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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세월호 200일, 끝낼 수 없는 투쟁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11/21 20:23
  • 수정일
    2014/11/21 20:2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를 오가던 정기여객선 세월호가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승객 대부분은 수학여행을 나온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속보를 보고 걱정하던 국민들은 곧 이은 전원 구조 보도에 안도했다. 하지만 이는 채 몇 시간도 안 돼 오보로 밝혀졌다. 당일 배 밖으로 탈출한 선원과 승객 172명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이후 몇 주 동안 국민들은 침몰하는 배에 갇혀 수백 명이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다.

295명 사망, 9명 실종, 총 희생자 304명. 세월호 참사는 전국민적인 트라우마가 되었고,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 한다는 환상은 무참하게 깨졌다. 유족과 국민은 진상과 책임의 규명을 국가에 요구했으나 그것은 이 요구에 대해 탄압으로 답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00일이 지났다. 그러나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은 여전히 요원하다. 


국가에 대한 분노 

참사 발생 직후 가장 먼저 사람들을 분노케 한 것은 정부의 무능이었다. 헛된 희망을 품게 했던 전원 구조라는 오보, 시시각각 변하는 구조자와 선객의 수, 구조 작업을 둘러싼 혼란과 잡음, 허무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점차 사라져가는 생존의 희망.

무능과 혼란을 넘은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이 곧 얼굴을 드러냈다. 골든타임이라 불리는 가장 중요했던 사고 직후, 해경은 구조를 돕고자 몰려든 민간 어선과 잠수사들을 막고 자체 계약한 언딘에 특혜를 주고자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구조 활동을 한다는 해경의 선전과 달리 언딘은 구조 업체가 아니라 인양 업체라는 사실, 정부와 해경은 애초부터 구조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더 많은 일들이 드러났다. 불법 증개축된 노후선박에 화물을 과적했고, 참사의 책임자로 공분의 대상이 된 선장은 계약직이었다. 항해를 해서는 안 되는 배가 바다에 나간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본과 국가가 비리의 고리로 결탁한 정황들이 나타났다. 이 참사가 단순한 과실이 아니라 이윤 중심, 안전 무시, 규제 완화가 낳은 사회적 비극이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300여 인명이 수장되는 과정을 무력하게 TV로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은 격분했다. 이 분노는 생존자 구조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바로 정권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으로 터져 나왔다. 5월 3일 열린 첫 번째 집회에 수천 명이 모였다. 다음 주 5월 10일 안산에서 2만 여 명이 모였고, 5월 17일 서울 집회는 5만 명 이상 집결했다.

처음부터 참가자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대중운동은 5월 17일 정점에 오른 뒤 완만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간혹 계기에 따라 다시 확대되는 때가 없진 않았지만 5월 중순과 같은 동력과 열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항의하는 대중행동이 확산되거나 더욱 급진화 되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초기에 집회를 주도한 국정원 반대 시국회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시국회의에는 여러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민주노총을 비롯 규모가 큰 제도권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투쟁을 부담스러워 했고, 이전부터 국정원 반대 촛불에 적극적이었던 통일운동 세력이 집회를 주도해 나갔다.

시국회의 대표를 맡은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공동대표는 5월 3일 집회에서 박근혜 퇴진과 국민이 참여하는 진상규명을 과제로 제기했다.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지만 세월호 투쟁의 요구는 사실 이 두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시국회의와 이후 구성된 국민대책위는 박근혜 퇴진을 공식적으로 걸지 않았고 단지 대중의 반(反) 정권 정서를 이용하려 들었을 뿐이었다. 세월호 집회는 주최 단위들의 단속과 통제 속에 2008년 촛불투쟁 같은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노동자공동행동, 만민공동회, 가만히 있으라 같은 진보·노동운동 좌파들의 운동이 통제를 뚫고 “선을 넘으려는” 시도들을 했지만 큰 흐름을 만들지는 못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5월 17일 집회에서 노동자공동행동이 청와대 행진을 시도했으나 대열을 벗어나 달려간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최 측은 참여자들이 대열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곳곳에서 강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도부의 이러한 태도는 5·6월 국면에서 청와대로 실제로 행진할 의지가 있느냐 마느냐가 쟁점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2008년 촛불 투쟁 때와 달리 청와대로 행진하려는 세력은 시위의 본 대열과 분리되었고, 경찰은 촛불 집회 때보다 훨씬 많은 경찰을 동원해 이를 막았다. 압도적인 경찰 병력을 뚫을 실제 동력을 만들지 못한 채, 청와대 행진은 대중과 유리된 선도투쟁의 반복으로 나타나며 갈수록 소진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대중행동의 정체 속에 선거국면으로 전환

5월 22일, 620여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가하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가 발족했지만 시국회의와 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뚫고 운동을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만민공동회, 가만히 있어라, 노동자공동행동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이 세 가지 흐름이 바라보는 주체는 각기 달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통제를 뚫어낼 만한 동력을 만들지는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 등이 제안한 만민공동회는 사실상 희망버스 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연대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는 청년운동, 노동자공동행동은 전통적인 노동운동 전투파의 흐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투쟁에 계급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8년 촛불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은 세월호 투쟁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노동자공동행동은 현장 순회선동 등의 활동을 통해서 조직노동자들을 이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호응은 거의 없었다. 여론에 떠밀린 민주노총 지도부는 일회성 집회와 투쟁을 하고 책임을 다한 듯이 행동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투쟁이 만들어낸 중요한 변화는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전면에 나선 것이었다. 기존의 조직운동이 제도화되고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터넷과 결합한 개인들의 연대는 촛불투쟁 뿐 아니라 최근 국제적인 대중운동의 주요한 특성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2008년 촛불 이후 트위터를 통한 투쟁사업장 연대운동, 희망버스 운동 등, 유사한 사회적 연대 운동의 흐름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만민공동회 운동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2012년 미국의 아큐파이 운동처럼 자발적인 개인의 집단 운동을 의식적으로 구현하려 시도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아직 계급적 성격을 띄기 보다는 개인으로 존재하는 민주주의 급진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정화는 심화되고 있지만 이는 새로운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아큐파이를 비롯하여 만민공동회 유의 연대 운동이 보이는 한계는 여기에 있다. 만민공동회 운동을 제안한 주체들이 박근혜 퇴진과 진상규명을 넘어 보다 문제의식을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여기로 모여든 자발적 개인들이 원한 것은 청와대로 행진이었다. 

청년운동으로 구성된 ‘가만히 있으라’는 6월 10일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고립된 활동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후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각기 제기한 주체들의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로 간다는 행위가 가장 일차적인 전투성, 급진성의 기준으로 제기된 점은 별다름 없었다.

기존의 주체들이 한계를 보여주는 속에서 열려진 투쟁 공간은 새로운 주체의 확장이라는 문제로 이어져야 했다. 사회의 불안정화에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청소년, 여성, 저임금·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을 주체화 할 수 있는 문제의식의 확대가 필요했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 민주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와 안전의 문제 등 폭넓은 논점을 제기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문제의식의 확대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박근혜 타도 혹은 퇴진이라는 구호는 대중들의 자연스러운 분노의 표현이며 대중투쟁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이 분노를 시스템 전반의 문제로 확대시키는 의식적인 노력은 충분하지 못했거나 투쟁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구성으로 볼 때 한계가 있었다. “여성” 박근혜에 대한 비하나 “어린” 학생 희생자만을 강조하는 보호주의적 인식은 이 운동의 확대에 선을 긋는 인식적 장애물로 기능한 면이 없지 않았다.

국가에 대한 분노는 주로 박근혜 개인에 대한 혐오와 적대로 집중되었다. 중앙행정권력 강화의 산물인 국가권력의 인격화는 그 자체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를 차단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국가원수의 교체가 선거로 이루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는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는 일개인의 교체라는 문제의식으로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 시기가 다가오자 모든 이의 관심은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게 선거로 넘어갔다.



선거와 음모론

대중운동의 하강세가 나타난 5월 중순이 지나면서 지방선거 국면으로 들어갔다. 세월호 충격의 여파가 여전한 와중에 선거 자체가 크게 부각되지 못했음에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야당은 절반의 승리를 맛보았다. 이후 대중투쟁으로서 세월호 국면은 6월 10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소강했고 보궐선거 정국이 급속히 떠올랐다.

미니 총선이라고 불린 보궐선거의 분위기는 지방선거에 비해 훨씬 뜨거웠다. 야당과 진보․노동운동 진영은 선거를 통해 세월호 투쟁을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부르주아 정당에서 이른바 진보정당, 노동자단위까지 모두 자기 의제를 갖고 선거 활동에 집중했다. 

선거 국면의 본격화와 함께 각종 의혹제기가 인터넷 카페와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의혹들은 대개 사고 자체의 원인,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계, 유병언 일가 관련 문제와 사건 당시 대통령의 행적에 관한 것으로 모아졌다. 

의혹들이 확산된 것은 아무 것도 해명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한 정부의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 하지만 다양한 의혹들이 모아지고 정론화 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상에 방치되며 정당한 의혹과 음모론이 뒤죽박죽돼버린 면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유병언 일가와 세모그룹에 대한 의혹들은 희생양을 찾는 정권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있었다. 참사에 대응을 완전히 실패한 정부는 책임을 전가할 곳이 필요했다. 수상쩍은 종교단체와 연결된 세모그룹은 구미에 딱 맞는 희생양이었다. 부르주아 언론들은 유병언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폭로에 나섰고, 과도한 책임 떠넘기기가 행해졌다. 유병언의 수배와 검거작전은 부르주아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다. 그런데 이조차 이 정부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자본가인 유병언과 정부 관료들의 유착관계의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검경은 번번이 유병언 체포에 실패했다. 결국 7월 22일 유병언으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발견되고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는 그 사체가 과연 유병언이 맞는지에 대한 의혹으로 뒤덮였다. 부르주아 언론의 1면은 도피하던 유병언의 장남과 여성 경호원의 관계를 둘러싼 스캔들로 도배되었다. 

잠수함 충돌설이나 국정원 연루설 등은 대선 이후 팽배한 반(反) 박근혜, 반(反) 국정원 정서로부터 사고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별반 호응을 받지 못하던 이런 음모론적인 가설들이 크게 증폭된 것은 이 시기였다. 국정원에 대한 의혹은 7월 25일 유족들이 세월호 안에서 발견한 노트북에서 ‘국정원 지적사항’이라는 문서를 찾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국정원이 세월호의 세세한 문제까지 지침을 내린 것은 확실히 석연치 않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호에 국정원 직원이 탔다거나 핵폐기물을 싣고 있었다거나 하는 의혹들은 근거가 빈약했다. 

사건 당일 대통령의 행방은 7월 7일 국회운영위 질의응답에서 김기춘이 자신도 모른다고 답하면서 처음 불거져 나왔다. 이 역시 처음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7월 18일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정윤회 의혹과 연관시키며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유병언 일가나 국정원, 대통령에 대한 의혹들은 온라인상에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부추기는 소재로 널리 활용되었다.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무수한 음모론 속에 근거가 있는 의혹마저도 더 자극적인 의혹들에 묻히게 되는 효과를 낳았다. 

선거와 음모론과 연동되어 제기되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공격은 흔히 대통령의 여성성에 대한 비하, 이른바 ‘사생활’ 논란 등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세월호 투쟁의 대중적 공감대와 문제의식의 확대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사회적 파업기금’의 권영숙 대표는 5월 말 페이스북에서 ‘특별검사’와 같은 국가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진상을 조사하는 사회적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사회적 진상조사위원회와 같은 형태의 대중운동체가 일찍이 구성되었다면 무작위로 퍼지는 의혹들을 걸러내고 그것을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는 좋은 창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에 대한 청원 요구와 선거 흐름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다양한 의혹들을 합리적으로 규명하는 역할은 운동진영이나 언론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선거 국면이 되자 정권에 불리해 보이는 정보라면 무차별적으로 무한 공유되며 퍼져나가는 형국이 되었다. 


유족들의 선도적인 투쟁과 세월호 특별법 정국

세월호 투쟁을 이끌던 일부 운동세력들이 선거에 집중하면서 운동진영의 관심 역시 점차 줄어들었다.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는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지 못하고 유족만의 문제로 축소되는 양상이 되었다. 유족에 대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흑색선전은 교묘하고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다.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원한다는 유의 유족들의 의지를 내세우는 논리는 대응논리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거센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7월 30일 재보선은 지방선거와 달리 새누리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세월호 사건 이전부터 야당의 참패가 예상되던 6월 지방선거에서는 세월호 효과가 작용했지만, 7월 재보선에서는 그 효과가 거의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새정치연합은 철저하게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의 모든 분파는 중도층 잡기라는 명목으로 더욱 오른 쪽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노선은 국정원 촛불과 세월호 문제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야당은 세월호를 외면했고 이런 어정쩡한 행보는 선거에서도 참패로 이어졌다. 결국 안철수·김한길 지도부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세월호 문제가 이렇게 가라앉는 것을 막고 나선 것은 결국 유족들이었다. 7월 중순부터 유족들이 수사권·기소권을 진상조사위원회에 부여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보궐선거 참패 이후 들어선 새정치연합 박영선 지도부는 유족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8월 7일 새누리당과 특별법을 전격 합의했다. 유족들의 거센 반대는 세월호 특별법을 다시 정세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운동을 두려워하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야당은 끝까지 수사권·기소권이 부여된 특별위원회라는 유족들의 요구에 무성의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유족과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거기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새누리당은 법치주의에 반한다거나, 입법권 침해라는 빈약한 논리로 이를 반대해 왔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부여된 특별위원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절차주의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특별위원회는 (비록 중도에 해체되었으나) 남한 정부수립 초기 반민특위의 전례가 있다. 이미 검경 외에 출입국, 세무 공무원 등에게 수사권을 부여하고 있고, 기소권의 경우에도 개인이 직접 기소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진 부르주아 국가들이 있다. 한국의 ‘특검법’도 기소독점주의의 예외사례다. 국회에서 합의를 통해 통과된다면 입법권 역시 아무 문제될 게 없다. 모든 문제는 정부와 새누리당이 이에 대한 논의를 아예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수사권·기소권이 부여된 특별위원회에 가장 반발하는 세력은 청와대와 검찰이었다. 매 정권마다 집권 중반기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권력 누수 현상을 막기 위해 검찰을 활용해 왔기 때문에 검찰은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국가기관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검찰 장악이 항상 집권 세력의 가장 긴급한 과제가 될 정도로 검찰 권력은 비대하게 커졌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들은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 공식 내각보다는 청와대에 측근들로 구성된 그림자 내각을 만들어 행정 권력을 통제해 왔다. 덕분에 청와대와 검찰은 현재 가장 막강한 양대 권력기구가 되어있다. 노무현 정권 이후 이들 사이에 인적 교환을 통한 커넥션이 강화돼 왔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본원리까지 들먹이며 유족의 요구를 반대하는 국가와 부르주아 정당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수사와 기소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려는 검찰과 자신들이 수사대상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청와대라는 두 강력한 국가기구의 결탁에 이와 같은 선례가 언젠가 자신들을 겨눌 수도 있다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염려가 결합한 결과인 것이다.



세월호 200일, 세월호 법은 합의 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9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는 수사권·기소권 논란에 대해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며,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었다고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날인 9월 17일 유족들이 민주당 의원과 술자리를 하다가 대리기사 및 행인들과 시비가 붙는 사건이 터졌다. 정부와 부르주아 언론, 우익단체는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지며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벌였다. 새로운 야당 지도부는 기다렸듯이 다시 여야 합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은 계속 거부했지만 여야 교섭은 유족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행되었다. 

결국 10월 31일, 참사 200일을 하루 앞두고 부르주아 정당들은 세월호 특별법 내용에 합의했다. 합의된 법안 내용은 진상조사를 위해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특별검사 후보군 선정은 유가족들이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후보는 제외하며, 특검 후보 선정에 유족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야당이 마련한다는 것이다. 

11월 2일, 유족들이 결국 합의안에 동의했고 7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미 충분히 싸워온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여론의 악화, 여야의 전 방위적 압박, 대중 운동의 소진 속에서 이것이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야가 합의한 법안을 찬성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으나 특별법이 통과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가족대책위의 성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세월호 투쟁은 이제 끝난 것인가? 물론 기존 국민대책위에 참여하던 단체나 사람들 역시 새롭게 구성되는 특별조사위원회에 참여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권과 야당의 그 동안 행태로 볼 때, 이 위원회에서 제대로 진상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세월호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을 밝혀낼 주요한 증거인 항적마저도 몇 달에 걸친 유족들의 노력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드러난 유일하게 확실한 진상은 이 국가가 진상을 밝힐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있다. 국가로부터 독립된 사회적 진상조사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족들 역시 진상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법 개정 운동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더욱 효과적인 방식은 스스로 진상을 파헤치며 은폐되기 십상인 의혹들에 대한 제기를 대중운동의 요구로 만들어 공식 기구의 조사를 감시하고 압박할 국가로부터 독립된 조사 기관이자 대중적인 투쟁기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 기관을 유족과 운동진영이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면 세월호 투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가 보여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현실

세월호 참사는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터진 터키의 소마광산 참사도 세월호 참사와 무척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안전을 무시한 규제완화와 이윤의 추구가 사고로 이어졌으나 정부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에게 오히려 폭언을 퍼붓고 탄압했다. 사고 직후 선거에서 기존 정권의 승리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기제가 된 것도 닮았다.

이런 사건들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80년대 이후 소위 선진민주주의 국가라는 곳에서도 “법과 질서”의 명목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들이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주적 권리의 후퇴는 더욱 노골적인 이윤 우선의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와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다. 

지난 몇 년 간 유럽과 북미에서 중동과 홍콩에 이르기까지 표면상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 운동들이 대개 자발적인 개인들의 연대투쟁으로 시작되었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투쟁 역시 민주주의 운동의 영역이지만 이 투쟁이 어떠한 민주주의를 제기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국가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진상 규명에 나서는 것, 그리고 이 속에서 직접적으로 제기되는 다양한 의혹들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 즉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적 불안정성의 문제, 비정규직의 문제, 체제의 문제로 확대되고 폭로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엄청난 참사에도 불구하고 별반 달라지는 점이 없을 것 같다는 사실에 허탈해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반복되는 허탈감에 묻히지 않고 정말 새로운 사회로 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운동을 통해 이 사회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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