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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청소

얼마 전부터 숙원 사업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냉장고 청소하기

또 하나는 화장실 청소하기

 

"상구~화장실 청소 좀 해줘...곰팡이가 날 잡아먹을 것 같애.."

 

청소는 정말 끝이 없습니다.

애한테 매달려 있다 보니, 청소까지 열심히 할 여력이 없기도 합니다.

 

처음의 의욕과는 달리 바닥 쓸고 닦는 건 2-3일에 한번씩 할까 말까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해야겠다고 맘 먹은 화장실 청소는

주선생님의 하소연을 듣고도 차일 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음식 만들기의 핵심은 냉장고 관리이기 때문에

평소에 잘 하면, 따로 청소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냉장고 안에는 뭔가가 잔뜩 쌓여 있습니다.

 

주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화장실에 들어간 김에 저는 세면대하고 변기를 조금 닦았습니다.

청소한 티가 가장 잘 나는 곳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하다 보면 언젠간 화장실 전체가 깨끗해지겠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일단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데만 좀 청소하면

주선생이 그냥 넘어가겠지..'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화장실 일부분이 깨끗해진 걸 보더니

주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화장실...깨끗해졌더라?"

"응....아까 그냥 좀 청소했어..."

"대충 그걸로 때울라고 그랬지?"

 

문제의 핵심을 일체의 돌려말하기 없이

정확히 꿰뚫는 주선생님이십니다.

 

세상 일 중엔 한방에 뒤집는 게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조금씩 고쳐봐야 끝까지 결판 안 나는 일이 있습니다.

'대충 때우는' 개량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는 조금의 변명도 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나갑니다.

 

"미안....내일 꼭 청소할께..."

 

하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저는

결국 냉장고 청소를, 그것도 일단은 냉장실만 했습니다.

 

온갖 음식 쓰레기가 다 나오더군요.

냉장고 관리를 해야 비로소 음식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제 평소 주장에 비춰봤을때,

역시 전 입만 살았습니다.

 

언제 해서 넣어놨는지 기억도 못하는 도라지 무침

검은 비닐에 쌓아서 넣어 놓는 바람에 방치된 상추 세 봉지

시장에서 사서 한 동안 잘 먹다가 그새 잊어먹고 이번에 발견한 쭈꾸미 조림

냉장고에 하도 오래 있어서 눅눅해져버린 멸치 조림

김치찌개 해 먹으려고 따로 모아놨는데, 화석이 되어버린 김치조각들

유기농을 사 온 거라 아껴 먹으려고 넣어놨다가 골동품으로 변해버린 야콘

 

...

 

이런 것들을 모두 치웠습니다.

드러워서 말이 안 나옵니다.

 

하지만 한방에 뒤집으니 이제 겨우 살만 합니다.

 

"아..청소하니까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보다 한발 앞선 감각을 갖고 계신 주선생님의 반응입니다.

 

이제 화장실이 남았습니다.

인간다운 화장실을 위해 또 한바탕 '혁명적 청소'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가 대충 청소해놨던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주선생님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습니다.

세면대가 깨끗한 걸 보고, 청소가 다 된줄 알고 방심했었나 봅니다.

 

미안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역시 개량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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