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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9
    대의정성 - 손사막
    산초
  2. 2008/08/04
    가을(미완유고시) - 윤중호
    산초
  3. 2008/06/20
    소리장도(笑裏藏刀) - 김사인
    산초
  4. 200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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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모악 편지(여덟번째) -김영갑(1)
    산초
  6. 2008/05/27
    결핍 - 박영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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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05/27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정호승
    산초
  8. 2008/05/24
    작별들 - 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옮김
    산초
  9. 2008/05/15
    팽이 - 조영관
    산초
  10. 2008/04/30
    봄비 - 박영근
    산초

대의정성 - 손사막

대의정성(大醫精誠)은 중국 당나라때의 '의사'이며 의학자인 손사막이 '의사'의 몸가짐,마음가짐에 대해 쓴 글입니다.  다시읽어봐도 그 내용은 여전한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해석은 마땅한것을 못찾아 졸렬하지만 제가 다시 했습니다.  주요부분을 올립니다.
해석은 원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의역을 했습니다.

 

대의정성(大醫精誠)

 

1
凡大醫治病, 必當安神定志, 無欲無求, 先發大慈惻隱之心, 誓願普救含靈之苦.
무릇 의사다운 의사는 환자를 진료할 때, 마음을 평안히 하고 뜻을 가다듬어야 하며,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좇아서는 안된다.  먼저 마음속에서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우러나와야 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두루 구하겠다는 굳센 염원이 있어야 한다.

若有疾厄來求救者, 不得問其貴賤貧富, 長幼姸蚩, 怨親善友,華夷愚智, 普同一等, 皆如至親之想,
질병이 있어 찾아와 진료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지위와 재산,소득을 묻지 말아야 하며, 나이가 많고 적음을 이쁘고 못생겼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과 친한지 원한이 있는지 따지지 말고, 동족인지 외국인인지 차이두지 말고 똑똑한지 바보인지 구별하지 않아야한다. 모두 다 동등한 사람으로서, 마치 자신의 자녀인것처럼 생각하고 치료해야한다.

亦不得瞻前顧後, 自慮吉凶, 護惜身命.
또한 환자를 진료할 때 앞뒤를 살피어, 자신에게 이득과 손해가 어떻게되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를 감싸고 아끼지 않아야한다.

見彼苦惱, 若己有之, 深心悽愴, 勿避嶮巇, 晝夜, 寒暑, 肌渴, 疲勞, 一心赴救, 無作功夫形迹之心.
환자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바라볼때는, 이를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마음속깊이 슬퍼하고 애처로워해야한다.  험한곳을 피하지 않고, 밤낮과 추위,더위를 가리지 않으며, 배고픔,목마름과 피로를 감수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아가 환자를 치료하되, 성과를 내어 공적을 남기려는 마음이 있으면 안된다.

如此可爲蒼生大醫, 反此則是含靈巨賊.
이렇게 할때 비로서 세상의 뭇사람들을 위하는 의사다운 의사라 할수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사람들에게 큰 도적이 되는것이다

2
夫大醫之體, 欲得澄神內視, 望之儼然, 寬裕汪汪, 不皎不昧. 省病診疾, 至意深心, 詳察形候, 纖毫勿失, 處判針藥, 無得參差.
의사다운 의사의 모습은, 늘 내면을 성찰하여 마음을 맑게하며, 보기에 단호하고 엄정하면서도, 너그럽고 넉넉함이 넓고도 넓고, 환하게 빛나지도 어둡고 어리석지도 않다.  환자를 진찰할때에는, 지극한 뜻과 깊은 마음으로, 상세하게 환자의 상태와 질병의 증후를 살펴, 터럭만한 실수도 없게하고, 약물과 시술을 처방하고 판단함에, 착오가 없다.

雖日病宜速救, 要須臨事不惑, 唯當審諦覃思, 不得於性命之上, 率爾自逞俊抉, 邀射名譽, 甚不仁矣.
비록 질병을 빨리 낫게 하는것이 좋다하더라도, 중요하고 필수적인 임상의 일은 미심쩍은것을 남기지 않고, 반드시 세세히 살피고 깊이 생각해야한다. 사람의 생명을 놓고, 신중하지 않고 치료를 서둘러 스스로의 뛰어남을 드러내고, 명예를 높이려는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又到病家, 縱綺羅滿目, 勿左右顧眄, 絲竹湊耳, 無得似有所娛, 珍羞迭薦, 食如無味, 醽醁兼陳, 看有若無.
환자의 집으로 방문진료를 갔을때에는, 늘어져있는 곱고 아름다운 비단에 눈이 둥그레져, 이리저리 기웃거리지 말아야하고, 음악소리가 귀에 들려도, 즐거워 해서는 안된다.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도 아무 맛이 없는것처럼 대해야 하고, 좋은술이 널려있어도 못본척해야 한다.

 所以爾者, 夫壹人向隅, 滿堂不樂, 而況病人苦楚, 不離斯須, 而醫者安然權娛, 傲然自得, 玆乃人神之所共耻, 至人之所不爲, 斯蓋醫之本意也.
이와같이 해야하는 까닭은 이렇다. 무릇 한사람이 외토리가 되어 괴로워 하는데, 옆에있는 사람들이 즐겁게 놀수는 없는법이다. 하물며 환자의 고통이, 잠시도 떠나지않고 계속되는데, 의사란 사람이 편안하게 즐기며, 거만함을 떨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사람은 물론 귀신조차 함께 부끄럽게 여길일로, 덕있는 사람이 할짓이 아니다.  이상은 의사가 본디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다.

夫爲醫之法, 不得多語調笑, 談謔諠譁, 道設是非, 議論人物, 衒燿聲名, 訾毁諸醫, 自矜己德,
의사가 사는법은 이래야 한다.  말이 많거나 비웃음 짓지 말아야하며, 농담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도 안된다.  길거리 시비에 끼어들지 말고, 다른사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품평하지 않아야한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소리내어 선전하지 말고, 다른 의사를 비난해서도 안된다. 다만 스스로 삼가하며 자신에게 덕을 쌓아야할것이다.

偶然治差一病, 則昂頭載面, 而有自許之貌, 謂天下無雙, 此醫人之膏肓也.
우연히 한 환자를 치료했다고, 머리를 높이들고 얼굴을 세워, 자기혼자 잘났다는 모양새로, 천하에 견줄자가 누구냐고 뻐기는것이, 의사들의 고치기 힘든 고질병이다.
 
所以醫人不得侍己所長, 專心經略財物, 但作救苦之心, 於冥運道中, 自感多福者耳.
의사는 자신의 기술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올리는데 마음을 쏟아선 안된다. 다만 고통 받는 환자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어두운 세상길 한가운데를 살아가며,  이를 스스로 행복하게 여겨야 할것이다.

又不得以彼富貴, 處以珍貴之藥, 令彼難求, 自衒功能, 諒非忠恕之道.
또한 부자나 지위높은 사람을 진료한다해도, 돈벌이로 비싼약을 처방해서는 안된다. 환자가  약을 구하기 어렵게 하는것은, 스스로의 전문기술을 팔아먹는 것으로,  바람직한 삶의 길이 아니다.

志存救濟, 故亦曲碎論之, 學者不可耻言之鄙俚也.
내 진정한 뜻이 전해져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는데 도움되기위해, 이렇게 비틀어지고 날카롭게 이야기를 했다. 이글을 보는 사람들이 이를 어리석고 부끄러운 말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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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미완유고시) - 윤중호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저
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
무덤 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

이. 제. 됐. 습. 니. 다.


* 윤중호(1956-2004)시집  '고향길'(200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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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장도(笑裏藏刀) - 김사인

소리장도(笑裏藏刀)
   
                                 김사인


웃음 뒤에서 칼을 감추고 나는
계면조 뒤에 핏발선 눈을 감추고 나는
비겁하게도
비겁하게도
사랑을 말하네
역수()를 건너던 자객쯤이나 되나
비장의 이 허장성세
칼은 이미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네
있는지 없는지도 다 잊었다네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에서
 
* 소리장도 : 웃음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
* 계면조 : <음악> 국악에서 쓰는 음계의 하나.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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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 - 도종환

개울

               도종환

개울은 제가 그저 개울인 줄 안다
산골짝에서 이름없는 돌멩이나 매만지며
밤에는 별을 안아 흐르고 낮에는 구름을 풀어
색깔을 내며 이렇게 소리없이
낮은 곳을 지키다 가는 물줄기인 줄 안다
물론 그렇게 겸손해서 개울은 미덥다
개울은 제가 바다의 핏줄임을 모른다
바다의 시작이요 맥박임을 모른다
아무도 눈여겨보아주지 않는
소읍의 변두리를 흐린 낯빛으로 지나가거나
어떤 때는 살아 있음의 의미조차 잊은 채
떠밀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고 있는 줄로 안다
쏘가리나 피라미를 키우는 산골짝 물인지 안다
그러나 가슴속 그 물빛으로 마침내
수천 수만 바닷고기를 자라게 하고
어선만한 고래도 살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 개울은 알게 될 것이다
제가 곧 바다의 출발이며 완성이었음을
멈추지 않고 흐른다면
그토록 꿈꾸던 바다에 이미 닿아 있다는 걸
살아 움직이며 쉼없이 흐른다면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고 늘 깨어 흐른다면
 
** 도종환 시화선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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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악 편지(여덟번째) -김영갑

여덟번째 편지 [두모악 - 2005/04/08]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면 외로움과 궁핍함은 감수해야 한다. 외로움과 궁핍함을 즐기려면 무언가 소일거리가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일거리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간장, 된장, 고추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하루가 상큼하다. 몸만 움직이면 자연 속에 먹을거리는 무진장이다. 굶주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한 돈 걱정은 없다. 문제는 소일거리다. 365일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소일거리만 있으면 된다.

제주도의 속살을 엿보겠다고 동서남북 10년 세월을 떠돌았다. 그러고 나니 제주도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디서 바라보는 해돋이와 해넘이가 아름다운지, 제주 바다는 어느 때에야 감추었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나름대로 최상의 방법들을 찾아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숲보다는 나무로, 나무보다는 가지로 호기심이 변해갔다. 계절에 따라, 기상의 변화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그 진면목을 무어라 단정지을 수 없다. 아름다움의 핵심에 도달하는 황홀한 순간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최적의 장소에서 미리 준비하고 대기해야 한다. 그래야 삽시간의 황홀을 맞이할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밤하늘 별자리처럼 제주도 전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대자연의 황홀한 순간을,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려면 스물네 시간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려면 삶이 단순해야 한다. 스물네 시간 하나에 집중하고, 몰입을 계속하려면 철저하게 외로워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기 위해서는 최소의 경비로 하루를 견뎌야 한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지 않으면 십년 세월을 견딜 수 없다. 십년 세월을 견딘다고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내던져 아낌없이 태워야만이 가능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행착오를 통해 마음의 눈은 떠진다. 진짜는 두 눈이 아닌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심안은 간절히 원한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다. 앞뒤 재지 않고 육신을 내던져 간절히 소망할 때 마음의 문은 열린다.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태풍이 부는 날이나, 바람 한줄기 없는 날에도,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똑같은 장소에 간다. 앉아서 보고, 서서 보고, 누워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혼자서 바라본다. 그렇게 몰입한 후에야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주만이 간직한 아름다움이 제모습을 드러낸다.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는 것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고 느낄 수 있는 심안이 없으면 그저 무심히 지나친다.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친 것들 속에 진짜배기는 숨겨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모르기에 마음 편안히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심안으로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고요해져선 혼자 지내야 한다. 삶의 의욕이 넘치는 젊음은 온갖 유혹에 흔들린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면 잡념이 없어야 한다. 한 가지에 몰입해 있으면 몸도, 마음도 고단하지 않다. 배고픔도, 추위도, 불편함도, 외로움도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에 취해 있는 동안은 그저 행복할 뿐이다. 몰입해 있는 동안은 고단하고 각박한 삶도, 야단법석인 세상도 잊고 지낸다.

 

** 김영갑 홈페이지 http://www.dumoak.co.k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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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 박영근

결핍
             박영근

1
너무 뜨겁다
내 몸은 온통 결핍의 자리

내가 살고 있는 골목길
봄날 대낮의 시간에
허공에 터져오르는 백목련
눈부신 흰빛을 바라본다

지상의 그늘을 딛고
타는듯 하늘을 빨아들이고 있는
꽃의 환한 자궁

저 밝은 꽃숭어리들은
겨우내 목말랐던 나무의 몸이
제 살을 찢고 피워낸
뜨거운 숨덩어리들

나는 안다, 빈방의 허기와
욕정과 구겨진
원고지와 바람벽에
지친 형광등 불빛에 말라비틀어져
툭 떨어지는
꽃대가리, 결핍은
견딜 수 없는 비등점에서
주검으로 타버리는 것

그리고 갈증으로 허공에 토해놓은 욕망의 흰빛
비와 바람에 이내 사라져버릴 황홀한 꽃자리
그 한없는 반복

너무 뜨겁다
불탄 마음의 자리에 백목련 저 흰빛의
불안한 꿈

한낮이 가고
흰빛도 스러진뒤
나는 나에게 쓸 것이다

결핍은 욕망의 감옥이라는 말

2
나는 저 꽃가지 위에 새 한 마리를 올려놓는다

날개짓도
울음소리도 잊어버린,
저 몸속에
타고 있는 불덩어리

대낮 뜨거운 하늘길에
눈이 멀고 있는

홀로 미쳐가고 있는
맹목조(盲目鳥) 한 마리

* 박영근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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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정호승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호승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내린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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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들 - 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옮김

작별들

                     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옮김


안녕, 안녕, 한 곳에게 또는 다른 곳에게,
모든 입에게, 모든 슬픔에게,
무례한 달에게, 날들로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주週들에게,
이 목소리와 적자색으로 물든
저 목소리에 안녕, 늘 쓰는
침대와 접시에게 안녕,
모든 작별들의 어슴푸레한 무대에게,
그 희미함의 일부인 의자에게,
내 구두가 만든 길에게.

나는 나를 펼친다, 의문의 여지없이;
나는 전全 생애를 숙고한다.
달라진 피부, 램프들, 그리고 증오들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규칙이나 변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일련의 반작용하고도 다르다;
새로운 여행은 매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장소를, 모든 장소들을 즐겼다.

그리고,도착하자 또 즉시
새로 생긴 다감함으로 작별을 고했다
마치 빵이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달아나듯이.
그리하여 나는 모든 언어들을 뒤에 남겼고,
오래된 문처럼 작별을 되풀이했으며,
영화관과 이유들과 무덤들을 바꾸었고,
어떤 다른 곳으로 가려고 모든 곳을 떠났다;
나는 존재하기를 계속했고, 그리고 항상
기쁨으로 반쯤 황폐해 있었다,
슬픔들 속의 신랑,
어떻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돌아가지 않은.

돌아가는 사람은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을 밟고 되밟았으며,
옷과 행성을 바꾸고,
점점 동행에 익숙해지고,
유배의 큰 회오리바람에,
종소리의 크나큰 고독에 익숙해 졌다.

* 파블로 네루다 시집 '충만한 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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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 조영관

팽이
 
              조영관

사람들은,
어떤 자는 내 대갈빡에는 뭔가로 꽉 차 있다고 한다
나는 머리가 텅 비어
땡볕에 목말라 머리끝까지 텅텅 비어
소금을 한 주먹 집어먹고 싶을 만큼
환장하게 어지러워 죽겠는데
거참 이상하다
뭔가 꽉 차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친구들은 나를 보고 앞뒤가 콱 막혀 있다고 한다
순진하다고,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한다
쉽게 말해 졸나게 멍청하다는 얘긴데
막혀 있건 꽉 차 있건 텅텅 비어 있건
매를 많이 맞아 맛이 갔건
내 근력으로 처자식 깜냥껏 먹여살리고
아직까지 누구한테건 뭐 좀 보태달라 한 적 없는데
아니 그러니까,
낡은 세상 좀 꼼꼼히 따지고 살피는 것이
그렇게 꽉 막힌 것인가,
어쨌든 간에 나는 매를 맞으면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망치 들고 뚝딱
용접봉 들고 징징징
쇠 철판 위를 이렇게 흥겹게 토끼뜀 뛰면서 잘만 돌아가는데
거참 이상도 하다
뭔가 앞뒤가 꽉 막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동료들은 내가 차돌멩이처럼 단단하다고 그런다
내가 차돌멩이처럼 단단하다면
구사대 매타작에 사직서를 쓰지도 않았을 터고
아니, 단단하고 마른 세상에 좀 야무진 것이
그렇게 섭섭한 것인가
어쨌든 간에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처럼
내 마음이 굳고 모질어졌다 쳐도
용접선 산소 줄이 어지러운 난장
호퍼, 탱크, 쇠를 밀어내는 그라인더 먼지 속에
뱃가죽에 척척 달라붙는 런닝을 떼어내며
쉬는 목에 쳐다보는 하늘가
녹슨 철판처럼 빨갛게 내리깔리는 구름에도 이리 눈물겨운데
거참 이상도 하다
내가 차돌처럼 단단하다는 것은

간혹 가다가 눈 밝은 친구들은
내가 사랑에 대해, 이념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비록 희망이란 항상 꿈꾸는 자에게 열린다고
입에 발린 말은 못해도
절망이란 배부른 자의 말장난이라고 차마 말은 못해도
아니, 살기 팍팍한 것이 절망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아니 아니, 절망이라는 것이
도깨비바늘처럼 갈고리를 달고 있는 것이기라도 한다면
바로 여기 이 현장
내 옆 동료의 몸에도 철썩 붙어 와서
가슴을 물어뜯고 허리를 호되게 걷어찼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는데
어쨌든 간에 나는 맞으면서 돌아가는 팽이처럼
이렇게 땅바닥에 뿌리를 박고 까딱없이
팽팽 잘만 돌아가는데
거참 이상도 하다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앞뒤를 잘 알고 있는 어떤 자들은
어깨를 툭툭 치며
이제 큰 고민은 끝이 났다고, 잔치는 벌써 끝났다고
간지럽게 속삭이면서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고민 끝, 행복 시작인가
아니 행복이란 결핍 그거 아닌가
우쨌든 그런 행복이란 것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목 매달려
사정사정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래 그래 우리 몰래 그새 무슨 잔치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니 아니,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환장하게 잔치를 하고 싶어
허기가 지도록 요렇게 껄떡거리며
늘 보고 있어도 허허롭게 그리운 벗들과 함께
땀투성이 뿌연 먼지 속에서
불 달아오른 철판 위를 토끼처럼 이리저리 뜀뛰면서
까딱없이 땅바닥에 뿌리를 박고
맞으면서 곤두서는 팽이처럼 여전히 팽팽 잘만 돌아가는데
거참 이상도 하다
뭔가 벌써 끝났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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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박영근

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 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 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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