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퍼옴-비마이너] 25년만에 시설에서 '탈출'했지만…

25년만에 시설에서 '탈출'했지만…
활보 없어 '상처'투성이, 소득보장 미약해 '앞날 캄캄'
장애등급재심사 받으면 활동보조 대상자에서조차 탈락될 가능성 커
2010.08.10 14:05 입력 | 2010.08.10 20:53 수정

▲지난 4월 중순께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정승배 씨가 집으로 가고 있다.

 

2010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탈시설한 뒤 자립생활을 시도하는 중증장애인의 현실은 어떨까? 정승배(31세) 씨의 이야기로 그 답을 알아보자.  

 

지난 4월 중순께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한 정 씨는 다섯 살에 장애인생활시설에 입소해 25년 동안 장애인생활시설은 물론 정신병원, 노인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정 씨는 실제로는 뇌병변장애가 있지만, 시설에서는 그들의 편의 등을 위해 지체지적장애 1급으로 등록했다.

 

"일곱 살에 장애를 비관해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라고 말할 만큼 세상과 장애에 대해 민감했던 정 씨. 그는 입소할 때 '오백만 원만 주면 평생 있도록 해주겠다'라고 약속했던 시설에서 그동안 계속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요구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결국 스물아홉 살 때 생활비를 재촉하는 원장과 크게 싸우고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

 

하지만 정 씨의 분노를 이해하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대신 원장과 마찰을 일으킨 정 씨에게 사람들은 정신장애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여러 시설을 전전하던 중, 마지막으로 있던 정신병원에서는 한 달 내내 방에 홀로 갇혀 알 수 없는 약을 먹어야 했다. 

 

정신병원에서 다시 전라도 지역의 한 노인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정 씨는 '탈출'을 결심하고, 전부터 알고 있던 장애인인권단체 전화번호를 간호사실 컴퓨터로 몰래 찾아 "시설에서 나가고 싶다"라며 도움을 청했다. 이후 정 씨는 면회를 온 장애인권활동가들과 함께 서울로 '탈출'했다. '탈출'을 '납치'로 오해해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정 씨의 자립생활은 시작됐다.

 

▲'장애인주거복지 및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사업' 대상자로 선정된 정승배 씨가 주거지원을 받아 현재 살고 있는 집.

 

한동안 다른 동료 중증장애인의 집과 체험홈 등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정 씨는 5월 하순께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는 '장애인주거복지 및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사업' 대상자 1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돼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원룸에 입주하게 됐다.

 

일단 자립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인 주거 공간이 해결됐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시설에서 나온 지 넉 달이 되어 가지만 아직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을 가능성도 적다는 것.

 

"내가 뇌병변장애인이 아니라 지체지적장애인이라는 것을 (지역사회로) 나오고서야 알았다"는 정 씨는 뇌병변장애인으로 등록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현재 활동보조서비스 신규 신청 등을 위해 의료기관에서 장애등급 판정과 장애등급 심사를 위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그러나 정 씨는 등급이 하락해 1급으로 대상자를 제한한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 씨는 휠체어를 손으로 잡고 밀면 어느 정도 보행이 가능한데, 뇌병변장애인의 경우 보행이 불가능해야 1급 판정을 받기 때문이다.  

 

현재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해 일주일에 6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지만, 식사와 세면 등 일상생활을 원활히 수행하기에도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지원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 자원봉사자가 와서 2~3시간 집안일을 도왔을 뿐이다. 그나마 이런 지원도 언제 중단될지 모른다. 

 

"어느 때에 활동보조서비스가 가장 필요하냐?"라는 질문에 정 씨는 밥솥을 열어 보여줬다. 그는 "내가 쌀을 물로 씻으면 다 쓸려 보내기 때문에 씻지 않고 밥을 했다"라면서 "밥을 공기에 담을 때에도 다 흘리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이 담아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 씨는 허벅지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혼자서 라면을 삶아 먹다가 뜨거운 물을 흘려 화상을 입었다"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하지만 상처는 허벅지뿐만 아니었다. 턱에도 혼자 면도를 하다가 난 상처가 있었다.

 

▲쌀을 물로 씻기 어려운 정승배 씨가 물에 씻지 않고 한 밥을 보여주고 있다.

▲활동보조인 없이 혼자 식사와 세면을 해결하다가 턱과 허벅지에 난 상처들.

 

활동보조서비스 뿐만 아니라 소득보장 문제 또한 정 씨의 자립생활을 가로막고 있다. 정 씨는 현재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고 아무런 지원도 없지만,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 

 

차상위계층에 속해 장애인연금 대상자이지만 급여를 받아도 월 9만 원에 불과하다. 현재 몇만 원 가량의 후원비와 함께 원룸 관리비와 쌀 등을 지원을 받고 있지만, 이 지원 사업이 끝나면 결국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냐?"라는 물음에 정 씨는 "일자리를 구해 남의 도움 없이 생활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장애인주거복지 및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의 조사랑 활동가는 "주거지원 사업 대상자로 현재 14명을 선정했지만, 승배 씨 등 2명만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나와 주거지원을 받았고, 나머지 대상자들은 장애등급심사 등으로 서비스를 받으려면 몇 달 이상 소요돼 현재 시설에서 나오지 못하고 서비스 신청 절차를 밟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조 활동가는 "특히 지방에 있는 시설에 사는 경우 지자체들이 '활동보조서비스 예산이 부족하다'라며 이유로 아예 신청 자체를 거부하거나 신청을 받아도 바우처 시간을 제공하고 있지 않고 대기자로 두고 있어 시간이 더욱 걸리고 있다"라고 설명하면서 "선정된 분들도 시설에서 나오는 시간이 길어져 많이들 힘들어하신다"라고 전했다.

 

장애등급 심사제도 확대 등 장애등급제 강화와 예산 부족으로 행정당국이 중증장애인에 대한 서비스를 제한함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하고자 하는 중증장애인의 삶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있다.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나오는 출구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홍권호 기자 shuita@beminor.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