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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 박영근

가을비

 

                           박영근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자장면 그릇 몇개
서로 얼굴을 파묻고
비에 젖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빈 그릇 속으로 고이는 빗방울들
지나가던 행려의 사내 하나 그 모양을 보고 있다.
어디 먼 데
먼 데로
흩어진 식구들 생각을 하나보다

플라타너스가 젖고
빗속으로 가지들이 흔들리고
허공에 걸리는 새 울음소리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낮게 엎드린다
온통 젖은 얼굴 한장
흙탕물 튀어오르는 그릇 위로 떨어지고 있다

날이 더 저물면 한번쯤 우레소리가 건너올 것이다.

 

* 박영근 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에서

 

 

플라타너스는 도시 길가에 흔히 심는 가로수다.

가을이면 큰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곤 한다.

박영근시인의 시에 백목련만큼이나 자주 나오는 나무이기도 하다.

 

플라타너스 나무밑에 집앞에 있어야할 자장면 그릇이 놓여있다.
누가 먹은것일까? 

그리고 빈 자장면그릇 위로 비가 내린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있는 사람이 있다.
'지나가던 행려의 사내'다.
시인은 지난 시집의 '행려'라는 시에서

'행려가있을뿐 돌아갈 곳이 없다'라고 말한다.


    '行旅'(행려) 중 마지막부분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안을 뒹구는 재고가 된 옷보따리와
        그 곁의 새우잠처럼

       

         먹다 남긴 소주병처럼

         그 속에서

         깨어나지 않는 꿈처럼"

그리고는 '빗속', '가지들이 흔들리고',  '새' , '젖은 얼굴',  '우레소리'등
이전 시집의 시 '봄비'에서 나왔던 시어들이 비슷하게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봄비'에는 있을수 없는 것이 '가을비'에는 나타난다.

떨어지는 나뭇잎이다

 

       "나뭇잎들이 길바닥에 낮게 엎드린다
        온통 젖은 얼굴 한장

        흙탕물 튀어오르는 그릇 위로 떨어지고 있다"

 

'봄비'에서는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했는데

이제  나뭇잎들이 같이 엎드린다

 

그래서 덜 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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