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 인터뷰 (3) : 원하청 공동투쟁체는 현중 새로운 주체형성의 맹아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5/01/28 16:04
  • 수정일
    2015/01/28 16:16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노동] 원하청 공동투쟁체는 현중 새로운 주체형성의 맹아

(1, 2편에 이어서)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보면 대공장 노조는 어용과 민주의 구분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다. 정규직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은 어떠하였고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여전히 비정규직 독자성의 현재적 의미를 설명해 달라.

정병모가 어용보다 더하다 하청노조 조합원들 중에 이러한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즉자적인 분노이고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어용과 민주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어용노조와 민주노조는 다르다. 오히려 민주노조인데도 조합주의를 극복하지 못 해서, 조합주의 틀 안에 갖혀 있는 경우라서,사고도 많이 치는 것이고, 비정규직 문제에 특히나 사고를 많이 쳤다. 그래서 현대미포조선에서는 노조가 어용노조이기 때문에 아주 대놓고 부결투쟁을 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부결투쟁을 하더라도 그렇게 부결투쟁을 하지 않는다. 대중적 선동을 할 때, 이 집행부가 회사의 똘마니라면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주파이기 때문에 회사로부터의 독립성, 자주성을 강조한다. 실천적 관계가 확 달라지는 것이다. 오히려 민주이지만 조합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게 문제의 본질이다.

젊은 현장실천단 동지들의 주장과 사업제안들이 무시당하거나 진압 당했다. 예를 들어 현장실천단이 집행부 선봉대의 역할이었으나 실천단 전체모임을 가진 것이 1222일이 처음이었다. 임단투 정리국면으로 갈 때 처음으로 현장실천단 전체 총회를 했던 것이다. 정리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설득이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방식이다. 아래로부터의 행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파업 과정에서부터 전체 총회 혹은 부서별 조합원 총회를 열어 투쟁을 상승시키기 위한 사업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총회 형태들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청노조와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는 결국에는 긴장관계일 수밖에 없다. 하청노조의 독자성은 하청노조의 생명이다. 독자성이 없다면, 광의의 자주성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규직 노조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현실 역관계 속에서 의존성이 커진다.

그래서 정규직 노조와의 관계를 보면 독자성을 확고히 가지면 긴장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정규직 노조는 힘이 있고 하청노조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 투쟁 과정 속에 내부 변수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청노조가 독자성을 갖는 경우, 정규직 노조에게는 외부적 변수가 되고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정규직 노조에 대한 의존성을 갖는 것은 하청 판 조합주의일 수 있다. 실리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힘이 센 정규직 노조에게 잘 보여서 따내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계급성이 거세되는 것이다. 정규직 노조에게 외교를 잘하면 알아서 떡고물이 떨어지는 것이니까.

하청노조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이유는,현실의 힘이 정규직 노조에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나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것과 실리를 통해 얻는 것은 계급적으로 명확히 다르기 때문이다. 계급으로 자각되고 계급으로 조직되는 것과 아닌 것. 그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계급적 수단이 하청노조 독자성이고 이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깃발에는 노동자는 하나다란 문구가 있다. 이것이 공문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노동자계급이라는 자각이 필요하고 계급적 이해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실리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조합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대공장 조합주의와의 투쟁, 노동조합관료주의와의 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하고 성장해온 노선이 비정규직 독자성이다. 조합주의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조직 하고 대중성과 계급성이 서로 긴장감을 갖는 것.긴장관계 속에서의 실천적 조화로움을 가져야 한다.  ​





 무엇보다 현대중공업에서 주체 구성의 문제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이에 대한 자기계획을 말해 달라.


정규직 선진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하청노조 조합원들을 계급적으로 구성하는 매개고리는 원하청 공동투쟁이고 이를 위한 공동투쟁체의 건설이라고 생각한다. 원하청 공동투쟁체가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급적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2014년 현대중공업 원하청 임단투가 이러한 과정을 밞아 왔다고 생각한다.​.


하청노조 싸움에 결합하는 현장실천단 동지들은 순수한 마음이 있고 싸울 때 싸워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원하청이 함께 싸워야 한다는 본능적인 계급적 자각이 있다. 해양사업부 같은 경우, 현장실천단 내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이 너무 쉽게 나온다. 해양에서는 정규직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원하청 공동투쟁체가 향후 새로운 대안적인 주체형성의 맹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하청 공동투쟁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와 함께 이데올로기 투쟁, 정치 교육의 문제가 중요하다. 학습하고 선전하라! 원하청 공동투쟁체가 정치선동 정치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원하청 공동투쟁의 경험과 공동투쟁체의 건설은 정규직 젊은 노동자들이 자기 운동의 정체성을 갖는 관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운동관이 되려면 정치선동과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작년 10월달 정당 정치조직 간담회가 있었다. 현대중공업에 제발 제 단위에서 정치적인 유인물을 보급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이러한 활동이 부단히 축적될 필요가 있다.


80년대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성장한 고참 활동가들은 막연한 노동해방의 기운도 있었지만 지금 남아있는 그 세대는 실패하고 파산한 조합주의자들이다. 비정규직 투쟁 과정에서 다 사고를 쳤다. 그 세대가 그대로 현장실천단 젊은 동지들을 가르치고 전수한다면 이 운동은 망하게 될 것이다. 이미 현장실천단 젊은 동지들은 선배들의 한계들에 대해서 느끼고 있다. 이들과 단절된 사회주의 정치와 노동자 민주주의 경험 속에서 성장한 자발성이 만나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필요하다. 이후의 전망은 현대중공업 내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갖는 원,하청 공동투쟁체가 구성되고 이들의 실천 속에서 지도력을 인정받는 시간이 올 것이다.이것은 대공장 운동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이다.
 


 현대중공업에서 새로운 주체의 구성과 관련해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갖는 원하청 공동투쟁과 공투체의 건설이 하나의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다. 대공장사내하청투쟁 과정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은 실천적으로 비정규직 독자성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파괴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기아차 11노조의 경험은 그 반동적인 모습의 예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중공업에서 제기되는 원하청 공동투쟁, 사회주의적 전망을 갖는 원하청 공동투쟁체의 건설은 자동차와 어떤 조건의 차이가 있고 또한 자동차에서 드러났던 반동적인 경험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주도하는 주체들의 지향의 문제가 크다. 11노조가 노동조합의 조직체계에 그대로 대응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주도하는 주체들의 정치적 전망이 핵심이다. 이것이 원하청 공동투쟁과 공투체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자동차 업종과 객관적인 조건의 차이가 있다. 조선사업장의 경우, 원하청 공동투쟁을 하지 않으면 조합주의도 하지 못하는 조건이다. 조선소는 라인이 아니고 정규직 자체가 3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는 정규직 조합원들이 1,700, 하청노동자는 15,000명이고 현대미포조선은 정규직 2,800, 하청노동자들은 10,000명이다. 하청노동자들 조직하지 않으면 답이 안나온다. 정규직 노조도 자본과 싸우려면 하청조직화, 원하청 공동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고 이것이 자동차와의 조건의 차이이고 이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원하청 공동투쟁과 공동파업의 경험 속에서 조선사업장 운동의 전망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공동파업을 위해서라도 파업위원회나 공장위원회의 조직적 전망을 가져야 하고 이 운동을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조건이다. 아래로부터 직접행동이 성장하면 할수록 정규직이나 하청노동자들 스스로가 자기 필요에 의해서라도 원하청 공동 파업위원회나 공장위원회를 요구할 것이다.


현대미포조선은 베트남에 비나신 조선소가 있다.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들은 경제 불황 이야기가 나오면 본능적으로 수주가 안되면 비나신 것 가져오면 되겠네, 이윤이 안되면 비나신 물량을 줄이면 되지라고 말한다. 젊은 하청노동자들의 입에서 툭툭 튀어 나온다. 계급관계에서도 이중적인 위치가 있다. 사내하청이지만 아제국주의의 국가에 있는 노동자로서의 위치도 있다. 이것을 자본이 의식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고, 정규직으로 가면 더 심하다. 정규직 어용집행부 때 회사와 함께 수주하러 다닌다. 회사가 잘 돼야 노동자도 살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깨기 위해서라도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져야 한다.


공장위원회 운동의 조직적 전망이 필요하다. 조선소에서 정규직 조합원, 하청노동자들이 분리가 되어 있고, 하청노동자 비율이 과반수가 넘어선 상태에서 현장 대표성을 갖는다는 것은 조합주의적 질서에서는 불가능하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정규직 따로, 하청 따로 갈 수 없다.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이 함께 결정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 이것이 공장위원회로 가는 가교가 될 수 있고 원하청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표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공장위원회의 구성이 필요하다. 이 공장위원회 운동은 원하청 공동투쟁과 공투체 건설을 주도하는 주체들이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정규적인 정치활동을 강화할 때 등장 할 수 있다.
 


 현장에서 1만인 현장선언운동과 거점농성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투쟁의 미와 올해 하청노조의 전망을 이야기 해 달라



정규직 임단협은 하청노동자들의 기대와 관심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지만 다 빨려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투쟁은 현대중공업 임단투 전선을 사수하는 역할을 했지만 정규직이 파업했을 때 하청노조의 파업은 표도 나지 않았다. 역량의 한계였다. 정규직 집행부는 원하청 공동요구안을 협력사 처우개선이라는 기만적인 문구로 폐기했다. 현장 1만인 선언운동은 이제 하청노동자가 직접 투쟁해서 자신의 요구를 스스로 쟁취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이 이번 투쟁에서 무엇을 교훈으로 남겨야 하느냐? 민주냐 어용이냐는 바람직한 평가는 아니다. 제대로 된 평가는 하청노동자가 참여하고 노조로 단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청노조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이의 수단이 현장 1만인 선언운동이다. 1만인 선언운동은 현장에서 문화제 형식으로 하고 있다. 이는 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좀더 많이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하청노조 쟁대위원들이 현장에서 싸워 쟁취했던 노동3권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의 성격도 있다. 1만인 현장선언운동은 잠정합의안 나오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좋다가 잠정합의안 나오고 나서는 주춤하다가 다시 부결된 이후에는 분위기가 좋다.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힘을 받고 있다.


거점농성투쟁은 정규직 임단투가 잠정합의 되자 마자 하청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기 시작했고 하청노조 지도부를 중심으로 해서 분명하게 항의하고 투쟁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 크다.


하청노조의 가장 핵심적인 자기 전망은 하청노동자조직화다. 작년 1년 하청노조 독자 임단투를 통해 현장에 기반을 가진 대중조직으로 거듭났다. 올해는 더 전면적으로 확대 해 노동3권 쟁취 투쟁을 전개 할 것이다. 올해는 50개 업체 교섭, 500명 조합원 조직화를 목표로 힘차게 달려 나갈 것이다.


50개 업체 교섭은 단순한데, 정규직 노조 상집이 50명이다.  50명의 상집이 쟁대위 속보 배포, 중식시간 선전전을 다한다. 우리 하청노조도 그 숫자만큼 조직해보자는 것이다. 하청노조가 현장 대표자들을 양적으로 확대되면 하청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질적인 변화를 하게 될 것이다. 하청노조 현장대표자들 50명이 퇴투를 한다. 상상해보라! 대중과의 관계에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100개 업체 교섭, 조합원 1,000명 조직화는 직선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고 이것이 돼야 실질적인 원하청 공동투쟁이 될 수 있다.


정규직 현장실천단도 하청노조 빡쎄게 싸우지만 너무 소수다라고 말한다.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양적으로 확대되면 정규직 현장실천단과의 실질적인 공동투쟁이 될 것이다. 비정규직 독자성과 원하청 공동투쟁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작년 임단협 투쟁을 통해서 경험했다.

인터뷰 & 정리 : 조성웅 siwanore@hanmail.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 인터뷰 (2) :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을 평가한다

[노동]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과정을 평가한다

 

 

제에 이어 현중하청노조 김백선 사무장의 인터뷰를 게재한다. 이번 연재분에서는 작년 하청노조 임단협 과정에 대한 평가와 의의가 주로 담겨 있다. [편집자]



●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진행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해 본다면


길지만 주요한 투쟁을 순서대로 되짚어 보겠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현장추모제, 노보를 배포하며 통제선을 넘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추모 사업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였다. 먼저 박일수 열사는 하청노동자들만의 열사가 아니었다. 박일수 열사 투쟁이 가지고 있었던 성격, 정규직 노조가 어용노조로 제명됐었다. 원,하청 공동투쟁을 통해서 진정으로 열사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 다음 현장에서 노보를 배포해보자고 했다. 하청노조의 노동삼권을 투쟁으로 쟁취하기 위해 시도해보자 제안했다. 


새로 당선된 민주파 집행부와 박일수 열사 추모사업을 공동으로 진행 했다. 집회 때 정병모 위원장이 ‘무릎 꿇고 사죄한다’란 말을 했었다. 그 시기에 그런 발언을 한다는 자체가 정규직 노조도, 우리 하청노조도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똑같은 추모사에 ‘협력사 처우개선’ 이란 단어가 나온다. 여전히 대공장 정규직 민주파가 하청노동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현장에서의 노동3권 쟁취 투쟁 문제는 하청노조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위험하다” 하지만 2014년 노동3권 쟁취를 위해서, 현장에서 노보를 배포한다고 하면 지금이 그 시점이다. 박일수 열사 10주기이고, 원하청노조가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 정규직 노조의 직인이 찍혀 있다는 점을 들어 설득했다. 현장에서 노보를 배포했다. 회사에서 감시를 했으나 물리적인 탄압은 하지는 않았다.  배포하던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훌륭하게 일을 수행했다.
 


2013년까지 현대중공업은 밖에서 하면 막지는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처음으로 노보를 배포했다. 회사가 그어 놓은 통제선을 처음으로 넘어선 것이다.하청노조 조합원들이 밖에서 배포가 가능했던 것도 2013년 10월부터였다. 이때부터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공개적으로 노보를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추모사업을 진행하면서 2014년 하청노조 임단투를 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조합원들을 주체로 세운 분향소 투쟁


3월말 하청노동자 사망사고가 났다. 2013년말부터 2014년 초 넘어오면서 현대미포조선 같은 경우 하청노동자들이 6개월 사이에 1.5배가 늘었다. 점심 때 줄이 길어 밥을 못 먹고 출근 때 통근버스를 타지 못할 지경이었다.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도 마찬가지였다. 저가주수로 생산량이 확 늘어나고 물량팀이 대거 투입됐다. 관리자들이 조회 때 “어디서 사고 나는 것 아니냐, 어중이 떠중이 다 들어와 있다”라고 말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3월말부터 중대재해가 발생하고 하청노동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청노조 노안부장은 “멘붕이 온다”고 말할 정도였다.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에서 유가족과 대책을 논의 하고 나가는데, 또 다시 하청노동자가 죽어서 응급실로 실려 오곤 했다.


저가수주로 생산량은 바짝 늘려났는데, 저임금 노동자들, 물량팀으로 채워지다 보니 사고가 터져 나왔다. 그 시기가 4월16일 세월호 참사와 맞물렸다. 더 이상 사람들이 죽어나가서는 안되겠다. 분명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현대중공업을 압박하는 투쟁을 하자. 그렇게 하청노동자 분향소를 정문 앞에 설치했던 것이다. 분향소를 설치고 투쟁했던 시기는 17일 정도 됐다.


중대재해는 두 달 내내 터졌다. 산재 사망사고가 집중해서 터졌던 것은 자본주의 위기, 조선업종 위기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의 외주화”를 한 것이었다. 물량팀이 대거투입 된 결과였다. 분향소 투쟁은 이에 맞선 투쟁이었다. 소수가 싸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지만 반향이 컸다. 세월호 참사와 정몽준이 서울시장 선거 나감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됐다.
 

분향소 투쟁에 대한 탄압이 들어왔다. 조합원들을 업체 총무가 면담하고 협박했다. 집회하는데 업체 총무가 와서 조합원 빼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중식시간 선전전 진행하고 분향소는 당번을 통해 거점농성 투쟁을 이어갔다. 그 투쟁 자체가 정치적, 사회적 의미도 있지만 하청노조로 본다면 조합원들이 투쟁의 주체로 확고하게 서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합원들의 질적 도약의 시기였다. 조합원을 공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조건에서 공개 거점투쟁을 하고 퇴근투쟁이나 집회 때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한다는 것은 도약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노조 간부로서, 투쟁하는 조합원으로 성장했다. 하청노조의 조직적 성과였다.
   

처음 6개 업체로 임단협을 시작했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분향소 투쟁 속에서 확고해졌다. 그리고 임단투 과정에서 확고한 자신감을 가졌다. 타 업체 조합원들의 결의도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분향소 투쟁을 거치면서 6개 업체에서 11개 업체까지 교섭요구 하청업체가 확대됐다. 이 확대도 분향소 투쟁의 성과였다. 투쟁을 통해 성장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이 됐다. 
    

하청노조 건설 11년만의 임단협 교섭과 합법적인 파업권 획득


현대미포조선으로 조합원 범위를 확대한 것, 지역노조로의 전망과 하청노조가 임단투를 진행한 것이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닌데 방향성에서 큰 전환이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 확 확대하기 힘드니 현대미포조선으로, 온산공단으로의 전망이 논의됐다. 100%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동자 조직화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가 감지되고 가시적으로는 민주파 집행부가 탄생하면서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에서 노동3권 쟁취 투쟁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하청노조 내부에서의 판단의 차이들이 존재했다. 객관적 조건이 변화했다는 점은 대부분 공감했지만 주체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임단투를 할 것이냐, 정규직 임단협 속에 묻어 갈 것인가의 차이가 있었다. 하청노조는 독자적인 임단협 투쟁을 결정했다. 


현대중공업 내에서의 계급역관계의 변화,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 속에서 하청노조가 움켜쥐어야 할 기준과 원칙은 무엇인가? 나는 독자성이라고 생각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상태가 됐고 정규직 집행부가 민주파가 되었기 때문에, 정규직 임단협이 하청노동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하청노조가 독자적인 임단투를 하지 않는다면 하청노동자들에게 하청노조의 존재이유가 사라지고 부정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투쟁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방선거 끝날 무렵, 분향소 투쟁도 끝나고 6개 업체에서 11개 업체로 교섭 업체가 양적인 확대를 했다. 지방선거 끝나고 현대중공업의 탄압을 예상했다. 그런데 먼저 교섭 들어간 6개 업체에서 6월13일 이후에 교섭을 하자고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도 몰랐지만 현대중공업 운영지원부가 알고 있었던 정보가 있었다. 2014년6월12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1차 결의대회 일정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16년만에 4,5000명이 참여한 집회가 개최된 것이다. 이 집회를 통해 현장에서의 계급역관계가 기울어진 것이다. 동시에 11개 하청업체가 하청노조와의 역사적인 교섭이 가능하게 된 측면이 있다.


6월12일 날 45000명이 모였다 이와 관련해서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활동을 집고 가야 한다. 지난 10년간 현장에서 버티고 있었던 하청노조의 존재가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의 토양이 됐다. 또한 12일 날 정규직 조합원들이 모이고 보여줬던 감동과 활력은 하청노조 조합원들이 독자적인 임단투를 당당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박일수 열사 10주기 추모 사업을 현장에서 당당하게 시작하고 3월달 하청노동자 실태조사 진행하고 4월에는 임단투 보고대회를 현장 식당에서 진행했고 5월에는 분향소 투쟁을 빡쎄게  했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현장활동이 현대중공업 내에서 계급역관계가 노동자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데 꽤 무거운 추의 역할을 했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45000명의 정규직 조합원들을 집회에 모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서가 있었다. “하청들 저렇게 빡쎄게 싸우는데 정규직들은 뭐하냐“는 말들이 나왔다. 대공장에 정규직 조합원들과 하청노동자들이 존재하는데 상호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하청노조가 당당하게 싸우는 과정이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4,500명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임으로써 노동자 쪽으로 역관계가 기울어지니, 이것이 하청노조가 11개 업체랑 역사적 교섭을 하게 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6말7초 넘어오면서 정규직 2차 집회 진행했고 하청노조는 독자적인 임단투 기조를 유지하면서 무게중심의 변화를 가져왔다. “원하청 공동파업을 조직하자. 원하청 공동 임단투를 진행하고 원하청 공동파업을 조직하자” 정규직 노조와 하청노조 차원에서 위로부터도 진행하고, 현장 부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조합원들이 진행하는 아래로부터의 원하청 공동투쟁도 한다. 하지만 아래로부터는 아직 구체적인 수단이 드러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 원하청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 정규직 집회에 반드시 결합한다. 이러한 방침을 수립했다. 

 

7월~8월 두 달 동안 11개 업체와의 지리멸렬한 교섭을 진행했고 원하청 공동파업 조직화를 위해서 7월30일 지역토론회도 개최하고 공동파업 이전에 공동사업에 대한 제안을 정규직 노조에 끊임없이 했다. 결과적으로 위로부터의 공동투쟁은 다 거부 당했다. 그런데 6월12일, 7월24일, 9월4일 3차에 걸친 정규직 임단투 결의대회가 4000 대오를 유지했고 정규직 노조는 쟁의조정신청과 찬반투표까지 가게 됐다.


정규직 집행부가 사석에서 하는 이야기들과 발언들은 “파업 못한다”였다. 하청들이 일하는데 정규직 이 파업할 힘이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8월과 9월에는 교섭도 지리멸렬하고 정규직 노조로부터 원하청 공동사업도 거부당했지만 하청노조는 업체 탄압에 맞서 방어투쟁의 시기를 보냈다. 현장 중식 선전전과 신화ENG와 부원테크의 조합원 탄압은 곧 원청 현대중공업의 하청노조 탄압이었다. 그래서 탄압 분쇄 투쟁을 조직했다.
 

추석 전후로 정규직 조합원들의 자발성이 정병모 집행부를 쟁의조정신청과 쟁의행위찬반투표까지 가게 했다. 이에 하청노조는 원하청 공동파업 조직화 기조로 갔다. 동시에 원청 사용자성 쟁취 투쟁도 기조로 결정했다. 11개 하청업체와 교섭을 진행했지만 다시 한 번 바지사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업체는 단 하나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원청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다. 하청노조는 원하청 공동파업 투쟁과 원청사용자성 쟁취 투쟁을 결합시켰다.  
 

● 조정신청은 언제 들어갔는가?
 

10월24일 날 들어갔다. 11월5일 임시총회를 통해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정규직은 역사적인 부분파업을 진행하고 하청노조도 부분파업을 조직하고 집회에 참가했다. 11월7일 정병모 집행부가 파업을 철회하는 실망스런 결정을 한다.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하청노조는 원,하청 공동파업 기조를 유지하면서 독자 파업을 진행하고 현장순회투쟁을 전개했다.
 

하청노조는 11월5일부터 해서 19일까지 정병모 집행부가 파업철회를 취소할 때까지 임단투 파업 투쟁 전선을 사수를 했다. 그렇게 하청노조는 정규직 조합원들이 집행부 파업 철회로 인해서 비관하거나 패배주의에 빠지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싸우자” 라는 결의로 전환되는데 분명한 촉매역할을 했다. 
 



 

● 하청노조의 합법적 파업권의 확보와 독자 파업의 의미와 성과는 무엇으로 보나?


하청노동자들은 특히나 노동3권은 투쟁으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 계급역관계가 변화하고 임단투를 진행하면서 하청노조의 일관된 기조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오직 투쟁으로 쟁취한다는 것이었고 마침내 하청노조는 2014년 노동3권을 투쟁으로 쟁취해냈다. 현대중공업에겐 아직 노동3권을 쟁취하지 못했고 여전히 우리의 투쟁의 과제로 남아 있다. 


현대중공업 내에서 하청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는 것은 업체가 아니라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파업을 한 것이다. 하청들도 파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던져주는 의미는 크다.


아래로부터의 공동파업 조직화라는 것이 하나의 구호로 남아 있었고 정규직 임단투 결의대회에 하청노조 깃발을 들고 참여하는 수준의 결합이었다면, 정병모 집행부가 파업을 유보하는 과정에서 정규직 현장실천단이 조직됨으로써 하나의 수단을 얻었다. 하청노조 쟁대위원들은 현장실천단과 함께 아래로부터 공동실천을 조직해나갔다. 현장실천단 같은 경우는 태생적으로는 정규직 노조 집행부의 선봉대 역할이지만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자발성 속에서 배출된 선진노동자들이다. 하청노조와의 원하청 공동투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일부는 더 긴밀하게 원하청 공동투쟁을 전개됐다.


원하청 공동투쟁의 경험은 이후에 정규직 조합원들이 조합주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이 될 것이다. 역으로 하청노동자들에게도 스스로 조직되서 자신들의 노동3권을 쟁취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차별받는 하청이 아니라 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의식으로 도약시키는 것도 원하청 공동투쟁이다.


원청 하청 신분제적 자기규정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자기규정의 첫 번째 단계가 원하청 공동투쟁이라면 작년 임단투 과정에서 그러한 흐름들이 만들어지고 현장에서 상당부분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냐, 운동의 큰 전진이라고 평가한다.  



● 하청노조의 독자파업은 어떠한 성과 혹은 한계를 현장에 남겼는가?


아래로부터의 원하청 공동파업이 중요했다. 정규직 집행부가 공동파업을 조직하는데 있어 하청노동자들 조직화뿐만 아니라 파업에 어떤 식으로라도 참가하도록 하고 이 속에서 스스로 자각하고 변화를 이끌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파업이 엄청나게 파급력을 가졌을 것이다.


아무튼 제한된 조직력 때문에, 하청노조 독자파업은 그 자체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할 수 밖에 없다. 작업장에 들어가서 작업을 못하도록 하는 것도 물리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처음에는 파업을 하고 작업장 밖을 도는 순회투쟁을 전개 했다.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지만 두 세번 반복해서 하다 보니 쟁대위원들도 “왜 하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래서 정규직 집행부가 파업을 철회 했을 때 하청노조 독자파업은 전선을 사수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지만, 다시 정규직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을 때 하청노조의 독자파업은 미미했고 존재감을 갖지 못했다. 현실의 문제고 역량의 문제다.


다시금 하청노조 독자파업이 부각되었던 건 12월17일 이후로 정규직 집행부가 7시간 파업 정점을 찍고 다시 투쟁이 하강국면으로 진입했을 때이다.  


하청노조의 현장 파업 활동은 의미 있는 진전인데, 하청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이나 반응은 확인이 필요한 일이다. 여전히 정규직 임단투를 바라보는 측면이 크고 해당업체의 파업이 업체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하강국면을 맞으면서 하청노조는 독자 투쟁을 진행하고 있고 원하청 공동요구안(4대요구안), 1만인 현장선언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하청노조 임단투와 현장하청노동자들의 반응들은 어떤가?


이번 하청노조 임단투에 대한 하청노동자들의 반응에 대한 확인과 평가는 임단투 이후가 될 것이다. 조직화로 귀결될 것인지 아닌지. 하청노조 임단투 시기는 사측과 대립과 갈등, 그래서 긴장이 높아지는 시기이다. 하청노조가 소수이다 보니 현장과의 관계가 확 넓혀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또 임단투라는 시기, 계급 역관계가 충돌하고 있는 이 시기에 하청노조 조합원 중에서, 후원회원 중에서는 업체와의 긴장감이 올라간 상태다 보니 거리를 두기도 한다. 
 



 

● 쓰레기 같은 잠정합의안 나오고 이를 부결시키는 투쟁 과정에서 하청노조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정규직 노조의 세 차례 부분파업은 전형화 되고 통제된 파업이었다. 현대중공업을 실제적으로 압박할 수 없었다. 선택은 둘 중의 하나였다. 직권조인 가까운 잠정합의를 하던지, 아니면 자각이 있어서 투쟁을 확전시키던지.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전자로 갈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의 기본급 동결이었다 원하청 공동요구안인 4대요구안에 대해서는 쟁점화 되지도 못했다. 잠정합의안 나오면  부결투쟁 한다고 방침을 정했다.


하청노조는 정규직 노조가 임단투를 정리하더라도 독자투쟁을 강화해서 임단투 간다는 기조를 수립했다. 이러한 기조로 12월 투쟁을 진행했다. 부결투쟁은 정규직 현장실천단 동지들과 교감하면서 갔다.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참가하고 있는 현장실천단이 부결투쟁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정규직 운동의 세대교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것이다. 부결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결투쟁 자체는 운동의 세대가 교체되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


하청노조 쟁대위원들과 현장실천단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인적 네트워크가 구성되고 부결에 대해 공감이 크고 함께 부결투쟁을 진행했다. 전체적인 현장실천단 젊은 동지들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현장실천단 고참 활동가들은 소극적이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결투쟁은 성사됐다. 결과적으로 부결투쟁도 승리를 했다. 


전선의 축이 바뀌고 있다. 2013년 10월까지는 어용과 민주의 전선 속에서 민주의 싸움이 승리했고. 이 전선은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후의 전선은 어떤 민주이냐?이다. 현재 정규직 노조 운동은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활력과 12년 전에 망했었던 조합주의 운동을 했던 고참들, 선배들과의 관계가 뒤엉켜 있다. 낡은 운동의 세력들이 집행부가 됐고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활력들이 현장실천단으로 조직화됐는데 파업철회, 부결투쟁 과정에서 어떤 민주냐를 두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노동조합관료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갈등과 대립이 작년 2014년 임단투 과정 속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냐. 그래서 2015년 1월7일 부결 자체보다도 부결까지 가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잠정합의안 소식이 전해지고 젊은 현장실천단 동지들은 교섭장 봉쇄투쟁을 전개하려 했으나 고참 활동가들(지단장들)이 위원장 면담한다는 문자 한 방에 진압당했으나 1월7일 부결 투쟁의 예행연습이 됐다. 고참활동가들은 12월 31일날 교섭장 봉쇄투쟁을 막고 대신 정병모 위원장과 면담했으나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연초 만났던 현장실천단 동지들에게 ‘밖에서는 가결이 예상된다’ ‘그래도 부결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개 분과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동안 현장실천단 젊은 동지들은 노동조합관료주의, 조합주의 고참활동가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했다. 현장실천단 전체는 2014년 말에는 유인물 내용상 부결 투쟁이 논리적 귀결이었나, 2015년 초가 되자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지단장은 부결 투쟁을 해태했다. 하지만 젊은 동지들은 부결 투쟁을 왜 안하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존재하고 있는 현장조직 내에 계파 싸움들이 지저분하게 존재했지만 이걸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현장실천단이 부결투쟁에 나서게 된 것은 대중의 자발성과 민주주의의 승리이다. 현장실천단의 부결투쟁은 기존 낡은 운동의 관성과 노동조합관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혁파의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흐름이 일회성일 수도 있으나 부결로 드러났다. 7일까지 과정이 정말 중요했고 그동안 넘지 못했던 선을 대중적으로 넘어선 것이다. 


하청노조의 독자적인 투쟁, 나아가 원하청 공동투쟁 공동파업 기조가 2014년 현대중공업 임단투 전체 전선에서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자극하고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3편에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 인터뷰 (1) : 투쟁을 통해 성장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됐다

[노동] 투쟁을 통해 성장하고 투쟁을 통해 조직됐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전(前) 지회장 조성웅 동지가 하청지회 김백선 사무장의 인터뷰를 보내주셨다. 최근 하청지회는 현대중공업과 교섭을 촉구하며 1월 12일부터 노숙농성 돌입해 있다. 올해로 설립 12년 째, 동토의 십 년 세월을 딛고 작년 임단협 투쟁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현중하청지회의 상황과 과제를 잘 알 수 있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인터뷰가 긴 탓에 오늘부터 3일 동안 나눠서 게재하려 한다. 인터뷰를 하고 정리해 기고해 주신 두 동지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며, 골리앗의 늑대들이라는 옛 신화를 넘어 하청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가 일어서고 있는 현대중공업의 현재를 알고 싶은 동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편집자]


한 사람의 역사가 결정적인 때가 있다. 그는 속도가 규정할 수 없는, 오래도록 기다리고 또한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한 조직의 역사가 결정적인 때가 있다. 그것은 속도에 강제받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활동의 정규성이 만들어 낸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문제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설립된 지 올해로 12년이 됐다. 지난 시간 동안 참 뭘 해도 주목받지 못하는 동토의 땅에서, 그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열사의 피 값으로 세워진 깃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현장 노동자들의 말문이 틀어 막히는 어용이 지배하는 지난 10여년, 하청노조는 의식적으로 매주 발행했던 유인물을 통해 현대중공업 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했고 나아가 전국적 사안에 대해 “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해왔다. 끈질긴 선전 선동 조직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올해 조선사업장에서 계급역관계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자기 희생을 통한 결단을 통해 현대중공업 설치 한 통제선을 과감하게 뛰어넘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기간 현장 밖으로 내몰린 고립된 섬, 해고자 조직의 성격이 강했다면 2014년 하청노조 임단협 투쟁을 통해 현장에 기반을 갖는 대중적인 노동조합으로 거듭났다.

또한 10여년의 어용의 지배를 끝장내고 맞이한 원하청 노동자들의 공동파업은 노예의 삶과 단절하고 있다는, 돌이킬 수 없이 다른 삶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로부터의 지침에 의해 통제되고 전형화된, 생산에 타격을 주지 못하는 관료적 파업, 작년 정병모 집행부가 수행한 파업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진실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하청 공동파업 속에 뿌려진 긍정적인 변화의 힘이고, 이미 등장하고 있는 다른 삶으로 진입하기 위한 거대한 질문들이다. 이 거대한 질문들은 과거 낡은 조합주의 운동 질서와의 단절을 위한 계급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난 작년 하청노조의 임단협 투쟁 과정을 평가하면서 투쟁주체들의 변화과정, 그 계급적 성장, 그리고 중공업 정세 속에서의 하청노조의 역할을 되돌아보면서 이 계급투쟁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고 현대중공업에서의 전망을 찾고 싶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일하면서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장을 맞고 있는 김백선 동지는 참 바쁘다. 이 바쁜 김백선 동지가 짬을 내 세 차례에 걸쳐 인터뷰에 응해 줬다. 김백선 동지의 인터뷰를 통해 작년 현대중공업 하청노조의 투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꿈꾸는 전망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지회장을 할 때 많은 동지들에게 밥상 차려 놓으면 숟가락 얻지 말고 함께 밥상을 차리자고 제안도 많이 했는데 현대중공업으로 이전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참 전망 없는 현대미포조선으로 이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2007년까지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집행위 상근 활동을 했다. 2007년 2월 총회 후, 이후 활동을 고민했다. 이전을 고민하면서 노동자 도시인 울산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울산에 2007년 5월10일에 내려왔다. 김석진 동지가 현대미포조선소에 있어서 내려오는데 영향이 컸다. 난 인생 경로를 결정하는데 있어 고민을 많이 하지 않는다. 울산이 대표적인 노동자 도시이고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는데 있어 의미가 크겠다는 생각이었다.

2007년 5월말에 현대미포조선 하청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노동부 워킹넷 들어가서 현대중공업 하청 업체에서 인원을 뽑는 것 보고 입사원서를 넣고 현대중공업에 취업이 됐다. 2007년 12월말까지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미포조선에 일자리가 생기고 건승ENG에 입사를 했다.


● 몇 년을 일했고 어떤 일을 했는가? 현장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하청노동자로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크레인 정비일을 했다. 지프크레인, 타워크레인, 천장크레인을 관리 보수 수리하는 일이다.

현대중공업에서는 회전기사업부에서 일했다. 크레인 정비 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현대미포조선으로 옮긴 후 아직까지 하고 있는 크레인 정비일은 위험성이 큰 작업이었다. 지프크레인 붐대 끝까지 올라가서 작업을 했다. 신입사원들은 무섭고 위험해서 며칠 일하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크레인이 고장이 나면, 고공에서 일을 하니까 위험하고 무서웠을 것이다. 고소작업은 대단히 스트레스가 심했다. 게다가 한 겨울에 입사를 했었다. 활동가로서 취업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업체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하청노동자의 삶은 원하청 차이가 있지만 조선소 일 자체가 거칠고 힘들다. 지프크레인 붐대 끝에 올라가서 점검하다가 잠깐 쉴 때도 있는데 도크장를 바라본다. 거대한 블록이 이동하는 것을 보면 위험해 보이고 그 밑에서 용접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족장 설치하는 것도 보이고 모든 것이 다 위험하다. 그리고 현대중공업도 그렇고 현대미포조선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은 더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을 했다.

미포에서만 7년 정도 일했다. 현장을 잘 몰랐지만 직관적으로 선택하고 들어왔다. 그래도 그나마 공개 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반공개 활동은 했다. 울산노동자 배움터 교육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울산지역 활동도 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공개활동을 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지역 반공개 활동을 했지만 한계가 분명 있었다. 2008년 1년차, 2009년 2년차, 그러다 2010년 3년차 쯤 가니까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 조직화라는 건, 만만치가 않은 것이었다. 특히 현장 들어간지 3년쯤 돼서 힘도 들었던 것은 막연하게나마 현장활동의 실마리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이 워낙 업체별로 분절되어 있었고 그래서 업체를 뛰어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미포에 하청에도 활동가들이 몇 명 있었는데, 2010년쯤 되니까 다 나가버리더라. 나 빼고 아무도 없었다. 답답하기는 했는데 외롭고 힘들다기 보다는 하청노동자 조직화의 실마리가 뭘까를 고민했다. 혼자지만, 우회하지 않고 제대로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3년에서 4년차 넘어가는 시기에 업체 내에서 상여금 삭감에 맞서 원상회복 투쟁을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환점의 의미가 있었다. 지난 3년 동안은 업체 내에서도 일은 잘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냥 ‘좋은 형’이었다. 그런데 일은 못하는 형이었다. 친해진 동료들에게는 정치, 노동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때 동생들 모아서 상여금 삭감에 대해서 원상회복시키는 계획을 같이 수립했고 업체 절반 이상의 서명을 받아냈다. ‘상여금 삭감이 임금삭감에 해당되고, 우리는 상여금 삭감에 동의한 적이 없다’ 이러한 서명 동의서를 돌렸고 과반 이상의 서명을 받아냈다. 업체 내에서 한 번 과감하게 싸웠다. 성과는 컸다. 좋은 형에서 어떤 문제를 함께 상의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 됐다. 업체 내 사람들에게는 노동자 대표라는 느낌을 줬다. 업체 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날 찾아오게 되었고, 동료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이 투쟁을 통해 업체 내에서의 활동은 전환점을 이뤘다. 싸움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는 간헐적인 수준이었지만 학습모임을 진행했었다. 북카페 더불어 숲에서 1년 정도 기본적인 학습을 진행했다. 또 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판결처럼 시의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시사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토론하고 모임을 진행했다. 그러다 2012년도 경부터는 노동자배움터에서 학습을 제대로 진행해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시사프로그램과 노동영화 보고 토론하는 것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니까 이탈자가 생기기도 했다.

하청노동자들은 업체별로 분절되어 있다. 3년차 넘어가니까 업체 내에 맹아가 꾸려졌지만, 타 업체에서 하청노동자 조직화를 함께 모색할 동지가 없었다. 게다가 현장에서 공동투쟁을 함께 할 정규직이 없었다. 현대미포조선에는 김석진 동지 한 명만 있었다.

이러던 차에 2013년 1월30일 날, 서울시경 보안수사대 4과 팀원 전체가 건승ENG에 들이 닥쳤다. 영장이 없어서 체포는 하지 못했다. 내가 현장 들어온 지 벌써 4년이 넘어가는데 현대미포조선은 전혀 몰랐던 듯 하다. 이때 내 신분이 공개가 됐다.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조직사건은 2012년 6월에 났었다. 지도부 4인은 체포는 되었으나 구속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보안수사대에서는 기소된 4명 이외에 추가로 3명을 피의자로 탄압했는데, 특히 필명으로 지역과 현장에서는 반공개,비공개로 활동을 하고 있는 나를 주요 타겟으로 삼았다.

지역 동지들은 조언이 반반이었다. “세게 나가라 반. 나머지 반은 여기서 해고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해고를 막을 수 있게끔 해라”

이때 재미있었던 것이 마침 이 무렵 한국GM 부평 비정규직 지회 이영수 동지의 학력 허위 기재건에 대해서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승소 판결이 난 것이다. 그런데 이영수 동지도 노동해방실천연대(준) 조직 사건으로 추가로 탄압받던 피의자 3명 중 1명이었다. 결국 현대미포조선도 조사해서 학력 허위 기재로 해고는 부당해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니는 건승ENG 업체 총무의 부인이 현대중공업 도장부 하청업체에 다니고 있었고 그런데 000동지도 그 업체에 다니고 있었는데, 000 동지에게 “내 남편이 미포에 하청업체 총무인데 사회주의자를 학력 허위 기재로 해고시키려 하는데 해고가 안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현대미포조선에서는 해방연대(준) 재판결과가 유죄로 나오면 그걸로 나를 해고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다시 하청노조 건설, 하청노동자 조직화 얘기로 돌아가면, 5년차 되던 2012년에는 하청노조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고민하게 되었다. 여름부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와 현대미포조선 정규직 3개 현장조직에 제안해서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동자 조직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모임을 진행했다. 6개월 정도 진행했는데, 하필이면 아까 말했던 2013년도 1월에 보안수사대 탄압 사건이 터지고 나서 모임이 중단됐다. 보안수사대는 한달이 지나자 또 회사로 처들어와서 임의 동행을 요구했었다. 그래서 공세적으로 국가보안법 탄압 분쇄 투쟁으로 전환했다. 지역에서 공개적인 기자회견도 하고 대책위도 구성했고, 이후 탄압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 서울에서의 기자회견과 상경 투쟁 등을 준비했었다. 그러자 탄압이 중단되서, 4월달에 다시 현중하청지회와 미포 3개 현장조직의 모임을 진행했다. 이때는 하청조직화에 대해서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결정할 단계였다. 6개월 동안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최종 결론은 현대미포조선 정규직들은 하청조직화에 대해서 의지가 없고 능력도 없는 것으로 정리했다.

2009년 현대미포조선 굴뚝 투쟁하고 나서 정규직 민주파가 완전히 괴멸됐다. 현장에서 유인물 배포하려면 탈취를 당했고, 심지어는 집 앞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유인물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것이 2010년이었다. 정규직조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원래 조선하청지역노조(지역지회)로의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이 조직화 되면 하청노조 건설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원하청 공동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의 도약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하창민 지회장은 나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면서 일단은 하청 조직화를 위해서 같이 대응하자고 제안했다. 6개월 넘게 말만 주고받는 동안, 정작 현중사내하청지회는 현대미포조선에 하청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격주로 유인물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기사를 쓰면서 협조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2013년 여름에 최종적으로 정리가 됐다. 하창민 지회장은 지역 조직화 전망을 제기했고, 나는 현대미포조선 원하청 공동투쟁이 원칙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는 정규직 쪽이든 하청 쪽이든 둘 다 안되는 조건이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하청노동자 조직화였다. 현중사내하청지회는 이미 시작했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 무렵 자연스럽게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들까지 조합원 범위를 확대할 수 있도록 규칙을 변경하는 논의가 되고 있었다. 나는 하청노조 조합원으로서 현대미포조선 하청조직화 사업을 하기로 했다. 이후 경로는 열어두고 가자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하청노동자들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현중사내하청지회는 조직화 수단의 틀거리를 마련해가는 과정이었고 2013년 하청노조 총회 때 규칙 개정하고 임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이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조 건설의 하나의 경로가 됐다.


● 2014년 현대중공업 노조 임원선거에서 예상치 않게 12년 어용노조의 지배를 갈아치웠다. 현대중공업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활동가로서 어떤 계획을 가졌는가?


현중사내하청지회는 2013년 10월 총회 때 규칙 열어 현대미포조선까지 조합원 범위를 확대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하청노동자들 조직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을 견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총회 때 그렇게 사업계획을 제출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던 객관적인 변화, 사건이 터졌다. 어용노조의 지배를 갈아치운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의 변화가 주체적 조건의 변화를 강제했고 평가가 확 달라졌다. 현대중공업에서 민주파 당선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현대중공업 내 계급역관계가 변화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한 것이었다. 2014년도 사업계획 수정을 가지고 연말 연초에 토론하고 논쟁했다.


● 하청노조는 규약변경을 통해 현대미포조선까지 조합가입 범위를 확대했고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인 동지는 임원을 결의했는데, 이것이 하청노조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은 업종과 지역이 일치하고 또 같은 그룹사이다. 특수한 경우다.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 조직화는 다 동의가 되는데, 현대미포조선, 온산공단까지 가는 지역지회로 조직되는 것이냐, 현대미포조선 독자노조의 맹아가 되는 것이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질문들이 실천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이 도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화하고 민주파가 당선 됐다. 5000여명이 자발적으로 임단협 투쟁결의대회에 참여했다. 계급역관계가 반전에 가까운 수준으로 가시화됐다. 현중 노동자들이 깨어난 것이다. 당선은 “어 뭐지”였지만 5000여명의 집회 참여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깨어 난 것이었다.

따라서 정세적으로 지역지회 조직화가 집중적인 사업은 아니었다. 하청노조를 둘러싼 객관적 조건이 변화하고 하청노조 주체적 조건의 변화도 강제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가 없었다면 하청노조 임단투 하겠다고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객관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원하청 공동투쟁, 공동파업의 전망을 가졌다. (2편에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고] 감옥에서 굴뚝으로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5/01/15 16:21
  • 수정일
    2015/01/15 16:21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진출처 : 프레시안

서울구치소에서 4개월 가까이 수감 중인 김정도 동지가 굴뚝농성 중인 이창근, 김정욱, 차광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해 달라고 요청해주셨다. 귀중한 편지 게재를 허락해 주신 김정도 동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루 빨리 석방되어 다시 투쟁의 현장에서 뵙기를 기원한다. [편집자]


쌍용자동차 이창근, 김정욱, 스타케미칼 차광호 동지께!

안녕하세요, 동지들! 저 정도입니다. 구치소에서 동지들 생각에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늦은 밤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보건복지정보개발원, 재능교육, 세월호 투쟁 등에서 일반교통방해 혐의를 포함 총 12개+α의 혐의를 적용받아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오늘로 116일째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입니다.

벌써 굴뚝농성 200일이 넘은 차광호 동지, 한 달이 넘은 이창근, 김정욱 동지 … 이 추운 날씨에, 구치소 독방 안에 있어도 양말을 두겹 신고, 옷을 세네 겹 껴입어야 버틸 수 있는 그런 날씨에, 차가운 굴뚝에서 그리고 길바닥에서 농성하시는 동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지곤 합니다.

가끔씩 들어오는 월간지나 구독하는 신문을 보면, 이창근 동지의 칼럼, 차광호 동지의 글 등을 접할 수 있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처음 동지들이 굴뚝에 올라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2014년 5월 27일 새벽에 차광호 동지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2015년 12월 13일 이창근·김정욱 동지의 소식을 신문으로 접했습니다. 차광호 동지가 올라가셨을 때는 안부 문자도 보냈는데, 이제는 감옥에 갇혀있어, 동지들이 계신 곳에 가보지도 못하고 희망버스도 집회도 농성도 함께 할 수 없어 마음이 답답합니다. 출소하면 꼭 찾아뵙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 전에 잘 해결되면 더 좋겠지만요.

가끔씩 노트에다 출소하면 뭘 하고 싶은지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평택, 구미에 들러서 동지들을 찾아뵙는 것도 있습니다. 제가 굳이 한 마디 더 보태지 않아도 차고 넘칠 만큼, 동지들의 투쟁은 제게, 그리고 모든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많은 희망을 주고 있다는 것 잊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옥보다 훨씬 더 갑갑할 굴뚝 위 동지들은 얼마나 힘이 드실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계시는지 … 아직 많이 부족한 제가 미처 다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지들을 생각하면서 또 하루하루 수감생활을 이어가는 제가 있다는 것, 하루하루 힘 받으며 생활하는 제가 있다는 것이 이창근·김정욱·차광호 동지께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지는 부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립되어 있지만, 고립되어 있지 않은 곳, 사람이 살아가는 ‘감옥’에서 ‘굴뚝’으로 띄워 보내는 이 편지가 오늘도 사투를 벌이고 계실 동지들께 힘이 되길 기원합니다.

저는 요즘 초기 수감생활 1~2달 간 읽던 사회과학 서적과 달리,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있습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얼마 전에 읽었는데, 낙원구 행복동에 사는 난장이 아버지의 삶, 그리고 굴뚝 이야기가 나올 때, 동지들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아직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을 확산시키려는 자본의 하수인 박근혜 정권에 치가 떨립니다.

얼마 전 한상균 동지 새로운 위원장에 당선이 되셨습니다. 물론, 지도부의 지침이나 명령으로만 포괄되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현장투쟁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이번 당선을 작은 ‘밀알’ 삼아 올해에는 정말 대투쟁의 한 해가 만들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저도 지금은 비록 감옥에 갇혀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출소하고 나서, 또 다시 구속이 된다할지라도 결코 주저하거나 물러섬 없이 투쟁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고 있습니다.

빛도 잘 통하지 않는 독방에 있다보니 하늘과 햇빛이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항상 힘내시고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뒷면에 시 한 편 적어 보냅니다.


하나의 밀알이 썪어

진은영

한 알의 밀알로 썩어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사람들

나는 하나의 밀알로 썩어
세상의 모든 바람이 취기로 몰려오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2015년 1월 12일 월요일 오후 11시경 구속 116일차 서울구치소에서 정도 드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고] 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 투쟁승리를 위해, 감옥 안에서 동지들께 피눈물로 호소 드립니다!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4/12/11 11:49
  • 수정일
    2014/12/11 11:5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2월 3일 서울일반노조는 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 봉혜영 분회장에게 중앙운영위 불참과 본조 지침에 따른 활동이 없다는 이유로 중앙운영위원회 결정이라며 분회 해산을 문자로 통고했다설사 이 사유들이 근거가 있다고 해도 당사자인 분회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중운위 결정으로 분회를 해산하는 것은 민주노조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서울일반노조는 그동안 마치 사측처럼 조합원들을 회유해 투쟁을 마무리 짓고는 투쟁을 지속하는 분회장과 조합원들에게 징계위협을 가하는 등 민주노조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러 왔다그러다 급기야 문자로 해고를 통보하는 악질 자본과 꼭 닮은 꼴을 연출하기 이른 것이다현재 보건복지개발원분회 연대투쟁 건등으로 서울구치소에 80일 넘게 수감 중인 보건복지정보개발원공대위 전 상황실장 김정도 동지는 이 사태에 분노의 마음을 담아 옥중에서 사회주의노동자신문에 기고 의사를 밝히셨다귀중한 글을 옥중에서 기고해 주신 김정도 동지에게 감사의 말씀 드린다. [사노신]

 

"투쟁하는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고노동조합의 주인이다."

 

지난 12월 4일 목요일 민주노총 서울본부 서울 일반노조 중앙운영위에서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를 일방적으로 해산’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이유는 그 무엇이 됐든 감옥 안에서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겨우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고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합니다전국의 투쟁하고 있는 개인단체조직노동조합 등 모든 동지들께 제안 드립니다어떤 방식으로든 서울본부 서울일반노조의 관료적·어용적 행태를 바로 직시하여 규탄하고이에 맞서는 힘의 실천을 조직해주시길 바랍니다연서명 성명서단체 성명서항의 방문 등 무엇이라도 좋습니다피눈물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봉혜경·봉혜영 동지와 함께 마음모아 주시길 간절하게 호소 드립니다이번 사태는 무너져 가고 있는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문제입니다투쟁하는 이들을 어용세력들이 어떻게 짓밟고탄압해왔는지를우리내부에 뿌리 깊게 만연한 타협주의노사협조주의·관료주의가 투쟁을 어떻게 망쳐왔고 병들게 했는지를  

 

우리는 재능교육스타케미칼현대차비정규직투쟁 등에서 수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 투쟁도 마찬가지입니다그래서 더더욱 동지들의 관심이 중요합니다우리 모두의 침묵과 방관은 끊임없이 어용세력노사협조주의 세력을 확대·재생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위 사례를 모아 공동토론회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봉혜영 분회장님과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공대위를 조직하고 함께 투쟁하다가 구속되어 오늘로 80일째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한 달 전에는 교도관으로부터 인격 모독적 욕설과 수차례 폭행을 당하는 사건까지 겪었습니다보석허가 대기기간이 길어져도폭행을 당해도구속이 되어도 두렵지 않습니다앞으로 제가 봉혜경·봉혜영 동지와 함께 투쟁했다는 이유로그 사실을 반성하지 않는 다른 이유로 수감생활이 훨씬 더 길어져도 조금 더 답답해질 뿐 단 한 치의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본부 서울일반노조의 어용적 행태를 이전부터 수도 없이 목도해왔고그로인해 아파하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다가 수감된 제가두려운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이 사태가 민주노조 운동의 원칙과 대의에 의해 공적이고 운동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고 정리되어버리는 것입니다적당히 타협되거나중재되거나동지들의 관심 속에서 잊혀 지거나소위 관료적 공조직의 질서 속에서 의도적으로 은폐.조작되거나 하는 것입니다그렇게 되지 않도록 전국의 모든 양심 있는 동지들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봉혜영·봉혜경 동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길 바랍니다부탁드립니다 

 

어용세력들을 단죄하고더 이상 우리의 투쟁이 이렇게 짓밟히도록 두고 볼 수도 없고 동지의 눈물을 안타깝게만 보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그래야 감옥 안에서 잠도 설치지 않고끼니도 잘 먹을 수 있고머리도 덜 아플 것 같습니다편지를 쓰면서도 분회 동지들과 함께했던 시간들그 투쟁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감옥에서 눈물이 많아졌습니다그 시간들그 투쟁을어찌 다 이곳에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앞으로의 제 삶과 실천활동을 통해서 승화시키고 녹여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조직들의 방조와 방관그리고 회유 … 이것들이 너무도 치 떨립니다저조차 이런데 당사자 동지들이야 오죽 마음 아프실까요.  

 

민주노총 서울본부 서울일반노조는 분회의 투쟁을 정리하기 위해, 2013년 7월 노동청사측과 밀실야합을 하여 쓰레기중재안을 강요합니다이를 거부하고 계속 투쟁하는 조합원 동지들에 대해 수없이 많은(현수막 일방철거물품반납강요집회신고일방철회명예훼손 고소운운징계시도 등등어용적 행위를 합니다.자본이 할 법한 일들을 민주노조라는 을 쓰고 서울일반노조가 자행하고 있습니다신규채용 쓰레기 안을 받으라고 강요합니다이제는 일방적 분회 해산까지 분통이 터집니다

 

마음 아파하고 계실 봉혜경·봉혜영 동지를 생각하면함께 있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밖에 있을 때 조금 더 잘해드리지 못한 점속상하게 했던 일사소한 것으로 다투었던 일힘들어하실 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못해드린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그래서 더더욱 다시금 결의하고 힘을 모아 나갔으면 좋겠습니다저는 벌금이 쌓이고이미 전과가 쌓였고 앞으로 또 쌓이겠지만그럼에도 봉혜영·봉혜경 동지와 당당하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투쟁하고 싶습니다끝까지 함께 가고 싶습니다글을 쓰다 보니 두서가 없어진 감이 있지만 옥중이니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봉혜영·봉혜경 동지힘내세요그리고 죄송합니다그리고 사랑합니다. 


"… 이들이 내 삶에 들어왔다내 삶 안으로 들어온 이상 이 싸움은 내 싸움이기도 하다 … " (기록노동자 이선옥, ‘콜트콜텍을 읽는 열 두 개의 시선 기타가 맺어준 아름다운인연’) 

 

"…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건 날씨 탓도 거리의 낯설움도 아니었다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노총 의결 단위로부터 배제됐고 투쟁했기 때문에 더욱 고립됐다는 것이다 … " (현중하청지회 조성웅, “인간의 존엄함이 가 닿은 시간” -전국학습지 노조 재능지부 유명자 동지를 생각하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발간사] 민주노총의 혁신?

노동운동 진영에 선거 열풍이 뜨겁다. 처음으로 직선제로 치러진다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때문이다. 그 동안 대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되던 민주노총 지도부를 70만 명에 이르는 조합원 전체의 투표로 뽑겠다는 것이다. 

최초의 직선제 선거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얼마 전까지 7~8명의 후보자들이 난립하는 기세를 보인 끝에 후보 등록을 앞두고는 4파전으로 정리되는 듯하다. 최대 정파인 전국회의와 중앙파가 연합후보를 냈음에도 여러 후보가 출사표를 던진 것은 정파적인 세력구성이 고착된 대의원 구조에 비해 뭔가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승철 현 민주노총 위원장에 따르면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직선제를 통해 민주노총이 강한 지도력을 회복하고 진보진영에서 더 큰 역할을 담당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땅에 떨어진 민주노총의 위상이 직선제를 한다고 그리 올라갈 것 같지는 않다. 민주노총이 오늘날 전체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못하고 쇠락하고 있는 것은 지도부의 문제도, 선거 방식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조합원들의 구성과 의식의 문제인 것이다. 

70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대부분은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이며 민주노총은 그들의 이해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민주노총이 직선제 준비를 하는 동안 금속노조는 불법파견에 대한 법원의 전향적인 판결에도 불구하고 현대차 이경훈 집행부의 8/18 합의를 추인했다. 여전히 정규직노조들은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어용화된 상급단체들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징계에 처하는 일들까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좌파를 비롯한 거의 모든 운동세력들은 이러한 일들에 은근슬쩍 눈을 감고 있다. 껍데기가 된 계급적 대표성을 확보하려면 조합원들의 이해를 거슬러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과감히 받아들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편에 단호하게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혁신이란 말뿐인 조직놀음로 전락할 것이다. 예전에 그렇게 떠들던 산별노조는 과연 민주노조 운동에 무엇을 갖다 주었는가? 

더욱 안타까운 일은 혁신을 가장 열심히 부르짖는 선본조차 성폭력 가해조직의 손을 잡고 ‘선거’와 ‘몸집 불리기’에 목을 매는 혁신과 거리가 먼 구태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올해 민주노총은 “내가 민주노총이다. 산자여 일어나라!”를 노동자대회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민주노조 운동이 산자가 되려면 이제 그 “나”를 버리는 것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일이 아닌지.

2014년 11월 8일
사회주의노동자신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토론회] 노동현장과 성소수자 차별

  • 분류
    노동
  • 등록일
    2014/11/24 12:29
  • 수정일
    2014/11/24 12:29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한국나사렛대학의 채용공고. 음주, 흡연과 함께 동성애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적
혀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동성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나사렛대학은 개신교단체인 나사렛성결회에서 설립한 사립대이다


지난 10월 21일 화요일 조계종 노동위원회 주최로 <노동현장과 성소수자 차별>이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곽이경 동성애자인권연대 노동권팀장과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조혜인 변호사가 각각 ‘성소수자 차별 현실과 성소수자-노동운동의 과제’, ‘성소수자 노동자(고용)차별금지법제 도입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고,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활동가와 현재 사무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게이 노동자 곤이 토론자로 자리했다.

곽이경 동성애자인권연대 노동권팀장은 노동운동에서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청년, 이주민의 노동권과 차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져 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소수자 노동권에 대한 논의도 노동운동의 일부가 되어야한다며 이 토론회의 취지를 밝혔다.
 

채용에서 해고까지 차별의 구조

곽이경 팀장과 조혜인 변호사는 각각 성소수자들이 노동현장에서 겪는 차별의 유형과 사례를 제시하였다.

먼저 채용과정에서의 차별로는 “외관상 인식되는 성별과 서류상 성별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 “사회에서 기대하는 종류의 여성성, 남성성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경우가 제시되었다.

“면접 보러 갔을 때 트랜스젠더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 지난번엔 (주민등록증) 민증 번호 좀 불러보세요. 뭐라고 하니까 다시 한 번 불러보세요. 왜 그렇게 하고 다닙니까? 면접 보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이런 경우 성소수자들은 채용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의 폭 자체가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조혜인 변호사는 성별변경을 하지 않은 성전환자들 대부분 “신분확인절차가 없는” 직업을 택해야하기 때문에 “많은 FTM들이 택배, 운송, 공장노동자 등의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상당수의 MTF들이 유흥업소 등 성산업에 종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FTM은 female-to-male transgender의 약자로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을 뜻한다. MTF는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의 대상이 된 사례도 제시되었다. 1996년경 한 전문직 노동자가 언론을 통해 커밍아웃을 하자 특별한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근무불성실’을 이유로 해고당한 사례가 있었다. 이런 경우 현실적으로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부당한 해고라는 점”을 입증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 채용에서 배제되거나 해고당하는 이유가 ‘성소수자이기 때문’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성소수자들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채용을 위한 면접에서 업무와 별 상관없는 예민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질문하는 이유, 바른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승진하기 어려운 이유, 노동조합에 가입했더니 해고자 명단에 오르는 이유에 대해 사측은 솔직하게 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의를 밝힐 필요가 없는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혜진 활동가는 성소수자의 차별금지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인사제도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노동자들이 인사제도에 개입하며, 비정규직에 대한 주기적 해고의 권한이 기업에게 주어져있는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찾는 싸움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채용되어 일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는 가족중심의 인사 및 임금복지제도를 제시하였다. 성소수자들이 실제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고 살고 있다하더라도 혼인을 중심으로 자격이 주어지는 가족수당, 주택지원, 경조사 지원 등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곽이경 팀장은 “이 같은 복리후생제도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은 각 기업에서 사규 등을 정비하는 것만으로도 작업장에서 성소수자들을 보다 평등하게 대우”할 수 있으며, “국가 차원의 차별금지법이 실행된다면 그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혜진 활동가는 “‘남성생계부양자 논리’를 가속화하는 수당들을 기본급으로 전환시키는 싸움”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어떤 실천이 가능하고 필요한가

토론에서는 실제로 노동현장에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다.

첫째로 성소수자 혐오와 배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단호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김혜진 활동가는 “건설노조에서 이주노동자들을 폭행하거나 불법이라고 신고하는 것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공동의 싸움을 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이나 행위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둘째로 현장 안에 성소수자들의 모임과 이들을 지지하는 모임을 형성하는 것이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노동운동이 임단협과 선거에 매몰되어 있거나 당장의 사측의 공격에 대응하는데 급급한 현실에서 이와 같은 실천은 상당한 수준의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곽이경 팀장은 영국과 미국의 많은 노동조합 내에 LGBT 그룹들이 형성되어 있고 노동현장 혹은 노동조합에서의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에 맞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성소수자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의 조직인 <일터의 자긍심 Pride at Work>은 미국 전역에 20개가 넘는 지부를 두고 활동 중이며, 영국노총은 매년 LGBT 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차별금지법 제정, 직장연금의 동성커플 혜택보장, 동성커플의 입양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운동에 적극 동참해왔다.

셋째는 성소수자들과의 만남의 계기를 자주 형성하는 것이다. 김혜진 활동가는 희망버스에 참여했다가 게이합창단 지 보이스의 공연을 보고 성소수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는 건설노동자의 사례,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계기로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이러한 만남이 서로를 매개하고 연대를 촉진한다고 제기하였다. 이는 앞서 제기한 현장 내에 성소수자 지지그룹을 형성하는 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체협약에 성소수자 차별금지조항을 명문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곽이경 팀장은 “단협에 차별금지가 한 줄로라도 보장이 있다며 기본적이지만 큰 힘”이 되며, 이는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단체협약에 이러한 조항을 넣기 위한 과정을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현장 내 교육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focus] 세월호 200일, 끝낼 수 없는 투쟁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11/21 20:23
  • 수정일
    2014/11/21 20:2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를 오가던 정기여객선 세월호가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승객 대부분은 수학여행을 나온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속보를 보고 걱정하던 국민들은 곧 이은 전원 구조 보도에 안도했다. 하지만 이는 채 몇 시간도 안 돼 오보로 밝혀졌다. 당일 배 밖으로 탈출한 선원과 승객 172명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이후 몇 주 동안 국민들은 침몰하는 배에 갇혀 수백 명이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다.

295명 사망, 9명 실종, 총 희생자 304명. 세월호 참사는 전국민적인 트라우마가 되었고,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 한다는 환상은 무참하게 깨졌다. 유족과 국민은 진상과 책임의 규명을 국가에 요구했으나 그것은 이 요구에 대해 탄압으로 답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00일이 지났다. 그러나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은 여전히 요원하다. 


국가에 대한 분노 

참사 발생 직후 가장 먼저 사람들을 분노케 한 것은 정부의 무능이었다. 헛된 희망을 품게 했던 전원 구조라는 오보, 시시각각 변하는 구조자와 선객의 수, 구조 작업을 둘러싼 혼란과 잡음, 허무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생존의 희망.

무능과 혼란을 넘은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이 곧 얼굴을 드러냈다. 골든타임이라 불리는 가장 중요했던 사고 직후, 해경은 구조를 돕고자 몰려든 민간 어선과 잠수사들을 막고 자체 계약한 언딘에 특혜를 주고자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구조 활동을 한다는 해경의 선전과 달리 언딘은 구조 업체가 아니라 인양 업체라는 사실, 정부와 해경은 애초부터 구조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더 많은 일들이 드러났다. 불법 증개축된 노후선박에 화물을 과적했고, 참사의 책임자로 공분의 대상이 된 선장은 계약직이었다. 항해를 해서는 안 되는 배가 바다에 나간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본과 국가가 비리의 고리로 결탁한 정황들이 나타났다. 이 참사가 단순한 과실이 아니라 이윤 중심, 안전 무시, 규제 완화가 낳은 사회적 비극이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300여 인명이 수장되는 과정을 무력하게 TV로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은 격분했다. 이 분노는 생존자 구조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바로 정권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으로 터져 나왔다. 5월 3일 열린 첫 번째 집회에 수천 명이 모였다. 다음 주 5월 10일 안산에서 2만 여 명이 모였고, 5월 17일 서울 집회는 5만 명 이상 집결했다.

처음부터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대중운동은 5월 17일 정점에 오른 뒤 완만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간혹 계기에 따라 다시 확대되는 때가 없진 않았지만 5월 중순과 같은 동력과 열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항의하는 대중행동이 확산되거나 더욱 급진화 되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초기에 집회를 주도한 국정원 반대 시국회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시국회의에는 여러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민주노총을 비롯 규모가 큰 제도권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투쟁을 부담스러워 했고, 이전부터 국정원 반대 촛불에 적극적이었던 통일운동 세력이 집회를 주도해 나갔다.

시국회의 대표를 맡은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공동대표는 5월 3일 집회에서 박근혜 퇴진과 국민이 참여하는 진상규명을 과제로 제기했다.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지만 세월호 투쟁의 요구는 사실 이 두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시국회의와 이후 구성된 국민대책위는 박근혜 퇴진을 공식적으로 걸지 않았고 단지 대중의 반(反) 정권 정서를 이용하려 들었을 뿐이었다. 세월호 집회는 주최 단위들의 단속과 통제 속에 2008년 촛불투쟁 같은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노동자공동행동, 만민공동회, 가만히 있으라 같은 진보·노동운동 좌파들의 운동이 통제를 뚫고 “선을 넘으려는” 시도들을 했지만 큰 흐름을 만들지는 못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5월 17일 집회에서 노동자공동행동이 청와대 행진을 시도했으나 대열을 벗어나 달려간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최 측은 참여자들이 대열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곳곳에서 강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도부의 이러한 태도는 5·6월 국면에서 청와대로 실제로 행진할 의지가 있느냐 마느냐가 쟁점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2008년 촛불 투쟁 때와 달리 청와대로 행진하려는 세력은 시위의 본 대열과 분리되었고, 경찰은 촛불 집회 때보다 훨씬 많은 경찰을 동원해 이를 막았다. 압도적인 경찰 병력을 뚫을 실제 동력을 만들지 못한 채, 청와대 행진은 대중과 유리된 선도투쟁의 반복으로 나타나며 갈수록 소진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대중행동의 정체 속에 선거국면으로 전환

5월 22일, 620여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가하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가 발족했지만 시국회의와 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뚫고 운동을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만민공동회, 가만히 있어라, 노동자공동행동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이 세 가지 흐름이 바라보는 주체는 각기 달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통제를 뚫어낼 만한 동력을 만들지는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 등이 제안한 만민공동회는 사실상 희망버스 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연대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는 청년운동, 노동자공동행동은 전통적인 노동운동 전투파의 흐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투쟁에 계급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8년 촛불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은 세월호 투쟁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노동자공동행동은 현장 순회선동 등의 활동을 통해서 조직노동자들을 이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호응은 거의 없었다. 여론에 떠밀린 민주노총 지도부는 일회성 집회와 투쟁을 하고 책임을 다한 듯이 행동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투쟁이 만들어낸 중요한 변화는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전면에 나선 것이었다. 기존의 조직운동이 제도화되고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터넷과 결합한 개인들의 연대는 촛불투쟁 뿐 아니라 최근 국제적인 대중운동의 주요한 특성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2008년 촛불 이후 트위터를 통한 투쟁사업장 연대운동, 희망버스 운동 등, 유사한 사회적 연대 운동의 흐름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만민공동회 운동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2012년 미국의 아큐파이 운동처럼 자발적인 개인의 집단 운동을 의식적으로 구현하려 시도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아직 계급적 성격을 띄기 보다는 개인으로 존재하는 민주주의 급진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정화는 심화되고 있지만 이는 새로운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아큐파이를 비롯하여 만민공동회 유의 연대 운동이 보이는 한계는 여기에 있다. 만민공동회 운동을 제안한 주체들이 박근혜 퇴진과 진상규명을 넘어 보다 문제의식을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여기로 모여든 자발적 개인들이 원한 것은 청와대로 행진이었다. 

청년운동으로 구성된 ‘가만히 있으라’는 6월 10일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고립된 활동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후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각기 제기한 주체들의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로 간다는 행위가 가장 일차적인 전투성, 급진성의 기준으로 제기된 점은 별다름 없었다.

기존의 주체들이 한계를 보여주는 속에서 열려진 투쟁 공간은 새로운 주체의 확장이라는 문제로 이어져야 했다. 사회의 불안정화에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청소년, 여성, 저임금·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을 주체화 할 수 있는 문제의식의 확대가 필요했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 민주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와 안전의 문제 등 폭넓은 논점을 제기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문제의식의 확대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박근혜 타도 혹은 퇴진이라는 구호는 대중들의 자연스러운 분노의 표현이며 대중투쟁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이 분노를 시스템 전반의 문제로 확대시키는 의식적인 노력은 충분하지 못했거나 투쟁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구성으로 볼 때 한계가 있었다. “여성” 박근혜에 대한 비하나 “어린” 학생 희생자만을 강조하는 보호주의적 인식은 이 운동의 확대에 선을 긋는 인식적 장애물로 기능한 면이 없지 않았다.

국가에 대한 분노는 주로 박근혜 개인에 대한 혐오와 적대로 집중되었다. 중앙행정권력 강화의 산물인 국가권력의 인격화는 그 자체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를 차단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국가원수의 교체가 선거로 이루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는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는 일개인의 교체라는 문제의식으로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 시기가 다가오자 모든 이의 관심은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게 선거로 넘어갔다.



선거와 음모론

대중운동의 하강세가 나타난 5월 중순이 지나면서 지방선거 국면으로 들어갔다. 세월호 충격의 여파가 여전한 와중에 선거 자체가 크게 부각되지 못했음에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야당은 절반의 승리를 맛보았다. 이후 대중투쟁으로서 세월호 국면은 6월 10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소강했고 보궐선거 정국이 급속히 떠올랐다.

미니 총선이라고 불린 보궐선거의 분위기는 지방선거에 비해 훨씬 뜨거웠다. 야당과 진보․노동운동 진영은 선거를 통해 세월호 투쟁을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부르주아 정당에서 이른바 진보정당, 노동자단위까지 모두 자기 의제를 갖고 선거 활동에 집중했다. 

선거 국면의 본격화와 함께 각종 의혹제기가 인터넷 카페와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의혹들은 대개 사고 자체의 원인,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계, 유병언 일가 관련 문제와 사건 당시 대통령의 행적에 관한 것으로 모아졌다. 

의혹들이 확산된 것은 아무 것도 해명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한 정부의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 하지만 다양한 의혹들이 모아지고 정론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상에 방치되며 정당한 의혹과 음모론이 뒤죽박죽돼버린 면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유병언 일가와 세모그룹에 대한 의혹들은 희생양을 찾는 정권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었다. 참사에 대응을 완전히 실패한 정부는 책임을 전가할 곳이 필요했다. 수상쩍은 종교단체와 연결된 세모그룹은 구미에 딱 맞는 희생양이었다. 부르주아 언론들은 유병언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폭로에 나섰고, 과도한 책임 떠넘기기가 행해졌다. 유병언의 수배와 검거작전은 부르주아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다. 그런데 이조차 이 정부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자본가인 유병언과 정부 관료들의 유착관계의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검경은 번번이 유병언 체포에 실패했다. 결국 7월 22일 유병언으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발견되고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는 그 사체가 과연 유병언이 맞는지에 대한 의혹으로 뒤덮였다. 부르주아 언론의 1면은 도피하던 유병언의 장남과 여성 경호원의 관계를 둘러싼 스캔들로 도배되었다. 

잠수함 충돌설이나 국정원 연루설 등은 대선 이후 팽배한 반(反) 박근혜, 반(反) 국정원 정서로부터 사고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별반 호응을 받지 못하던 이런 음모론적인 가설들이 크게 증폭된 것은 이 시기였다. 국정원에 대한 의혹은 7월 25일 유족들이 세월호 안에서 발견한 노트북에서 ‘국정원 지적사항’이라는 문서를 찾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국정원이 세월호의 세세한 문제까지 지침을 내린 것은 확실히 석연치 않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호에 국정원 직원이 탔다거나 핵폐기물을 싣고 있었다거나 하는 의혹들은 근거가 빈약했다. 

사건 당일 대통령의 행방은 7월 7일 국회운영위 질의응답에서 김기춘이 자신도 모른다고 답하면서 처음 불거져 나왔다. 이 역시 처음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7월 18일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정윤회 의혹과 연관시키며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유병언 일가나 국정원, 대통령에 대한 의혹들은 온라인상에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부추기는 소재로 널리 활용되었다.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무수한 음모론 속에 근거가 있는 의혹마저도 더 자극적인 의혹들에 묻히게 되는 효과를 낳았다. 

선거와 음모론과 연동되어 제기되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공격은 흔히 대통령의 여성성에 대한 비하, 이른바 ‘사생활’ 논란 등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세월호 투쟁의 대중적 공감대와 문제의식의 확대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사회적 파업기금’의 권영숙 대표는 5월 말 페이스북에서 ‘특별검사’와 같은 국가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진상을 조사하는 사회적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사회적 진상조사위원회와 같은 형태의 대중운동체가 일찍이 구성되었다면 무작위로 퍼지는 의혹들을 걸러내고 그것을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는 좋은 창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에 대한 청원 요구와 선거 흐름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다양한 의혹들을 합리적으로 규명하는 역할은 운동진영이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선거 국면이 되자 정권에 불리해 보이는 정보라면 무차별적으로 무한 공유되며 퍼져나가는 형국이 되었다. 


유족들의 선도적인 투쟁과 세월호 특별법 정국

세월호 투쟁을 이끌던 일부 운동세력들이 선거에 집중하면서 운동진영의 관심 역시 점차 줄어들었다.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는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지 못하고 유족만의 문제로 축소되는 양상이 되었다. 유족에 대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흑색선전은 교묘하고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다.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원한다는 유의 유족들의 의지를 내세우는 논리는 대응논리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거센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7월 30일 재보선은 지방선거와 달리 새누리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세월호 사건 이전부터 야당의 참패가 예상되던 6월 지방선거에서는 세월호 효과가 작용했지만, 7월 재보선에서는 그 효과가 거의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새정치연합은 철저하게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의 모든 분파는 중도층 잡기라는 명목으로 더욱 오른 쪽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노선은 국정원 촛불과 세월호 문제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야당은 세월호를 외면했고 이런 어정쩡한 행보는 선거에서도 참패로 이어졌다. 결국 안철수·김한길 지도부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세월호 문제가 이렇게 가라앉는 것을 막고 나선 것은 결국 유족들이었다. 7월 중순부터 유족들이 수사권·기소권을 진상조사위원회에 부여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보궐선거 참패 이후 들어선 새정치연합 박영선 지도부는 유족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8월 7일 새누리당과 특별법을 전격 합의했다. 유족들의 거센 반대는 세월호 특별법을 다시 정세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운동을 두려워하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야당은 끝까지 수사권·기소권이 부여된 특별위원회라는 유족들의 요구에 무성의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유족과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거기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은 법치주의에 반한다거나, 입법권 침해라는 빈약한 논리로 이를 반대해 왔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부여된 특별위원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절차주의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특별위원회는 (비록 중도에 해체되었으나) 남한 정부수립 초기 반민특위의 전례가 있다. 이미 검경 외에 출입국, 세무 공무원 등에게 수사권을 부여하고 있고, 기소권의 경우에도 개인이 직접 기소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진 부르주아 국가들이 있다. 한국의 ‘특검법’도 기소독점주의의 예외사례다. 국회에서 합의를 통해 통과된다면 입법권 역시 아무 문제될 게 없다. 모든 문제는 정부와 새누리당이 이에 대한 논의를 아예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수사권·기소권이 부여된 특별위원회에 가장 반발하는 세력은 청와대와 검찰이었다. 매 정권마다 집권 중반기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권력 누수 현상을 막기 위해 검찰을 활용해 왔기 때문에 검찰은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국가기관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검찰 장악이 항상 집권 세력의 가장 긴급한 과제가 될 정도로 검찰 권력은 비대하게 커졌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들은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공식 내각보다는 청와대에 측근들로 구성된 그림자 내각을 만들어 행정 권력을 통제해 왔다. 덕분에 청와대와 검찰은 현재 가장 막강한 양대 권력기구가 되어있다. 노무현 정권 이후 이들 사이에 인적 교환을 통한 커넥션이 강화돼 왔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본원리까지 들먹이며 유족의 요구를 반대하는 국가와 부르주아 정당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수사와 기소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려는 검찰과 자신들이 수사대상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청와대라는 두 강력한 국가기구의 결탁에 이와 같은 선례가 언젠가 자신들을 겨눌 수도 있다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염려가 결합한 결과인 것이다.



세월호 200일, 세월호 법은 합의 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9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는 수사권·기소권 논란에 대해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며,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었다고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날인 9월 17일 유족들이 민주당 의원과 술자리를 하다가 대리기사 및 행인들과 시비가 붙는 사건이 터졌다. 정부와 부르주아 언론, 우익단체는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지며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벌였다. 새로운 야당 지도부는 기다렸듯이 다시 여야 합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은 계속 거부했지만 여야 교섭은 유족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행되었다. 

결국 10월 31일, 참사 200일을 하루 앞두고 부르주아 정당들은 세월호 특별법 내용에 합의했다. 합의된 법안 내용은 진상조사를 위해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특별검사 후보군 선정은 유가족들이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후보는 제외하며, 특검 후보 선정에 유족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야당이 마련한다는 것이다. 

11월 2일, 유족들이 결국 합의안에 동의했고 7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미 충분히 싸워온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여론의 악화, 여야의 전 방위적 압박, 대중 운동의 소진 속에서 이것이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야가 합의한 법안을 찬성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으나 특별법이 통과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가족대책위의 성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세월호 투쟁은 이제 끝난 것인가? 물론 기존 국민대책위에 참여하던 단체나 사람들 역시 새롭게 구성되는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권과 야당의 그 동안 행태로 볼 때, 이 위원회에서 제대로 진상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세월호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을 밝혀낼 주요한 증거인 항적마저도 몇 달에 걸친 유족들의 노력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드러난 유일하게 확실한 진상은 이 국가가 진상을 밝힐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있다. 국가로부터 독립된 사회적 진상조사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족들 역시 진상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법 개정 운동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방식은 스스로 진상을 파헤치며 은폐되기 십상인 의혹들에 대한 제기를 대중운동의 요구로 만들어 공식 기구의 조사를 감시하고 압박할 국가로부터 독립된 조사 기관이자 대중적인 투쟁기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 기관을 유족과 운동진영이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면 세월호 투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가 보여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현실

세월호 참사는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터진 터키의 소마광산 참사도 세월호 참사와 무척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안전을 무시한 규제완화와 이윤의 추구가 사고로 이어졌으나 정부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에게 오히려 폭언을 퍼붓고 탄압했다. 사고 직후 선거에서 기존 정권의 승리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기제가 된 것도 닮았다.

이런 사건들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80년대 이후 소위 선진민주주의 국가라는 곳에서도 “법과 질서”의 명목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들이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주적 권리의 후퇴는 더욱 노골적인 이윤 우선의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와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다. 

지난 몇 년 간 유럽과 북미에서 중동과 홍콩에 이르기까지 표면상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 운동들이 대개 자발적인 개인들의 연대투쟁으로 시작되었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투쟁 역시 민주주의 운동의 영역이지만 이 투쟁이 어떠한 민주주의를 제기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국가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진상 규명에 나서는 것, 그리고 이 속에서 직접적으로 제기되는 다양한 의혹들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 즉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적 불안정성의 문제, 비정규직의 문제, 체제의 문제로 확대되고 폭로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엄청난 참사에도 불구하고 별반 달라지는 점이 없을 것 같다는 사실에 허탈해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반복되는 허탈감에 묻히지 않고 정말 새로운 사회로 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운동을 통해 이 사회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시민들, 그리고 사이버사찰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11/13 16:29
  • 수정일
    2014/11/13 16:3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얼마 전 정부의 사이버사철에 대응하기 위해 <사이버사찰긴급행동>이 꾸려졌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져 있는 글을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의 오진호 집행위원이 기고해주었다. 기고에 감사하며, 기고글은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사진 출처: 참세상) [사노신]



세월호 참사. 책임을 묻기 위해 사람들이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라”는 2014년 저들의 외침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응답한 시민들은 유모차를 끌고 나오기도 했고,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기도 했다. 국화꽃을 들고 도심을 걷기도 했으며, 어딘가를 선도투쟁으로 점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청와대 만민공동회와 6.10청와대 만인대회가 있었다.


세월호 정국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예정되었던 탄압이 시작됐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민주적이지 못한 정권은 사회 곳곳에서 비민주의 씨앗을 뿌렸음을 드러냈다. 특히 지난 10월 1일 정진우 동지의 카카오톡 압수수색 규탄 기자회견은 사이버 공간이 얼마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드러냈다.
 

쉽지 않은 기자회견


9월 16일자로 정진우 동지가 카카오톡 압수수색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서를 받았음을 듣자마자 머릿속은 복잡했다. 카카오톡이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라는 이야기들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오고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수사기관이 봤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쁘게 공동으로 대응할 동지들을 만나 논의하고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이 이슈로 어떤 운동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기자회견에 기자가 얼마나 올까?’였다. 당시 사이버망명은 시작되고 있었지만 얼마만큼의 이슈를 만들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충분히 이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대응 역시 일회성 이상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기자회견이 다가오면서 나의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자료를 미리 주면 단독으로 크게 다루겠다는 언론에서부터 기자회견 당일 자리를 가득매운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까지, 언론에서만 보던 ‘열띤 취재경쟁’을 몸으로 느끼며 ‘카카오톡’이 얼마나 중요한 이슈였는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10월 1일, 그 이후


9월 16일 대통령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사이버사찰은 거짓을 말해온 검찰과 다음카카오에 의해 확대됐다. 감청이 불가능하다는 다음카카오의 거짓말에서부터 다음카카오가 대화내용을 선별해서 줬다는 검찰의 거짓말까지. 의혹은 늘어갔고, 불신은 커져갔다. 검찰은 내뱉은 말을 주워담기 바빴고, 10월 1일부로 합병된 다음카카오는 시작부터 떨어지는 주식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결국 다음카카오 이석우 대표는 잔다르크가 되겠다는 기세로 “감청 영장 집행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실정법 위반으로 문제가 된다면 … 벌은 제가 받을 것”라고 밝혔지만 실상은 다르다. 지난 10월 9일 정진우 동지는 다음카카오와 검찰에 “압수수색 집행에 협조한 과정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은 제대로 밝힐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10월 13일에는 항의하러 간 시민들에게 다음카카오 관계자는 “정진우씨에게 다 알려드렸다”며 또 다른 거짓말을 했다.

 

쟁점은 압수수색


이석우 대표의 발언 이후 쟁점은 흐려지고 있다. 검찰총장이 “열쇠공을 불러서 직접 문을 따는 것처럼” 감청을 감행하겠다고 밝히면서 쟁점은 감청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10월 1일 기자회견이 문제제기한 것은 ‘압수수색’이지, ‘통신제한조치(감청)’가 아니다. 제기되지 않은 문제인 ‘감청’으로 쟁점을 흐리는 것은 압수수색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메신저 업체가 수사기관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에는 ‘통신자료’와 ‘통신사실확인자료’가 있으며, 업체에 발부할 수 있는 영장에는 ‘감청영장(통신제한조치)’, ‘압수수색영장’이 있다. 감청의 경우 통신비밀보호법에 허가할 수 있는 사유들이 정해져있어 압수수색에 비해 허가를 받는 것이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그러나 압수수색의 경우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정황이 있고, 해당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에 한정하여” 할 수 있는데 이 규정에 의해 압수수색은 실제로 매우 광범위하고, 손쉽게 발부되고 있다. 

통계를 봐도 압수수색에 대한 문제는 감청 이상으로 심각하다. 다음카카오가 밝힌 바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 요청받은 감청영장은 61건이었지만 압수수색영장은 2,131건이다. 어디까지가 감청이고, 어디까지가 압수수색인지에 대한 기술적 논란도 있지만 핵심은 수사기관이 무분별하게 개인정보와 대화내역까지 사찰해 왔다는 사실이다.

 

정보인권에 대한 천박한 이해를 드러낸 수사기관


사태를 여기까지 악화시켜온 수사기관의 태도는 적반하장이다. 검찰은 사이버사찰을 쟁점화 시킨 정진우 동지에게 “정당한 과학 수사에 대해 근거 없는 비난으로 국가적 혼란이 야기되고 선량한 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며 괘씸죄를 적용하라는 내용의 ‘보석취소 청국 신속결정 촉구 의견서’를 제출했다. 정진우 동지의 카톡 내용을 보수언론에 공개하는 적극적인 언론대응도 불사한다. 개인의 대화내용을 본인의 동의 없이 언론에 공개하는 이들의 모습은 본인들이 정보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갖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전까지 수사기관이 해왔던 수사방식에 비하면 양반이다. 사건의 황당함으로 따져보자면 카카오톡 압수수색보다 더 심각한 사례들이 많다. 일례로 몇 년 전, 전교조 서버를 압수수색 할 때 수사기관은 전교조 서버를 직접 압수하지 않았다. 원격 압수수색이라 하는 신종 수사기법을 사용했는데 그 수사기법을 사용한 곳은 ‘영등포 인근 PC방’이었다. PC방에서 서버의 내용을 통째로 볼 수 있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디지털 공간의 민주주의


이번 사태는 후퇴하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디지털 영역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수사기관은 지속적으로 사이버 영역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국정원 댓글이나 새누리당이 선거대응을 하며 SNS나 일베를 활용한 사례는 이들이 집단적‧ 조직적으로 디지털 공간을 점유하고 싶었음을 보여준다.


메신저는 이미 우리 삶 속으로 깊게 들어와 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각 투쟁사업장 공대위는 단체카톡방을 열어 일정을 공유하고, 투쟁계획을 토론한다. ‘운동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 보다는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선호한다. 정보공유와 고민상담은 인터넷 게시판을 지나 단체카톡방으로 그 공이 넘어왔다. 사이버 망명에 가장 먼저 합류한 이들은 판‧검사, 금융인, 그리고 교수라고 한다. 

이제 정권과 수사기관은 전화통화를 감청하거나 편지를 압수수색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메신저 회사에 팩스 한 장을 보내면 그 사람이 나눈 공적, 사적인 대화 모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단체카톡방에서 정권을 비판하건, 풀리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의혹을 던지건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1세기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사이버 공간이 가장 중요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망명을 넘어선 우리의 행동


‘사이버망명’이 300만을 넘었다. 자국 브랜드 선호도가 유난히 높아 가전제품, 자동차, 심지어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외국산이 끼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제 막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 막 카톡에 익숙해지는데 다들 다른 메신저를 쓴다. 그건 또 어떻게 다운 받냐”며 답답함을 토로한다. 많은 이들이 카카오톡과 작별하고 싶지만 이미 수 십 개의 단체카톡방과,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관계망 때문에 결국 양다리를 걸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도 부지기수다.


이 혼란을 멈추기 위해서는 정보주체인 시민들이 자신의 정보가 광범위하게 수집되고 남용되는 것을 스스로 알고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제도적 대안과 이를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현행법에 따르면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한 압수수색은 형사소송법, 감청과 ‘통신사실확인자료제공’은 통신비밀보호법, ‘통신자료제공’은 전기통신사업법의 적용을 받는다. 디지털시대에 법이 뒤쳐지면서 통일적으로 규율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이메일, 메신저에 일반적인 압수수색과 동일한 요건과 절차가 적용되면서 정보인권은 심각하게 침해받는다. 법제도 개혁이 절실한 이유다.


이에 오랜 기간 정보인권 운동을 해왔던 단체들과 시민사회가 마음을 모아 <사이버사찰긴급행동>을 꾸렸고, ‘사이버사찰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1만인선언’ 등 작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감시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받는 세상을 위해서는 망명을 넘은 실천이 필요하다. 검찰과 권력의 수사권 남용에 맞서 수사기관의 사이버 사찰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수사기관의 정보취득을 엄격하게 제한된 범위에서만 허용되도록 통제하는 ‘사이버사찰금지법’을 만들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오진호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네트워크 집행위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 차라리 혁명의 권리를 허(許)하라!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4/11/13 16:22
  • 수정일
    2014/11/13 16:2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장면 하나. 8월 1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9부(이민걸 부장판사)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 항소심에서 이 의원에게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1심과 달리 내란음모와 내란선동을 구분하여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대부분 유죄로 인정했다. 1심 재판에서 이 의원은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형을 선고 받은 바 있다. 

#장면 둘. 8월 20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사건에 대한 상고심에서 오세철 활동가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원심 중 야간시위에 따른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하 집시법) 위반 부분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이 부분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같은 혐의로 기소된 7명의 활동가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집시법 위반 부분을 제외하고 사노련이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이적단체라는 원심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지난 8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주목할 만한 판결이 잇달아 나왔다. 사노련 사건과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은 또다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두 사건은 앞으로 파기환송심 및 3심 재판을 각각 남겨놓고 있지만 지금의 유죄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언론의 주목이나 여론의 반향도 예전처럼 크지는 않았다. 공안당국에 의해 이들 사건이 처음 발표되고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을 때에 비하면 그 차이는 확연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거대한 우회전을 경험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부터 민주적 기본 권리의 침해 사례가 늘기 시작하더니 특히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이른바 ‘3종 종합선물세트’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즉, ‘종북’ 프레임을 앞세운 ‘종박’ 세력이 ‘종편’의 지원을 받아 정치적 반대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종북 논란은 심지어 세월호 참사 직후에도 불거졌으며 최근에는 일베 회원들의 폭식투쟁과 서북청년단 재건위까지 등장하여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사노련 사건과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은 발생 시점도 그 성격도 실은 판이하다. 서로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유죄 판결의 법적 근거가 통상적인 공안사건과 차별화된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을 지닌다. 이점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의 우경화 징후가 이제는 법제도적 완비까지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더욱 강력한 탄압 무기를 손에 쥘 수 있다는 우려는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가뜩이나 시민들의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그 위험성은 더 커질 것이다. 


죽은 법도 되살려내는 공안당국

국가보안법은 본래 한시적인 법률이었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1953년 형법이 제정되면서 그 내용이 형법에 흡수되어 폐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태생부터 냉전적 반공주의를 내세운 탓에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후 국가보안법은 안보를 이유로 집권세력이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군림해왔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한동안 사문화된 법으로 인식되었다. 노무현 정권 때는 대통령이 직접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제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민주화 시대의 유산자임을 자처하며 기존의 보수진영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직접 충돌하는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강경자세를 고수했지만 사회정치적 사안에서는 이념적으로 유연하게 접근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은 모든 반정부․반체제 세력에 대해 적용되었지만 김대중․노무현의 자유주의 정권 시절에는 그 대상이 주로 통일운동 진영으로 한정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서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으로 내세워졌다. 

하지만 당시에도 한계는 분명했다. 정치사상의 자유는 북한의 체제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적 기본 권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이 더 이상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의 실효성은 점차 의문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 통일운동 진영을 대상으로 여전히 악용되었다는 점은 국가보안법이 집권세력의 교체에 따라 언제든 현실적인 위협으로 되살아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2008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10년 만에 집권에 성공한 보수진영은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되돌리려 하였다. 적용 법률도 집시법과 국가보안법에 그치지 않았다. 2010년 위헌 결정으로 지금은 사라진 ‘미네르바법’이 대표적이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의 인터넷 논객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고 이명박 정권은 옛 전기통신법 47조1항까지 들먹이며 탄압했던 것이다. 운동세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은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고, 자유주의 정권 이전처럼 통일운동 진영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를 표방한 운동세력까지 확대․적용되었다. 사노련 사건은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의 사법부는 그동안 국가보안법 7조1항의 ‘반국가단체’를 북한이라 해석하고, 이를 이롭게 하는 단체를 ‘이적단체’라고 심판해왔다. 그러나 사노련의 경우 북한 체제를 공공연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재판부는 ‘국가변란 선전․선동단체’라는 신조어까지 동원하며 유죄를 선고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새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은 한술 더 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후 무려 33년 만에 내란음모죄를 부활시켰다. 


국가보안법을 형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이 당시 출범 6개월의 신생조직인 사노련을 탄압한 것은 2008년 촛불투쟁 이후 조성된 대대적인 공안정국과 관련 있다. 박근혜 정권이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기획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2013년 집권과 동시에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이 갈수록 커지자 코너에 몰린 박근혜는 김기춘을 내세워 친정체제를 정비한 다음 종북 몰이를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작품이 바로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었다. 

공안당국이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죄로 기소한 것은 상식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도 아닌 내란죄의 부활에 뭇사람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자유주의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의 논리로 형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막상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 터지자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은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이석기 의원을 방어하기는커녕 체포동의안 국회통과에 군말 없이 동조했으며, 이후 재판 결과는 형법상 내란죄가 국가보안법보다 더 강력한 탄압 무기임을 보여주었다. 

이석기 의원은 2심 재판에서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사노련 사건에 적용된 국가변란 선전․선동죄만 해도 처벌의 수준은 비교적 가벼웠다. 구속영장은 두 차례나 기각되었고, 국가보안법을 확대․해석한 탓에 법리적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반면 형법에 근거한 내란죄는 달랐다. 법정구속 상태에서 재판이 시작되었고 무엇보다 사회와 완전히 격리시킬 수 있는 중형 선고가 가능해졌다. 수십 년 동안 죽어있던 내란죄를 부활시킨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형법상 내란죄의 ‘국헌문란’이 국가보안법상의 ‘국가변란’ 못지않게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란 점이다. 특히 내란선동죄는 ‘내란에 대해 고무적 자극을 주는 일체의 언동’만으로도 위법이라 판단한다. 이는 구체적인 행위와 무관하게 국가권력이 누구든 자의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이석기 의원도 내란음모는 무죄지만 내란선동에서는 가까운 장래에 내란 범죄를 결의․실행할 개연성이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우익세력은 물론이고 자유주의 세력은 한 목소리로 현 체제에 도전하는 사상은 모두 처벌 대상일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른바 내란선동죄의 등장은 효력이 줄어 이제 높은 형량을 내리기 힘든 국가보안법을 대체하여 반정부·반체제세력에 대한 더 강력한 탄압 무기가 이미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는 자유

국제언론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 자유는 2004년 26위에서 2014년 68위로 곤두박질쳤다. 최근에는 메신저 사찰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대한 검열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지 오래지만 모바일 메신저까지 실시간으로 감청이 가능하고 실제 피해 사례까지 알려지면서 ‘사이버 망명’은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검열 강화로 국민의 입을 어떻게 해서든지 틀어막겠다는 심산이다. 

이런 양상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의 심화로 반세계화 운동 비롯해 대중투쟁이 활성화되면서 이른바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2001년 9․11테러를 기점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애국자법(정식명칭은 테러대책법)을 선포했다. 부시 정권에서 오바마 정권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자법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화, 이메일, 의료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사법집행기관의 감시권한은 대폭 강화되었으며 심지어 영장 없는 도청까지 합법화되었다. 개인 정보 및 자유, 인권 침해 소지가 다분하지만 미국은 반정부세력들을 겨냥한 공안통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2008년 촛불투쟁 때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노래를 부르며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곱씹어봐야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 속에서는 ‘국가란 무엇인가?’하고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전반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는 어느새 만성화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사회에 불만을 표시하고 불온세력으로 찍혔다가는 징역살이까지 각오해야 하는 세상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시킨 과거 유신 체제의 긴급조치 시대를 떠올리게 하며 시계 바늘을 거꾸로 되돌리고 있다. 

국가보안법 뿐 아니라 내란죄 같은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횡횡하는 요즘, 이제는 우리 스스로 사고의 폭을 확대시켜야 한다.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사회적 생산의 다수를 장악한 이들에 맞서 진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감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기부정에 빠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들만의 철옹성을 구축한 부르주아 정치체제가 더 이상 대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애국자법이 보여주듯 집권세력의 교체가 민주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 자각하는 만큼 힘을 발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국민에게 윽박지르며 자본을 비호하기에 바쁜 현 체제의 ‘정상’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과 대안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사상의 완전한 자유가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로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치사상의 자유는 그것을 실행할 혁명의 권리로 뒷받침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민주주의다. 


김성렬 tjdfuf@jinbo.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