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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봐야 티도 안 나는 일

모유 수유 상담을 받으러 병원에 갔습니다.

 

저는 상담실에 들어가지 못해서 밖에서 기다렸죠.

보통 '여성잡지'라고 부르는 잡지 두 권을 다 볼 동안 주선생님은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모유 수유에 어려움이 많으니까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잡지를 읽었습니다.

 

옆에 두분의 할머니가 계셨는데

둘 다 아이들을 하나씩 데리고 계셨습니다.

아마 딸이나 며느리가 애를 하나 더 나았거나 하는 이유로 와 있는 것 같더라구요

 

"어휴...저것들 보기는 저렇게 이뻐도 힘들어 죽겄어.."

"글쎄 말여..키워 봐야 티도 안 나고.."

 

맞습니다.

티 안나는 일이 참 많습니다.

티 안나더라도 좀 알아주면 좋은 데 티 안 나는 일은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하면서는

'대자보' 쓰는 일이 티 안나면서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학'하면은

항상 운동권들이 뭔가를 잔뜩 써서 여기저기 벽에 다닥 다닥 붙여놓은 대자보가 연상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맨날 바닥에다 큰 종이 펼쳐놓고 바짝 엎드려서 매직으로 글씨를 한자 한자 써내려갔죠.

그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선전담당 아니면 착한 친구들이 대자보를 썼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해봐야 티도 안 나는 일들이

안 하면 또 굉장히 티가 많이 납니다.

80년대, 90년대 중반 정도까지 대자보 없는 대학은 잘 상상이 안 가잖아요.

 

...

 

당시에 여성학 책을 읽으면서

주부의 가사 노동이 꼭 대자보 쓰는 일하고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티도 안 나지만, 안 하면 티가 팍팍 나는 일이 어쩜 그리 똑같은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아까 병원에서 본 그 할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옛날 생각이 좀 났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들 얼굴을 한번씩 더 보게됐습니다.

 

분명히 젊었을 때도 그랬을 그 분들은 나이 들어서 대접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여전히 티 안나는 일, 안 하면 티 나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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