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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특집]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②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적 구성의 변화는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세력들에게 저항의 주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1968년을 전후해서 유럽과 북미, 일본에서 벌어진 혁명적 투쟁들은 그전까지 분배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던 여성·환경·인종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1970년대 이전까지 사민주의든 공산주의든,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사회진보의 담지자로 상정된 공업노동자들은 오히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결과는 급진 정치의 분열로 나타났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업노동자 운동의 보수화는 1980년대 이들을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반대운동의 주체로 세우는 데 실패한 것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흔히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에 투쟁해야 하는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은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기술진보로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생산성의 향상으로 총 노동자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필요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이들 부분에서 총임금은 줄어들게 된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줄어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정정도 유지시키면서 생산을 지속시키는 것이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오히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길들이고 산업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싸게 먹힐 것이다. 

1980년대 서구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졌지만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대응전략은 구조조정을 인정하고 남은 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0년대를 거치며 대규모 작업장의 조직노동자들과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는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임금저하 경향은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임금이 하락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저임금 노동자층의 창출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들과 여타 분야의 노동자들의 이해는 크게 달라졌다. 90년대 들어 많은 나라들에서 조직노동자와 정부의 협약에 의해 비정규·불안정노동자들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제조업 고용의 노동량이 줄면서 9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시행되었지만 이는 노동유연화의 확대와 직결되며 정규직과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차별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그 속에서 대규모 작업장은 마치 불안정 노동자들의 거대한 바다에 뜬 작은 섬들처럼 고립된 별천지가 되었다. 

공간적으로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산업 국가들에서 대규모 작업장은 폐쇄적인 지역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로 대규모 작업장의 입지조건과 노동자들의 의식상태는 19세기 농민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19세기 자영농민들처럼 사회적 변화에 둔감하고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집착하는 경향을 뚜렷히 드러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90년대 주식투자 같은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며 자본가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노동자본가(worker capitalists)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대규모 산업단지에서 보수정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는 사례에서 보듯이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은 퇴행적 측면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이후 저항 담론은 다양하고 분산된 영역에서 저항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주요한 문제로 제기했다. 이런 상황은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문제의식이 세계를 풍미하는 현실적 배경이 되었다. 전통적 좌파이론이 여전히 보수화된 공업노동자들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개인의 저항에 기초한 포스트구조주의는 보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운동의 이념적 좌표를 가리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구체적인 위치에서 저항을 하다보면 어쩌다가 집단적인 투쟁이 된다는 식 이상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개별적인 탈주의 선들이 어느 순간 접합해서 흐름이나 덩어리가 된다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이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조업이 축소되고 기존의 노동운동은 쇠퇴하고 있으나 종래의 공업노동자계급을 대체할 동질적인 사회집단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대적 한계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위적 정치정당으로 집약되어 그의 지도를 받는 동질적인 노동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결국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 운동은 개별화된 운동의 연합일 뿐이라는 생각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앙드레 고르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계급이 아닌 새로운 사회집단이 광범위하게 창출되지만 이들은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적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非)노동자”이며, 집단적 주체로 등장할 수 없는 “특수한 개인성”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고르는 그들이 미래 사회 전체적인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역사적 사명의 부여받았다고 상상한 과거의 계급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끝에 그가 제시한 대안은 국가의 지배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3장 "사회주의를 넘어서"를 보라) 

완고한 맑스주의자들도 이런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 초반, 포스트주의자들에 맞서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 중심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90년대 들어 평조합원 전략을 포기했다. 대신 이들은 자신들이 비판해 마지않던 반전·반세계화와 같은 인민전선 운동의 새로운 버전으로 후퇴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맑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80년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객관적 실체로서의 계급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즉자계급”이라고 표현한 객관적 계급관계는 그가 “대자계급”이라는 말로 표현한 의식적 계급 형성의 바탕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리바르는 실체로서의 계급을 부정하고 이를 사회적 투쟁의 효과로 환원시켰다. 그것은 결국 전통적 노동계급의 개념을 넘어 계급의 확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급진적 맑스주의자로 아우토미아 운동가였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노동계급의 개념을 대단히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풍부하게 흡수한 네그리는 결국 “계급”이나 “노동자”라는 개념을 사실상 포기하고 “다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기했는데, 그에 의하면 다중은 과거의 공업노동자 계급과 달리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종족, 젠더, 성적 지향 및 상이한 노동형태와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과 같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차이의 정치와 맑스주의의 절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입장에서는 동질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단일한 전망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외양적인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민주의적 전망에 흡수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네그리 역시 여전히 코뮤니즘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한 전지구적인 시민권, 사회적 임금, 지식정보 공유권 같은 요구를 볼 때, 그 역시 다중으로부터 급진적 민주주의 이상의 공통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중 이론은 90년대 들어서 활성화된 반세계화 운동, 반전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영물이다. 반세계화·반전운동은 멕시코 농민들로부터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치조직들까지 매우 다양한 구성요소를 포괄했다. 이 투쟁들은 전통적인 조직노동운동의 참여가 높지 않는 대신 개별적인 참여가 높은 특성을 보였다. 노조나 정당 같은 기존의 조직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은 매우 격렬한 투쟁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속에서 모종의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지시하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precarious)이라는 형용사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인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 반세계화 투쟁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던 이탈리아에서 2003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단어는 이후 유럽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기존의 조직노동운동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행사를 상징하는 용어로 널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000년대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프리타가 양산된 일본에서도 2006년 메이데이부터 프레카리아트 행사가 기획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도 올해 메이데이에서 프레카리아트 총파업 행사가 개최되었다.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앙드레 고르가 신프롤레타르라고 부르고, 90년대 들어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노동자라고 불리던 사회집단의 최신 명명법이다. 모두 다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와 다른 무언가가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시하고 있는 개념이지만, 특히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기존에 상대적·부분적·비정상적인 개념으로 정립되던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이 사회다수적인 새로운 사회집단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는 사회집단이야말로 전통적인 조직노동자들보다 오히려 초창기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더 가까운 사회집단이다. 1840년대 영국과 유럽에서 사회적 용어로 떠오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당대에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달라진 경제현실은 언론인과 사회평론가들이 ‘빈민(pauperism)’과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용어를 많이 쓰게 된 세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빈민이니 프롤레타리아니 하는 말은 뿌리 없고 재산도 없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들로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사회안전망의 보호대상도 되지 못하는 층을 뜻하는 말이었다. 칼 가는 사람, 구두장이, 재단사, 비숙련공, 직물노동자 등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이 라인란트 일대 중소 도시로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쾰른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20~30퍼센트가 빈민 구제 대상이었다. 독일 사회이론가 로베르트 폰 몰은 현대의 공장 노동자 - 도제 훈련을 받거나 장인이 될 가능성도 없고,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없으며, 기술을 습득할 기회도 없다 - 를 ‘수레바퀴에 묶인 농노’와 비슷한 존재라고 묘사했다. 정치개혁가 테오도르 폰 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표현을 ‘집이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이광일 옮김, 글항아리, p.99) 


2011년 초, <프레카리아트 : 새로운 위험계급>이라는 책을 쓴 영국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전 지구적 변환이 초래한 최근의 사회·경제 위기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불안정한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불안한 노동 생애를 날마다 보내고 있는 프레카리아트는 전세계적으로 수십억 명에 이른다. 대부분은 ‘도시 유목민’처럼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미래에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이들은 정체성도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고, 자기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지도 못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일자리를 갖고 있어도 사내 복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공적연금 복지도 제한적으로만 받는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비정규직으로 서비스 섹터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 이들은 하루 일을 끝내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채팅을 하고 축구 경기에 광적으로 흥분하면서 여가를 보낸다. 극도의 불안정으로 인해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없기 때문에 인터넷과 축구와 같은 스포츠에 여가를 많이 의존하는 것이다. 현대판 ‘빵과 서커스’(로마시대에 민중에게 먹을거리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 정책)라고 할 수 있다. … 프레카리아트는 비정규직 범주와 다르다.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고용형태나 임금수준 등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 삶의 안정과 불안 등의 측면에서 폭넓게 노동자 집단을 파악하는 개념이다.


19세기 중반의 프롤레타리아트와 21세기 초의 프레카리아트는 1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용역·계약직·일용직 등 종래의 비정규직과 거의 유사한 의미이지만 프레카리아트는 고용형태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그들이 공유하는 ‘불안정’이란 측면에서 범주화되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뜬 구름 잡는 다중이 아니라 “저임금”과 “불안정”이라는 코드를 공통점으로 19세기 중반의 프롤레타리아트처럼 명확한 실체를 가진 동질적인 사회집단이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영향 받은 여러 담론들이 제기하고 있는 탈노동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새로운 빈곤 인구들이 고용이 불안정한 저임금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들 생존조건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와 함께 스스로 프레카리아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투쟁도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2011년 세계를 휩쓴 미국의 아큐파이 운동을 본격적인 프레카리아트 투쟁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점차 사회 인구의 다수를 점해가고 있는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어디로 갈지는 아직 매우 유동적이다. 


프레카리아트는 소득 불안정으로 인해 삶의 방식도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인다. 대다수 프레카리아트는 창의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가져다주는 윤리규범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 프레카리아트는 외국인이나 이주노동자, 경제적 약자 등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이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침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이 불안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 외국인과 이주노동자에게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 전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는 청년과 여성층에서 많아지고 있다. 인종적 소수자가 새로운 노동인구로 유입되면서 이 층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유연한 저임금 노동력의 원천이다. … 특히 주목할 대목은 프레카리아트가 되기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자녀·친척·친구들이 프레카리아트가 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경우 포퓰리즘과 정치적 극단주의의 구호에 휩쓸리기 쉽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 세계 경제위기가 직면한 가장 두려운 측면이다. 불안정의 진창에 빠진 프레카리아트들은 자신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프레카리아트의 공포”를 이용하는-인용자] 선동가 혹은 극단주의자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이코노미 인사이트> 5호, 「21세기 위험계급 ‘프레카리아트’(가이 스탠딩 교수 인터뷰)」) 


현재로서 이들은 아직 독립적인 계급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에 종속되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요구보다는 “1%에 맞서는 99%” 같은 추상적인 구호로 대표되거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위치에 있는 중장년층과 달리 노동시장에 새롭게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불안정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88만원 세대” 같은 세대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위 프레카리아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주로 비교적 학력이 높은 20대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은 흔히 이 운동을 비계급적인 운동 또는 중간계급 운동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 현재 이 운동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불안정·저임금 노동자들의 주체화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지, 조직노동계급의 결합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운운하는 낯익은 레퍼토리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가이 스탠딩을 비롯해 앙드레 고르나 제레미 러프킨 등 이런 새로운 빈곤층의 등장에 주목한 진보적 학자들은 대부분 기본소득제도를 지지하고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모든 국민에게 일정 금액의 화폐를 나누어주어 임금노동의 불안정화·저임금화로 빚어지는 사회적 불안을 무마하고 저소득계층의 소비력을 진작시켜 유효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급진좌파들은 기본소득제에 대한 요구가 자본주의 체제를 침식하고 사회 혁명의 가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제도는 이미 알래스카 등지에서 시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제도의 법·제도적이고 국가의존적인 성격 때문에 사회 변혁의 성격을 가지기 보다는 프레카리아트를 새로운 정치기반으로 만들려는 의회주의 사민당의 정치 슬로건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누가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에 따라 미래 운동의 지형이 바뀔 것이다. 이들을 포섭하거나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지배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의 기획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공업노동자들에 매달리며 이들을 여전히 중간계급, 혹은 반(半)프롤레타리아로 배제하거나 조직노동운동이 보살펴야할 부차적인 영역으로 취급하고 있다. 


 

중공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부분 서비스산업에서 창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자본주의 초기 공업에 대한 중농주의자들의 태도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중농주의자들은 공업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못하며 다만 가치를 변형시킬 뿐”이기 때문에 농업만이 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비슷하게 대다수의 맑스주의자들은 서비스노동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철학적 노동개념을 기초로 한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노동을 인간에게 고유하게 잠재된 추상적 에너지로 보고 인간의 노동행위는 자연에서 채취한 물질에 그 에너지를 투여하여 가치를 부여한다는 논리를 취한다. 이는 사실 17세기 존 로크나 윌리엄 페티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부르주아들의 소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논리였다. 

헤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던 초기 맑스 저작에도 이와 유사한 인간주의적 노동가치론이 드러나 있다. 특히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그것이 상당히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무렵의 맑스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자본주의적인 소외를 노동의 소외와 극복으로 바라보았다. 헤겔에게 있어 자연에 대한 파악은 정신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으나 초기의 맑스는 노동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즉, 자연을 파악하고 그것과 동일성을 회복하는 철학적 매개는 정신이 아니라 노동이며,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소외는 노동의 소외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노동 개념은 자연에 대한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이른바 “물질적” 노동생산물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성(性)노동, 감정노동, 돌봄노동 등은 공업노동에 비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헤겔 철학의 영향은 맑스와 엥겔스가 1845~6년 <독일이데올로기>를 쓸 무렵부터 극복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들에게 소외 같은 철학적 범주는 더 이상 중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소외라는 문제의식은 더 이상 철학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잉여가치의 착취라는 경제학적 개념으로 제기되었다.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가하는 문제는 그것이 어떤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냐 아니냐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며 스미스가 농업노동이든 공업노동이든 상관없이 자본과 임금노동이 직접 교환되고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면 생산적 노동이라는 것과 특정대상이나 팔 수 있는 상품에 구체화된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두 가지 규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 노동이란 그것이 산출하는 것의 물질성과 무관하게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명확히 규정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의미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가변자본 부분(임금으로 지출되는 자본부분)과 교환되어 이 자본 부분(즉 그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 만 아니라 그밖에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도 생산하는 임금노동이다. 오직 이것 때문에 상품 또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며, 자본으로 생산된다.

예컨대 연극배우나 어릿광대도, 만약 그가 자본가(기업가)에게 고용되어 그에게 임금 형태로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그 자본가에게 돌려준다면 그는 생산적 노동자이지만, 수선 재봉사가 자본가의 집에 와서 자본가의 바지를 고쳐주고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가치만을 창조하여 준다면 그는 비생산적 노동자이다. 전자의 노동은 자본과 교환되는 것이며 후자의 노동은 소득과 교환되는 것이다. 첫째 종류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둘째 종류의 노동에서는 소득이 소비된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은 여기에서는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서 구분되어 있으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가닐 등등은 어리석게도 사태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 못하였던지 매춘부, 하인 등등의 노동 즉 봉사 또는 기능은 화폐를 가져 오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작가가 생산적 노동자인 것은 그가 사상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서적상을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떤 자본가의 임금노동자인 한에서 생산적이다. (칼 맑스, <잉여가치학설사>, 아침, p.165, 171)


이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이냐, 비생산적 노동이냐 하는 문제는 오로지 자본과 관계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잉여가치학설사>의 관점과 달리 <자본론>은 아마포처럼 기계가 도입된 제조업에서 가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다루고 있을 뿐, 불변자본의 비중이 낮은 서비스 부분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자본론>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의 운동이었다. 이는 아마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제기한 “연극배우, 어릿광대, 매춘부” 등등의 노동은 제조업에 비해 사소하고 부차적인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잉여가치학설사>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조업의 확대 발전과 함께 맑스주의는 극히 공업중심적인 이론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자본의 유통을 다룬 <자본론> 2권에서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밝힌 견해와 언뜻 보기에 모순된 견해를 개진했다. 여기서 그는 자본이 유통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인적·물적 비용을 유통비용이라고 부른 다음, 그것이 순수유통비용·보관비용·운수비용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중 순수유통비용에는 상업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과 부기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이 포함되는데, 이 경우 그들이 받는 임금은 자본가의 비생산적 지출이며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자본가가 획득한 잉여가치에서 공제되는 비용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보관비용과 운수비용은 생산과정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여기에 드는 노동은 가치를 추가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자본론> 2권의 이 부분은 이후 맑스주의자들이 사무·유통·서비스노동자들을 비생산적 노동자로 간주하는 단초가 되었다. 스위지와 바란은 <독점자본>에서 이러한 분야들을 경제잉여를 흡수하기 위한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파악했으며, 에른스트 만델 역시 기본적으로 그 주장을 받아들여 <잉여가치학설사>와 <자본론> 2권이 모순적이며 후자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만델은 <자본론> 2권을 근거로 맑스가 결국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은 모두 생산적 노동이라는 주장을 사실상 포기하고 “물질적인 상품의 생산에 참여하여 있고 따라서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를 생산적인 노동자로 규정”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그는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서비스 부문의 확대는 기껏해야 작은 악(惡)일 뿐”이라는 현실의 전개과정과 상반되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 영역은 총잉여가치량 증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이윤을 쫓게 되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자가용, 텔레비전, 비디오처럼 서비스 제공 기능을 가진 물질적 상품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맑스가 살던 시대에는 만델이 말한 대로 부기노동이나 유통노동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당시 공장 모델은 수십에서 수백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기업주와 소수의 인원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구조였다. 브레이버맨이 지적한 대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규모가 큰 사업장에서도 대개 여섯 명을 넘지 않았으며, 기업주의 친척과 친지인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당시 사무실 직원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예비 경영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상업, 특히 소매상업은 소규모였으며 지금 같은 대규모 유통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맑스가 이러한 부분들을 자본가 전체의 지출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영역을 자본가 개인의 필요에 의해 자본가의 수입과 교환되는 비교적 작은 부분으로 상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부문들 역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 자본가에게 이윤을 확보하는 독립적인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에 다양해진 서비스 부문까지 합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부분은 고용은 물론 경제적 비중에서도 이미 공업 부분을 압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정도로 거대한 부분을 비생산부분으로 설정한다면 현실 파악에 곤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이런 주장을 펼치는 논자들이 대개 이 공제되는 비용을 개별자본의 것이 아닌 일종의 사회적 공비로 취급하면서 난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이토록 거대한 부분이 공비로 잉여가치에서 공제되고 있다는 관념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이냐 비생산적 노동이냐는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가 물질이냐 서비스냐가 아니라 맑스의 말대로 자본과 관계로 설정되어야 마땅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이윤을 추출해낼 수 있는 노동이 생산적인 것이다. 

18세기 중농주의자들이 공업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본 것은 농업생산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만 공산품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 사치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주의자들이 살던 시대에서 불과 3백 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공산품이 없는 삶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회적 필요는 인간 사회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3세기 전에는 공산품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영역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공업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를 창출하고 마침내 그것을 인류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 생산력의 발전이 전통적인 서비스 영역을 넘어 사회 및 대인 서비스를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필요로 만들고 상품화하고 있다. 이 속에서 제조업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농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적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은 비제조업 부분의 증가를 자본주의 쇠락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 산업사회가 발전할 사회적 여력을 준 것처럼, 제조업 생산성의 발전으로 사회의 노동력 전반이 공장 노동에 투입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은 사회의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우리는 서비스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공업노동만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특화시키는 논리들은 제조업 비중이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 사회가 공장 노동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기묘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산업화되어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서비스 분야의 노동 역시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비생산적이라는 인식, 부차적인 영역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오히려 자본으로 하여금 이들을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사슬이 되고 있다. 이런 노동이 성인 남자의 가족 부양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여성, 청년, 청소년 같은 사회 잉여층의 부차적 노동이라는 인식이야 말로 이 노동의 가치를 낮게 묶어두는 인식적 장애로 기능하고 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공업중심주의자들은 제조업이 높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제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제조업 자체가 고임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업 노동이나 서비스 노동이나 자본과 결합할 때 동일한 노동인 것이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사회적 가치와 인식인 것이며 그 역시 변화하는 것이다. 

자본은 이러한 인식과 불안정 노동자들의 특수한 존재양식을 최대한 이용하여 극악한 노무관리를 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이 특유의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작업장의 단결을 통해서 자본에게 직접 권리를 요구하기 어렵다는 현실, 파트타임으로 노동시간이 분산되어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강제하기 어렵다는 현실, 이런 존재양식 자체가 또 다시 이들의 저임금·불안정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8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월마트이다. 월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는 서비스 산업에서 비교적 대규모의 집약된 현장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이며 1962년 창사 이래 지금까지 무노조 사업장이다. 미국 디트로이트의 자동차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6만 달러(약 7천만 원)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는데 반해 월마트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연봉은 미국 1인당 국민소득에도 크게 못 미치는 1만8천 달러에 불과하다. 

임금소득이 보편화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단지 임금소득의 여부를 가지고 계급을 따지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가들마저 임금소득자의 외양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사회는 일반 노동자들의 수백, 수천 배에 이르는 고임금을 받는 극소수의 자본가들과, 블루칼라냐 화이트칼라냐 무관하게 안정된 고용을 바탕으로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중간계급, 그리고 광범위한 불안정·저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물론 중간계급의 성격 상 이들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위 역시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현재적인 의식이 중산층의 그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위 맑스주의자들이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간혹 사용하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는 부분적인 임금소득자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지 전적으로 임금소득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고용의 단속성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사회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일 수는 없다. 오히려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이나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조직된 중간계급들은 자신들이 이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정체성과 이해, 예컨대 동일한 노동자계급, 동일한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과거 부르주아들이 그랬듯이 이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며 독자적인 이해로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담지자가 되고 있다. 이들의 전반적인 저임금은 자본주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인구 다수부분의 저임금화에도 불구하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는 지난 십여 년 간 주식·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높게 유지되면서 소비력을 지탱해 왔다. 공산품 가격의 전반적인 하락도 이들의 생활수준을 일정정도 유지시켜 주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자산 거품을 유지해왔던 마지막 지렛대인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자 이들은 곧바로 당장 의식주마저 보장받기 힘든 집단으로 전락했다. 기본소득제도와 같은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능성과 잠재성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은 제조업에 비해 현장에 집약된 노동자들이 아니다. 대규모 유통업체처럼 밀집한 사업장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이러한 사업장들 역시 수천, 수만이 일하는 제조업 대공장의 집약성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반적으로 이들의 존재양식은 파편적·분산적·유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세계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 지 20여 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의 역사는 최소한 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조직화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가입률은 2.8% 밖에 되지 않으며,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15만 조합원 중 사내하청노동자는 5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 미미한 조직조차 대개 기존의 정규직노조에서 조직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금속대공장에서 사내하청운동을 일구고 노동조합을 건설한 것은 대개 민주노총과 적대적인 좌익 정파의 활동가들이었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그 집약성과 사회적 파급력 때문에 흔히 노동계급의 대표자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을 배경으로 고용과 고임금을 보장받고 있는 조직노동운동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요구는 전통적으로 노동계급 공통의 요구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정규직노동자들에게만 유리하고 노동유연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제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현상은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연장으로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장에 집약되지 않고 분산적이고 유동적인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존재양식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기존의 노동조합 모델로 조직하기는 매우 어렵다.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공장의 집약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68년 혁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개별화된 인자들의 투쟁은 폭발했다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 이런 경험의 현학적인 표현이었으며, 맑스주의자들은 그 이론들의 실천적 무력함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공업노동자들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신뢰가 포스트구조주의자들보다 결코 더 많은 것을 보여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근 십여 년 간의 경험은 전통적 공업노동자들과 그들의 조직에 속하지 않는 개별적인 인자들의 투쟁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전·반세계화 투쟁들은 소위 조직노동자들의 질서정연하고 정형화된 투쟁이 아니라 무정형적이면서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인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2001년 9․11 사태가 빚은 국제적 공안국면과 이어진 세계경제의 호황으로 주춤했다가 2008년 위기 이후 극적으로 폭발했다. 

일방적인 매스미디어를 대체하고 있는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투쟁들이 보다 쉽게 확산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발생한 중동의 민주화 투쟁,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의 투쟁, 미국의 아큐파이 투쟁은 모두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공간의 집약성은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러한 투쟁들이 입증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사람들이 새롭게 발전한 매체의 지원을 받아 어떻게 실물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지 이들 투쟁은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어떻게 일상적인 조직과 실천을 만들어가며 그것을 기반으로 보다 급진적인 의식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연적인 폭발이나 계기만을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선진적인 부분이 필요하며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사전조직화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양식은 일정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층을 기본 조직 대상으로 상정한 기존의 노조와 정당을 뛰어 넘는 모델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하여 노동조합의 주요한 형태가 된 산별·업종·기업별 노조 등 전통적인 조직 모델들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틀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최근의 시도들은 대개 기존 노동조합의 특성보다는 생활 공동체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단일한 현장에 모여 있지 않고 유동적이고 분산적인 노동자들에게 “지역”과 “생활”이라는 것이 주요한 코드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공동체들이 친목단체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의식, 정치적 운동과 직접 결합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장에 집약되지 않았다는 상황은 흔히 약점으로 지적되지만 이는 반대로 현장과 노조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들을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공장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계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딜레마의 하나였다. 맑스가 활동하던 시대부터 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계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독일의 라쌀레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직 정치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은 정치투쟁은 부르주아 국가주의에 포섭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총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에 기초해서만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양자가 모두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며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은 현실에서는 독일 사민당의 예처럼 당과 노조의 기계적인 분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노조는 경제투쟁을 담당하고 노조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정치투쟁을 담당하는 이러한 활동방식은 노동자들을 표를 찍는 대중으로 수동화 시키고 정치와 경제의 부르주아적 이분법을 재생시키는 효과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 볼셰비키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이 허용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비합법적인 정당이 직접 현장의 당 조직을 통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890년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과 교육 중심의 활동에서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경제투쟁에 직접 개입하고 지원하는 활동으로 운동방식을 전환했다. 상대적으로 산업이 발전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분트 활동가 크레머가 쓴 <선동론>은 이런 운동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투쟁이 격렬해지면 자연스럽게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치투쟁을 배타적으로 강조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준 강렬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사실 이런 노선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의 경제주의 비판은 정치노선이라기보다는 조직노선 상의 논쟁에 더 가까웠다. 189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 각지에는 레닌과 마르토프의 페테르스부르크노동자해방투쟁동맹을 필두로 사회주의적 지식인과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결합한 활동가조직들이 많이 생겨났다. 경제주의자들은 대개 러시아 산업지대에 분산된 활동가조직들을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거나 혹은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했던 반면 레닌은 이를 중앙집권적인 정당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를 일반적으로 사회에 제기하는 투쟁도 정치투쟁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런 정치투쟁을 노동자들의 자생성에 굴종한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경제투쟁 자체로부터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정치는 조합주의적인 정치로 귀결되지 국가권력을 타도하거나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으로 제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닌이 제시한 해결책은 공장 외부에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공장의 노동자들로 정치의식이 불어넣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노선은 조직의 문제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정당은 직접 노동자들의 흔히 공장세포로 불리는 현장의 기초 당 조직을 통해 경제투쟁을 지원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정치선동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각성시켜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오해와 달리 레닌이 주요하게 제기한 정치적 선동의 내용은 제2인터내셔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민주주의적 요구들이었다. 

이러한 노선은 러시아 혁명 이후에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달리 노동조합이 하나의 제도로 확립된 서구 노동운동에 코민테른 조직노선을 이식하기 위한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공장세포는 독립적인 정치조직체라기 보다 노동조합 활동의 배후정치로 전락했다. 스탈린주의에서 당-세포-노조의 전달벨트 이론은 이를 정식화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 현장에서 정치선동과 경제선동을 직접적으로 수행한다는 공장세포 원래의 의의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초기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은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요한 요구로 내걸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아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가 가장 중요한 실천적 요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됨에 따라 8시간 노동제와 더불어 사민주의 운동의 두 축을 이루었던 민주주의적 정치투쟁의 요구가 사실상 기각되었다. 그 결과 코민테른의 전술은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실제적인 매개를 상실하고 오로지 노동조합적 요구들을 가장 전투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으로 경사되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가 제출한 「전술에 대한 테제」는 이러한 노선을 명백히 천명했다. 


자신들의 부분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동적으로 전체 부르주아 및 그 국가기구와 투쟁할 수밖에 없다. 부분적 요구를 위한 투쟁이나 개개의 노동자그룹의 부분적 투쟁이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투쟁으로 확대되어감에 따라 공산당의 슬로건도 또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고, 일반화되어 마침내 직접적인 적의 타도를 호소하는 슬로건에 이른다. (코민테른 3차 대회, 전술에 관한 테제 (1921년 7월9일))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은 이러한 코민테른의 전술을 그대로 강령으로 정식화한 것이었다. 독일 사민당의 강령이 사회주의적 이상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실천의 분리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 트로츠키는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요구를 배제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적 요구를 중심으로 강령을 구성했다. 이는 결국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적 제 요구를 기각하고 이른바 “생산의 정치”로 함몰되도록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경제투쟁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에서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되더라도 레닌이 조합주의 정치로 규정한 노동조합 요구를 법제화해서 정부에 요구하는 투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반대로 1968년에 나타난 것처럼 공장 외부의 사회적 위기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끄는 경우가 더 많았다. 

프레카리아트 운동은 차티스트 같은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처럼 현장의 자본가에 대한 요구보다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요구는 “1%에 맞서는 99%”라는 슬로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사회경제적 대안보다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 이들이 독자적인 사회경제적인 계급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인 위기의 심화가 필요하다. 다가올, 혹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위기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할 주체로서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실천과 구체적인 요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들의 존재 조건에 대한 더 깊은 연구와 직접적인 실천의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운동의 경향으로부터 일반적으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유럽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1차 대전 이후, 우리에게는 87년 이후 기각된 민주주의적 요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불안정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세계화된 자본의 힘이다. 그 앞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이해를 일정 조율하는 역할을 하던 국민국가의 대의제 합의구조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국가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자본에 종속되어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들조차 후퇴하고 있다. 대의제 합의구조를 보완하던 코포라티즘 체제 역시 세계화 된 자본의 요구를 조직노동운동이 추인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점차 사회적 인구구성에서 다수의 위치를 점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대변하는 제도 정치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은 한국에서의 촛불 투쟁이나 아큐파이 투쟁에서 나타나듯이 민주주의, 그것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끌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 의식을 유러코뮤니즘 같은 국가개조론의 방향이 아니라, 구체적인 요구들과 폭로를 매개로 하여 보다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요구로 이끌어야 한다.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여성, 청소년 등 우리가 흔히 주변부 노동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구성요소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대개 일터와 생활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고 있다. 공업노동자들을 배타적으로 기반 하려한 맑스주의자들이 대부분 여성, 환경 및 여타 소수자 운동에 대해 그 중요성을 폄하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조직하려는 대상이 주로 남성노동자들이란 점, 경제투쟁을 이들을 조직하는 중심 고리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진보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일본에서 프레카리아트 메이데이 행사 광고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뿔뿔이 해체되면서 전쟁 상황을 강요받고 있다. 노숙 생활자는 차별과 배제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자립’을 강요받고 시장에서 방출된다. 장애인들은 사회보장 혜택도 받지 못하면서 ‘자립지원 법’이라는 명목 하에서 자기 책임으로 일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 파트타임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고 정규직은 꿈도 못 꾸는 노동만 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는 인간성을 유린하는 지문 날인 따위의 치안 관리에 휘둘리면서 주변부 노동자로 혹사당한다. (아마미야 가린, 같은 책, p.25)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을 기본 모델로 현재 사회주의자들이 제출하고 있는 강령들과 달리 이런 부분들을 소위 ‘부문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요구들을 중심에 놓고 이를 극복한 사회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요구들을 기각할 수는 없지만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중점을 이동하고 민주주의·여성·환경 등 과거에 부차화 되어 왔던 문제들을 일상적인 실천의 요구로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낡은 전략·전술과 단절이 필요하다

투쟁에 대한 이론은 투쟁의 경험에서 나온다.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유럽 각지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의 경험은 이전까지 생디칼리스트들의 구호이던 총파업과 노동자통제를 사회주의자들의 전술과 요구로 받아들이게 했다. 1917년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실천을 중요시하는 코민테른 전술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모두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전술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산업 국가들을 휩쓴 세 차례의 국제적인 반정부운동, 즉, 68년, 99년, 2011년의 투쟁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투쟁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68년 혁명은 포스트구조주의를, 99년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다중이라는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2008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와 점령운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와 광장 점령을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의 대부분을 여전히 규정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1920년대 코민테른에서 정식화된 노선들이다. 프레카리아트라고 불리는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주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코민테른 노선으로 대표되는 대공장/정규직/남성중심의 전략·전술과의 단절이 필요하다. 우리가 맑스와 엥겔스, 레닌 저작들의 오타쿠가 아니라 진짜 현실을 분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이라면 이른바 “맑스주의의 역사와 전통”보다는 현실을 중심에 두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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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특집]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①

새로운 주체를 위한 노동계급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이정인 (사노신 독자회원)
 




* 작년 노동자대회에 발간된 <붉은글씨>에 실린 글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대공업을 자본주의 생산의 집적과 집중의 필연적 결과물인 동시에 세상만물의 가치를 창출하는 물질적 생산의 중심이자 계급의식이 집약된 혁명 혹은 사회진보의 기지로 상정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촛불투쟁, 희망운동의 경험들은 이러한 가정이 단순히 환상이나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역사적 경험이다. 객관적인 계급과 당위적인 계급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2차 대전 이후 세 번의 주요한 국제적인 반정부투쟁, 즉 68혁명, 90년대 반세계화 운동,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의 대중투쟁들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보조자나 주변부에 머무를 뿐 무대의 주인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공업노동자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 최후의 순간 분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메시아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믿음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역사적 고찰을 통해 다시 점검해 봐야할 시기에 서 있다.


 

대공장의 등장과 노동자의 보수화

1885년 엥겔스는 가장 산업화한 영국의 노동운동이 왜 사회주의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처음으로 “귀족화된 노동자”, 즉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지속적인 개량은 노동자 계급 중 보호 받는 두 부류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 중 첫 부류는 공장 노동자들이다. 이들을 위하여 적어도 비교적 합리적인 표준 노동일이 법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 상태는 상대적으로 회복되었고 정신적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는바, 이 정신적 우월성은 그들이 한 장소에 집결되고 있는 관계로 더욱 강화되었다. … 둘째는 대형 노동조합이다. 이것은 성인 남자의 노동만이 사용되거나 또는 그러한 노동이 지배적인 노동부문의 조직이다. 여기에서는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의 경쟁도 기계의 경쟁도 지금까지 그 조직적 역량을 타파할 수 없었다. 기계공, 목공, 소목, 건축 노동자들은 각각 그 자체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건축 노동자의 경우와 같이 그들은 기계 도입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그들의 처지는 1848년 이래 의심할 바 없이 현저히 개선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지금까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노동자계급 중에서 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엥겔스는 노동귀족이 생기는 원인을 영국 공업의 독점적 위치에서 찾았다.


영국의 공업 독점이 지속되는 한 영국 노동자 계급은 어느 정도 이 독점의 이익에 참여하였다. 이 이익도 노동자들 사이에 극히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대부분은 특권을 가진 소수가 차지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대중도 때때로나마 일시적으로 한 몫을 얻곤 하였다. 바로 이것이 오언주의의 몰락 이후 영국에 사회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독점이 무너지면 영국 노동자 계급은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들 전체가 ― 특권적이고 지도적인 소수들도 포함하여 ―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에 처하게 될 날이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가 영국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 독일어 제2판 서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이수흔 옮김, 박종철출판사, p.385)


엥겔스가 예측한 대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미국과 독일 같은 새로운 산업국가의 도전에 의해 세계시장에서 영국 산업의 독점은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 노동운동이 급진화 되진 않았다. 오히려 20세기 초 노동운동의 보수화가 서유럽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대규모 제조업의 등장과 궤를 같이 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대공업의 발전을 예측했지만, 당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한 장소에서 일하는 대공장은 아직 미래의 것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맑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고 있던 1850년대와 60년대에는 영국에서조차 공장 규모는 수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자본론>이 아마포를 예로 들어 상품생산을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주도적인 산업은 면방직 공업이었다. 

공장제 도입을 이끈 직물업에서 기계의 도입은 아동노동과 여성노동 같은 미숙련 노동을 광범위하게 사용할 여지를 만들었다. 이들 공장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50%도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값싼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으로 채워졌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엥겔스가 1845년에 쓴 <영국노동계급의 상태>에 잘 드러나 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형태는 파괴되었다. 조그만 쪽방 하나에 온 가족이 거주하며 부모와 아이들 모두 공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른 집단은 바로 이런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로부터 맑스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은 점차 사멸할 것이며 이는 기계제 공업의 발전으로 여성/아동과 남성 성인의 육체능력의 간극이 좁혀짐에 따라 사회성원 전체의 노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래의 가족제도의 붕괴가 아무리 무섭고 메스껍게 보일지라도, 대공업은 가정의 영역 밖에 있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에서 부인·미성년자·남녀 아동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가족과 양성관계의 더 높은 형태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창조하고 있다. … 또한 남녀노소의 개인들로 집단적 노동그룹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연발생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형태[…]에서는 부패와 노예상태의 해로운 원천으로 되지만, 적당한 조건 하에서는 이와 반대로 인간적인 발전의 원천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명백하다. (칼 맑스, <자본론 I (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제 2개역판), p.656)


따라서 맑스는 원칙적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참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동노동 일반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자본주의적인 아동노동의 폐지와 교육과 생산의 통일이라는 요구를 지지했음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맑스가 <자본론>의 집필을 완결지은 1860년대 이후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경향으로 제시했던 생산 규모의 거대화 즉, 공장 규모의 거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시기 영국 자본주의 생산의 중심은 면방직 같은 소비재 산업에서 점차 철강·기계·조선·철도 같은 중공업으로 이동했다. 이와 함께 비로소 오늘날의 대공장처럼 같은 작업장에서 수천, 수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강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강화되고 노동자운동이 정치적으로 급진화 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산업 변화에 따라 제조업에서 여성과 아동 노동력은 점차 축출되었다. 중공업의 발전과 함께 소위 ‘가족임금’이 등장하여 노동자 가정도 부르주아 가족과 유사하게 남성노동자 1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형태가 되었다. 노동계급의 여성은 가사노동으로 돌아갔고 아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보통교육제도에 의해 학교로 흡수되었다. 엥겔스가 1880년대 영국의 “귀족화된 노동자”에 대해서 썼을 때, 그가 노동귀족으로 보았던 집단은 전자본주의의 유제로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수공업적인 노동자들과 새롭게 등장한 공장노동자들이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던 산업의 이동, 즉, 2차 산업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철도·조선·탄광·철강·공작기계 산업의 상호 연관된 발전과 생산단위의 거대화는 북서유럽국가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일반화되었으며 이들 산업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은 대략 1880년대에서 1920년대 사이에 단일한 조직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되었다. 생산의 대규모화와 산업구조의 변화, 기계에 의한 숙련의 대체 등에 의해 장인·직인·숙련공 중심의 노동운동이 몰락하고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매우 동질화된 반숙련·미숙련 육체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노조·정당·공제조합·협동조합·소비조합·취미클럽 등을 통해 ‘노동자 문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동질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세대는 전 시대에 제기되었던 보통선거제의 실질적 확대를 쟁취하며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구성했으나, 보통선거제의 점진적 확대와 생활수준의 전반적 향상과 함께 자신의 정치행위를 평화적인 시위와 투표행위로 제한하고 작업장 투쟁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 결과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맑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 영국에서 목도한 “잃을 것이라고는 노예의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 밖에 없었던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후예들은 여전히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들과 달리 더 이상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을 중심으로 대륙에 새롭게 등장한 노동운동은 맑스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았고 사회민주당과 인터내셔널로 정치적으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노동운동이 엥겔스가 생각한 것처럼 영국의 노동운동보다 급진적인 운동이었는가는 꽤나 의심스럽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노동운동의 형성 초기부터 국가, 가족, 여성에 대한 입장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맑스는 1875년 고타 강령이 나오자 “자유로운 국가”라는 강령의 요구가 라쌀레주의 국가관에 타협한 것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실은 맑스 파라고 불렸던 아이제나흐 파, 즉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의 강령 역시 그 제 1조에 “자유로운 인민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다고 버젓이 밝히고 있었다. 국가주의적 경향은 엥겔스가 당시까지 나온 강령들 중 가장 맑스주의적인 것이라고 논평한 1891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카우츠키가 쓴 에르푸르트 강령 해설은 여전히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제2인터내셔널은 아동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와 여성노동에 대한 제한을 주장했다.

사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실천적으로 노동조합 운동과 결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었으며 이념의 혁명적 성격과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엥겔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사민당 지도부에 의해 맑스·엥겔스의 저술에 대한 왜곡과 조작·누락이 나타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죽기 얼마 전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에 붙인 새로운 서설에서 19세기의 혁명 전술이었던 도시 바리케이드 투쟁이 더 이상 적절한 전술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문서는 상당 부분이 삭제되면서 폭력투쟁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게끔 편집되었다. 그 결과 이 글은 독일 사민당에서 엥겔스를 의회주의적 평화주의자로 해석하는 주요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자 사민주의 운동은 곧바로 수정주의 논쟁에 휩싸이며 내적으로 분열되었다. 엥겔스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당내 가장 권위 있던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의 변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수정주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독일 사민당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서유럽 노동운동의 실체는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회원 단체들은 전쟁 이전에 이미 반전운동을 결의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노동자들을 사로잡은 애국주의 열풍에 굴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은 전쟁공채 투표를 반대했지만, 당의 공식적인 이론적 지도자 카우츠키는 전쟁공채에 조건부 찬성 입장을 내놓았다.

서유럽 사민주의 운동의 변질에 충격을 받은 레닌은 이 변질 과정을 제국주의 분석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는 엥겔스의 노동귀족 이론을 더욱 확대하여 서유럽 전반에 적용시켰다. 레닌은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주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주민에 대한 초과착취를 통해 자국의 노동계급 중 일부를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로 유럽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보수화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분열

엥겔스와 레닌의 노동귀족이론은 당대 노동운동의 보수화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이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노동귀족이론은 몇 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어디까지 노동귀족이고 어디까지 노동자계급인가는 애매한 문제로 남았다. 특히 레닌의 노동귀족이론은 식민지에서 뽑아낸다고 상정된 초과이윤을 실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칫 산업국가 중심부에서 혁명의 전망이 없다는 논리로 귀결될 여지가 있었다. 이에 대한 맹아적인 문제점은 부하린과 레닌의 미묘한 차이에서 나타났다. 1차 대전 발발 이후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볼셰비키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조직자본주의”라는 개념과 함께 소위 “약한 고리론”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런 논리가 잘못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을수록 혁명이 일어나기 쉽다는 논리가 될 가능성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래서 레닌은 대신 흔히 알려진 것처럼 “약한 고리”가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중간정도의 약한 고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노동운동이 보수화된 서구도,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동양도 아닌 러시아처럼 어느 정도 산업이 발달하고 노동자들이 중첩된 모순에 고통 받고 있는 중간 정도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 분석을 기초로 이 혁명은 일국의 혁명에 제한되지 않고 즉시 세계혁명으로 전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간정도의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 혁명은 서유럽의 공업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사회주의 혁명과 동양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과 결합하여 세계혁명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런 레닌의 전망은 민족해방 투쟁 일반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적대시한 서유럽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에 상대적인 중요성을 두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1968년 이후 자국의 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한 급진적 좌파운동은 유럽이 아니라 제3세계 해방투쟁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런 논리들은 보다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이단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에게 노동귀족이론은 일반적으로 기각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유럽의 공산당들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기본으로 한 운동을 계속했다. 반면 보다 좌익적 맑스주의자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운동의 보수화를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의 중심성을 방어하기 위해 노조관료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기했다. 이런 논리를 특히 정교하게 제시한 것은 토니 클리프를 위시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가들이었다. 

한국에서 노동귀족론과 노조관료론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조관료이론은 이론사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귀족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적 장치였다. 이 이론은 사실 맑스주의 역사에서 이질적인 전통을 수용한 것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레닌과 엥겔스의 논의가 아니라 베버를 시조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학적 분석의 틀을 도입해 노조관료이론을 만들었다. 주로 독일 사민당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제의 발달에 대한 막스 베버의 분석을 독일 노동운동에 적용했다. 그는 1911년에 쓴 <정당사회학>을 통해 독일의 노조와 사민당 모두에서 관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이들 조직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서술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만든 노조관료이론은 베버와 미헬스의 분석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적 경향은 결국 이들이 서유럽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나 레닌의 주장처럼 영국이나 서유럽의 공업노동자들이 노동귀족이라면 이들 나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집단이라고 상정된 노동귀족을 대상으로 조직화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토니 클리프를 비롯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유럽에서 전통적인 산업노동자들의 투쟁이 크게 벌어졌던 1920년대와 1960~70년대 투쟁을 근거로 노동귀족이론으로는 영국 같은 선진 산업국가에서 벌어진 대규모 노동자 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신 자본주의 사회의 노사관계에서 일상적인 교섭을 담당하는 노조관료층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집단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일상적 시기에 일반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겉보기에 보수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잠재적인 혁명성과 투쟁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 시기에 일반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과 결합된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은 노조관료라는 자본주의 완충장치를 뚫고 나와 이들을 다시 혁명적 계급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1920년대 영국 총파업이나 1960~70년대 벌어졌던 숍스튜어트 투쟁 같은 일반 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했으며, 그것은 반관료 평조합원 노선으로 정식화되었다.

그러나 노조관료이론은 사실 전통적 공업노동자에 대한 혁명적 신뢰 이상,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관료주의는 일반 조합원들의 조합주의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노조관료들은 조합주의의 인격적 화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미 1950년대부터 산업노동자들의 부르주아화 되었다는 주장이 등장했고 특히 지난 40여 년간 주요 산업 국가들에서 벌어진 주요한 반정부 투쟁에서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형성된 공업노동자계급은 2차 대전 이후 급속하게 보수화되었다. 1950년대 장기호황 이후 노동조건이 급속히 개선되었으나 이러한 투쟁은 공장 밖의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미래의 산업노동자들은 48년간의 고용보장, 연간 48주, 주 48시간의 노동시간이라는 세 가지 48을 기대할 수 있었다. 호황에 따라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1950년대 말이 되면 사회학자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메그나드 데사이, <마르크스의 복수>, 김종원 옮김, 아침이슬, p.380)”

60년대 말, 서유럽 국가에서는 학생들의 투쟁이 불러일으킨 전사회적 위기에 호응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의 물결이 휩쓸었다. 북미에서 195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생활개선이 서유럽에서는 대중투쟁의 성과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1968~1970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파업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예년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임금인상을 획득했다.

2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와 북유럽 3국, 네덜란드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 존재하던 국가관료·기업관료·노조관료의 3자 협의체인 코포라티즘 체제가 1970년대 들어 서유럽 국가들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제도주의자들은 코포라티즘을 케인즈주의, 포디즘과 함께 장기호황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 양식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코포라티즘은 사실 68~72년 사이에 유럽을 강타한 노동자 대중투쟁을 포섭하기 위한 대응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노동자투쟁은 70년대 들어 빠르게 퇴조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주목했던 영국의 평조합원 운동도 흔히 ‘불만의 겨울’로 불리는 1978년 말 대규모 투쟁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1980년대 몰락했다. 70년대 불황이 강타하자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키는데 급급했고, 80년대 정치적 반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맑스주의자들은 사실상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았다. 유럽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조직노동운동의 경제주의를 정당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클리프 류의 노조관료이론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전통적인 공업노동계급의 혁명성을 관념적으로 정당화하고 그들의 보수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맑스주의자들이 공업노동자들의 보수화라는 현실에 눈을 감으려 하고 있을 때, 부르주아 사회학에서는 70년대 초 이를 반영하여 내부노동시장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부노동시장이론은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시장의 경쟁에 제약받지 않는 폐쇄된 노동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1980년대 들어 노동계급의 분절화 이론, 이중 노동시장 이론으로 발전해 들어갔는데 그 핵심은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폐쇄된 노동시장이 존재하며, 여기서 배제된 하층 노동자들의 노동시장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되린저와 피오르가 처음 제기한 내부노동시장이론은 공장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소위 기업특수적인 숙련에서 원인을 찾았다. 기업 특수적 숙련이란 공장의 기계설비에 고착된 모종의 숙련이 있다는 가설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기술혁신으로 공업 부문에 전반적으로 탈숙련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노동시장은 건재했다. 되린저와 피오르는 미국 현장 특유의 직무급제를 내부노동시장 형성의 중요한 기제로 파악했지만 직무급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대규모 제조업에서 내부노동시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제조업 대공장의 폐쇄적 노동시장이 숙련이나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대공장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런 폐쇄성의 형성은 엥겔스가 지적한 대로 대규모의 인적 집결성이라는 대공장 자체의 잠재력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20세기 초 공장규모가 일반적으로 확대되는데 주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포디즘 체계는 그 형성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유인하는 경향을 보였다. 1914년 헨리 포드는 ‘T-모델’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일 작업 8시간 당 5달러를 지불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공장 노동자들이 받는 금액의 세 배에 가까운 임금이었다. 대공업의 단순 반복적인 업무와 인적 집약성으로 인한 조직화 가능성은 비교적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좋은 노동조건을 제시하게 했다. 

이런 포드 유형의 대공장은 대규모 기계 설비를 놀리지 않기 위해 안정적인 고용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포드 유형의 대공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풀타임 노동자, 소위 말해 정규직 고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고용관계의 안정성은 다시 노동조합의 조직을 이전에 비해 용이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조직노동운동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 고용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적인 공공부문과 대규모 제조업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장기 호황 국면에서 높은 조직률을 가진 서구의 노동조합은 안정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9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확대되었다고 흔히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노동유연화에 의해 내부노동시장이 해체되었는가? 여러 연구 결과들은 전통적인 화이트칼라 분야에서는 노동유연화의 진행과 함께 내부노동시장이 일정정도 붕괴되었으나 대규모 제조업에서는 축소된 형태긴 하지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유연화는 탈공업화와 함께 새롭게 창출된 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추진되었다.



탈공업화와 계급논쟁

1973년 이후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제조업 고용이 뚜렷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럽 좌파와 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 여러 가지 논쟁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은 대개 탈공업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는 전통적인 계급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었다. 

19세기에 중간계급, 즉 맑스주의 용어로 쁘띠부르주아는 임금이 주요 소득이 아닌 자영농민과 수공업자를 의미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일반적으로 임금소득자와 동의어로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공무원, 기술자, 감독자, 사무직, 판매직 노동자 등 임금소득이 주수입이면서도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와 출신성분, 생활환경, 정서, 의식에서 큰 차이가 있는 새로운 계층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미 이 당시 사민당 내부에서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인지 아니면 중간계급에 속하는 자들인지 논쟁이 벌어졌다.

베른슈타인은 제2인터내셔널 주류의 계급양극화 이론을 비판하며 이런 부류의 임금고용인들을 중간계급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 하에서는 계급 양극화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이 늘어나며 오히려 사회가 안정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우츠키를 위시로 한 독일 사민당 주류는 임금소득자들은 결국 양극화 경향을 피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집단으로 간주했다. 이 두 경향은 사실 1970년대 논쟁을 예기하는 것이었는데, 논쟁과 무관하게 독일 사민당은 비(非)공업노동자 당원들이 증가하며 점차 “국민” 정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계급의 범위에 관련된 논쟁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장노동자만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해지면서 끝이 났다.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는 당의 기반을 공장에 두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새로운 임금소득자들은 동맹의 세력도 계급적 연대의 대상도 아니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는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세력에 맞서는 노동자와 부르주아적인 중간계급의 동맹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조차 혁명의 주체는 공업노동자와 농민들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장노동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는 독일처럼 중간계층이 발달하지 못하고 대규모 작업장이 외자유치를 통해 이식된 러시아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주도성이 강화된 1차 대전 이후 국제 사회주의 진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노동자와 동일한 개념으로 수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1930년대 들어 하급 사무직 근무자들이 파시즘의 지지자로 드러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공장노동자들의 보수화와 제조업 비중의 축소에 따른 정치적 실천의 변화가 제기되며 유사한 계급 논쟁이 부활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조업 생산의 거대화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친 뒤 활짝 꽃을 피웠다. 두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업의 변화는 2차 대전 이후 서유럽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일반화되어 내구소비재, 전자산업, 자동차, 철강, 석탄, 석유생산 산업이 상호 연관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산업의 융성은 이중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호황 동안 생산이 확대되고 생산규모가 거대화되며 제조업 고용이 증가했지만 비제조업의 고용은 더 빨리 증가했던 것이다. 미국의 좌파 학술 잡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의 대표적 이론가 폴 스위지와 폴 바란은 1966년에 발표한 <독점자본>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전통적인 독점자본주의와 연관시켰다. 그들은 독점자본 시대에 등장한 생산의 거대화는 대규모의 경제잉여를 창출하고 이 경제잉여를 처분하기 위해 커다란 비생산 영역이 창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 이후에 서구 사회에서는 공공부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거대해진 생산을 기획·관리하고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상품을 광고하고 유통하는 영역이 비대하게 발전했다. 스위지와 바란은 이를 대규모 경제잉여를 처리하기 위한 자본의 노력으로 규정했다.

1970년대 계급 논의는 주로 이런 부분은 일하는 임금소득자, 흔히 화이트칼라라고 명명된 사회집단의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집중되었다.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던 사민당과 공산당,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은 새롭게 늘어나고 있는 화이트칼라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를 놓고 다양한 논의를 시작했다. 사민당들은 베른슈타인과 유사하게 이들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반면 공산당은 여전히 공장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유지하며, 이들이 노동계급이 아니라 새로운 중간계급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럽 공산당들은 반독점민주주의라는 폭넓은 전선 하에서 이들과 동맹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유럽 공산당의 전략을 주도한 그리스 출신 사회학자 니코스 풀란차스의 계급론은 반독점 민주주의 전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계급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공산당과 사민당 모두의 정치적 우경화로 귀결했다. 

이 두 경향과 다른 제3의 이론을 제기한 것은 스위지와 바란과 같이 <먼슬리 리뷰> 그룹에 속한 해리 브레이버맨이었다. 그는 1976년에 <독점자본>의 분석을 현대 자본주의 계급분석에 적용시킨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브레이버맨은 제조업 뿐 아니라 다른 산업 영역에서도 단순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창출되고 있으며 이들의 성격은 제조업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레이버맨의 주장과 달리 이후의 연구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의식은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무엇보다 비제조업 화이트칼라 임금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제조업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1980년대 들어서자 서구 산업 국가들의 탈공업화 경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산업공동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좌파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는 1980년 선견지명적인 통찰력을 담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의 역사적 역할이 끝났다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이제 특혜 받은 소수층일 뿐이다.” 앙드레 고르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전통적 노동계급에 속하지 않는 신(新)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들은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도 동일성을 가질 수 없는 비(非)계급이다.

인구의 대다수가 후기산업사회의 신프롤레타리아에 속한다. 이 신프롤레타리아는 불안정한 지위의 보조직·기간직·구(舊)기술의 노동직·대체직·파트타임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일도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는 자동화 때문에 상당수 폐기될 것이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현웅 옮김, 생각의 나무, p.110)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972년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였던 에른스트 만델은 <후기자본주의>라는 책에서 본질적으로 비생산적 분야인 서비스산업의 팽창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그것은 기술발달에 따라 상품 산업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교통 서비스는 자가용에 의해, 극장이나 영화 서비스는 개인 텔레비전 세트에 의해서 대체되며 장래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교육훈련이 비디오 카세트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다. (에른스트 만델, <후기자본주의>, 이범구 옮김, 한마당, p.396)”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에 대한 답변으로 공업노동자들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 국가로 이전되고 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북미와 서유럽에서 제조업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대만 등 신흥공업국의 등장으로 전체 공업노동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탈공업화 경향이 단순한 이전이나 정체가 아니라 역전불가능한 자본주의의 경향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졌다. 2003년 발표된 미국 알리안스 자산관리의 세계 20대 경제국 고용 동향 분석에 따르면 1995~2002년까지 제조업분야의 일자리는 2200만여 개가 줄어들어 11%가 넘는 감소를 기록했다. 이 기간 미국의 제조업 고용은 11.3% 하락했으며 일본은 16.1% 하락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공업노동자 증가의 예로 제시한 브라질과 중국, 한국에서도 제조업 일자리는 각기 19.9%, 15.3%, 11.6% 감소했다. 이런 결과는 그들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창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한 신흥공업국가에서도 제조업의 비중이 계속 줄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후반 전통적인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여전히 탈공업화를 부정하고 있을 때, 탈공업화 논의를 넘어 인간의 노동력 사용 자체가 종말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고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5년 출간된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과 1996년에 나온 프랑스 작가 비비안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는 제조업의 축소를 넘어 인간노동의 종말을 예상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은 자동화의 진전이 결국 인간 노동력 사용에 종말을 고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제조업뿐 아니라 농업과 서비스업 등 모든 산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유의 주장이 옳다면 당연히 실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주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실업률은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에 급속히 증가했다가 1990년대 이후 정체되거나 심지어 미국의 경우에는 감소세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경제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공업노동자들의 절대적 숫자가 감소 혹은 정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탈공업화는 노동의 종말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과 노동방식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탈공업화의 배경이 된 1970년대 북미와 서유럽의 경제침체는 이윤율의 저하 때문이라는 것이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합의되었다. 이로 인해 맑스주의 이론진영에서도 종래의 과소소비설에서 맑스가 <자본론> 3권에서 제시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새삼 자본주의 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부각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구성에서 불변자본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잉여가치를 낳는 노동자의 수는 불변자본 요소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생산성을 계속 상승시켜서 경쟁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확보하고자 노력하므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갈수록 고도화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의 변화는 이윤율의 저하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근래의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특성으로 많은 논자들이 금융화를 꼽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융부문의 팽창이 생겨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금융의 팽창이 완전히 새롭고 특이한 현상은 아니었다.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화폐자본이 생산으로부터 유리될 때 일반적으로 금융적 팽창이 형성되었다. 이런 금융의 과도한 팽창은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새로운 산업, 새로운 투자처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해소되곤 했다. 문제는 1970년대 이후 이렇게 웃자란 자본을 흡수할 만한 제조업의 확대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소위 제1부문과 자동차를 비롯한 내구소비재 부문의 발전이 경제성장과 고용확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40여 년 동안 제조업에서 그에 상응할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휴대폰,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제조업 영역이 창출되고 있지만 이들이 지난 시대의 기계·철강·자동차산업처럼 경제성장을 이끌기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단 이들은 그것들에 비해 비교적 값싼 소비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제조업 부분에 보다 쉽게 적용되는 기술혁신은 전보다 훨씬 줄어든 노동자로 필요한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브레너는 <혼돈의 기원>에서 1965년에서 1973년 사이 제조업에서의 이윤율 저하 때문에 금융부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 시기 이후 비제조업의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제조업에 비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레너는 맑스의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이 지나치게 단순한 모형이라고 비판하며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 원인을 과잉축적과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브레너는 자동화 혁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위기 자체는 제조업 분야의 과잉축적으로 촉발된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의 개발로 출발한 소위 극소전자 혁명,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혁신이 70년대 이후 모든 제조업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대로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산업자본가들의 대응이었다. 기술혁신은 제조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을 줄이고 선진산업국가에서 제조업의 이윤율을 전반적으로 더욱더 하락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능한 것이 분명하다. 

지난 40년 동안 모든 주요 산업국가에서 서비스 산업의 고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제레미 리프킨이 주장한 대로 기술의 발전으로 서비스 영역에서 퇴출되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가 자동화의 결과로 노동력 사용이 줄어든 서비스분야의 예로 제시한 전화 교환수, 우편 서비스, 일반사무직, 유통업과 같은 부분들은 공공서비스, 사무, 유통 등 2차 대전을 거치며 급증한 서비스산업의 보다 전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서비스영역에서 고용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서비스산업 종사자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체 임금노동자의 60~70%를 차지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비스산업을 넘어서는 또 다른 확대과정이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제조업을 비생산영역으로 바라보는 사고로는 이 부분들의 팽창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서비스산업의 낮은 노동생산성과 따라서 여전히 제조업이 경제성장에 중요하다는 논리들로는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른바 서비스 사회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하나의 유력한 가설은 제조업 이윤율보다 서비스산업의 이윤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비스산업의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정자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이윤율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고정자본의 비율이 낮은 산업은 당연히 생산성은 낮겠지만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서는 자유로울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즉, 기계 설비를 사용하는 제조업에 비해 노동력 사용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 서비스산업은 노동생산성은 낮으나 이윤율은 높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 제조업으로부터 금융부분의 팽창을 거쳐 가변자본 비율이 높은 비제조업, 특히 대인 서비스 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합리적이다. 맑스의 <잉여가치학설사>에는 “농업에서 이윤율은 공업에서의 이윤율보다 떨어지므로 자본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현상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라는 책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필리프 프티는 제레미 리프킨이나 비비안 포레스트의 주장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그녀에 따르면 기술혁신의 영향으로 제조업이나 기존의 서비스산업에서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보 과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공동생활의 한 분야가 있다”고 한다. “육체적·정신적, 지적으로 아이들·청소년들·노인들·병자들·장애인들, 그리고 심지어 생산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성인들을 돌보는 것, 가르치고 보살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 사람들의 요구는 무한하다. 따라서 이른바 일자리의 광맥도 무한하다. (도미니크 슈나페르,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 - 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김교신 옮김, 동문선, p.75)” 

그녀는 앞으로 이런 일자리들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최근의 자본주의는 이런 분야들을 지속적으로 상품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돌봄 노동,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전반적인 실업 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가 제3부문이라고 이름붙인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영역에 국가가 사람들을 고용하고 일정정도의 소득을 지급해 줄 것을 제기한다. 자발적인 사회적 서비스의 영역을 저소득층이 일하는 저임금 일자리로 만들자는 리프킨의 위험한 아이디어는 하지만 이미 사적 자본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나 필리프 프티는 사회서비스 영역의 노동화가 인간에게 기본적인 생활보장과 함께 새로운 사회 참여의식을 고양해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만, 2006년 일본 메이데이 프레카리아트 행사 광고의 글귀는 이런 노동이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고용주 측은 “노동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친구 같은 동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감언이설을 남발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싼 시급으로 불평 없이 일해주길 원하고 때로는 기꺼이 무급으로 노동해주기를 바란다.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나 감정, 대인 서비스같이 사람의 생 자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 잠시 착각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를 기대하고 하찮은 작업에서 ‘보람’을 발견, 감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직업인이 된 듯한 기분’도 ‘사이좋은 클럽’에 대한 기대도 곧 배신당한다. 일하는 장소는 수시로 바뀌고, 그때까지 손에 익은 기술은 곧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후에 낚시를 하고 밤에 토론을 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고 집에 돌아가면 녹초가 된다. 그런데도 “일할 의욕이 없다, 엄살이다.”와 같은 비난 세례를 받고 있다. 문제는 항상 이것이 개인의 자질 탓이라며 ‘인간력’을 높이라고 참견하는 설교가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비정규직인 사람들은 이런 적의나 조소와 겨루고 있다. 이 전망 없고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견뎌야 한다. (아마미야 가린,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김미정 옮김, 미지북스, p.24)


이러한 일자리들은 과거 인격적으로 종속된 신분사회에서 하인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신분사회의 붕괴와 함께 예속적인 기능에서 풀려나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영역으로 존재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변화는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공통체적 본성에 기인한 자발적인 영역이던 사회서비스, 혹은 인간서비스의 영역을 자본이 이윤을 찾아 상품화시키고 있는 걸로 보아야 한다.

제조업에서 노동유연화가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데 반해 노동유연화의 확대와 서비스 노동의 확대가 서로 중첩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후발 공업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대규모 작업장에서 사내하청이라는 전근대적 고용관계가 초기부터 존재했고, 90년대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포디즘에 기초한 대규모 작업장의 형성과 함께 정규고용을 중심의 노사관계가 확립된 서구의 경우 신자유주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에서 노동유연화의 확대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유연화는 법률과 조직의 보호를 받는 이들 부분을 비껴나 대개 비제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유동적이고 분산적인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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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쟁점] 다시 ‘소련’을 말하다 ②

3.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과 이론적 혼란



1920년대 초 볼셰비키 정권은 이미 진정한 혁명적 대중 권력기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물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의 자발적인 무장력은 내전을 겪으며 불가피하게 훼손되었고 그 후에도 민병제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물리적․문화적 후진성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옛 차르체제의 장교들도 편입된 적군에서 그 지휘와 통제는 점차 관료적으로 변해갔다. 또한 그 자체가 입법과 행정이 통일된 국가기구이자 직접민주주의의 표상이어야 할 소비에트는 내전 동안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이후 의회적인 감시기능으로 역할이 국한된 채 하향식으로 재건되었다. 더욱이 네프에 따른 자본주의로의 퇴행 속에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당에 의해 그 혁명성을 보증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노동자대중이 더 이상 국가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집단적인 통제력을 상실한 객체로 전락해가고, 또한 세계혁명의 전략에 종속되어야 할 러시아 혁명이 오히려 그 자신의 안정과 번영을 세계혁명보다 앞세우며 일국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게 될 때, 국가기구를 주도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반혁명의 귀결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의 역사에서 소위 ‘위대한 전환의 해’로 일컬어지는 1929년은 이런 의미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로 요약되는 스탈린의 급격한 정책전환은 일국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집행한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공업과 농업의 불균형 속에서 인민경제의 발전과 관련해 공업독재와 부농해체로 상징되는 트로츠키의 좌파적 노선과 공업발전을 농민경제에 의존하는 부하린의 우파적 노선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이론적 투쟁이 아닌 정치적 투쟁이었지만 그 승리자는 다름 아닌 당 중앙기관에 의지하며 당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삼은 스탈린이었다.

 

레닌 사후 네프를 실질적으로 총괄했던 스탈린은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지만 정작 그것은 스탈린 자신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보자면 문제될 게 없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을 이유로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부정한 좌익 기회주의자로, 또한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과 방법을 부정한 우익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사실, 네프는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양보이자 후퇴로 시작되었지만, 세계혁명과 절연된 일국사회주의에 충실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는 국가권력 그 자체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경에 이르러 농업총생산이 전쟁 전의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고 권력이 안정화되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부농에게 더 이상의 양보를 중단하는 등 네프를 이제 적극적인 정책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7년 영국과의 외교 및 무역관계 단절 등 국제정세가 긴장을 맞게 되고, 그해 하반기부터 곡물조달의 위기가 심각해지자 스탈린은 이미 국가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 해결책으로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전면에 내걸고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 이전부터의 누적적인 추세를 반혁명으로 완결지은 공세였다.

클리프 역시 『소련』에서 이와 유사하게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28년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설정한다. “이때 처음으로 관료층은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면서 급속히 자본을 축적하려 했다. 달리 말하면, 관료층이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되도록 신속하게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정성진 옮김, 책갈피, 2011, p.168)”


클리프는 1928년 이후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보다 정확히 말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명명한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관료층은 노동계급에 기생하고 있는 신분에서 인격화된 자본인 지배계급으로 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소련 사회에 대한 이 같은 분석은 1948년에 정립되었는데, 당시 소련은 히틀러를 패퇴시키고 이른바 ‘대조국수호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유럽 전역에 스탈린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서구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내재한 이론적인 혼란과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선명하고 분명한 주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말하다


클리프가 자신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정식화한 과정은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트로츠키주의 운동 내부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이론적 논쟁과 맞물려 있었다.

클리프가 제출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원래 소련이 아니라 종전 후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4~45년 ‘인민민주주의’의 슬로건 하에서 대체로 동유럽이 소련의 감독 밑에 놓이게 되자 트로츠키가 건설했던 제4인터내셔널은 이들 국가들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리프는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주장한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에 동조했지만,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에 대한 이 같은 방침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클리프는 양자 모두 퇴보한 노동자국가임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면서 클리프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소련 역시 그 사회 성격이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우왕좌왕 하였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등장할 무렵인 1947~48년부터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자 그 완충지대에 있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강력하게 소련을 닮아가기 시작했고 불과 몇 년 만에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한 전환을 이루었다. 그러자 제4인터내셔널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과 동일하게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며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임을 중단했다는 수정된 견해를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클리프와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이상 없었다.

당초 트로츠키는 전쟁의 비극을 다시 한 번 지켜보면서 이 전쟁이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새롭고 결정적인 시험대이자 노동자혁명을 촉발시킬 것이라 확신했다. 자본주의가 최종단계에 들어서게 되었고 생산력의 정체와 사회적 쇠퇴 속에서 지배계급조차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특유의 파국적인 정세인식은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 역시 이러한 압력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오래된 격언처럼 그 반대의 가능성(“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트로츠키, 「전쟁에 돌입한 소련」,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이장수 옮김, p.54))도 제기되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곧 닥쳐올 세계혁명과 그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러나 기대되었던 세계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게 활력을 보여주었고, 스탈린주의 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정적임이 입증되었다. 트로츠키의 예측은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에 따른다면 소련의 관료층은 이제 새로운 착취계급으로 스스로 등장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은 변화된 세계정세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고집스럽게 또 다른 정치적 격변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트로츠키가 그의 입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1930~40년대의 시대적 맥락을 고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또한 소련 사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로의 복원 가능성을 부정하며 과거 트로츠키가 했던 방식처럼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이유로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했다. 향후 혁명의 과제 역시 사회혁명이 아니라 기생적인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으로 한정되었다. (트로츠키는 본래 소련에 대해 개혁주의 전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소련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당을 없애고 새로운 혁명정당을 만드는 것이나 코민테른 대신 새로운 국제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이에 대한 스탈린주의 관료층의 묵인과 방조를 목격하면서 당과 국가를 개혁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트로츠키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었는데,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련의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도 악용될 수는 중대한 문제였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없듯이 당연히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피난소바야 가제타>라는 언론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하고, 정치혁명은 단 하루만에도 일어날 수 있으나 사회혁명은 수십 년 내에 행해질 수 없다고 협박하며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2월 혁명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명백한 사실을 숨기려 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이를 반박했다. “모든 정치적 격변은 단순한 파벌의 변화가 아니라면 사회혁명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계급이 그 사회혁명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1917년 2월 27일 혁명은 니콜라스가 이끄는 봉건지주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그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주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사회혁명이었다.”(레닌, 「인민을 놀라게 하려고 자본가들은 어떻게 애쓰고 있는가」, <레닌저작집 7-1>, 레닌출판위원회 옮김, 전진출판사, 1991, p.409))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을 정통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중 스스로 국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러한 국가가 노동자국가가 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노동자국가가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도 없이 동유럽 국가들처럼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때문에 트로츠키주의 운동 안에서 클리프를 비롯해 반대 조류가 출현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소련의 방어를 주장해야 했다. 193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목격한 트로츠키에게 ‘발전하는 사회와 쇠퇴하는 사회’의 구별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전쟁에서 소련의 방어를 호소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이유로 소련 사회를 두고 노동자국가의 변종이자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로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트로츠키의 견해를 왜곡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1936년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했다는 스탈린과 달리 소련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임을 명확히 했다. 물론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보다 진보한 사회체제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주장은 공통된다. 그 근거도 대부분 소련 사회에서 존재한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로 집중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가지고 그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혁명 이후 사회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기능할 뿐이며,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전사회적으로 획득․점유되어 생산이 더 이상 개별단위에게 맡겨지지 않고 전사회적으로 조직되는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계급의 폐절과 국가기구의 사멸을 전제로 하며, 가치법칙 역시 소멸하게 된다.

 


“사회가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그것을 직접 사회화하여 생산에 이용한다면, 각인의 노동은 그 특유하게 유용한 성격이 아무리 상이하더라도 처음부터 직접 사회적 노동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생산물에 들어 있는 사회적 노동의 양을 확정하기 위해서 우회로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 ; 날마다의 경험이 평균적으로 얼마만큼의 사회적 노동이 필요한가를 직접 알려주게 된다. … 따라서 이제 사회가 생산물에 투입된 노동량을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알고 있는 이상 그 노동량을 … 제3의 생산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사회의 머릿속에 생겨날 리가 없다. … 그러므로 사회는 위에서 말한 전제에서는 생산물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3, pp.338~339)


그러나 정작 소련에서 상품생산의 일반적 성격은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일국사회주의라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상품생산의 현실을 ‘사회주의적 상품생산’으로 호명하며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이론을 왜곡하였다. 1952년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에서 스탈린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때로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가치법칙이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여부가 질문된다. 그렇다, 그것은 존재하고 작용한다. 상품 및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가치법칙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인가? 아니다.” (스탈린,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 <스탈린선집 2>, 서중건 옮김, 전진출판사, 1990, p.240, 255)


 

하지만 엥겔스는 “가치법칙은 바로 상품생산의 기본법칙이며, 따라서 또한 상품생산의 최고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법칙이기도 하다(엥겔스, 앞의 책, p.342)”라고 분명히 했다. 스탈린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소련 사회에서 가치법칙의 존재를 자인하는 것이자,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일례로 스탈린이 소련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선언한 그 무렵 트로츠키는 “루불화는 대중의 경제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되었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1995, p.106)”고 밝혀 소련에서 화폐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님을 명백히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련이 노동자국가로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 민병제가 상비군으로 대체되고 관료제가 부활했으며, 당의 퇴보와 소비에트의 무력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소련의 국가기구는 사멸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유례없는 끔찍한 강제기구로 변했다고 증언했다. 트로츠키 그 자신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겼던 국유화와 계획경제도 노동자대중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도리어 그 위에서 군림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모습은 소련 사회가 아무리 퇴보했다고 해도 더는 코뮌국가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향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등장하게 될 코뮌국가의 구체적인 방침을 미리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등장한 다음과 같은 방책은 분명히 확인될 필요가 있다.

 

““경찰과 상비군이 폐지되어 보편적으로 무장한 인민으로, 즉 인민의용군으로 대체되고; 모든 공무원이 선출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거인들의 다수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소환에 응하고; 예외 없이 모든 공무원이 유능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초과하지 않는 수준의 급여를 받고; 의회 대의기관들이 점차적으로 입법기관 및 행정기관의 기능을 겸비하는 (다양한 계급과 직업 출신의, 또한 다양한 직업 출신의) 인민 대표자들의 소비에트로 대체될 보다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바로 코뮌국가인 것이다.” (레닌, 「당 개정에 관한 자료들」, <레닌저작집 7-2>, 레닌출판위원회 옮김, 전진출판사, 1991, p.36)

 

오히려 트로츠키가 묘사한 소련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0년대 초 레닌은 이미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해 당시 사회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한다면 그것 역시 코뮌국가의 일종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분명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을 트로츠키가 그것도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보여준 반혁명의 최종적 귀결 이후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코뮌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클리프를 포함해 당시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반대자들에게 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해명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선택한 것은 바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이었다. 

 

클리프 이전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역사


지난 1990년대 초반 남한에 클리프의 『소련』이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국가자본의론은 클리프가 주도하여 창건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이하 SWP)의 이론적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서구에서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해명하려는 노력은 클리프의 이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었고,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미 상당히 인기 있는 이론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기의 그 배경에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역사에 대한 단선적인 도식, 즉 ‘봉건제→(국가)자본주의→사회주의’와 친화성이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에 따라 소련 사회를 관료적 집산주의를 비롯해 ‘제3의 체제’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살펴볼 것처럼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의 유형에 속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사회주의도, 노동자국가도 아니라서 자본주의로 규정한다는 편의적 사고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 사회의 성격 문제를 위해 고안된 이론이 아니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의 역사는 10월 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국유화와 사회복지정책이 실시되자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이를 소위 국가사회주의 정책이라 부르며 지지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러자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하여 이들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부르주아 국가의 팽창이 ‘국가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불리하게 세력균형을 바꿈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어떤 분석적인 의도를 갖고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독일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독일이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그만큼 강하게 규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더욱 정교해졌다.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나타났던 기업에 대한 생산의 강제, 소비재의 분배 규제, 최소가격의 고정 등은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대해 부하린은 “자본주의적 ‘국민경제’는 비합리적인 제도에서 합리적인 조직으로 변화했으며, 주체 없는 경제에서 그 자신을 경제주체로 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금융자본주의 성장, 부르주아 경제조직과 정치조직의 결합”이었다. (부하린, <과도기 경제학>, 황수정 옮김, 백의, 1994, p.21) 따라서 “금융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편성은 국가자본주의적 조직화로 나아가는 길이었으며, 그것은 상품시장의 폐지, 화폐가 계산단위로 전화되는 것, 생산이 국가적 규모로 조직되고, 모든 ‘국민경제’ 구조가 세계적 경쟁이라는 목적에, 특히 전쟁 목적에 종속되는 전 과정과 더불어 진행”된다고 보았다. (부하린, 앞의 책, pp.48~49)


당시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부하린처럼 자본주의 발전의 더 높은 새로운 국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은 1918년 상반기 러시아의 볼셰비키당 내에서 벌어진 국가자본주의와 관련한 논쟁에서도 반영되어 있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이 수습되자 경제를 국가운영의 최우선적 과제로 놓으며 기업의 노동규율 확립, 경영의 단독책임제 도입, 독립채산제의 실시, 부르주아 전문가 활용, 경쟁의 조직화 등 일련의 경제조치를 내세웠다. 레닌 스스로도 파리코뮌의 원칙으로부터 일보 후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당내에서 좌익적 경향을 대표하던 부하린, 오신스키 등은 이러한 정책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부르주아 세력의 부활 가능성을 우려하는 한편,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권은 미리 박탈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 속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독점이 확고해질 때 도입된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는 노동자국가에 봉사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있는 러시아 경제의 독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18년 5월 「좌익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적 심리」에서 레닌은 “현재 러시아에서는 (소농 중심의-옮긴이)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데, 그것을 대규모 국가자본주의로 혹은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은 양자 모두 완전한 동일한 과정이며, 또한 이 과정은 ‘생산과 분배에서의 국가적 계획과 통제’라는 완전히 동일한 중간 역을 거친다”고 했다. (레닌, 「좌익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적 심리」, <좌우익 기회주의 연구>, 이민희 편역, 아침, 1988, p.282) 이는 그만큼 러시아에서 우선적인 과제로 대규모 생산의 발전, 즉 국가자본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단호한 사회화’를 주장할 때, 레닌이 이를 ‘국유화나 몰수’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사회화를 위한 계산과 분배능력의 결여라는 당면한 현실을 고려해야 함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1918년 중반 이후 내전의 본격화는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적 구상을 사실상 기각하며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논쟁도 일단락시켰다. 이후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네프 시기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좌익에 속한 호르터, 판네쿡, 륄레 등이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비판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당초 이들은 10월 혁명에 열광하고 지지했지만 이후 그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재규정하였다. 오토 륄레에 따르면, 볼셰비키당은 봉건제에서 사회주의로 직접 나아감으로써 하나의 역사적 시기를 건너뛰려 했지만 결국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즉, “러시아 혁명은, 주어진 역사적 환경에서, 오직 부르주아 혁명일 것이다. (마르셀 판 데르 린던, <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 황동하 옮김, 서해문집, 2012, pp.59~60에서 재인용)” 이러한 견해는 일국차원에서 10월 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난한 카우츠키를 제외한다면 소련 사회를 가장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경우였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비롯된 만큼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개입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시장경제로 폭넓게 해석되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규모의 거대화와 맞물려 국유화를 통한 사적 자본주의의 지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의 역할을 하는 경제라는 개념으로 예전에 비해 협소한 뜻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추진된 전면적 국유화 조치와 관련이 깊다.


트로츠키의 경우 이를 근거로 파시즘 국가와 소련 사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자랑한다 : ‘내가 이탈리아에서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원한다면 필요하고 적절한 객관적 조건들은 전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즉 자본가계급 전체의 생산수단 전부를 국가는 아직 몰수하지 않았다. 이 조건을 실현하려면 파시즘은 계급투쟁의 바리케이드에서 노동자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 전부를 몰수하는 일은 다른 사회세력, 다른 지도자, 다른 중핵들을 필요로 한다.”(트로츠키, 앞의 책, p.251)) 그러나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연구 작업은 그 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그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그 출발에서부터 꼼꼼한 독해를 요구한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① :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혼란스런 이해과 이론의 왜곡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모델로 삼은 만큼 <소련>에서 먼저 소련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이는 소련에서 혁명이 어떻게 파괴되어 있는지 생생한 사례와 구체적 통계를 통해 환기시켜주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클리프는 10월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재확인한다. “차르 체제의 몰락을 재촉한 제1차 세계대전은 교전국들 각각의 생산력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세계 수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물질적 조건들이 무르익었음을 나타내는 것(클리프, 앞의 책, p.156)”이라고 함으로써 10월 혁명의 의미를 일국차원으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마련되기도 전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비극은 10월 혁명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과격 정파의 지도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의 지배와 그 계급지배가 함축하는 여러 조치가 실현되기에는 시기가 성숙되지 않은 때에 한 정부를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딜레마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한 마디로 그가 어쩔 수 없이 해야 대변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정파나 계급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제 조건이 성숙된 계급이다.”라고 한 바가 있다. (엥겔스, 「독일농민전쟁」, <독일 혁명사 2부작>, 이종훈․김용우 옮김, 소나무, 1988, pp.122~123))

이를 토대로 클리프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됨에 있어 1928년의 제1차 5개년계획을 그 기점으로 놓는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도 이때부터는 명확하게 자본축적을 지상과제로 삼게 된 자본가계급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클리프가 소련 사회의 국가자본주의적 특성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기 이전 <소련>에서 주요하게 문제 삼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규정은 대단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한 소련을 통해 노동자국가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입증하려는 과정에서는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왜곡과 그 일반화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클리프가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트로츠키였고,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 곧 자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리프는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에서 피력한 견해(“국가자본주의가 경제 전체를 지배할 경우 이 이윤균등분배 법칙은 자본들간의 경쟁이라는 우회로가 아니라 국가 회계라는 방식을 통해 직접 그리고 즉시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지금까지 존재해본 적이 없으며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대한 모순 때문에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더욱이 국가가 자본주의적 소유형태의 보편적 담지자가 되면 사회혁명의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이 될 것이다.”(트로츠키, 앞의 책, p.250))처럼 국가자본주의의 실현 불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국가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더라도, 사적 자본주의가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 실제로 사회의 모든 자본이 하나의 수준에 집적되는 상황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클리프, 앞의 책, pp.170~171)”

하지만 곧이어 클리프는 “집권한 노동계급이 타도되고 난 후에 전통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가 부활할 가능성도 배제하는가?(클리프, 앞의 책, p.171)”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의도는 분명했다. 소련 사회를 통해 국가자본주의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클리프가 제기하는 국가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은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발전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일 수밖에 없다. 소련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패퇴시킨 반혁명에 의해 등장하게 되는 국가자본주의를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격을 서술하면서부터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 극한이라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국가자본주의는 노동자국가와 함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한 단계로 격상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유는 클리프가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판단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물구나무선 국가자본주의, 즉 국가자본주의 자신의 대립물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 것이라 주장한다. “사회세력들 간의 상관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지수형(한 곱 더 올라간) 권위를 나타내며, 여기에서 자본의 지배는 극치에 달하여 정말로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 독재로 표현되는 자본의 지배 하에서 적대적 생산관계를 토양으로 하는 생산과정의 합리화이다. … 사회주의 독재 체제는, 만약 국가사회주의라는 말이 일반에 통용되는 과정에서 더렵혀지지만 않았더라도 그것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으로서, 국가자본주의의 변증법적 부정, 대립물이다. 여기에서 생산관계의 유형은 근본적으로 바뀌며 자본주의 종주권은 폐지된다.”(부하린, 앞의 책, pp.140~142))

이러한 입장은 앞서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제한적인 조건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는 “소련은 통상적인 표준(즉, 독점자본주의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한 국가자본주의 개념)과는 다르다”며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한 국가자본주의보다 소련 경제가 이 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보다 분명하게 말한다.(클리프, 앞의 책, p.186) 이렇게 될 경우 클리프가 트로츠키와는 달리 국가자본주의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 사회를 통해 설정했던 예외적인 가능성과 그 양식은 이제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클리프의 자기논리는 서로 충돌하게 되어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한편,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의 실재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자본주의로의 변질 역시 부정했는데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폭력적인 반혁명의 부재였다. 이와 관련해 트로츠키는 “소련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정부에서 부르주아 정부로 점진적으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개혁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클리프, 앞의 책, p.199에서 재인용) 클리프 또한 소련의 반혁명 과정에서 노동자권력을 해체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양상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클리프는 노동자국가의 관료가 지배계급으로 바뀌면 경제적 부활과 정치적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국가는 점진적으로 노동자대중과 절연된다고 주장했다. “관료가 대중의 통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과정은(1928년까지는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할 수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혁명적인 질적 변화의 단계에 이르렀다.(클리프, 앞의 책, p.199)” 뿐만 아니라 이를 다음과 같이 일반화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이 평화적으로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관료와 상비군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에는 관료도 상비군도 없다. 그래서 이러한 제도들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국가에서 그것들이 존재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클리프, 앞의 책, p.200)


 

그러나 소련 사회에서 반혁명의 귀결이 일견 점진적인 이행으로 비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1918~1920년의 내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내전을 거치며 10월 혁명의 코뮌국가로서의 의미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대중이 정치권력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0년대 말 권력을 움켜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반혁명의 최종 공세는 오히려 문화혁명으로 둔갑하며 모든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책은 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또한 대중운동에 적극성을 더해주었으며 전투성을 동반하게 했고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기대감을 일깨웠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 전반을 60년대 중국의 경우에 빗대어 ‘문화혁명’이라 불렀다. 이러한 파악방식은 수백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은 강제와 억압 외에, 다수의 당원과 대학생 혹은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의 상당 부분, 그리고 노동자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집단(혹은 계층)이 스탈린의 폭압적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들 지지집단은 국가지도부가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통해 마침내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때를 계층이동, 즉 신분상승의 시기로 체험했다.(헬무트 알트리히터, <소련 소사 1917~1991>, 최대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7, p.76)”) 하지만 클리프는 내전을 경과하면서 확연해진 혁명의 퇴화를 주요하게 고려하지 않은 까닭에 소련의 퇴행과정을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으로 묘사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이론적 왜곡까지 했던 것이다. 클리프의 주장처럼 정말로 ‘1928년까지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했다면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로 퇴행하는 과정에서는 노동자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대중의 집단적인 저항과 조직적인 투쟁이 존재했을 것이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②: 현실과 괴리된 소련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강조
<소련>에서 클리프는 기본적으로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부하린과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밝히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해 부하린은 ‘자본주의 전시경제’와 ‘자본주의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의 저장고가 되는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면서 양자의 개념을 각각 ‘국가독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로 구별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클리프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질적 차이는 없지만 혼동을 피하려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클리프, 앞의 책, p.222) 하지만 클리프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클리프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기본법칙인 가치법칙이며 그것의 규정을 받지 않는 사회를 더 이상 자본주의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따지고 보면 맹목적인 경제력에 좌우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목적의식적 의지나 결정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비록 경쟁과 가치법칙이 왜곡되기는 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도 따지고 보면 가치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클리프, 앞의 책, pp.222~223)
"소련 경제 내부의 관계들을 세계경제와의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살펴보면, 생산의 동력자이자 조정자인 가치법칙이 소련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클리프, 앞의 책, p.229)


 

이러한 판단은 1920년대 말 이후 소련의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에 기초해 국가자본주의 개념이 협소화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1940년대 C.L.R 제임스와 두나예프스카야의 경우 소련 사회가 모든 자본이 하나의 거대 자본주의 기업으로 결합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다수자본 간의 경쟁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인 까닭에 그들이 소련을 ‘하나의 공장’으로 보면서도 출구로 찾은 것은 바로 세계시장이었다. 세계시장에서 소련이 다른 국가 자본과 경쟁하는 것을 통해 가치법칙은 소련에서 계속 적용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C.L.R 제임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스탈린주의 경제는 임금으로 조정되었고, 그러한 임금은 가치법칙에 따라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근대 세계에서 계급 사회가 초래하는 엄청난 비용, 즉 생산의 끊임없는 기술 혁명에서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을 필요와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 (생산 비용에서 엄청난 증가를 감수하는) 자립 경제냐 아니면 세계 시장으로의 침투(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의 모든 변동에 종속되는 존재)냐의 선택, 제국주의적 투쟁과 후진적 경제라고 하는 이 모든 것 때문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노동을 독일에서와 똑같은 취급해야 했다. 즉, 그는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해야 했고,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의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마르셀 판 데르 린던, 앞의 책, p.147에서 재인용))

클리프도 이러한 입장에서 소련의 국내 경제에서는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소련과 국제경쟁 사이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클리프는 소련이 세계시장에서 상품을 매개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군비라는 형식의 사용가치를 매개로 경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에서 클리프는 소련 사회의 실상을 통해 ‘관료의 부실경영’을 평가하면서는 소련 경제가 계획경제라기보다는 ‘관료적 지령경제’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공장들이 조정되지 않고 발전이 일치되지 않아 가격의 발작적인 등락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개별 공장 간 물물교환 협정을 알선해주는 중개인 집단마저 출현했기 때문이다. 클리프의 말마따나 소련의 관료지배와 경영의 자유재량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이론화하는 부분에 가서 정작 클리프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소련에서 기업들 간의 관계는 얼핏 보면 전통적 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업 간 관계와 다를 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렇다. … 소련에서는 개별 기업과 경제 전체가 모두 계획적 생산 규제를 따라야 한다. (클리프, 앞의 책, p.223)”

그러나 실제로 소련 경제는 중앙집권적인 통제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공장 체제가 아니었으며, 굳이 세계시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상이한 생산단위들 간의 관계는 애초에 클리프가 실증하였듯이 다수자본의 경쟁관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느슨하였다. 이는 소련 내부의 생산부문이 가치법칙에 기초한 상품․화폐 관계로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경제학자 베뜰렝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련에서-옮긴이) 사회적 자본은 통일된 모습을 띠지만(이는 주로 계획 체제와 국가 소유의 법률적 형태가 조장하는 환상이다), 현실에서는 사회적 자본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복수의 경제 단위들로 분할되어 있다. 사회적 자본의 파편화가 국가적(혹은 집단적) 소유의 외피 하에서 전개된다. … 개별 기업은 단지 ‘단일한 국가트러스트’의 단위들(혹은 거대 국영공장의 ‘작업장’)이 아니다. … ‘당 자본주의’(party capitalism)는 사회적 자본이 파편화되는 특수한 방식이다. … 소련 경제에서 자본들 간의 경쟁은 분리된 생산단위들과 상업의 존재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단위들은 실제로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있는 기업장들의 관할 하에 놓여 있다. … 투자와 생산 및 혁신과 관련된 모든 결정이 중앙에 의해 ‘지령’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결정의 대다수는 기업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성진, 「소련 사회의 성격: 마르크스주의적 설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2006, p.188에서 재인용)

 

소련 경제를 세계시장과 관련지어 살펴본다 해도 클리프의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클리프는 자본주의에서 군비증강의 실질적인 이유를 간과하고 있다. 클리프는 1930년대 소련의 대외무역 규모가 저조했던 것을 이유로 세계시장에서 소련에 강제되었던 경쟁이 상품경쟁보다는 군비경쟁의 형태를 취했다고 하면서 군비경쟁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앞뒤가 뒤바뀐 주장이다.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군사경쟁은 부르주아들의 이윤창출과 자본축적을 둘러싼 경쟁의 연장인 까닭이다. 물론 자본주의 세계질서에서 정치군사적인 갈등과 경쟁이 경제적인 사안만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절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군비경쟁 역시 일국사회주의로 합리화한 자신의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유지하며 급속히 추진된 중공업의 확대와 맞물려 군수산업을 통해 이윤창출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국제경쟁이 주로 군사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소련에서 가치법칙은 자신의 대립물, 즉 사용가치의 추구로 나타난다는 클리프의 분석은 다양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클리프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특히 전시경제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이미 밝힌 것처럼 전시경제에서도 가치법칙은 관철되었고 사용가치가 생산의 목적으로 사회질서 전반을 규정할 수는 없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사회학자 퓌레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가치법칙에 훨씬 종속되었다. 영국 지배계급이 잘 알듯이, 영국은 그들의 무기를 공짜로 얻지 않았다. 가치법칙의 원칙은 영국이 미국에 진 부채를 충당하기 위해 팔아야 하는 중요한 해외 자산의 상실을 통해 영국 자체에 가장 고통스런 부담을 주었다.”(마르셀 판 데르 린던, 앞의 책, p.320에서 재인용))

그럼에도 클리프가 소련 경제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모종의 사용가치 생산을 지향한다고 한다면, 이는 소련의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앞서 소련 사회가 세계시장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가치법칙이 부재하다는 것과 맞물려 세계시장 속에서 가치법칙이 관철되더라도 적어도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형태보다는 진일보한 사회로 여기게끔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련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소련과 관련한 자본주의 경제공황에 대한 판단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클리프는 자본주의 공황론 중 불비례설에 입각해 국가자본주의가 공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적 설명이다. 부하린은 “각종 생산 분야의 생산물들에 대한 수요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수요, 즉 자본가와 노동자의 수요도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 경제에서 일반적 과잉생산 공황 따위는 있을 수 없”고 “특별히 급속한 생산발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클리프, 앞의 책, p.246에서 재인용)

둘째, 러시아 경제학자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이다.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사회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한(생산력이 이것을 충분히 받쳐 준다면), 사회적 생산이 균등하게 배분되면 이에 따라 수요도 증가할 것”이며, 관건은 생산수단 부문과 소비재 부문 사이의 비례성으로 이것만 유지되면 “사회적 소비가 감소하더라도 과잉생산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 앞의 책, p.247, 249에서 재인용) 이에 대해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따라서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은 세계자본주의와 비교해서 후진적이고 생산수단이 부족해서 경제의 주된 요구가 기계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기계 생산인 경우의 국가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기계 생산이 국가자본주의 경제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면, 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과잉생산에 봉착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 경제는 사실상 정체하리라는 부하린의 대답이 그것이다." (클리프, 앞의 책, pp.251~252)

 

결국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에서 공황은 그 사회의 발전수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클리프의 규정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극한’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공황에 관한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을 살펴보면서는 이것이 후진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국가자본주의가 사회경제적인 발전수준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기준과 잣대는 더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그런데 클리프에 따르면 소련은 부하린과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을 따르지 않더라도 공황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군비경쟁에 따라 ‘전쟁경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경제의 실상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경기순환과 경제공황은 소련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는 소련의 경제성장이 1970년대 이후 사실상 정체되고 1980년대에는 구조적인 난국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그 시기만을 특정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소련 사회에서 경제공황은 과잉축적에 의해 야기된 부족공황이라는 도착된 형태로 주기적으로 발생해왔다.

예를 들어 베뜰렝은 소련 경제에서 공황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속적인 공업화가 종료된 후 소련의 경제발전은 순환적이었다. … 소련에서 경기순환은 다음과 같은 계기적 국면들로 이루어진다: 가속적 팽창 및 투자-호황-경기둔화(혹은 정지)-불황-새로운 가속적 성장 국면으로의 이행. 경기순환은 축적률이 증대되었다가 감소하고 다시 증가하는 시기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경기순환은 과잉축적 경향에 근거하며, 이는 다시 기업 경영자들의 자립적 의사결정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이들이 계획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기 확장을 목적으로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전반적 경제균형을 위해 요청되는 수준 혹은 현실적으로 이용 가능한 수준을 초과하여 배치하기 때문이다. … 과잉축적 경향이 과도하게 되면 금융 및 은행 당국이 투자 고삐를 조인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부분적인 제약이 과잉투자와 성장에 부과된다. 그러나 가장 현저한 부족 현상이 제거되면 통제가 이완되고 새로운 경기순환의 상승국면이 다시 시작된다.”(정성진, 앞의 책, pp.193~194에서 재인용) 이른바 중앙의 계획은 소련의 경제전반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③ : 이론의 수정과 국가자본주의론의 일반화


소련 사회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지녔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클리프의 이론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클리프를 따르자면 소련 사회의 성격은 분명 자본주의이지만 가치법칙이 부재하거나 그 규정을 받더라도 생산의 목적이 사용가치의 추구로 나타나며 경제공황도 부재한 사회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SWP 안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특히 소련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존재를 놓고 내부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임금노동과 자본 간의 관계는 서로를 전제하고 제약한다는 점에서 임금노동 없이는 자본주의를 말할 수는 없는 만큼 논쟁이 지닌 의미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클리프는 소련 사회가 일국차원에서는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상품화도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클리프는 “소련에는 상품의 필요조건들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력”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고용주가 한 명 밖에 없다면 ‘주인 바꾸기’는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파는 일’도 단지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 앞의 책, p.227, 228) 이것은 맑스가 제기하는 임금노동의 전제조건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자, 소련 사회에서 직접생산자들이 겉으로는 등가교환이지만 사실은 부등가 교환으로 잉여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클리프는 세계시장을 고려하면서 소련 국가는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는 자본주의 기업 소유주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말하지만 노동력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 SWP 당원인 피터 빈즈와 마이크 헤인스는 관료적 집산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놓았다. 이는 클리프의 이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소련 사회의 유일한 고용주는 국가라는 클리프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SWP의 다른 당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맑스주의 이론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빈즈와 헤인스는 물론 클리프의 이론까지 정면으로 비판했다. 캘리니코스는 클리프의 주장대로라면 소련의 노동자는 경제외적 강제를 받는 노예나 농노에 더 가깝게 된다고 반박하며, 소련의 노동자는 단일한 공장이 아니라 상이한 생산 활동들이 접합된 국민경제 체제에 속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사이에서 실질적인 차이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우리가 소련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소련에서도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업들은 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며, 자기 기업에서 일하도록 설득하려고 온갖 종류의 불법 상여금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의 선택 폭은 상당히 넓다. 그들은 특정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이 점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소련 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할 권리나 그 밖의 민주적 자유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칠레나 남한의 노동자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소련에서 사실상 완전고용이 존재한다(비록 중국과 유고슬라비아 같은 다른 국가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지만)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산업예비군 개념은 실업자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제3세계가 서방 자본주의를 위한 값싼 노동력의 저수지 역할을 했던(특히 서방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던 1950년대와 1960년대) 것처럼, 유럽러시아의 농업 인구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초기의 50년 동안 비슷한 구실을 했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소련>, p.402)


그 결과 1980년대 SWP 내부 논쟁 이후 클리프의 이론은 중대한 수정을 겪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비해 소련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던 클리프의 이론은 이제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클리프가 구분했던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차이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의 적용을 소련과 이와 유사한 사회체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더 확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가운데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주도 양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체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크리스 하먼은 “전체 경제가 국가 통제로 나아가는 경향은 스탈린주의에 특유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걸쳐 발생하고 있는 경향이었다(하먼, 「폭풍이 인다」,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이원영 편역, 갈무리, 1995, p.89)”고 말하였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 개념의 과도한 일반화는 소련 사회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소련 자본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모두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지니고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발전해온 양상마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중국,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국가들은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블록에 속해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그 발전과정에서는 소련과 또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국가의 개입 여부를 잣대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을 동일하게 국가자본주의로 한데 뒤섞는 것은 클리프의 이론과 비교해 일종의 역편향이라 할 수 있다.


즉, 클리프가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를 사적자본주의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놓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필수적인 한 단계로 일반화한 것과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소련에서 나타난 매우 독특한 사회형태들마저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관료가 맑스주의를 왜곡하며 스탈린주의와 그 변종이론들을 국가통치이데올로기로 삼고 자본주의 발전이 낙후된 지역에서 자본축적을 강제한 것은 분명 소련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4. 나가며


 

오늘날 소련 사회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입장은 과거에 비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 규정일 것이다.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아무도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이점이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여전히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클리프의 이론에서처럼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대단히 일반화되어 적용되고 있다. 때문에 소련 사회를 자본주의로 규정한다고 했을 때, 이와 함께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붕괴되고 변질되어 갔던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과 구체적인 판단이다. 노동자대중의 집단적인 힘과 열정이 어떻게 소진되어 갔고 결국은 해체되었는지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소련 사회를 단순히 국가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일변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사회를 그것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이론적 규명에 머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련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으로써 지금의 대중운동에서 새로운 정치적 전망과 새로운 권력을 향한 그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자리매김해야 한다. 오히려 소련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로 또는 노동자국가의 변종으로 파악하는 퇴행적이고 낡은 이데올로기야말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그 가능성을 제약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직접 목격하며 누구보다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또한 이를 냉철하게 검토하며 독일의 노동계급을 각성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이 걸었던 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러시아 혁명 사례에 대한 존경과 매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 사례만이 독일 대중의 숙명적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일은 독일 사민당의 후견적인 정신 아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그 일은 ‘최고위원회’나 ‘러시아의 사례’와 같은 완전무결한 권위에 의해서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아울러 혁명적인 열기를 창출해내는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즉,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일은 우려되는 모든 심각한 사태 및 그것과 연관된 과제에 포함된 복합성을 통찰할 때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성숙과 정신적 자립의 결과로써, 또한 대중의 비판적 판단능력 - 대중의 비판적 판단능력은 수십 년 동안 사민당에 의해 여러 가지 구실로 조직적으로 압살되어 왔다. - 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역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독일 노동계급에게 생기는 것이다. 제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독일과 국제 노동계급이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상의 훈련방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혁명」, <로자룩셈부르크주의>, 편집부 옮김, 풀무질, 2002, p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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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쟁점] 다시 ‘소련’을 말하다 ①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김성렬 (사노신 독자회원)


* 작년 노동자대회 때 발행된 <붉은 글씨>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온라인 상 가독성을 위해 각주를 삭제하거나 본문에 포함시켰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게 혁명이란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요. 혁명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어리석죠?”
“어리석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우리 -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죠….”
- 예브게니 자마찐, <우리들> 중에서

 


1. ‘상실의 시대’ 그 이후



소련은 무엇이었는가? 소련은 어떤 사회였는가? 역사의 무대에서 소련이 사라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규정에 따르자면 소련의 붕괴는 이른바 ‘단기(短期) 20세기’의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부터 사실상 시작된 지난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이후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만큼 10월 혁명에서의 승리와 환희를 뒤로 하고 후퇴와 변질의 역사적 단절을 통해 등장한 소련 역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

때문에 지구 영토의 1/6을 점한 그것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린 소련의 붕괴가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역사의 종언’을 운운하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앞에 대부분의 좌파세력은 무기력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인 실수로 매도당했고,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며 매장당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회주의를 향한 전망과 정치는 역사의 오류를 답습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소위 ‘상실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충족이 아닌 이윤추구의 경쟁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색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우익세력이나 사회주의의 실현불가능성을 외치는 자유주의 세력 모두 일반화된 상품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속수무책이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어 생산과 소비 역시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사슬에서 어느 한 쪽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위기는 발생하고 늘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IMF 경제위기’로 기억되는 지난 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미국 등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은 수출호조로 일시적인 극복이 가능했지만 현재 가중되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다. 때문에 중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출하고 미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글로벌 불균형’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른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올 정도로 세계경제는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스스로 붕괴된다거나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여태껏 경험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대공황을 비롯해 자본주의 체제가 그간 겪었던 수많은 경제위기의 역사가 예증해준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국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때 이른 낙관도 성급한 비관도 아닌 점차 확산되고 있는 대중의 자각과 정치적 각성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11년은 유럽과 미국,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맞서 대중의 직접행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과 역동성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성찰로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고, 남한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과 목마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만큼 과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역시 더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세기 동안 존재했고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과 판단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급의 폐절로 집약되는 사회주의는 오직 ‘지나간 미래’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불편한 진실’은 결코 우회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이하 <소련>)가 남한에서 1993년에 이어 2011년에 재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지난 1993년 당시 <소련>이 출간되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이야 지금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소련>이 맑스주의 운동에서 고전으로서 지닌 역사적인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서 소련 문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고민하는 데 있어 여전히 그 방향을 설정하는 시금석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소련을 말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2. 1917년 10월 혁명 : 과연 혼돈의 기원인가



소련 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대한 재검토부터 필요할 듯하다. 사실 10월 혁명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로 삼을 만큼 오래된 쟁점이다. 역사 속에서 10월 혁명은 레닌의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열정과 행동으로 권력 장악에 성공했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고 압도적인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탓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혁명의 성격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체제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준다는 점에서 10월 혁명과 소련 사회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소련 사회를 놓고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규정한다면 10월 혁명과의 연관성은 한층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러시아는 왜 그토록 빠르게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는가? 그렇다면 10월 혁명은 처음부터 세계사에서 일탈해버린 잘못된 행동이거나 기껏해야 부르주아 혁명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소련 사회에 대해 살펴보기도 전에 숙명적인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태적인 사고로는 1917년 당시 10월 혁명의 본모습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10월 혁명과 세계 혁명

19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제국주의 세계질서는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인식되었다. 자본주의의 자유경쟁과 달리 독점자본이라는 거대한 힘과 국가라는 거대한 힘이 서로 유착된 제국주의 열강들이 출현했고, 이들 사이의 알력과 갈등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 국제적인 정치경쟁은 이윤 극대화에 혈안이 된 경제경쟁의 양상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세계전쟁으로 전례 없이 유럽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곧 전유럽은 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 광란에 의한 대량살육이라는 비극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의 깊은 수렁은 불과 1년도 채 안 되어 대중의 의식을 애국적 열정에서 변모시켰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각성된 대중은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빵’을 공공연하게 직접 요구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1915년 이후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혁명적 정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반동적인 차르체제의 러시아에서 최대의 혁명적 정세가 성숙하리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혁명 전략과 관련된 레닌의 구상은 과거 1905년의 러시아 혁명 때와 비교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1905년 혁명기에 레닌은 러시아에 있어 부르주아 혁명을 제기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농민의 지지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외적 조건에 좌우되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 주장했다.

이 같은 시각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이어졌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과제가 여전히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증대하는 위기가 서로 결부되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만큼 이 결합이 직접적임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을 관철시킨다는 것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이제 서구 사회주의 혁명의 서곡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분한 구성부분이 된 것이다. (레닌, 「러시아의 패배와 혁명적 위기」, <사회주의와 전쟁 外>, 오영진 옮김, 두레, 1989, pp.211~212)”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엇보다 1918년 당시 세계 제2의 산업대국이자 유럽 최강국이던 독일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자 세계혁명은 더 이상 헛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것으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10월 혁명은 세계혁명이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이제 겨우 첫 전투에서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나라에 있어 혁명의 발전과 지원, 그리고 각성을 위하여 러시아라는 일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술은 당시 유일한 국제주의적인 전술로 입증되었다.

이런 까닭에 10월 혁명은 애초부터 러시아의 일국혁명이 아닌 세계혁명이란 전망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이중권력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혁명보다는 더 나아갔지만 아직 노동계급과 빈농의 순수한 독재에는 도달하지 못한 과도적인 국면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중권력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해야 했고, 우선 대중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화부터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의 고통에 놓인 수많은 대중들의 당면한 요구를 즉각 해결하기 위한 각종 혁명적 민주주의의 방책들이 시급하게 실행되어야 했다.

예컨대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러시아 부르주아 권력의 반동적 관료주의에 맞서 혁명적 노동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민주주의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⑴모든 은행들의 단일 은행으로 합병, 그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 또는 은행들의 국유화 ⑵신디케이트들, 곧 가장 대규모의 독점적 자본주의적 기업연합들(설탕, 석유, 석탄, 철 및 강철 그리고 그밖의 신디케이트들)의 국유화 ⑶상업적 영업비밀의 철폐 ⑷생산업자들, 상인들 및 고용주들의 강제적인 신디케이트화(즉, 강제적 연합체로의 합병) ⑸소비자 조합으로의 주민의 강제적 조직화, 또는 그러한 조직의 장려, 그리고 조직 통제 행사”(레닌, 「임박한 파국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레닌의 세계사회주의 혁명이론>, 淺原正基, 한유승 옮김, 다락방, 1990, p.347)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러시아에서 직접적인 사회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과거 1980년대 남한의 PD 강령과 그 방침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민중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하고 이를 정식화 했지만 그것은 10월 혁명의 의미를 단순히 일국혁명의 차원으로 협소하게 재단한 결과 나타난 이론적, 실천적 왜곡이었다. 오히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이후 1921년까지 계속된 세계혁명의 시기에서 그 출발점이자 구성부분으로 보아야 하며 세계혁명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다. 일국적 잣대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으로 제한될 수 없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물론 사회주의의 완성은 바로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보증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좌절된 세계 혁명, 포위된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의 혁명적 정세는 분명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요구했다. 세계혁명의 붉은 물결은 유럽 곳곳에서 넘실거렸다. 그러나 1921년 3월을 기점으로 세계혁명의 고조되던 분위기는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볼쉐비끼당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사민주의에서 분화한 유럽 공산당들의 경우 대중의 자생적인 파업과 가두투쟁을 넘어서서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기 위한 임무를 사려 깊게 수행할 능력은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이 곧 드러났다. 특히 세계혁명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독일혁명에서 독일 공산당이 보여준 좌충우돌과 반복되는 오류는 혁명적 정세를 유실시키기 일쑤였다.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성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노동자권력 하에서 이제 막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로 들어섰고 또한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볼셰비키 그 누구도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와 지원 없이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기를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에 속했다.

이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대공업적 팽창은 더 이상 소규모의 고립분산적인 지역적 시장이 아니라 서로가 연결되고 통합된 세계시장을 창출해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혁명도 그 자체로 세계혁명이고 또한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일국에서 노동계급이 권력 장악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세계혁명으로 확산되지 않고 고립된다면 필연적으로 반혁명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국민국가 단위로 노동자권력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러한 사회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궁핍이 일반화되어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등 지극히 퇴행적인 형태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이 겪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혁명의 잇따른 패배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현실적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 세계혁명을 표방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계적인 생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들에서 혁명의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전에 이미 대공업의 주요 부문과 은행, 무역 등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고, 전쟁 동안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와 집중화가 강화된 유럽에서 정작 기대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은 무위에 그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포위된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자신의 모든 노력과 전쟁 이후 유럽이 경험한 사회적, 정치적 동요에 불구하고 그들이 고립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결코 달갑지 않는 현실에 마주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차츰 ‘정상 체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물론 1914년 이전처럼 팽창하는 시장과 자유무역으로 대표되는 전지구적 경제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와 달리 일국적 자본주의가 규준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지배질서마저 위협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혁명의 고립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정권의 장기적 전망과 그 방향은 아직 미결의 상태로 열려 있었다. 레닌은 전쟁 이후의 국제관계를 일종의 ‘계급간 휴전상태’로 판단하며 식민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나뉜 서구 제국주의 열강간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피억압 민중들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터져 나올 또 한 번의 ‘군사적 대결’을 전망하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혁명을 지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몰두했다.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여전히 세계혁명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혁명과 괴물의 탄생


분명한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장기적으로 지연될수록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한가운데서 언제까지나 온전히 존속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이후 러시아 혁명의 비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 체제의 등장을 놓고 그 원인을 불발된 세계혁명만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혁명의 실패가 곧 10월 혁명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로의 변질을 자동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단선적인 도식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반혁명 중에서도 역사상 유례없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국가관료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을 강제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소련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를 가능하게 한 내적 원인에 대한 규명 역시 필요로 한다.

실제로 1921년 무렵 러시아 혁명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다. 1918~1920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볼셰비키 정권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지만 10월 혁명을 만든 계급의 기껏해야 잔영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끔찍한 경제위기와 공장폐쇄 속에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어 갔고,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대중의 자연적 지도자로 부상한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과 볼셰비키들은 내전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탈계급화 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내전 중에 강요된 식량 징발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다수를 점점 더 볼셰비키 정권에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 정권은 내전기의 처참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강제된 ‘국유화의 가속화와 국가통제의 강화’를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 즉 계급이나 국가가 없는 사회주의를 위한 당장의 실행조치로 혼동하며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던 전시공산주의(1921년 3월 신경제정책이 채택된 이후 그해 4월 레닌은 소책자 「식량세론」에서 처음으로 전시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인용부호로 묶어 사용했다. 이 용어는 한때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보그다노프의 개념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전쟁 중 서구 여러 나라에서 등장한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대체로 군대란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코뮌이며 전쟁의 영향으로 생산과 분배에 대한 국가통제가 확립됨에 따라 전시․소비공산주의가 군대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보그다노프는 전시공산주의가 계급투쟁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에 서구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 또한 부정하였다.)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시적 후퇴로써 정책적 방향을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변함없이 중시된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였다. 이는 탈계급화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수의 소부르주아 농민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다음번의 세계혁명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네프 시기 농민에게 경제적 이익추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불가피했고 또한 필요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문제는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기초한 소비에트 권력 그 자체가 내전이라는 반혁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대단히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나날이 강화되어 가는 국가권력과는 대조적으로 혁명의 활력은 급속도로 퇴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오직 자신을 방어하고 세계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가를 이용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계급과 국가권력의 사멸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내전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중앙집권화되고 군사화된 볼셰비키당의 등장이었다. 국가방위와 권력유지를 명분으로 한 군사적인 방법들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지녀야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당과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운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곧 인민에 대한 전면적인 강제의 일상화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발성의 위축을 가져오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권과 대중 사이의 이러한 균열 양상은 네프 도입 이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네프 초기 가장 주된 쟁점은 자본주의로의 후퇴와 양보의 한계였으며(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로의 급격한 전환을 주도했던 레닌은 후퇴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현실이 가르쳐 줄 것이라 공언했지만 네프의 시작과 더불어 투기가 만연해지고 당 안팎에서 부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는 후퇴의 중단을 외치며 당 대열의 재정비를 요구했다. 실제로 네프 시기 자본주의로의 퇴행은 사회경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자유로운 물품교환의 욕구는 너무나 필사적인 것이어서 일단 어떤 상거래가 합법화되자(1921년 3월)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져 모든 제약을 쓸어버릴 정도였다. … 사적 상인들은 점차 거의 모든 종류의 상거래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 사회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폐를 폐지하자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국영공업과 국영상업은 경제적 혹은 상업적 회계(khozraschyot, 독립채산제) 위에서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윤을 남기고 손실을 피하는 것이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김남섭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8, pp.94~98)) 상당한 위험이 내재해 있었던 만큼 당의 결속은 더욱 더 강조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전시공산주의 시기와는 다르게 노동의 탈(脫)군사화가 추진되었음에도 정치적 독점을 확고히 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위계질서와 군대화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형성이 금지되고 1921년 후반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된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1918년 초부터 우려했고 생애 마지막까지 싸워야 했던 관료주의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국가 형태는 그들과는 괴리되어 있는, 곧 국가와 결합된 당의 독재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 결과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두고 이른바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네프 시기 국가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볼셰비키 정권이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집단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와 그들의 굳건한 계급의식이었다. 노동자대중은 반혁명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해야 했지만, 그러한 국가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내전을 경과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심지어 소멸되어 가는 상황에서 혁명의 물결은 급속히 그 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압도적 다수의 독재가 아니라 단호한 소수의 독재로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1920년대 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볼셰비키당의 독재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당의 일각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으며 1923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노동계급의 독재를 볼셰비키당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테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레닌 역시 내전 때 국가와 당의 관계가 바뀌자 그 이전과는 다르게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볼셰비키당원들이 곧 국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대체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당의 독재를 관료주의의 독재로 대체한 것에 대해 주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10월 혁명의 이듬해인 1918년부터 발발된 내전과 그 후과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고려는 매우 중요하다. 소련 사회에서 발생한 혁명의 변질과 퇴락, 즉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에서 부르주아 계급 국가로의 전환을 놓고 대개 스탈린주의의 궤적을 따라 1937년(대숙청)이나 1928년(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 1927년(좌익반대파의 패배와 트로츠키의 축출)을 짚거나, 혹은 그 이전인 1921년(크론슈타트 반란 진압과 네프의 도입)에 주목하는 등 두드러진 연도와 관련해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 대중의 혁명운동에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퇴조하게 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경직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내전 시기가 미친 전사회적인 영향력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셰비키 정권이 곧바로 권력을 포기했다면 볼셰비키당은 제국주의 열강들과 결합된 부르주아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적 야당은 고사하고 철저하게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세계혁명의 좌절과 내전을 거치면서 본격화된 볼셰비키 정권과 노동자대중 사이의 균열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화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결국은 세계혁명의 꼬리표마저 떼어내고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만을 영속적으로 주장했을 때, 그 귀결은 일국사회주의로 치장된 또 다른 반혁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볼셰비키 정권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를 행사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누적적인 과정들을 주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는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빅토르 세르주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르주는 10월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대중의 혁명참여가 퇴조한 것이 1918년 말부터였다고 파악한다. 이 책의 원제가 ‘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등장한 코뮌국가가 불과 1년여 만에 당 독재의 국가로 전환되었다며 내전을 비롯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누적적인 역사적 과정들에 주목했다. 그럼에도 세르주는 내전 기간 내내 볼셰비키 정권을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며 그 생존을 위해 앞장섰는데, 이는 사회경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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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벼랑 끝에 선 투사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3/05/23 19:42
  • 수정일
    2013/05/23 19:4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진 않은가
 



(* 이 기사는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편집자])

 

박근혜의 당선으로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소위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박근혜 당선 이후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최강서 열사이운남 열사,윤주형 열사 
 

처지와 조건은 다르지만 최근 목숨을 끊은 동지들은 대부분 기나긴 투쟁을 하고 있던 해고노동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조직노동운동과 현장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박근혜 정권의 등장이 주는 실망감이 생명을 끊는 절망감의 원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투쟁이 빚어내는 인간관계의 파괴와 고립감도 그러한 선택에 일조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곁에 있던 동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회한을 남긴다하지만 이것이 개인적인 회한에 그쳐서는 안 된다이런 상황을 만든 운동문화와 구조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그러지 않고서는 끝없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계속되는 장기투쟁


지난 수년간 노동운동의 특징은 비정규직과 해고자 중심의 장기투쟁이 투쟁전선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수 백 일 동안 계속된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들과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었다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수백 일을 훌쩍 넘는 장기투쟁은 이제 일반적인 일이 되고 있다백일 정도 투쟁한 정도로는 장기투쟁이라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한국 노동운동 역사는 노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였다박정희 정권 이후 노동법은 집단적노사관계법의 개악을 통해 노동조합의 건설을 어렵게 만드는 대신 개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근로기준법을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식으로 설계되었다그러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외침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이 법제도적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군사정권의 통제 속에 현장에서는 작업장을 군대처럼 운영하는 병영통제가 횡횡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폭발하자 정권과 자본은 뒤늦게 노동운동을 포섭하려 했다그러나 이미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트렌드는 이미 합의와 포섭보다는 노동을 파편화하고 배제시키는 신자유주의로 기울고 있었다. YS정권의 노동법 개악 시도는 결국 신자유주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시도였으며결국 87년의 거대한 집단적 기억을 잊지 않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다조직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은 정권을 무력화시켰고 정권 교체를 불러왔다하지만 97년 총파업 이후 이어진 자유주의 정권의 십년 집권은 시민운동을 제도화함으로써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체제내로 흡수하고 노동운동을 고립시켰다.
 

IMF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 속에서 1998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를 통해 민주노총 합법화·노조의 정치참여 보장·복수노조 도입 등 조직노동운동의 제도적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수정과 근로자파견제·정리해고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이 도입되는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을 바꾸는 합의를 해주었다이는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의 증가를 합의하는 신자유주의 코포라티즘의 변형된 형태였다.
 

98~2000년 구조조정 공세 속에 노동운동은 다른 사회계층으로부터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 채 패배했다자유주의 정권 십년 동안 노동자 투쟁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노동유연화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비정규직의 증가를 맞바꾸는 협약은 구조조정이 휩쓸고 지나간 단사 현장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대공장노조들은 정규직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비정규직 증가를 합의했고이는 노동운동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갈라놓았다.

구조조정 이후 급속한 경기회복은 금속대공장과 공공사업장 조직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빠르게 회복시켰다사회양극화 속에서 조직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지위는 상승했다구조조정 이후 자본은 대규모 작업장의 정규직노동자들에게 고용과 안정적인 임금인상을 보장하고 산업평화의 안전판 역할을 하게한 대신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높은 이윤을 확보했다.
 

이 속에서 지난 십 년 동안 민주노조 운동의 양축을 이루었던 금속대공장과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 상당수가 어용노조로 넘어갔다그러나 어용으로 넘어가지 않은 사업장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00년대를 경과하며 작업장에서 어용 대 민주노조의 전선구도는 붕괴했다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태도는 어용이든 민주노조진영이든 다르지 않았다형식적으로 진행하던 임단협 파업마저 2000년대 중반부터 자취를 감추고 무분규 타결이 관례화되기 시작했다금속대공장과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노동운동은 구조조정 분쇄 투쟁 이후 사실상 투쟁전선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생존권이 악화된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들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이에 대해 자유주의 정권들은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극악한 탄압으로 일관했다김대중 정권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 역시 마찬가지였다노무현은 초기에 반짝 유화적 노동정책을 쓰는 제스처를 펼치다가 반년도 안 돼 탄압으로 돌아섰다비정규직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노무현의 말은 이 시기 건설된 무수한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탄압과 파괴로 나타났고 현장에 안착한 노조는 별로 없었다많은 노조들이 장기투쟁으로 내몰렸다.
 

장기투쟁의 양상은 다 비슷하다투쟁에 나섰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별로 많지 않다대개 농성장을 설치하고 복직투쟁에 들어간다정당한 노조활동혹은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는 복직요구로 좁아진다하지만 자본은 현장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의 요구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초기에는 상급단체에서 몇 번 형식적인 집회를 박아주기도 하지만 오래되면 그것도 없다길거리 투쟁이 수십 일에서 수백 일 계속된다대다수의 조합원들은 투쟁에서 이탈하고 소수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이어진다성과가 없기 때문에 투쟁을 접기도 어렵다그래서 투쟁은 한없이 길어진다.
 

87년 이후 최초로 이전 정권보다 보수적인 정권의 집권이었던 MB시대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따라서 지난15년간 금속과 공공 등 조직노동운동 핵심부위의 형식적인 투쟁을 빼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탄압이 계속되어 왔다하지만 탄압받는 노동자투쟁에 대해서 조직노동운동의 태도는 방관과 무시였다.
 

이는 대규모 사업장 자신에 대한 공격에도 마찬가지였다. 98~99년 구조조정 공격에 대한 대공장노조들의 투쟁은 적어도 처음에는 전공장 파업의 성격을 띠었다그러나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에서 애초부터 전공장 투쟁의 조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해고자들의 명단이 확정될 때까지 투쟁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결국 해고자 명단이 나오자 해고당사자들 중심의 싸움이 되었다해고자들이 밀려난 현장은 어용노조에 의해 장악되었고해고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다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거리로 내몰렸다해고가 되고 나서야 노동자는 하나가 되어 투쟁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졌다.


심화되는 갈등과 무너진 의사결정 구조
 

2001년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260일을 넘겼을 때 모두가 놀랐다. 2002년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이 500일을 넘겼을 때는 더더욱 놀랐다그러나 기록 갱신은 계속되었다기륭전자 노동자들은 1895일을 투쟁했다현재진행형인 재능교육교사노조의 투쟁은 1900일을 넘기고 있다.


오랫동안 조직노동운동의 상징은 주먹을 불끈 쥔 투사의 얼굴이었다이는 금속대공장의 남성노동자를 전형화한 것으로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상징한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한다는 구호들무척 귀에 익은 말이었다우리 운동은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굳건한 철의 노동자가 될 것을 요구해왔다하지만 아무리 강철로 만들어진 투사라 해도 수 년 동안 계속되는 투쟁에는 장사가 있을 리 없다무한정 길어지는 투쟁은 노조체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내부의 인간관계도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올해 목숨을 끊은 활동가들 중에는 소위 현장이전을 한 의식적인 활동가도 있었다현장투신은 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였으며 200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2000년대 초 의식적인 활동가들은 대개 취업이 비교적 용이한 대공장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그렇게 현장에 들어간 이들은 커다란 개인적 희생과 헌신을 통해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의 기반을 만드는데 일조했다하지만 지금 그런 동지들 중에 현장에 남아있는 동지는 별로 없다.거의 대부분 해고되었다.


장기투쟁에서 끝까지 남아 노동자들 중에는 이런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많다이들은 높은 정치의식과 헌신성으로 열악한 해고생활을 감내하며 투쟁전선이 유지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그런데 이런 동지들마저 절망감에 목숨을 끊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운동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투쟁주체들 사이에는 생계 등 물적 조건이 부족함에도 당위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강제하다가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 많다운동에 대한 긍지가 높은 의식적인 활동가들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자신들의 물적·심적 조건에 대한 고려보다는 이른바 운동적 전통과 원칙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주도성을 쥐게 되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특성상 누가 투쟁을 더 헌신적으로 더 원칙적으로 더 전투적으로 했냐가 정당성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운동에서 이탈하거나 전술적으로 후퇴하는 동지들을 보고 너무나 쉽게 나약함에서 기인한 기회주의로 낙인을 찍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왔다과장된 투사성을 운동의 이상형으로 삼아 나약함을 죄악시하는 문화는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다힘들어도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 없고투쟁일수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극한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내부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노조체계가 파괴되면서 갈등을 해결할 의사결정 장치가 무력화되고 있다는 점이다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수백 수천이라면 별다른 논란 없이 다수결 같은 민주주의 기제들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전술에 대한 견해에 이견이 나타날 경우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선동하고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이미 투쟁 주체들이 명 단위로 소수화 된 투쟁에서는 그런 기제들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전술상 갈등이 개인들 사이의 문제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전술에 대한 이견은 흔히 활동가들 사이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대립으로 발전한다그 속에서 오랜 기간 열악한 상황에서 쌓여온 사소한 마찰과 갈등들이 극대화되며 소통은 중지되고 불신이 쌓이게 된다기존의 의사결정 장치들은 작동을 중단하고 개별인자들 간의 고립과 갈등이 심화된다.


장기투쟁에 뒤따르는 생활고와 스트레스에 이런 갈등적인 문화가 주는 고립감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절망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이런 문화가 극단적인 선택의 주원인은 아니라 해도 아예 무관하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주체와 연대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의 책임을 나누어야


노동운동이 위기를 넘어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새로운 운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그러나 새로운 운동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존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아니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그 무엇보다 우리 운동에 소중한 자신이다하지만 이들이 살아서 투쟁하며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관성에 얽매인 운동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여러 가지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과거의 운동에서 주체와 연대의 경계는 선명했다. 90년대 후반 민주노총 주류가 소위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론을 들고 나와 사회개혁투쟁 노선을 제기했을 때전투적 노동투사들은 이를 비판하며 현장권력 쟁취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현장중심 전술현장사안을 통한 노동자들의 직접투쟁을 옹호했다그들은 연대는 있으면 좋지만 부차적인 것 뿐 기본적으로 현장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요구를 쟁취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과연 지난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주체는 누구고 연대는 누구였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금속노조나 한진중공업지회가 과연 이 투쟁의 주체였는가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연대대오였는가이 투쟁의 주체였는가이처럼 최근의 투쟁들에서 주체와 연대의 위치가 때로는 뒤바뀌기도 하며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물론 이것이 기존 노동운동 체계가 몰락하면서 나타나는 양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운동방식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직노동운동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희망버스 운동 이후 흔히 사회적 연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87년 이후 점진적으로 체제로 흡수되었던 민주주의 운동은 보수 정권의 등장과 함께 촛불투쟁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대중투쟁으로 등장했다일부의 냉소적인 평가와 달리 촛불이 열어 놓은 의식은 투쟁하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는 미약하나마 장기투쟁 사업장에 대한 연대와 희망버스 운동으로 이어졌다.


회적 연대는 과거 연대운동이 단체들이나 학생들이 주축이던 것과 달리 다양한 배경의 노동하는 개인들로 확대되고 있다연대방식 역시 다양해지고 있으며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스레 주체와 연대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실제로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모든 전술이 연대단위들과 공유되고 공동으로 결정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중요한 고비에서 주체들이 연대단위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연대단위들 역시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투쟁주체에게만 모든 짐을 떠맡기지 말고 보다 의식적으로 주체와 연대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의 책임과 의무를 분담할 필요가 있다.이는 이미 의미를 잃고 박제화 되고 있는 노조질서의 절차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함께 투쟁하는 자들의 민주주의로 우리의 사고를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 노동운동의 가장 훌륭한 전통으로 꼽힌 총회민주주의는 교섭권 위임 같은 관료적 절차를 인정하지 않는 투쟁하는 자들의 직접 민주주의였다물론 그것은 당시 대공장의 기업별노조라는 형태를 띠었지만지금에 있어 투쟁하는 주체는 더 이상 노조내지는 노동운동이라는 틀로 한정될 수 없다오래 전에 투쟁의 장애물이 된 조직 노동운동의 관료적 질서보다 연대하고 투쟁하는 자들을 진정한 주체로 보아야 한다투쟁은 이미 더 이상 소위 주체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특히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된 시대에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볼 때도 더욱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총회민주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주체와 연대가 모두 함께 하는 대중총회 같은 방식의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구조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이를 위해서는 이제 주체는 연대를 대상화하지 말아야 하고연대도 스스로를 연대라는 이름으로 침묵하거나 주변화하지 말고 주체로 나서야 한다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새로운 투쟁주체로 성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서 투쟁하기 위해


지금까지 장기투쟁의 목적은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당연한 목적이다그러나 활동가들에게 있어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활동가들의 현장복직의 의지는 생계문제만이 아니다돌아가서 운동을 하기 위해서이다돌아가서 현장의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현장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대개의 경우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알던 그 현장이 아닌 경우가 많다이제 현장복직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투쟁을 그것을 향한 지난하고 힘든 과정으로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이 투쟁을 통해 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운동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민주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새로운 투쟁의 형태를 만들어나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투쟁의 힘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여러 투쟁사업장에서 가열 찬 투쟁 뿐 아니라 그 이전까지는 잘 몰랐던 다양한 분야의 투쟁하는 사람들과 문화일꾼들과 교류하고 함께 즐기는 보다 풍부한 투쟁문화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런 투쟁 분위기 속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자신들을 현장의 벽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연대와 지원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꿋꿋하게 전선을 지켜온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성과다이제 앞으로는 또 다시 수백 일을 투쟁해서 그런 지원을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네트워크를 확대시켜 보다 생존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조건 속에서 투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강철로 생각하는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오랜 투쟁으로 상처 입은 투사들을 트라우마 운운하며 금치산자로 몰아가기보다모두가 주체가 되어 그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그들의 심신이 얻은 상처를 치유할 시간과 여유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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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장기투쟁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과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3/05/23 19:37
  • 수정일
    2013/05/23 19:3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투사들에게도 힐링이 필요해



(* 이 기사는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편집자])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나 해고노동자들은 투쟁이 길어짐에 따라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주체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하면서 투쟁의 전망을 계속 잡아나가야 하는데 싸움이 진행될수록 주관적객관적 상황이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사측이나 공권력과 대치하며 항상 긴장상태에 있어야 하고 각종 징계나 고소고발·가압류벌금과 구속·수배 등의 위협에 시달린다모든 일상이 투쟁일정으로 꽉차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여유를 가지기 힘들다신분보장기금 등 노조나 산별연맹의 제도적인 지원금이 없다면 생계문제도 닥친다.


이러한 다양한 압박은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서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투쟁력과 조직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준다이로부터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이나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충돌하거나 관계가 단절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투사에게도 힐링이 필요해


그러나 지금까지의 운동문화 속에는 투쟁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마땅히 감내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싸움을 그만두거나 쉬고 싶은 마음을 주위 동지들에게 표현하는 것은 나약한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고 강고한 투쟁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때문에 자신이 겪는 문제들을 표출하지 못한 채 쌓이다가 운동을 그만두거나 돌파구를 찾기 위한 극단적인 선도투쟁을 선택하고 투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언젠가부터 투쟁이 시작되면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만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더욱 커졌다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개인에게 맡겨둘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투쟁하는 기계도 아니다체력과 감정을 소모하면 쉼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2011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심리치유센터 <와락>이 개소했다. <와락>을 전후로 오랫동안 투쟁하거나 자본과 공권력의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게 심리적·정서적·의료 지원을 하기 위한 단위들이 생기고 있다유성기업지회 노동자 등 용역깡패에게 시달렸던 노동자들과 가족들 역시 이러한 프로그램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노동자의품>, <인드라망 공동체>, 조계종 노동위원회에서 운영하는<템플스테이등이 투쟁하는 노동자 및 저항하는 다양한 주체들을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를 넓히고 있다.


작은 연대들이 모인다

한편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단위도 있다과거에도 투쟁사업장에 투쟁연대기금을 모아주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일회성에 그쳤다면 최근에 나타나는 움직임은 일상적이고 생활에 좀 더 밀착된 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다. <진보마켓>의 경우 물건을 사면서 적립되는 금액을 소비자가 지정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나 가족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현대차 아산 성희롱 피해자 농성장이나 대한문 쌍용자동차 농성장에 정기적으로 음식을 제공한 밥셔틀’, 집회현장에 등장하는 진보신당 밥차’ 등이 그것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후원회원들의 회비를 모아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는 투쟁하는 현장에 찾아오는 것과 함께 그들의 삶을 나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물적 지원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문화연대>, 조직인 아닌 개인들이 모여 투쟁현장에 연대하는 <작은연대>도 있다.


 

지난 3월29일 해고자의 날을 맞아 열린 
<해고에 맞선 투쟁의 역사와 전망> 토론회

 

 

지원 프로그램의 네트워크 형성이 시급해


자발적 혹은 단체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고 있지만 여기에도 아쉬움은 있다우선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모아지는 관심도 수도권 투쟁사업장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때문에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민주노총 등의 산별연맹 차원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고립되기 일쑤이다.

또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과 단체들의 활동이 서로 연계되지 않거나 개별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막상 참여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별로주제별로 어떠한 단체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지 정보를 구축하고 연계시켜줄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이러한 체계를 전국적으로 형성하고 투쟁사업장과 소통할 수 있는 인력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당장 어느 곳에서 이러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지는 정할 수 없지만 총연맹이 실질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체계와 계획이 부족한 상황에서 네트워크를 어디서 어떻게 총괄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운동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우선해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투쟁하는 것도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투쟁이 길어져도 절망하거나 피폐해지지 않고 숨을 고르며 전망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서로에게 보다 전투적인 모습을 요구하며 더욱 수위 높고 치밀한 일정만 기획한다면 결국 지치고 말 것이다.

단시간에 승부가 나는 싸움이 아니라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주변의 장치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재정적·정서적 지원은 이러한 방향에서 사고해야 한다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딱하고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투쟁하는 동안 다치지 않고 투쟁이 일단락 된 이후에 후유증을 줄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준비이다.

지원 프로그램이 접근하기도 쉬워야 하지만 투쟁하는 주체나 활동가들 역시 투사에게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필요 없다는 거부감이나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만이 휴식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오해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투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돌아보고 자본을 타격하는 만큼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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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공장노조운동의 조합주의 늪에 빠져버린 야간노동 철폐, 주간2교대제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3/05/23 19:24
  • 수정일
    2013/05/23 19:28
  • 글쓴이
    사노신-1
  • 응답 RSS

대공장 주간2교대 투쟁전선의 그늘
 




(* 이 기사는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편집자])

 

필자| 이상욱 (기아 활동가)


2013년 3월 4일부터 기아자동차에서는 주간2교대가 전면 시행되었다. 8+9 형태로 시작하여 2016년 8+8완성을 목표로 야심차게 출발한 주간2교대가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기아자동차 주간2교대의 실상을 보면서 과연 주간2교대 요구가 많은 노동자들의 고된 야간노동을 대변하는 모습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정규직 현장


노사 양측 모두 역사적이며 획기적인 사업이라고 자축했다이런 노조의 모습에 현장활동가그룹들은 비판적인 홍보물을 발행하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임금하락노동강도강화에 따른 인원충원과 설비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지적사항의 대부분이다그러나 실제 현장을 들여다보면 정규직 현장조합원들은 그게 반발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있다이유를 찾아보면이미 물량=임금이라는 자본의 등식논리에 휩싸여 노조집행부 조차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만큼의 줄어드는 생산총량을 유지하겠다는 협상기조였다.

UPH UP
으로 늘어난 노동강도를 보상하기 위한 신규인원 충원 요구는 노조집행부가 협상조차하지 않았다공장별로 상황이 각기 다르다는 이유에서 였다인원충원협상은 각 부서 현장 대의원들에게 맡겨져 분산되었다결국 신규인원충원 요구는 쟁점화 되지 않았다임금하락을 우려했던 비판도 힘을 잃었다. 4월 29일 정기상여월급봉투를 받아본 정규직조합원들은 몇몇 수당의 통상급전환 효과로 몇 십만 원 늘어난 보너스에 만족해하는 눈치들이였다임금 중에서 특근에 대한 할증률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정규직 현장에서 향후 별다른 저항의 요소는 발견하기 힘들 것 같다.


외곽지대


주간2교대가 되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기에 아침을 집에서 먹기란 불가능하다공장밥을 먹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 배식 줄은 식당 밖까지 늘어선다그런데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노동자들은 도대체 몇 시에 출근을 해야 할까식당노동자들은 새벽 2시에는 일어나 4시까지 출근해서 6시 배식을 준비한다주간2교대 시행 전에는 쉬는 시간 달콤한 쪽잠을 청했던 그 시간에 출근하고 일해야 하는 힘든 처지가 되었다얼마 전 힘든 상황에 못 견뎌 식당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었고 현재 주간2교대 시행 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식당노동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은 보통 새벽 4시반정도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5시 반에 출근버스에 오른다대중교통이 없는 새벽에 출근버스를 타러 나오는 것도 문제다그런데 출근버스를 운행하는 버스기사노동자들에겐 야간노동 없애자고 시작한 주간2교대 때문에 오히려 고된 야간노동이 생기고 말았다.
 

주간2교대제 시행은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주변에 있는 납품업체 노동자들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그 전에도 공장 정문 앞엔 납품업체 부품 트럭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지만 주간2교대 시행 후 그 숫자가 큰 폭으로 늘어났다그 전에는 주야2교대에 맞추어 함께 야간을 하면서 야간에 납품을 하면 되었지만 새벽2시부터 7시 사이 텅 빈 공장에 납품할 수는 없는 일이다그래서 7시 공장이 가동되기 전에 라인에 납품이 밀리지 않도록 대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그러면 이들 부품회사 노동자들에게 야간노동에 따른 수당이 지급되는가정확히는 알 수는 없지만 노조가 변변치 않은 부품업체에서 교대제 변화에 따른 추가 노동에 대해 추가 임금을 지급할리 없을 거라는 예상은 쉽게 가능하다.
 

이처럼 주간2교대 시행 후 몇몇 사건들만 살펴보아도 주간2교대가 기아자동차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거꾸로정규직노동자들의 주간2교대를 위해 식당노동자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하며 몇 시간 일찍 출근하고버스기사나 납품업체 노동자에게는 없던 야간을 보상도 못 받으며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았다금속노조나 주간2교대를 준비해왔던 사람들은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란 걸 애초에 알고 있었다금속노조는 부품업체 노조를 모아서 몇 차례의 회의도 진행했다금속노조의 인식은 어떻게든 현대기아자동차에서 주간2교대를 시작하고 보자는 거였다대공장 정규직노조를 제외하고 주간2교대가 시행되면서 주변부의 비정규직사내하청부품사노동자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문제는 정말 핵심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시행 후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현대기아차 정규직 노조집행부나 현장 활동가들은 임금하락을 벌충하기 위한 특근할증률을 비롯해 버스승강장부족간식 및 식사 실 개선주차공간 부족과 총무성 같은 문제점들에 초점을 맞추고 사측과 대립을 하고 있다정규직 노조와 현장조직들은 시행된 주간2교대가 부족하다고 한목소리를 내지만 정작 시행에 따라 임금이 삭감되고 노동강도가 증폭되며없던 야간노동이 생기는 부당함을 당하는 사내하청주변 부품사노동자들의 문제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4월 29일 현대차 울산공장의 정규직 조합원들 천여 명이 공장 곳곳에서그리고 노조사무실 앞에서 연좌하며 자발적인 비공인 파업을 벌였다그들은 노동조합집행부와 사측이 합의한 특근 할증률과 운영방식에 대해서 주간2교대 시행 전과 비교하여 불이익이 발생하는 것에 반발했다현장 조합원 대중들이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주간2교대 시행에 따른 공장 안팎의 노동자들 전체의 희생을 대변하려는 고려가 있었다면 좋았을 일이다그러나 여전히 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의 요구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저항의 불씨가 유지되고 확산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규직만의 주간2교대

 

국회에서 공휴일이 주휴일과 겹치는 월요일을 휴일로 하는 대체휴일에 대해 한창 논란이 있었다결국 자본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는 일당직파견노동자들도 냉소적이기는 마찬가지 이었다대체휴일 이야기는 월급 꽤나 받는 정규직들 이야기라는 인식이었다가뜩이나 저임금에3일도 못 쉬어 가며 일하는 우리들에게 꿈같은 얘기라는 것이다그리고 결국 힘 있는 노동자들은 대체휴일에 일하고 특근 처리되어 임금 상승되는데 우리들은 그것도 쉽지 않은 얘기라며 힘 있는 사람들만 더 좋아지는 남일 같은 거라고 얘기한다주간2교대가 그 꼴 아닌가 싶다금속노조와 현대기아차가 추진해온 주간2교대를 바라보는 사내하청일용직파견노동자들과 주변 지역의 부품노동자들은 그림에 떡인 거였다.피해나 안보면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이 있는데 애초에 주간2교대제가 전체노동자들의 요구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그것은 더 이상 많은 노동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현대기아차와 같은 금속노조의 대공장노조 중심의 투쟁이 자기 조합원들만정규직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합주의에 깊숙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야간노동의 문제를 계급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관료적인 접근을 한 것이 원인이다주간2교대제를 수년 동안 준비한 금속노조 상층과 현대기아차 집행부는 주간2교대제를 먼저 시행하고 나면 전체로 파급될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그러나 대공장에서 전체로 파급될 것이라는 망상은 노동운동에 한 치의 전진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썩어가는 대공장 조합주의 운동의 모습만 드러내고 말았다주변으로 내몰리고 희생을 강요당한 많은 노동자들에게 배신감과 자괴감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그리고 우연치 않게 터져 나온 식당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저항과 같은 작은 희망조차 희생을 강요하면서 무력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모습마저 보인 것이 바로 남한의 대공장 노조 운동의 현실이다.
 

안타깝지만 대공장노조 주변에 위치한 노동자들고용이 불안한 임시 일용직 노동자들부품사 노동자들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다사내하청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고용은 워낙 불안해 지역의 실업자 군으로 돌아가기 일쑤로 드나듦이 심하다파견노동자들이 정규직혹은 1차하청의 가족들이 일하는 경우도 많다함께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조직되면 좋겠지만 거꾸로 관리자들의 친인척이라면 이야기는 정반대의 상황이다.현대모비스를 제외하고는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수는 영세한 수준으로 노조 활동이 안정적인 곳이 거의 없다그나마 유성기업과 같은 금속노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중급 노조도 그동안 이명박 정부의 탄압정책으로 많이 파괴되었다이처럼 대공장노조 주변에 있는 열악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만나기란 쉽지 않다.결국 장기적인 계획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공장 담벼락을 넘나드는 투쟁


그러면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에는 장기적인 계획이 있는가여전히 15만 조합원 중 12만을 차지하는 현대,기아차를 중심으로 놓고 주간2교대를 준비하고 시행했다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도 미지수다.
 

금속노조가 이럴 때 공공부문에서 의미 있는 조직화 모습을 볼 수 있다여전히 한계는 있지만 과거 KT노조지하철노조발전노조 등과 같은 큰 사업장노조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점차 지역 노동자들불안정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다그 결과 학교비정규직노동자콜서비스센타비정규직노동자간병인노동자대형마트비정규직노동자 등 그동안 노동운동의 주변에서 차별받아왔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새로운 조직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주간2교대 시행을 큰 업적인 냥 떠들고 있는 금속노조와 대공장노조 집행부여전히 그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단지 노동운동의 대의나 원칙이 아닌주변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더 많은 노동자에게 피해와 희생을 강요하며 쟁취한 성과로 생색을 내서는 안 된다대공장노조 운동이 처해있는 사회적 고립은 자본이 의도한 측면도 있지만 대공장노조운동 스스로 선택했던 것도 분명히 있다그 고립을 타파하고 조합주의 늪에서 빠져나와 사내비정규직노동자지역과 전국의 노동자와 함께 야간노동 철폐를 외치고 대안을 모색할 때 지지 받으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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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회주의자도 반제국주의자도 아니었던 우고 차베스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3/05/23 18:51
  • 수정일
    2013/05/23 18:52
  • 글쓴이
    사노신-1
  • 응답 RSS




* 이글은 www.leftcom.org에 ant라는 필명의 필자가 쓴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기사는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편집자]

 

2013 3월 5일 우고 차베스가 사망했다. 차베스는 1999년 2월에서 2013년 3월까지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었다. 그의 장기집권은 네 차례의 선거에서 확고한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결과였다. 차베스의 주요 지지층이 베네수엘라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며 집권기간 동안 이들의 생활조건이 개선됐다는 데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절망적인 극빈자들이 23%에서 9%로 감소했다.)
 

신자유주의적 우파들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논평들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애롭고 사회적 관심이 많은 인민의 대변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언론들이 미디어 독점이나 무모한 베네수엘라의 부채 부담 증가를 가지고 차베스를 비난할 때, 우리는 그냥 웃어넘기면 된다. 서구사회에는 베를루스코니와 머독이 독점한 수많은 미디어가 존재한다. 베네수엘라의 부채 부담은 2008년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G20 강대국들보다 여전히 훨씬 적다. 자본주의의 공공연한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반박해야 할 것은 훨씬 더 위험한 신화이다. 차베스와 ‘차비스모(Chavismo)’가 진정한 사회주의를 대표한다는 널리 퍼져있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좌파들 및 스탈린주의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위대한 혁명의 불빛이 꺼져버렸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의 이상은 변치 않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전세계의 가장 훌륭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진정으로 봉사했다.” 영국공산당(맑스-레닌주의)


2006년 영국 잡지 <새로운 정치인 (New Statesman)>이 실시한 “우리 시대의 영웅” 순위투표에서 차베스는 11위로 뽑혔다. 차베스는 19세기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지배에 맞선 반란 지도자 볼리바르가 자신의 “사회주의”에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볼리바르가 자본주의를 지지한 백인우월주의자(노예제도를 반대하긴 했지만)였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멘토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몇몇 좌파들의 핵심 논조는 여전하다. 억눌린 민중의 편에 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차베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사회주의' 브랜드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 권위자들이 전 세계 미디어에 쏟아내고 있는 차베스에 대한 찬사는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와 차베스의 관계는 복잡한 것이었다. 1996년 5월, 차베스는 아구스틴 블랑코 노즈(Agustín Blanco Muñoz)와 인터뷰에서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지만 맑스주의에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지만, 반공주의자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차베스는 많은 맑스주의 이론가들의 저작을 읽었고, 맑스주의 문헌에 정통했으며, 종종 이를 공개적으로 인용하기도 했다. 여러 국제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차베스 정부를 “맑스주의 이론"이 예측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지했다. 2010년 차베스는 맑스주의자 “레온 트로츠키”의 “사상”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차베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호세 라몬 리베로(전 노동부 장관)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내게 ‘대통령님, 다른 사람이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저는 트로츠키주의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음, 뭐가 문제란 말이요? 나도 트로츠키주의자요! 나는 영속혁명이라는 트로츠키의 노선을 따르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차베스는 맑스와 레닌을 인용했다.” (위키피디아)


베네수엘라 노동자계급의 상당수가 차베스를 신자유주의 우파라는 이미 알고 있는 악보다 나은 대안으로 보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2년 4월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백만 명 이상이 차베스를 지지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고 쿠데타는 곧 진압되었다. 차베스가 많은 베네수엘라 인들의 생활조건을 향상시켰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이렇게 썼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차베스는 1997년부터 2011년 사이에 빈곤층(moderate poverty)를 54%에서 31%로, 극빈층을 23%에서 9%로 감소시켰다. 차베스는 문맹 비율을 극적으로 감소시켰으며, 빈민가와 노동자거주구역에 진료소를 설치하고, 식료품할인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 가운데 어느 것도 차베스에 대한 과장된 수사들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가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주지 않을뿐더러 “반(反)제국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해주지도 않는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일정 수준의 복지와 국가개입, 국유화가 더해진 것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물 타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지배계급에 종속된 상태를 유지시키는데 일조할 뿐이다. 소위 맑스주의자들의 다수가 여전히 굳게 믿고 있는 것과 달리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더욱 계급의식적인 노동자의 운동이 상승하는 것을 가로 막는 방파제일 뿐이다. 또한 (포퓰리즘적인 볼리바리즘과 결코 조화될 수 없는)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이며 직접 민주주의적인 형식을 통해 노동자 스스로 경제의 직접 통제에 찬성하여 기존 국가를 전복하는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폐절할 명확한 강령을 가진 정치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그 방책들은 탐욕스럽고 위기에 시달리는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계급이 더 심각한 불행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절대적으로 취해야 할 정치적 방향이다.
 

평론가들은 베네수엘라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회지원프로그램이 개선되고, 대다수 빈곤층에 있어 문맹률, 보건, 주거, 소득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미(對美)수출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석유 수입에 경제의 90%를 의존하는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기초는 여전히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차베스가 권력을 잡았을 당시보다 더욱 굳건해졌다. 차베스 치하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 빈곤층 비율은 여전히 라틴아메리카 평균 이상이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의 추정치를 인용하는 이안 제임스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정부가 ”운영하는“ 경제부문의 비중은 차베스가 1998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와 동일하다. "민간 부문은 여전히 베네수엘라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G.W. 부시를 당나귀나 악마라고 욕하는 것과 같은 겉보기에 급진적인 발언들과 쇼맨십, 대중들이 의사 결정과정에 어느 정도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게 하는 참여 민주주의 실험 이면에서 차베스와 그의 볼리바르 혁명은 자본주의 유지라는 전 세계 지배 엘리트가 정치적 쇼를 통해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어냈다.
 

석유 매장량과 유리한 시장가격의 도움으로 베네수엘라는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치적 안정을 살 수 있었다. 또한 모든 자본주의의 특징인 복지와 국가의 경제 개입의 다면적인 변종에서 볼 수 있듯이, 베네수엘라 노동계급의 (체제)위협은 민족주의, 포퓰리즘, 부패의 뒤범벅인 사이비 혁명 이데올로기, 대중에게 일정한 생활조건의 개선을 허용하는 경제 성장의 속도에 의해 지금까지 억압되어왔다.
 

그러나 세계적 규모의 강렬한 경제 위기라는 새로운 현실은 베네수엘라라고 해서 아무 상처 없이 남겨두지 않았다. 현재 베네수엘라 인플레이션은 25%이며 실업률은 8%에 이른다. 차베스가 집권했을 당시보다 부채는 열배 이상이다. 기본 식품은 부족하고 카라카스는 세계에서 살인사건이 가장 많이 벌어지는 도시이다. 차베스가 이끄는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의 당파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인 재앙에 영속적인 대안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노동계급을 진정시킬 수 있는 일시적인 유리한 조건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았을 뿐이다. 
 

카라카소와 "볼리바르 사회주의"의 의미
 

착취자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차베스 시대를 있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카라카소는 억압만으로 충분히 기존 질서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배 엘리트의 일부에 경종을 울렸다. 카라카소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와 인근 도시들에서 1989년 2월 27일에서 발생한 시위, 폭동, 약탈의 물결과 뒤따른 학살​​에 붙여진 이름이다. 충돌의 결과, 일부 보도에 따르면 3000명에 이르는 수 백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그 희생의 대부분은 보안부대에 의한 것이었다.
 

카라카소는 정치 사회적 불안정의 시대의 막을 열었다. 그 다음 해 2월, 유사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푸에르토 라 크루즈와 바르셀로나에 군대가 투입되었다. 6월, 마라카이보와 다른 도시들에서 운송비 인상으로 인한 불만이 봉기로 터져 나왔을 때에도 다시 군대가 투입되었다. 이것이 차베스가 권력을 잡게 되는 맥락이었다. 그는 1992년 2월에 벌어진, 수 년 동안 준비되었고,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실패한 쿠데타의 지도자였다. 이것은 차베스를 절박한 사람들에게 도둑정치의 적으로 알려지도록 만들었고, 결국은 투표함을 통한 권력인수로 이끌었다. 그러나 카라카소가 사람들을 수십 년 간 가혹한 억압과 수치 속에 살도록 만든 구질서에 대한 가장 기초적 형태의 계급적 거부에 기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만약 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게 지속적 위협이 되며 체제를 무덤 속에 파묻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깨어나고 있는 거인을 직접적으로 억누를 수 없다면 그들은 다른 전략을 필요로 할 것이다. 차베스와 그의 이데올로기적 꼼수들은 증가하는 사회운동의 목소리를 안전한 범위로 포섭하기 도구였다.
 

그래서 우리는 차베스가 "혁명적 사회주의"라고 위장하려 한 프랑켄슈타인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규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맑스에 의해 구상된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위에서 아래로 포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수백만 노동자의 자기 활동에 의해 건설될 수밖에 없다. 유난히 학대받아온 베네수엘라의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를 위해 초보적인 방식으로나마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이야말로 볼리바르 혁명이 정부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코미시온”이라 불리는 민주적 협동체(co-ordinations)와 여타 대중동원 기관들보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이 높다.

지배 그룹에 의해 정해진 문제들에 대해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것은 나폴레옹 이래로 모든 포퓰리즘 정권의 전가의 보도였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자권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노동계급의 권력 하에서 사람들은 지배 엘리트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 단순히 “네”, “아니오”로 대답할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차베스가 하층계급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했든 간에 이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베네수엘라에서의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한 간접적 지출이었을 뿐이다. 차베스는 노동계급의 진정한 자기조직화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남미 지역 및 베네수엘라 국내의 부르주아들에게 지극히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차베스는 미국의 달착륙을 부정하고, 아이티에 큰 피해를 준 지진의 원인국으로 미국을 지목하고,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입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하는 등 모욕적 언사와 극적인 규탄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베네수엘라 석유의 일등 소비국이다.


반제투사 차베스?
 

이는 다른 어느 특징보다 차베스가 조지 갤러웨이나 켄 리빙스턴 등 자본주의의 좌익적 지지자들 전반의 사랑을 받게 한 차베스 수사학의 한 가지 특징으로 이어진다. 그 특징이란 바로 차베스가 자주 표방하는 “반제국주의”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사기이다. 차베스는 반제가 아니라 반미를 했을 뿐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 민족주의자의 긴 행렬에 속해 있다. 여기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반공주의, 에두아르도 치바스(Eduardo Chibás)의 ‘정통파(Ortodoxo)’의 일원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쿠바의 카스트로도 포함된다. 카스트로는 1959년 1월 권력을 잡자마자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협상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정부가 자신의 정부에 제재를 부과하는 것을 명확히 했을 때에야 민족주의자 카스트로는 1961년 갑자기 "맑스-레닌주의"를 발견했다. 그때까지 미국은 쿠바에 대한 침공 정책(예를 들어 피그스 만 사건)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카스트로의 "맑스-레닌주의"로 전향은 소련이 쿠바의 제국주의적 후견인 자리를 인수했다는 신호였다. 카스트로는 설탕 단일 재배에의 의존성을 끝내겠다고 맹세하며 권좌에 올랐지만, 카스트로가 수확 전체를 소련에 판매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더욱 증가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 위성국가들에게 설탕을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따라서 쿠바는 “반제”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하나의 제국주의를 다른 제국주의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 후 25년 동안 수백 명의 쿠바 젊은이들이 앙골라 둥지에서 벌어진 소련의 대리전쟁들에서 목숨을 잃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쿠바 역시 거의 붕괴될 뻔하였고, 이후 국가개방을 통한 관광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 결과 혁명 이전의 좋지 않은 사회 특성들이 여럿 복구되었다.) 1998년 차베스가 집권해서 쿠바가 의사들을 보내주는 대가로 값싼 석유를 제공하자 카스트로 정권을 구제를 받았다. 현재 공식적으로 4만 명의 쿠바인들이 베네수엘라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는 의학 분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차베스가 선택하고 쿠바가 승인한 후계자 마두로는 G2라고 불리는 쿠바 정보기관이 베네수엘라에서 자신을 대리하여 활동하도록 하고 있다. 두 국가는 지역에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형성하려는 의제를 공유했으며 차베스는 이러한 관계를 “베네쿠바”라고 불렀다. 심지어 이는 일정 정도 중국의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베네수엘라의 대중국 석유수출액의 1/3은 4250억 달러의 빚을 갚는데 쓰였다.
 

석유를 통한 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코레아와 같은 사회주의 계승자로 자임하는 동료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선거 지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뿐만 아니라 싼 값의 석유는 세계무대에서의 차베스의 입지를 세워주었다. 그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시리아의 아사드, 이란 등 모든 미국의 적들에게 지원을 제공하고, 중국과 밀접한 무역관계를 만들었다. 이 국가들 모두 현재 혹은 예전에 그들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미국 지배적인 세계질서에 반대된다. 이에 차베스는 그들을 지지했다. 이는 반제국주의가 아니라 단지 다른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의 표현일 뿐이다. “국민성을 부정”하는 노동계급은 어떠한 제국주의적 권력을 지지하는 데에도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진짜 혁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난 세기 스탈린주의와 사민주의에 의해 왜곡된 맑스주의라는 죽어가는 괴물의 사지 절단된 손발을 가져다가 서투르게 짜맞추어놓은 국가자본주의 기획에 불과하다. 증가하는 빈곤, 실업, 전쟁, 억압, 지구 환경 재해의 형태로 전 세계에서 점차 펼쳐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쇠락이라는 무서운 이야기에 직면하여 가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현실적인 지지와 신화를 뒤섞어놓은 차베스 식 짬뽕은 계속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착취를 가려주는 위선의 베일을 제공한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유일한 방어수단을 왜곡하는 것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 일반의 이해에 더 유해한 것은 없다.
 

인류 문명의 미래는 세계혁명을 현실적 전망으로 바라보고 있는 전 세계 노동계급에게 점점 더 의존하고 있다. 차비스모는 지배계급의 부와 노동계급의 박탈의 유래 없는 양극화를 지탱하는 많은 왜곡 중 하나일 뿐이다.
 

절충의 길은 없다.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계급제도를 끝장내는 것은 권력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서만 제기될 수 있다. 이는 현 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의회, 법원과 사법제도, 그것들을 규정하는 헌법질서, 현 제도 내에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에게 더 나은 거래조건만을 추구하는 정당들과 노조들과 단절을 의미한다. 매 4년이나 5년 또는 더 긴 주기마다 한 번씩 벌어지는, 통제되지 않는 대표를 선출하는 공허하고도 가식적인 행사 대신,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의 지표는 노동자들이 직접 민주주의에 기반한 그들 스스로의 투쟁 기구를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구들은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 속에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 혁명가들이 소환가능한 대표로 구성된 노동자평의회의 형태로 나타나는 노동계급의 온전한 권력을 지지할 때, 그것은 단지 이상주의적 꿈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자본이 그토록 왜곡하고 은폐하고 싶어 하는 과거 노동계급의 혁명적 활동으로부터 도출해낸 훌륭한 교훈이다.
 

파리꼬뮌 패배나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사례에서 역사는 노동계급이 그들만의 민주적인 자치를 해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의 자치는 현존하는 국가의 파괴를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는 자본가 계급의 양보에 의해 관료주의적 국가기구와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 통제”가 결합될 수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관점과는 상반된다. 베네수엘라의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허풍과는 달리 노동자통제는 유일하고 무제한적인 권력이다.
 

사회주의는 압도적인 다수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 국가의 칙령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로의 투쟁은 기나긴 싸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포퓰리즘을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 체제가 파산했다는 노동계급의 인식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혁명적 정치조직을 찾는 시도를 고무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은 자본주의 내 좌익의 거짓된 약속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강령을 마련할 것이다. 우리 ICT(국제주의적 공산주의 경향)는 이 과정에 일부분으로서 복무할 것을 목표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명확한 공산주의 강령에 입각한 전지구적 정치조직의 탄생이 될 것이다. 무엇을 쟁취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전망 없이는 노동계급은 공산주의를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잡을 수는 없으나, 혁명적 정치조직은 노동자 평의회 혹은 전세계 노동계급이 창조해낸 대중적 기구의 혁명적 독재를 온전히 옹호할 것이다. 2006년 우리가 차베스에 대한 논평에서 내린 결론은 아직 유효하다.


“이것이 전세계적 차원에서 ICT가 활동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 세계적 당은 스탈린주의적인 당이 아닐 것이며, 지역적 권력을 위한 기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역적 권력과 동일시되지 않는, 혁명을 위한 전 세계적 기구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이 성공한 지역의 계급대중 기구의 임무다. 그리고 우리가 말했듯이, 폭넓은 시야의 공산주의자들의 계급정당이라고 할지라도 정당이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이 임무를 해낼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을 위해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훌륭한 교훈 중 하나다. 동시에 혁명정당은 과거 노동자들의 경험을 종합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매순간 손상을 감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는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다. 혁명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손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해방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 여러 방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중에는 조합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인 양하는 국가자본주의와 같이 우리가 이 짧은 글에서 다룬 것들이 포함된다.”(leftcom.org)

 

원문 :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3-03-18/hugo-ch%C3%A1vez-neither-socialist-nor-anti-imperi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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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충돌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3/05/23 18:25
  • 수정일
    2013/05/23 18:2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이글은 국제적인 좌익공산주의 조직인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이 2월에 쓴 기사를 번역한 것으로,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기사를 번역해 주신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이형로 동지에게 감사드립니다. 번역 기사는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필자| ICC
번역|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년에 시작된 센카쿠 열도(열도는 대만의 북동쪽 약 200km, 일본 오키나와의 400km 남서쪽, 중국의 동쪽 대략 400km에 있다)를 둘러싼 분쟁은, 극동아시아 최대의 양국 간 적대적 야망과 긴장을 초래했다. 세계 최고의 인구를 갖고 있으면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지닌 중국, 그리고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 두 나라는 서로 이 제도(諸島)를 둘러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병력을 동원해왔다. 대만 또한 이 섬을 둘러싸고 일본과 충돌했다. 이것은 일본과 중국,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 있어서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이 양 거두(巨頭)뿐만 아니라 대만도 이 제도(諸島)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바위투성이로 거주 불가능한 땅임에도, 그 전략적 가치와 잠재적인 유전, 천연 가스원, 풍부한 어장의 존재가 이 제도의 영유권 주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 - 신흥 제국주의 대립


중국이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과 충돌하고 있는데, 이곳이 이웃 제국주의와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분쟁지대는 아니다. 최근의 경제 성장 이후, 중국은 점점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자국 선박 수송의 80%가 센카쿠 열도 주변을 통과한다. 아시아에 있어 어떤 해협의 봉쇄도 중국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게다가 중국은 본토를 넘어 바다 건너까지, 특히 남중국해(South-China-Sea)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주요 경쟁자인 인도와 직면하게 된 중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각각 전초 기지를 설치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의 공격을 무릅쓰고 이란과 시리아를 지원해 왔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경제발전을 바라는 한편 동시에 군사력 증강에 투자를 계속해 왔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미 중국이 아시아에서 최대의 경쟁자라 인식하고, 군사적 중점을 동아시아로 옮기는 것을 결정했다. 미국은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동아시아 지역에 배치할 예정이다. 

게다가, 증대하는 자원 수요, 특히 에너지 자원 수요는 중국의 남중국해에서의 자원 탐사 및 채취권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지금까지 남중국해에서의 대립과 이번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대립은, 중국이 엄청나게 자원을 갈망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 서열(계층)의 재편성에 나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지배적인 역할을 끝내고, 자국 영토를 넘은 지역에서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세력이 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 중국의 대립은 극동아시아에 있어 증대하는 제국주의 국가 간 긴장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본: 자기 야심에 집착하는 쇠약해진 제국주의


일본은 지금까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자신의 능력을 예전의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찾아내려 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이미 일본 자본은 대만, 동중국해 섬들 그리고 한국 침략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1894년 센카쿠 열도 점령의 역사적 정당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이 미 제국주의에 패배함에 따라 이 열도는 미국의 관리로 넘어갔지만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물론 일본은 이 땅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을 중국에 양도할 생각도 없고, 제국주의 서열을 바꿀 생각도 없다. 이 땅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일본은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갔다. 격렬한 폭격(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도쿄 다른 지역까지 공습) 후, 미국의 관리하에 놓였다. 일본은 외국에서의 충돌에 군사력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 헌법을 제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초 냉전 상황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대결 시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강요했다. 북한의 정기적인 일본, 미국, 한국에 대한 무력행사 협박과 중국의 증가한 힘 때문에, 일본은 스스로 모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의 의존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북한과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자국을 미국의 군사력의 아래 두고 싶은 것이다. 1989년 이래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약간의 행보를 시작했다. 자위대는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최초의 ‘해외파병’을 경험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 주도의 전쟁에서 병참 일부를 담당했다. 일본은 인도, 베트남과 함께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군사 행동에 참가했다. 앞서 일본은 지부티(아프리카 북동부 아덴만 기슭에 있는 국가의 수도)에서 최초의 군사기지를 설립했다. 이 자위대는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다. 중국군의 현대화와 확장은 일본에 군사력 투자를 한층 더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게 중국과 센카쿠 열도는 유일한 분쟁지역이 아니다. 일본은 한국과도, 일본이 1905년 한국으로부터 획득한 타케시마(독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두려워하고 있고, 장래 일어날 수 있는 남북한 통일을 더욱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일본은 중국 제국주의의 번창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은 이 지역에서 양대 제국으로서 대립해 왔다. 수년 동안 중국 대부분을 점령하고 수많은 국민을 학살한 처참한 전쟁을 감행한 일본에 대해, 중국의 지배계급은 항상 일본에 대한 복수의 애국주의적 감정을 이용했다. 이에 대해 일본 아베 내각은, 중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밝혔다.

일본, 중국 간의 긴장의 고조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양국과 그 동맹국이 대립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의 긴장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 아시아 양대 강국의 경쟁은 전 세계로 번지게 될 것이다!



민족주의적 견제에 머물지 않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

일부의 경우, 특히 2012년 가을, 중국의 일부 도시에서, 센카쿠 열도에서의 일본 군사력에 대해, 일본계 상점을 불태우거나, 일본계 기업의 공장을 공격하는 등의 항의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분명히 이러한 시위를 환영하고, 아마도 직접 조직까지 했을 것이다. 다른 정권과 같이 중국 정부도 경제 성장 문제, 환경 오염, 지배 세력의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당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폭동’의 회수는 지난 몇 년간 증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국수주의-애국주의의 틀로 왜곡시키고 있다. 일본과의 충돌은 사람들을 국가에 재결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중국은 지난 몇 년 동안 세련된 애국 선전을 젊은 세대의 머리에 주입해 왔다. 오랜 세월 불황에 고통받고, 후쿠시마 재해와 쓰나미의 참극에 직면한 일본 정부도 똑같이 사람들을 민족주의로 끌어들여, 국가 아래 단결시키고 싶어했다. 확실히 지배세력이 이러한 항의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지만, 이 대립을 단순히 경제, 사회, 환경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책략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대의 양국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충돌해,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이 분쟁에서 적과 아군을 정하는 과정에 들어가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긴장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로 퍼질 것이다.

양국 모두 서로의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앞서 말한 충돌 때문에 교역이 심각하게 감소했는데, 왜 지배자들은 ‘이성적’으로 민족주의 경향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원래 지배자들은 ‘이성적’인가? 사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불치병이다. 자본주의는 일개 국가의 힘보다 훨씬 강력하다. 자본주의는 평화적으로 경제 경쟁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류를 점점 야만스럽게 만드는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었다. 아시아는 이 시점에 아직 전장에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되어, 몇 천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베트남 전쟁에 앞선 한국 전쟁은, 1950년대 가장 처참한 대립의 하나였다. 소련의 붕괴와 미 제국주의의 쇠퇴에 따라, 중국 제국주의가 영향력을 얻어 아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의 중국의 경쟁자들(일본, 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은 중국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바라고 있다. 중국, 일본의 최근 충돌은 이 지역 전체로 확대되는 일련의 긴장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책에 따라 대량 학살에 대비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덤이다. 극복할 수 없는 경제위기, 끝없는 전쟁으로 가는 길, 배타주의,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지구환경 파괴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민족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다.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인류는 도태될 것이다. 20세기에만 2억 명이 끝없는 일련의 전쟁 때문에 살해되었다. 이 사회가 현재의 생산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우리를 야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계급이 각 나라의 사회운동에 보내야 할 메시지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참사에 대한 수많은 항의가 있었고, 경제위기의 참상에 대한 분노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믿기 어려운 끔찍한 착취와 무서운 환경오염에 대한 수많은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아랍의 봄, 스페인, 미국, 그리스, 방글라데시 등, 높은 실업률, 빈민화와 직장에서 증가하는 중압에 시달리는 노동자 계급이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 아래 단결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계급투쟁이 해결책이다. 우리는 이 위기와 야만을, ‘외국의 경쟁 상대’가 소유한 상점이나 공장을 불태우거나, 외국 경쟁사들의 상품 불매를 호소하거나 구매를 제한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계급 대 계급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슬로건은 언제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이다!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을 노동자 계급이 끝낼 수 있던 것은 이러한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한- 레닌,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와 주위의 혁명가들은 국제주의의 입장을 지켰다. 공장과 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을 고무시키고, 마침내 혁명적 봉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로 이끈 것은, 강고한 국제주의 입장이었다. 1937년의 중일 전쟁 당시 소규모 좌익 공산주의 그룹 <빌랑(Bilan)>의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켜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노동자를 학살하는 것이 목적인 탐욕스러운 지배적 부르주아가 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대학살을 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노동자들이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먼저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의 노동자와 잠시라도 함께 ‘싸우는’ 부르주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 제국주의는 어느 장소든지 확장하며 중국은 다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적 투쟁을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계급 단결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급투쟁에 돌아와야 한다. 그들의 동맹은, 착취자들에 대한 동시적 공격을 공고히 할 것이다. ( … ) 국제 공산주의 좌익분파만이 수많은 배신자, 기회주의자에 대항하여 혁명투쟁의 깃발을 높게 내걸 수 있다. 이러한 세력만이 아시아에서 아비규환을 가져온 제국주의 전쟁에서 착취자에 대한 노동자의 인민 전쟁 - 중국과 일본 노동자의 단결, ‘국가전쟁’의 전선 파괴, 국민당에 대한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동원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투쟁 - 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좌파 잡지 <빌랑 (Bilan)> 제44호, October 1937, p1415)


우리는 이러한 국제주의자의 전통을 이어 민족주의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연계를 놓고, 세계 곳곳에서 국제주의자들의 공통 입장을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이 창출되고 있다. 지배자들이 검열, 인터넷 검열, 탄압, 국경 폐쇄 등의 어떠한 수단을 이용한다 해도- 우리는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중국, 일본의 지배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를 민족주의 유혹에 빠트리려 하는 가운데, 우리는 확고한 우리의 대안- 계급투쟁- 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배자들 간에 매일 협박하고, 똑같이 전쟁 선전을 부추기는 북한과 한국의 노동자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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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정기토론회] 파시즘

박근혜는 파시즘인까? 일베는 파시즘일까?

5/3 금 저녁 7시 고려대 미디어관 411호에서 토론회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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