청 절차를 밟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조 활동가는 "특히 지방에 있는 시설에 사는 경우 지자체들이 '활동보조서비스 예산이 부족하다'라며 이유로 아예 신청 자체를 거부하거나 신청을 받아도 바우처 시간을 제공하고 있지 않고 대기자로 두고 있어 시간이 더욱 걸리고 있다"라고 설명하면서 "선정된 분들도 시설에서 나오는 시간이 길어져 많이들 힘들어하신다"라고 전했다.

 

장애등급 심사제도 확대 등 장애등급제 강화와 예산 부족으로 행정당국이 중증장애인에 대한 서비스를 제한함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하고자 하는 중증장애인의 삶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있다.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나오는 출구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홍권호 기자 shuita@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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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참세상] 장애인의 시설탈출, 살이있는 드라마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6501

 

장애인의 시설탈출, 살이있는 드라마

[상상나누기] 장애인들의 탈출이 계속되고 있다

김유미(노들장애인야학 교사)  / 2010년04월28일 18시17분

 

지난 토요일 한 장애인이 또 시설에서 ‘탈출’했다. 이번에도 ‘한 편의 드라마’가 연출됐다. 28세 남성 S, 뇌병변장애에 언어장애가 있다. 열 달 전 경기도에 있는 ㄱ시설에서 동료들과 함께 ‘탈시설’ 하려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로 실패,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ㄴ노인요양병원으로 보내진다. ㄴ병원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하던 S와 시설 동료들 사이에 작은 싸움이 일어나고, 이 일로 S는 ㄷ정신병원에 격리된다. 미치지 않은 S는 시설 밖 친구들에게 SOS를 날린다. 그리고 얼마 뒤 시설 밖 친구들이 차를 끌고 ㄷ정신병원에 S를 ‘면회’하러 간다. 친구들을 만난 S는 친구들에게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ㄷ병원 관계자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S는 친구들의 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한다. ㄷ정신병원은 경찰에 S가 납치되었다고 신고. S가 탄 차량 번호가 노출된 탓에 S와 친구들은 경찰 검문을 피해 국도와 고속도로를 번갈아 타 가며 급히 서울행…

 

지금 S는 잘 있다. S와 친구들, 분노한 S의 아버지, 납치범 탐문에 나선 경찰, 관리 부실 책임을 뒤집어쓸까 노심초사한 정신병원 사이에 여전히 긴장이 흐르고 있긴 하다. S는 열 달 전 함께 탈시설을 하려고 했던 ㄱ시설 출신 친구들 집에 머물며, 앞으로 만들어 가야할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병원에서 뭔지도 모르고 먹어야 했던 약을 끊은 덕분에 더 안정된 S.

 

지난해 여름에도 한 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마흔두 살의 지체장애가 있는 여성, A. 경기도 산골짜기 시설에 살던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소등’하고 ‘취침’한 밤에, 온 몸으로 기어 시설을 탈출했다. 큰 길이, 불빛이 보일 때까지 무작정 기었다. 몇 시간을 기었는지 모르겠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그녀를 발견해 근처 경찰서에 데려다주었다. 언젠가 시설에 들어와 ‘탈시설 욕구’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갔던 S가 생각나 무작정 ‘탈출했으니 도와 달라’ SOS를 날린다. A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S와 경찰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시설 관리자. A를 가운데 두고 설전이 벌어지고, A는 S와 함께 시설이 있는 동네를 벗어난다. 밤 1시, 그녀의 탈출이 이뤄졌다. A도 지금 잘 살고 있다. 그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다. A가 한밤중에 시설을 기어서라도 나가야겠다 결심했던 건, 시설에서 A의 손전화기를 빼앗은 사건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남편인 T와 그녀는 시설에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A와 T는 시설에서 나가 함께 살기로 약속했으나 A 부모가 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T 먼저 시설을 나가게 된다. 떨어져 있는 동안 A와 T를 이은 유일한 수단은 손전화. 시설에선 A가 손전화를 통해 계속 ‘탈시설’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고, 전화를 못 쓰게 눈치를 주다가 결국 이를 빼앗고 만다. 눈앞이 깜깜해진 그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기로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설에서 기어 나온다. 그곳에선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벼락 맞듯 깨달은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라고 표현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바로 2009년, 2010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다. 몇 십 년 전 일어났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자, 이제 극적인 드라마의 재미에서 빠져나와 ‘시설’에 주목해보자. 대체 시설이 어떤 곳이기에 장애인들이 거기에서 ‘탈출’하고 있는지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사람이 죽어나갔다. 정신질환자 80%, 알콜중독자 20%, 한 방에 60명이 똥통, 소변통 옆에서 잤다. 새벽 4시 기상시간. 배고파서 개밥도 먹어 봤었다.” 1998년에 충주 장호원 근처에 있었던 장애인생활시설의 모습이다. 당시 시설은 열악했고, 인권유린의 온상이 되어 우리 앞에 종종 등장했다. 그곳에 살았던 야학 학생 덕민께서는 당시를 “완전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시설은 한 방송사의 ‘현장고발’ 보도로 바로 폐쇄됐다.

 

시설 폐쇄로 살 곳이 없어진 덕민은 ‘음성 꽃동네’로 옮겨 갔다. “꽃동네는 동네가 아니었다. 작은 도시라 할 만했다. 5000여명이 있었는데 내가 살던 건물만 해도 300여명. 한 방에 15명 내지 17명까지 정신지체, 뇌성마비, 중도장애인들이 같이 생활했다.” 꽃동네는 그 명성답게 장애인을 잘 보살폈다. 덕민은 꽃동네를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라고 이야기한다. 21세기 시설은 이제 적어도 먹고 생활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는 듯하다. 아직도 종종 인권유린 뉴스가 흘러나오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설이 살 만한 곳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춥고 배고프지 않았지만 덕민은 2004년 꽃동네에서 나왔다. 그 역시 지금 잘 살고 있다.

 

“아침에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 반에 밥을 먹고, 씻고 뭐하고 하다보면 8시가 돼요. 8시부터 8시 반까지 기도 시간이고, 기도가 끝나면 10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근무자들이 점심 준비를 해요. 우리는 11시 반에서 12시까지 점심을 먹어요. 12시부터는 근무자들이 밥을 먹고, 그 뒤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는 자유시간이에요. 자유시간에 저는 주로 컴퓨터를 해요. 3시 반부터 4시 반까지 근무자들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해요. 4시 반부터 5시까지 밥을 먹고, 5시부터 청소하고 이불 깔고 잘 준비를 해요. 6시부터 6시 반까지 저녁 기도 시간이고, 그 뒤론 또 자유시간이에요. 9시에는 불을 꺼요. 불은 꺼야 되는데 텔레비전은 안 꺼도 돼요. 텔레비전은 11시까지 볼 수 있어요.” 2010년 4월 현재 꽃동네에 살고 있는 국진 씨, 종일 뭐하며 지내냐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다. 국진 씨는 1990년 그의 나이 15살에 꽃동네에 입소해 20년째 살고 있다.

 

시설 안과 시설 밖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시설 안의 삶은 군대 안, 감옥 안과 닮았다. 한 방에서 대여섯 명이 5시 반 기상 9시 소등하는 생활을 20년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학교에서 단체 생활과 규칙을 가르치기 위해 진행하는 극기 훈련, 야영 프로그램도 3박 4일이면 족했다. 시설 안의 삶, 장애인의 삶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된다는 전제를 깔아야 시설이 살 만하다,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결국 장애인이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장애인에 대한 포기가 전제된 말. “아직까지 시설에 대한 불만은, 그렇게 큰 불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소한 것들… 나도 자립생활 한번 해보자, 남들 같이 일도 해보고 돈도 벌어보고 한번 그렇게 살아보자 그런 마음이 있는 거죠… 시설에서는 틀에 박힌 생활이니까. 오늘이 어제고, 어제가 오늘이고…”

 

지난해 국진 씨는 시설에서 나와 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시설 바깥으로부터 받았다. 가족의 반대가 심하기도 했지만 그가 선뜻 나가지 못 한 건 대책이 없어서였다. “그때는 숙일 수밖에 없었어요. 돈… 보증금이 필요한데… 그동안 제가 나오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무조건 나오겠다고 했던 거예요. 근데 돈 문제가 걸리니까 고집을 끝까지 못 부리겠더라고요.”

 

 

‘탈시설’은 엄연한 현실의 문제다. 시설에서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무슨 돈이 있을 것이며, 가족의 포기로 버려진 이들에게 돌아갈 집이 있을 리 없고, 게다가 일상적으로 활동보조가 따라 붙어야 삶이 가능하다는 취약점(?)도 있다. 모든 것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밑바닥에서 탈시설은 시작된다. 투쟁하지 않으면 되는 게 없는 게 탈시설 장애인들의 삶이다.

 

야학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탈시설 중증장애인들은 “선생님, 화장실 좀…” 화장실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하고, “안 바쁘시면 밥 좀 먹여주세요.” 매 끼니 밥 먹을 걱정을 한다. 보증금을 모으기 위해 과일 가게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활동보조인이 갑자기 오지 못 하는 날이면 축축한 엉덩이로 종일 천장만 보고 누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마치 신고식이라도 하듯 한번 씩 대성통곡을 한다. 힘들어죽겠다, 외로워죽겠다는 이야기는 해도 시설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현재 국진 씨는 꽃동네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와 음성군수를 상대로 자립생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지난 해 12월 음성군에 사회복지서비스 변경 신청을 했는데,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업법 제33조는 복지서비스를 이용하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게 돼 있다. 당사자가 서비스를 신청하면 관할 기관은 욕구 조사를 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국진 씨는 음성군에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해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군에서는 시설에서 나오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 있다 정도의, 누구나 아는 정보만 제공했다. 욕구조사도 없었다. 국진 씨는 음성군청이 자신이 제기한 사회복지서비스 변경 신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문제제기하는 소송을 시작했다. 소송의 의미는 크지만 가족의 반대가 여전하고 소송이 잘 될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내가 몸도 못 가누는데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것이며, 몸이 갑자기 아프면 누가 병원에 데려갈 것이며, 갑자기 위험한 일이 나도 대처가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시설에 있으면 다 알아서 해주는데 왜 그러냐고… 사람으로 살면서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내가 느끼는 기쁨, 그런 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아도 천국이 지옥이 되고, 지옥에서도 내가 기뻐하면 그게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진 씨의 드라마는 아무래도 대하드라마가 되려나 보다. 야학에선 ‘포기’란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말장난을 하곤 한다. 썰렁하지만 맞는 말 같다. 시설에 장애인을 가두는 것, 스스로 시설에 갇히는 것, 결국 서로 함께 살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 꽃동네 국진 씨가 어서 이곳으로 나오면 좋겠다. 활동보조가 없어 쩔쩔매고 대성통곡하는 시간을 겪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오늘, 내일이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보다, 후들거릴지라도 이곳에서 함께 사는 게 낫다. 삶은 밑바닥에서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니까. 포기하는 것보다 투쟁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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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2월이여! - 병수

오, 2월이여!

        -  병수

 

오, 2월이여!

 

2월은 날짜가 짧은만큼 ,

우리의 슬픔도 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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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의복음서 12:49-53

루가의복음서 12:49-53

 

"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  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이다."

 

** '공동번역 성서' (대한성서공회,198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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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 박영근

가을비

 

                           박영근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자장면 그릇 몇개
서로 얼굴을 파묻고
비에 젖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빈 그릇 속으로 고이는 빗방울들
지나가던 행려의 사내 하나 그 모양을 보고 있다.
어디 먼 데
먼 데로
흩어진 식구들 생각을 하나보다

플라타너스가 젖고
빗속으로 가지들이 흔들리고
허공에 걸리는 새 울음소리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낮게 엎드린다
온통 젖은 얼굴 한장
흙탕물 튀어오르는 그릇 위로 떨어지고 있다

날이 더 저물면 한번쯤 우레소리가 건너올 것이다.

 

* 박영근 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에서

 

 

플라타너스는 도시 길가에 흔히 심는 가로수다.

가을이면 큰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곤 한다.

박영근시인의 시에 백목련만큼이나 자주 나오는 나무이기도 하다.

 

플라타너스 나무밑에 집앞에 있어야할 자장면 그릇이 놓여있다.
누가 먹은것일까? 

그리고 빈 자장면그릇 위로 비가 내린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있는 사람이 있다.
'지나가던 행려의 사내'다.
시인은 지난 시집의 '행려'라는 시에서

'행려가있을뿐 돌아갈 곳이 없다'라고 말한다.


    '行旅'(행려) 중 마지막부분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안을 뒹구는 재고가 된 옷보따리와
        그 곁의 새우잠처럼

       

         먹다 남긴 소주병처럼

         그 속에서

         깨어나지 않는 꿈처럼"

그리고는 '빗속', '가지들이 흔들리고',  '새' , '젖은 얼굴',  '우레소리'등
이전 시집의 시 '봄비'에서 나왔던 시어들이 비슷하게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봄비'에는 있을수 없는 것이 '가을비'에는 나타난다.

떨어지는 나뭇잎이다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낮게 엎드린다
        온통 젖은 얼굴 한장

        흙탕물 튀어오르는 그릇 위로 떨어지고 있다"

 

'봄비'에서는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했는데

이제  나뭇잎들이 같이 엎드린다

 

그래서 덜 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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