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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치인의 자격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4/07/31 13:21
  • 수정일
    2014/07/31 13:2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7월 25일에 발행한 <focus>에 실린 기사입니다.



조희연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던 고승덕을 제치고 교육감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을 미친 건 ‘가족’이었다. 조희연의 둘째 아들은 ‘현실적인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의와 소신을 위해 출마를 결심한 올곧은 아버지’라는 꽤나 통속적인 이야기로 호소했다. 크게 감동적이지는 않았고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글이 빛을 본 건 고승덕의 딸이 공개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고작 11살밖에 되지 않았던 저는 아빠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매년 아버지의 날은 그냥 넘어가야 했지요. 사람들이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또는 뭘 하시느냐고 물을 때마다 기분이 상했고, 결국 모른다고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말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전화와 인터넷이 있었지만, 고승덕 씨는 결코 저와 동생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일을 맞았을 때 전화를 해달라거나 선물을 사달라고 하는 건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식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여 저희의 교육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혈육인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에 교육감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딸의 호소는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격이었다. 그렇다보니 또 다른 보수후보인 문용린의 공작이라는 등의 논란이 불거졌다. 하지만 우리가 고승덕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작의 결과인지를 밝힐 건 없다고 본다. 고승덕은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을까에 대해서도 궁금하지 않다. 개인사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이 문제를 따지는 건 지배자들의 공방에 휘말리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 같은 덕목만이 강조될 것이기에 긍정적이지도 않다.
 

한 집안의 가장이 가족부터 잘 이끌어 나가야지 더 큰 가족인 국가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은 제도정치에 가부장제가 조금도 가리지 않은 민낯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선거에서 가족 얘기가 나오는 건 한국 정치가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많은 부분 그렇다. 박원순의 부인이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 것은 공격당할 빌미가 된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박근혜의 숨겨진 자녀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공격할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이 정치를 하면 부인은 내조를 해야 하는 거고,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애가 있으면 정치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여야와 보수 진보가 따로 없다.

 

그렇다면 가족 이야기가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되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걸까. 가족 이야기가로 제기될 수 있는 건 ‘가장으로서의 책임’이나 ‘일부종사’ 같은 것뿐일까. 가족을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할 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자기 인생에 걸림돌이 되니까 ‘친자’임을 부정하여 그 자녀들이 기본적인 사회보장도 받지 못하게 내버려두는 '코피노'들의 아버지가 그렇다. 예를 들어 서유럽과 북미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떠나온 가족에서 요구되는 돌봄노동의 공백이 그렇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순전히 개인의 선택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 하거나 자신이 돌봐야 하는 관계는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그 관계는 그 사회가 얼마나 공적으로 이를 짊어지려 하는지에 따라서도 다르고 개인이 얽혀있는 가족관계에 따라서도 다르다. 복지제도를 통한 사회적 부담이 약할수록 돌봄의 책임은 전적으로 가족에게 부여되고, 이를 지탱하는 돌봄노동은 대부분 여성들이 담당하게 된다.부유한 국가의 소득이 안정된 가구는 이주여성을 고용하여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주여성이 떠나간 자리에서 가족에게 요구되는 돌봄노동은 다른 여성에 의해 채워지거나 공백으로 남게 된다. 이는 돌봄의 책임에 대한 자기 삶의 선택의 여지도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국가 간의 위계질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뜻 같아 보이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실제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돌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선택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필리핀에 있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남성에 대해 ‘가장의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여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가족 생계비를 벌기 위해 서유럽과 북미로 이주한 여성들이 자신에게 지워진 짐을 던지고 적극적으로 자유를 찾아나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오히려 돌봄의 책임을 다 하고 싶어도 다 할 수 없게끔 강제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책임을 충분히 질 수 있음에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선택은 순전히 개인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부장제가 어떤 관계 속에 지탱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돌봄에 관하여 이루어지는 선택은 타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적 영역이 아니다. 돌봄을 둘러싼 누군가의 선택이 보여주는 사회적 관계가 있다. 이 사회적 관계는 공사 이분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돌봄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드러내는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고 정치적인 것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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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또 하나의 약속, 또 하나의 투쟁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4/07/31 13:08
  • 수정일
    2014/07/31 13:16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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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5일에 발행한 <focus>에 실린 기사입니다.


최근 삼성이 반도체 피해자들의 피해를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고 삼성서비스지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인정받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반노조 기업 삼성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물론 반올림을 비롯한 노동사회단체들과 활동가들,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에 의한 것이지만 삼성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이나 <탐욕의 제국> 같은 영화들도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실제 노동문제를 다루는 상업영화가 극히 드문 현실에서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 문제라는 노동운동에서조차 주변화 된 투쟁을 상업영화의 틀에서 풀어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 대한 상업적·비평적 평가는 그다지 높지 못했다. 
 

이중의 무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어 여러모로 <또 하나의 약속>과 비교된 <변호인>은 제작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늘어나며 상영관이 확대된 끝에 결국 천 만 영화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자신이 한 말처럼 시장의 힘이 권력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약속>은 별다른 외압이 없다는데도 교묘한 방식으로 상영 확대가 저지되었다. 이런 현실은 지금 우리가 자본의 뒤에 국가가 있던 시대에서 국가의 뒤에 자본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명쾌히 보여준다. 

삼성이 가진 힘은 막강하다. 그리고 한국이 삼성공화국이라고 불린 정도가 된 데는 삼성에 대해 엄청난 특혜를 베푼 노무현 정권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후퇴, 비정규직의 양산 역시 노무현 정권 시절에 더욱 심화되었다. 

<변호인> 같은 영화가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망각을 요구하며 한 개인의 신성화에 기여하는 정치적·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태도를 보인 반면,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문제와 그에 투쟁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러한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상업적 뿐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씨네21>은 창간 19주년 특집으로 1995년에서 2013년까지 최고의 데뷔작을 뽑았는데, <변호인> <감시자들>에 이어2013 2위에 올랐다. 실제로 <변호인>은 작년 말 올해 초 비평담론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였다. 

이에 반해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비평적 반응은 의례적인 치하 외에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다. 전반적인 반응은 의도는 좋지만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라는 것 같다. 이는 <변호인>에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적어도 <변호인>에는 완성도에 대한 지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저널 평단에서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게다가 자본의 탄압을 받고 있는 영화에 평가의 잣대를 들이 밀어 괜히 초칠 필요는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들이 과연 정당한지는 의문이다. <또 하나의 약속>이 영화적으로 별로 언급할 게 없는 영화라는 인식에는 영화 자체 이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 괄호를 치고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수 있다. 
 

또 하나의 약속 vs 변호인


몇몇 평론가들은 <변호인>에서 인물들이 평면적이라고 지적하지만, 사실 <변호인>은 상업영화가 세련되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관객들은 몇 가지 영화적 장치들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곽도원이 분한 차동영 경감의 과거, 조민기가 분한 강 검사의 출세지향성, 송영창이 분한 판사의 속물성을 구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이러한 구체적인 인격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그 어떤 액션 영화 부럽지 않은 박진감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변호인>은 통속적으로 보이지 않는 통속적인 영화이며 최근의 저널 평론은 이를 높이 사는 경향이 있다. 

<또 하나의 약속>은 훨씬 노골적으로 통속적이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 대한 평자들의 주저는 아마도 이 때문일 텐데, 통속적이면서도 평면적이라는 것은 결국 이른바 완성도 낮음, 만듦새가 허술해 보인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생각보다 슬프지 않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실제로 이 영화는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러닝타임의 약 4분의 1 정도 지점을 빼면 신파적 소재에 비해 감정적으로 상당히 밋밋하다. 영화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할 재판 장면 역시 별로 극적이지 않다. 살아 움직이는 <변호인>의 법정과 달리 삼성 측 변호사는 사무적이고 법정 분위기는 건조하다. 

<변호인>의 생동감 넘치는 악역들에 비해 <또 하나의 약속>에서 그나마 가장 일관된 악역은 이보근 실장인데 야비해 보이긴 하지만 삼성이라는 거대한 악의 대변자로 보기에는 왜소한 인물로, 어떤 구체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인물에 가깝다. (심지어 7년의 세월 동안 이 사람은 계속 실장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영화는 일반적인 관객들에게 재미없고 평범한 영화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정말 재능과 자원의 부족인지 의도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겉보기에 약점으로 보이는 이런 변들이 오히려 영화의 내적 이야기 구조와 관객의 지나친 동화를 방지하고 삼성과의 대결이 인격적 개인들의 충돌이 아니라 삼성이라는 시스템과 싸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면이 있다. 

예컨대 <변호인>은 스스로 실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렇게 창출된 현실성은 판타지와 실제의 경계를 흐리고 사실로 믿고 싶은 관객들의 욕망에 부응하는데 기여한다. 영화 끝부분에서 스스로를 실화로 선언해 버리는 것은 이러한 동일시를 완성하며 다양한 극적 장치들은 역사적, 비판적 사고와 성찰의 계기보다는 영웅주의에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적 과잉 없이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배경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는 <또 하나의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목적하는 바에 적합한 연출이며 현실에 대한 정치·윤리적인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이 영화가 실화 그대로를 옮긴 영화는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변호인>의 태도보다는 현실에 대한 우월한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오는 크레딧 신이 흔히 비교되고 있지만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에 대한 조작과 개인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반면 <또 하나의 약속>은 영화의 창작에 대한 능동적인 사회적 참여를 반영하고 있다는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물론 <또 하나의 약속> 역시 분명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갖고 있다. 노무사와 같은 전문인에 대한 의존성, 대중투쟁이 아니라 소수 피해자들의 법률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은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자체의 한계에 가까울 것이지만, 재판 과정에서 삼성과 국가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체제의 제도적 공정성에 대한 환영을 깨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 역시 별로 지적되지 못했다.

 
문제는 완성도가 아니다

 
<또 하나의 약속>이 대단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한 비평적 침묵은 이런 영화를 평가할 비평적 틀이 부재한 주류 비평담론의 협소함을 보여주기 충분하다. 

1970년대 유럽에서 맑스주의적인 영화이론과 평론이 주류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대개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정치성보다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주목했다. 이런 비평적 관점은 60년대 이후 급진화 되고 있던 좌파 모더니즘 영화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고 보는 창작 및 비평의 시대가 오게 했다. 이 시대의 비평과 창작 경향은 헐리우드 고전 영화의 매끄러움보다 텍스트 내부의 균열과 충돌을 보려고 했으며, 때문에 기존 영화의완성도라는 잣대에 흠집을 내고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정치적으로 영화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에 따르면 A범주의 영화들은 내용과 형식 모두 주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업 영화, B범주는 내용과 형식 모두 급진적인 영화, C범주는 내용은 모호하나 형식적인 면에서 관습성을 깨고 있는 영화, D범주는 저항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형식은 관습적인 영화, E범주는 겉으로 볼 때 내용과 형식 모두 관습적이지만 이데올로기적 균열성을 스스로 폭로하는 영화로 나누었다.

이런 비평적 기준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된 영화는 B범주였고, 가장 낮게 평가된 것은 A범주와 D의 범주의 영화였다. 독재정권의 정치적 음모를 폭로하는 그리스 출신 감독 코스타 가브리스의 <계엄령> 같은 영화들은 전형적인 D범주로 분류되며 가장 큰 피해자가 됐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변호인>이나 <또 하나의 약속> 같은 영화도 모두 D범주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비평담론에서 <또 하나의 약속> 같은 영화가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이런 심오한 논리의 내적 정치성 때문이 아니라 통칭 완성도라 불리는 다소 애매한 포괄적인 기준에 의해서이다. 여기에서는 캐릭터와 내러티브의 깊이와 복잡성, 구체성들이 중요시 되는데, 충분히 영리한 상업 영화라면 그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비평담론과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현된 현실성이 오히려 더욱 인위적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텍스트의 관습적 형식 자체에 내제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던 시기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잣대가 통용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텍스트의 전복성에 집중하는 70년대 좌파적 비평논리도 종국에는 작가주의 같은 전통적 비평담론에 포섭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텍스트에 전복성을 부여하는 예술적 주체로서 작가개념이 살아남을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다르 같은 좌파 모더니스트가 천재적 예술 작가로 신화화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허나 비대한 제도적 시스템으로 존재하는 영화라는 특수한 문화상품에 있어 전복성은 텍스트 내부보다는 오히려 생산과 유통, 소비의 변화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업전야>의 경우, <카이에 뒤 시네마> 식 분류로는 역시 D범주 영화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파업전야> 같은 영화가 갖고 있는 중요성은 영화과 대중운동과 관계 속에 생산되고 유통되고 관람되는 방식에 있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여러 가지 내적 한계들이 있지만 생산과 유통의 방식에서 관객을 또 하나의 주체로 만들어 내고 있으며, 노조나 운동단체에서 집단적인 관람 운동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에서도 주변부였던 반도체 공장의 실상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영화가 이미 생산되는 초기부터 제작에 참여하고 유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일고 그것이 실제 관람과 토론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분명 텍스트 자체의 전복성보다 더 높은 전복적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 외적 부분에 대한 평가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윤리성과 정치성이 예술성과 완전히 자율적인 것인가

 
7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판적 관점은 작가주의와 같은 전통적인 예술관을 벗어나는 면이 있었다. 창작자보다 관람자들의 능동적 문화를 중시한 컬트 무비 같은 말이 비평 용어로 등장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그러나 서구에서 80년대 대중운동의 퇴락과 전반적인 보수화를 겪으며 좌파 모더니즘은 쇠락했고, 다시 미학적 자율성이 강조되고 낡은 작가주의가 부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90년대 형성된 미학적 자율성에 대한 편향은 일정 정도 예술성과 완성도를 등치시키는 경향으로 흘러갔으며, 이는 이른바 정치적인 영화들에 대한 평가에 난점을 드러낸다. 

재작년에 개봉된 <26>의 경우에도 완성도 논쟁을 피할 수 없었는데, <26>의 정치적 내용에 대해 전혀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영화들을 일괄적으로 완성도라는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26>에 대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라고 맹렬히 비판했으면서 <또 하나의 약속>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의례적인 찬사를 보내는 것도 기묘한 일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상업 영화의 틀 내에서 사회운동이나 노동자를 다룬 영화들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의 이면에 정치 과잉의 시대에 대한 환멸로부터 미적 영역으로 이동해간 사람들의 기여가 컸다는 측면이 일정정도 작용하고 있다. 이는 영화의 비평과 흥행에 있어서 어떤 영화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가에 꽤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호인> (찬성이든 반대든) 이슈를 타는 것에는 영화 자체적인 부분보다는 대부분 좌파 자유주의나 중도좌파인 주류 비평담론의 정치성과 연관이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비평담론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계급적 위치, 정치적 입장에서 비평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26>에 대한 혹독한 평가는 이 영화의 (자유주의자들이 매우 혐오하는) NL적인 정치성이 주류 비평담론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거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차라리 완성도보다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비판이 가해졌어야 했다. 

영화에 대한 평가와 담론화에 이미 정치적 태도가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평가에 있어 애써 정치를 배제하는 태도는 이상하다.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태도와 생산과 유통에서 주체들과 맺는 관계와 효과가 이론적·비평적 틀 내로 들어와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정인 wjddls72@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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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노동자신문 연속 워크샵 #4 프레카리아트

지난 번에 연기되었던 사노신 공개워크샵 네번째 # 프레카리아트 ^^ ;;;
이번에는 연기되지 않을 거예용 ㅎ

함께 읽을 글

* 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 새로운 위험계급> 1장
* 이진경, '프롤레타리트와 프레카리아트', <마르크스주의 연구> 10권 3호
* 곽노완, '노동의 재구성과 기본소득', <마르크스주의 연구> 10권 3호
* 이광일,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과 '해방의 정치'', <마르크스주의 연구> 10권 3호
* 이정인, '탈공업화와 프레카리아트', <붉은글씨> 창간호

- 참여하실 분들에게는 사전에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 문의 : 010-7647-7076/ sanosin.jinbo.net
- 7월12일 토요일 오전 11시 사노신 사무실 (5호선 영등포시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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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노동자신문 연속 워크샵 #4 프레카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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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인, '탈공업화와 프레카리아트', <붉은글씨> 창간호

- 참여하실 분들에게는 사전에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 문의 : 010-7647-7076/ sanosin.jinbo.net
- 6월12일 목요일 저녁 7시 사노신 사무실 (5호선 영등포시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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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혹은 침묵에 대해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4/03 11:09
  • 수정일
    2014/04/03 11:09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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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투쟁의 과정과 마무리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과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투쟁을 함께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가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논의들은 중요한 사안임에도 몇몇의 활동가들 사이의 논의로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는 사람만 아는 내막은 공개적으로 작성되는 글의 몇 문장에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은 평가 중에는 집행부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평가를 자제하자는 입장은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맞물려 있다. 이는 최근 철도파업을 비롯한 몇몇 노동조합 투쟁에서 나타났다.
 

엇갈리는 평가

역대 최장기인 23일간의 철도노조 파업이 마무리된 작년 12월 30일, 운동진영에서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렸다. 한편에는 철도노조 지도부의 합의과정과 그 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회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의 구성이라는 합의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점, 징계를 비롯한 후폭풍에 대해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점, 보수정당들과의 합의이기에 투쟁의 방향이 왜곡됐다는 점, 일부 철도노조 임원을 제외하고는 조합원을 비롯하여 연대한 수많은 시민들도 합의에 이르는 논의과정을 전혀 몰랐다는 점, 조합원의 의견 수렴과정 없이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파업철회를 선언했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다른 한편에는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불과한 비판을 자제하자는 견해가 있었다. 그 어떤 현실적인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는 점, 오히려 이러한 평가가 다시 시작될 투쟁을 앞두고 조합원들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 등을 제기했다.

23일간의 철도노조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누가 생각해도 집행부는 막막했을 것이다. 물론 국민적 지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다. 파업 또한 조합원 이탈이 크지 않은 수준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그 어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집행부로서는 파업의 힘이 꺾이기 전에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현실화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새누리당의 김무성이 계기를 열어준 것이다. ‘필공’ 파업으로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기회를 통해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민주노조의 민주주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합리적인 판단을 한 집행부를 비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위원장은 노동조합의 대표로서 합의의 체결권자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노조 위원장이 노동자투쟁과 거리를 두고 자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합의서에 도장 찍기를 바란다. 그러나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는 총회민주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위원장이 합의를 했더라도 조합원 총투표에서 통과가 되지 못한다면 자본과 정권이 뭐라고 말하건 상관없이 합의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세우는 것이 민주노조 운동의 원칙이었다.

여전히 위원장이 사측과 ‘잠정합의’를 하고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최종 합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 노동조합의 일반적인 과정으로 남아있는 것 또한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조 위원장의 법적인 체결권과 노동조합 민주주의 사이에서의 갈등은 노동조합 투쟁을 둘러싼 평가의 차이를 불러오는 주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수많은 노동조합 투쟁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아주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였다. 조합원들의 투쟁이 뻗어나가는 상황에서 노동조합 집행부의 일방적인 결정(직권조인)으로 그 기세가 꺾이고 투쟁의 전선이 급격히 후퇴하는 상황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98년 민주노총의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직권조인에 대한 투쟁이 있다. 1996~7년의 총파업 투쟁 이후 1998년 민주노총이 노사정협의체에 들어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하는 직권조인을 했을 때 대의원들은 현장의 분노에 따라 그 집행부를 끌어내리고 그 결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 꾸려진 총파업 투쟁 비대위마저도 “노사가 공멸할 것이라는 국민의 우려와 걱정을 받아들여 파업을 철회”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노총 내 ‘현장파’가 현장의 전투적 투쟁을 기반으로 관료주의와 의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로 결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노동조합 차원의 전면적 투쟁은 2002년 발전파업을 마지막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제 관료주의의 문제는 주로 정규직 노동조합 중심 노동운동의 내부가 아닌 사내하청, 비정규직 사업장, 장기투쟁사업장과의 관계 속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집행부 혹은 상급단체가 자신의 권한으로 ‘관리가 안 되는’ 비정규직/장기투쟁을 회피하거나 가로막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류기혁 열사투쟁에 대한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의 회피,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투쟁 중단 종용, 기아차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통제를 위한 정규직 노동조합과의 1사1조직 강제, 위로금에 투쟁을 정리한 금속노조의 하이닉스 투쟁 직권조인, 원칙을 유지하며 투쟁하는 재능지부와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분회 조합원에 대한 상급단체의 탄압 등 그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과거 ‘현장파’로 분류되던 현장조직들 또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여 구분의 의미가 없어졌다.
 

사라진 문제제기

이런 점에서 이번 철도파업은 한동안 뜸하게 언급되던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투쟁이다. 그만큼 대규모 정규직 노동조합이 오랜만에 보여준 강력한 투쟁이었기에 비판적 평가를 자제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철도노조 집행부의 결정은 문제가 많았다. 합의과정에 대해 전혀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결정 이전에 토론을 할 수 없었다. 파업 철회는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지침으로 내려졌다. 이는 직권조인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철도노동자와 민주노총 조합원, 그리고 철도파업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12월 19일 집회에서 임원과 명망가들, 심지어 민주당 인사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을지언정 조합원을 비롯한 여타 참가자들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 아닐까. 파업을 결의하고 앞으로 투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공권력의 침탈이 있더라도 조합원 총회를 열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투쟁과정을 집단적 논의와 결정의 장으로 만들어가려는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노동조합 집행부가 어쩔 수 없는 판단을 했다는 주장은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없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주장은 조합원들을 투쟁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위원장에게 조합원들과의 대화 없이 투쟁의 방향을 정하고 합의를 체결할 수 있는 제도적 권한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권한은 투쟁을 확대해나가자는 경향에 맞서 투쟁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노동조합 집행부의 판단은 노동조합의 상태와 조합원의 정서를 합리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은 노동조합 운동이 빠지기 쉬운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확대되어야할 노동자 민주주의

최근의 노동조합 투쟁에서 드러나는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노동조합 내부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노동조합 투쟁은 과거에도 항상 단사 차원의 문제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지금 상당수의 투쟁사업장은 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을 이끌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철도파업처럼 노동조합 외부에서의 연대와 지지의 수준이 높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철도노조가 여론의 압도적지지 속에 파업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점이나, 민주노총이 자체적으로 파업의 힘을 갖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총파업을 계획하는 것에서 보듯이 투쟁의 힘 중 상당부분은 민주노총 외부에 있었다. 여론의 지지가 상당한 것을 넘어 다양한 실천적 연대가 이뤄졌다. 이런 경우 어떠한 소통도 없이 누군가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투쟁이 마무리 되는 것에 의아해할 사람들은 단지 조합원들만이 아니다. 투쟁이 노동조합 질서를 뛰어넘어 이루어지고 있다면 민주주의 또한 그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과거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이다. 민주노총이 의회정당을 만들어 의회에 들어가고 나아가 집권하는 것이 노동자 정치의 방향이라며 현장에서의 노동자투쟁은 가로막는 것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 있었다. 그 이후 파업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투쟁을 관료적으로 중단하거나 가로막은 이유로 ‘선거’, ‘국민’, ‘여론’이 제시되었다.

표를 위해 투쟁하지 말자는 주장은 노골적으로 제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노동조합 외부에서 지지와 연대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었으나, 그 지지와 연대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민주노총과 철도노조였다. 그들은 소통의 대상으로 조합원도 연대세력도 아닌 자본가 정당의 우두머리를 택했다. 이는 민주노총 ‘정치’가 계속해서 민주당에 종속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단지’ 철도노조가 더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었는데 집행부가 이를 가로막아서 망쳤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투쟁의 힘이 아무리 떨어지고 노동조합이 궁지에 몰려도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확장하려는 가운데 정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 민주주의의 문제는 집행부만 잘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관료주의와 조합주의의 벽을 넘어서는 힘으로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조합원을 비롯하여 함께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 힘이야말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비판이다.

김사자 (saja-kim@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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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4/04/03 11:02
  • 수정일
    2014/04/03 11:04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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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행동만이 고발되어야 하고, 말은 처벌되지 않는다”고 썼다. 당시로서 극히 혁명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이것은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다. 놀랍게도 고대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나오는 말이다.

타키투스가 이 말을 한 것은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존엄훼손법(maiestas)을 부활시킨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따르면 제정 이전에 존재하던 존엄훼손법은 본래 모반, 폭동을 비롯하여 로마 시민의 존엄을 손상시켰다고 판단되는 행위 일반에 대한 법률이었으며 행동만이 고발되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키투스, <연대기> 1부 72)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법을 부활시키면서 황제와 그 일가에 대한 비판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이 존엄훼손법은 이후 유럽 법에서 역모죄를 다루는 모든 법률의 시초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을 문제 삼을 뿐 말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 굳이 현대 민주주의를 논할 필요 없이 제정 이전의 고대 로마에서도 상식으로 통용되던 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심에서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내란음모죄라는 것은 결국 로마의 존엄훼손법을 이어 받은 서구의 반역법(treason law)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판결은 전근대 사회에서 역모죄가 흔히 그랬듯이 한 개인에게 12년 형이라는 중형을 내린 것치고 근거가 매우 박약하다. 유일한 증거로 제출된 녹취록에 대한 국정원의 날조가 재판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보다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이 법 자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기부정과 퇴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하는 역모죄

서구 국가들에서 반역법의 전통은 제정로마시대 존엄훼손법의 후손이며 군주제의 유산이다. 이는 아직 군주제가 남아있는 나라들에서 이 법이 주로 국왕과 왕족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실 이 법은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사극에서 보게 되는 역모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제 왕권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역모죄는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누구든 역모죄로 잡혀간다는 것은 혐의만으로 일족의 멸문을 각오해야 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별 근거 없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관련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인 다음 고문으로 쥐어짠 자백을 통해 죄를 입증했다. 그러므로 모의 혐의 자체가 죄가 되는 역모죄는 이른바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정치·사상의 자유, 증거주의, 무죄추정의 원리 등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따라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 이후 서구국가들에서 본래적 의미에서 반역법은 사문화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대개 전쟁 시 적국에 대한 부역행위를 다루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이 법이 적용된 사례들은 대부분 전시 부역행위나 간첩 행위에 제한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21세기 들어 호환·마마처럼 이미 사멸된 반역법이 부활하고 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쟁이 잇따라 선포되며 반역법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2001년에는 취재를 위해 핵발전소 사진을 찍던 기자가 전시에 국가 기간시설 사진을 찍는 것은 반역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구금을 당한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고, 근래에는 위키리크스에 군사기밀을 적용한 브래들리 매닝이나 미국 국가안보국의 민간인 감시 행위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우든에 대해 반역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정치·사상의 자유와 반란의 권리

내란음모죄 같은 반역법의 부활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기 부정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야말로 그 시작부터 정부에 대한 반란의 권리를 국민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사상의 자유가 내면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석기와 진보당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사상을 용인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스피노자 같은 인물이 자유로운 국가를 꿈꾼 것은 중세의 억압적인 잔재들 속에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수백 년간 전쟁과 반란과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피를 흘려야 했다.

스피노자와 동시대인이자 근대 부르주아 정치사상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존 로크는 이미 피통치자들에게 반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이 계약에 의해 위임한 것으로 보았으나, 절대왕정을 옹호한 홉스와 달리 국왕에 의해 그 계약이 파기될 때 피통치자들에게는 국왕을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선출된 대표들이 방해를 받아 의회를 열지 못할 때, 외세가 국민에 대한 권력을 부여받을 때, 선거제도나 절차가 국민의 동의 없이 바뀔 때, 법치가 유지되지 않을 때, 정부가 국민들에게서 권리를 빼앗으려고 할 때 피통치자들은 반란을 일으킬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부르주아들은 결국 국왕에 대해 반란자가 되어야 했으며, 반란권의 인정은 따라서 근대 부르주아 정치사상에 태생적으로 깊이 각인돼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 가장 멀리 관철되었으며 아직까지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미국 헌법에서는 수정헌법 2조를 통해 여전히 인민이 무장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형식만 남아 우파 민병대와 보수적인 총기보유법의 근거가 되어 자유주의자와 좌파의 골칫덩이가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대혁명 이후에 1793년 산악파가 제출하고 국민공회가 채택한 프랑스 헌법에서도 정치·사상의 자유와 함께 “억압에 대한 저항은 사람의 다른 여러 권리의 귀결(33조)”이며 “정부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반란은 인민과 인민의 각 부분에게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불가결한 의무(35조)”라며 국민들의 저항과 반란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

반란의 권리가 인정된다고 한다면, 반란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의하고 선동해야 한다. 그럼 정치·사상의 자유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원칙이다. 예컨대 미국의 수정헌법은 제 1조에서 “의회는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못 박고 바로 그 다음 조항에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 두 권리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근대 인민혁명에 의해 쟁취된 정치·사상의 자유란 단지 양심의 자유, 내면의 자유로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반란이 대중의 동의를 받지 못해 실패할 경우 처벌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그리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국의 어느 공안 검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단지 모의하고 선동한 것만으로 처벌 받는다면 이는 결국 전제정치로 돌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퇴행

근대 초기 부르주아 정치 사상가들이 꿈꾼 세계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의 과두제 국가였다. 오늘날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했다는 많은 정치사상가들 중 스피노자를 제외하고 민주정이라는 말을 주요하게 언급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마 스피노자조차도 저잣거리의 갑남갑녀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국가를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로크는 <통치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democracy'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딱 세 번 나온다.) 로크가 겨냥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왕의 자의적 권력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법률과 절차를 중시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왕과 귀족의 권력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보편적인 인권에 호소하여 하층민들의 분노를 업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고대 아테네 이래 천 년 넘게 잊혀졌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다시 대중적인 용어로 부활했다.

그러나 일단 지배계급이 되고 나자 부르주아 역시 군중에 대한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된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들을 끊임없이 제한하고 과두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국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무기로 사용되던 법과 절차는 차츰 대중의 지배를 통제하는 기제로 변화했으며, 선거권은 재산을 가진 남성에 한정되었고 여성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애초부터 시민이 아니었다. 노동계급과 여성들은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근대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 난지 한 세기가 지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가 돼서야 점진적으로 선거권을 쟁취했다.

19세기 후반 부르주아들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막 본격화 되고 있던 노동운동과 혁명사상의 결합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8년에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여 십 년 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불법으로 묶어 두었으나 사회민주당과 노동운동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다. 1차 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보통선거제가 일반화된 뒤, 부르주아는 몰락하는 소부르주아의 분노와 광기의 표현인 파시즘에 의존해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억압했다. 그러나 파시즘이 결국 2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일으키고 자멸하자 오히려 파시즘의 부활을 핑계로 정치·사상의 자유의 제한을 제도화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투쟁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체제로 만들어 그 외에 다른 체제들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파시즘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곧 명확해졌다. 1940년에 도입된 스미스 법은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가르치거나 옹호하는 행위, 그것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모의하는 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곧바로 미국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에 이용되었다. 이는 수정헌법 1조를 명백히 위배하는 것이었으나 지배계급은 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된 공포를 조장하여 연방대법원을 통해 스미스법을 합헌으로 판결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몰락하자 더 이상 동구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역사가 종말했다는 부르주아들의 찬가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해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적 반정부 투쟁이 등장했다. 99년 시애틀 투쟁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2001년 7월 이탈리아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점점 심각해졌고, 이에 대해 미국 정부와 서유럽 국가들은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21세기에 전근대적인 역모죄, 즉 반역법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소련과 동구권 붕괴 이후 반정부 운동을 억압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도구의 필요성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9·11 이후 미국정부는 테러의 위협을 통해 공안기관을 강화하고, 항상적인 전시상황을 조성해 공안정국을 조성했으며,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는 “애국자법” 같은 새로운 악법들을 대거 도입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이 더 이상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의 약발이 떨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이 때문에 사노련과 해방연대에 대한 재판에서 검찰은 국가변란선전선동목적 단체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냈지만 처벌의 수준은 가벼웠다. 그러나 내란음모죄의 부활은 북한과 연계가 없으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와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최근의 국제적 대중투쟁에서 민주주의가 이슈로 부각되는 상황은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후퇴에 맞선 투쟁에 있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운동진영은 자유 “내란음모”를 내세운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에 대한 공격에 쉽사리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보당 사태는 그들이 내세우는 “합리적 진보”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었다. “헌법 밖 진보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민주주의는 지금 같은 광범위한 민주주의 후퇴의 시기에 고대 로마에서 통용되던 원리조차 방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태영 (picoll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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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방선거, 정치재편? 새로운 정치가 열릴 것인가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4/04/03 10:50
  • 수정일
    2014/04/03 10:5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2월 25일은 박근혜 정부가 집권한 지 1년 째 되는 날이었다. 이 날 시청광장에서 열린 국민총파업엔 4만명이 몰려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연말에는 철도노조의 파업과 함께 공공부문 민영화가 이슈가 되면서 전국의 대학가에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 열풍이 들끓었고, 엄청난 여론의 지지 속에 철도도노조의 파업은 사상 최장기간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50%대로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주변 인사문제나 영어몰입교육 등으로 곤혹을 겪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내내 조용하게만 지냈던 것은 아니다. 대선 직전 불거졌던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가 한 해 내내 정권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고, 복지국가 운운하며 대표적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기초연금제도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자 대중들의 시선은 싸늘하게 식어버리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전 내세웠던 중요한 슬로건 두 가지가 바로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이었는데, 지난 1년 동안 이 공약과 관련하여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민주화는 1997년 IMF 이후 더욱 공고해진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뒤엎어야만 이룩할 수 있는 문제이고, 세수를 늘려야만 하는 복지정책은 조세저항이라는 국민 의식의 개선과 내수 진작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두 가지 문제 모두 엄청난 의지를 갖고 있어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 박근혜가 경제 양극화로 허덕이고 있는 서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일이라고는 반공 보수주의자들의 심리를 겨냥한 공안탄압 뿐이었다.
 

공안탄압으로 얼어붙은 야권의 무능력한 모습들

이명박 정부 이후로 급속하게 진행된 민주주의의 후퇴는 박근혜가 집권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죄 적용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심판 청구, 공권력을 앞세운 민주노총 침탈 등 박근혜의 공안탄압은 역사 교과서에 남겨야 할 정도로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애초의 의도대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공안탄압에 반대하는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진영,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이 간간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도 했지만, 높은 지지율을 기반으로 박근혜가 휘두르는 칼자루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아직까진 집권 초기라고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야권의 무능력으로 인해 대중들의 불만을 조직해 낼 대안세력이 부재하다는 점 등이다.

진보진영의 취약성이야 워낙 고질적이고 오래된 문제이기 때문에 일단 차치하더라도, 지난 대선에서 48%의 지지율을 이끌어냈던 민주당의 행보는 어떠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현재, 안철수가 민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기 전까지 민주당의 지지율은 고작 10%대에 불과했다. 대선 이후 지지자들이 대거 빠져나간 것이다. 이는 민주당의 이중적인 모습과 무능력함에서 기인한 것인데, 박근혜가 집권한 이후 민주당은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우며 야권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통합진보당을 제물로 삼아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어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민주당의 이중성은 지난해 연말 박근혜의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론’이라고 주장했다가 이 같은 주장이 대선 전 민주당에서 내세웠던 보편적 복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시민사회단체의 원성을 샀던 데에서도 드러났다.
 

안철수 신당의 등장

민주당의 소극적인 태도는 지난해 내내 정치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국정원 선거개입 사태에 대한 대응 국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 여름, 국정원 규탄 집회의 열기가 한창일 때 민주당은 국정원 문제에 대해 새누리당과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며 이를 축소시키기에 급급했고, 국정조사마저 결과 보고서 채택이 무산되면서 유야무야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특검 실시, 국정원개혁특위 설치 등 국회 안에서의 여러 가지 해결방안을 주장했으나 번번이 새누리당의 반대에 밀려 어느 하나 실질적으로 애초 의도대로 집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구장창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오락가락하는 민주당에 대중들의 염증은 극에 달했고, 올해 초 민주당 지지율은 한자리수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무력한 야권의 대응 국면을 뚫고 지난해 말, 안철수 의원이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2013년 4월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노원구 국회의원이 된 안철수는 오는 6월로 예정된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본격적인 정치 기반을 다지기 위한 레이스에 돌입하기 위해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이다.

안철수 신당 창당을 준비했던 새정치추진위원회에서는 국민대토론회와 발기인대회 등을 통해 신당을 지지하는 인재 영입 작업에 착수했고, 지난 16일 국민공모를 통해 당명을 ‘새정치연합’으로 바꾸었다. 새정치연합은 수십 년에 걸쳐 굳어져 온 양당체제에 변화를 주겠다며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의 연대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선전해왔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으로 고착화된 기존의 낡은 정치, 기성 정치권의 구도가 깨지길 기대하는 대중들의 열망에 올라타기 위해서였다.
 

모호한 정치노선, 과연 새 정치인가

안철수가 정치권에 등장했을 당시 언론에 비춰친 대중들의 기대감은 상당한 것으로 보였다. 일부에선 안철수가 등장하면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이반효과가 생겨날 것이라고 예측했고, 새누리당도 이런 측면에서 안철수 신당을 두려워했다. 안철수가 가장 바라고 있었던 결과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안철수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자 과거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이들보다 전통적으로 야당을 지지해왔던 수도권 거주자들과 젊은 층, 그리고 무엇보다 무당파였던 사람들의 지지도가 훨씬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지난 여름,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였던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을 최장집 교수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최 교수가 이사장직을 사임하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의 기능 왜곡 문제 개선”과 “시장근본주의적인 경제 원리의 개혁” 등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안철수의 정치이념으로 세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안철수가 추구해왔던 ‘합리적 보수’, ‘중도 보수’ 노선은 최장집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안철수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선언한 이후부터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합리적 보수야당’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민주당 내에서 친노 세력을 밀어내는 과정으로 연출되고 있다.

안철수의 실제 정치노선과 안철수 지지자들의 정치노선에 차이가 났던 것은 대선 전부터 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안철수가 정치권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난 2011년 무상급식 논쟁 이후 실시된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는데, 이 때 안철수는 정치인으로써의 안철수라기보다 하나의 ‘현상’에 가까웠다. 안철수가 의지를 가지고 정치활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기존의 정치권에 실망을 느낀 대중들이 정치혁신을 위해 안철수를 부르주아 정치제도 안으로 호명하면서 끌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

대중들이 바라는 안철수의 정치적 포지션은 실제 안철수의 그것보다 항상 왼쪽에 위치한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안철수가 대선 전부터, 국회 입성 후, 신당을 창당하고 나서도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모호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기초공천폐지와 정치혁신

안철수라는 정치인은 이처럼 등장과 함께 태생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혁신’이라는 과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지지했던 대중들의 조직력과 결집력이 미약했던 상황에서 지방선거후보 영입에서도 인물난을 겪자 안철수는 민주당과의 기습적인 통합을 선택했다. 통합을 선언한 이후, 민주당 내부를 혁신하겠다는데 열을 올리며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고 있는 안철수는 과연 얼마나 정치혁신이라는 과제에 부응할 수 있을까?

그 동안 정치권에서 구태정치를 청산하기 위해 내놓았던 해결책은 주로 ‘공천권’에 관한 것이 대다수였는데, 지방선거를 앞두고 화두가 되었던 문제도 바로 ‘기초공천폐지’에 관한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전, 기초공천폐지를 통해 지방자치단체 및 기초의회 선거에서 정당에게 부여된 공천권을 없애겠다고 공약했다. 지방자치의 참뜻을 살려 지역정치에 헌신할 수 인물이 선거에서 뽑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지역에서의 혼란이 가중되자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기존의 공약을 번복․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새누리당에서는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당원들의 의견 반영 비중을 높이겠다며 ‘상향식 공천제’를 도입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이었던 ‘전략공천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은 기초공천폐지가 정당하다며 이번 지방선거에 자신의 정당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이야기했고,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기초공천을 유지할 경우, 자신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거에서 불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단순히 기초공천을 폐지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정치혁신의 과제라고 보긴 힘들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누가 정치를 하고 있는가이다.
 

누가 정치를 하고 있는가?

기초공천을 폐지한다고 해서 정치혁신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정치권에서 이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들은 대중들에게 일시적인 착시효과만을 안겨다줄 뿐이다. 근본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누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가’이다. 대중들의 정치참여방법이 실질적으로 대의제에 근거한 선거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거후보가 될 수 있는 사람들,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 정해져있다. 우리가 흔히 ‘정치 엘리트’라고 부르는 부르주아 계급만이 그 바운더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대중들의 정치 참여의 폭이 근본적으로 넓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지방자치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폐지한다고 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초공천폐지가 정치혁신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전 세계에서 목격되고 있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선거 참여율의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치참여 폭을 넓혀야 한다. 20세기 초 근대국가의 탄생과 함께 확립된 지금의 정당정치 구조는 자본주의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나 젊은 층, 그리고 이 외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문제가 선결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내에서의 정치구조, 대의제와 정당정치의 영향력은 점차 하락할 수밖에 없다.

정당구조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층의 정치참여는 지난해 연말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국면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SNS와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기존의 틀로는 담아낼 수 없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제도권을 넘어서는 전망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안철수처럼 정치적 내용이 불분명한 채 혁신만 내걸고 나온 인물에 대한 기대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는 것이다.

올해 역시 지방선거 이외에 7월 30일과 10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일정이 잡혀있어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새정치연합과 민주당의 통합 선언 역시 이처럼 대중들의 새로운 정치활동을 대의제와 선거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김재영 (hedwig@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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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86세대를 위한 변명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4/04/03 10:43
  • 수정일
    2014/04/03 10:5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디즈니의 <겨울왕국>의 등장으로 기세가 꺾였지만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거세게 몰아친 <변호인>의 열풍은 이 영화를 한국에서 사상 열 번째 천만 관람 영화로 만들었다. 이는 아마도 <변호인>이 이미 한국사회에서 주류 기성세대가 된 386세대가 갖고 있는 어떤 집단적 무의식과 공명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386세대의 자화상

386세대라는 단어는 잘 알려진 바대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가리키기 위해 90년대 등장한 신조어다. 그래서 이 세대가 4·50대가 된 지금은 486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특정 세대에 특정 명칭을 부여해서 어떤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있었지만, 유독 386세대라는 말이 지금까지 살아남고 있는 것은 이 세대가 가진 모종의 동질성이 유달리 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80년대, 혹은 80년대 정서라고 부르는 것은 꼭 80년대라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까지를 장기 19세기라고 불렀다. 나는 이와 유사하게 한국의 80년대도 79년 박정희의 죽음에서 92년 대선까지를 장기 80년대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태어나 그 시기에 대학을 다닌 79학번부터 92학번 정도까지를 386세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도 더 자세히 보면 대중적인 학생회 시대가 시작된 84, 85년을 기점으로 다시 나눠 질 것이다.)

대략 베이비붐 세대와 세대적으로 겹치는 이들은 6·70년대 고도성장 속에서 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적 혜택을 받으며 성장했고 많은 수가 대학에 진학했으나 억압적 정권 하에서 대학생활을 보내며 캠퍼스의 낭만보다는 이념화된 민주화 운동과 대중적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이다. 또 이들은 90년 소련의 몰락과 92년 대선 이후 대중운동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경험한 이른바 후일담 소설의 주인공들이고, 갑작스러운 세상의 변화에 기만당했다는 집단적인 피해의식을 느꼈으며, 그 속에서 뒤늦게 개인의 “실존”을 발견하고 썰물처럼 운동에서 빠져나간 세대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점진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 세대는 제도권 정치로 뛰어든 소수를 제외하면 민주화 세대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탈정치적인 경향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과거 급진주의의 잔영 탓에 (혁명적이지 않은) 현실의 야당이나 진보정당들에 냉소적이면서도 IMF 이후 한국의 사회적 질서가 급속히 재편되던 시기에 주식과 부동산 붐을 타고 자산을 늘리는 재미에 빠지거나 아니면 더욱 각박해진 사회에서 생존투쟁에 바빠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은 낮은 편이었다.

노무현의 집권은 이 세대에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사회 지도세력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노무현 집권 시기에 이들은 노무현에게 등을 돌렸다. 그 이유는 주로 “무능”이었는데, 그 무능이 자신들의 안정과 자산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지지율이 무섭게 치솟던 2007년 대선 전야에 나는 이 세대의 사람들로부터 “이 정도 왔으면 한 번 바뀌는 것도 괜찮지 않냐”, “이제 한국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정권을 쥐는 선진국적인 모습을 보여줘야지” 같은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런데 이명박이 집권하여 불과 몇 달 사이에 보여준 모습은 이들로 하여금 일종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불과 몇 달도 안 돼 촛불투쟁을 통해 다시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무현의 죽음은 이 세대가 마침내 과거의 그림자가 낳은 가식적인 급진성과 냉소주의를 버리고 본래의 계급적 위치에 맞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변호인>에 대한 글(“그를 전설의 서사로 추어올리지 마라!” - <씨네21> 942호)에서 <변호인> 열풍을 “그처럼 착한 사람을 우리가 자살로 내몰았다”라는 죄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풀이하는데, 나는 오히려 극중 송우석 변호사에 대한 자기 동일시의 감정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돈밖에 모르던 속물에서 세상의 불의에 대한 정의감으로 거리로 나오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외치며 자식들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송변의 모습에는 확실히 촛불 이후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386세대들과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80년대를 불러내는 비겁한 변명

물론 누구든 밀실에서 광장으로, 거리의 투쟁으로 뛰쳐나오는 것은 당연히 환영하고 고무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대의 의식이 여전히 80년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 대한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림 사건의 피의자들이 빨갱이가 아니며 송변은 오로지 정의의 이름으로 이들을 변호하는 것이라는 이 영화 전반의 태도가 전형적으로 그런 예이다. 영화 속에서 임시완이 분한 대학생은 고문 경찰관이 너의 사상이 뭐냐고 묻자 “실존주의요?”라고 대답하는 순진한 대학교 1학생으로 등장한다. 헌데 이게 과연 진짜 사실의 전부였을까. 8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이념화와 급진화였고 이는 낭만적 자유주의에 기댄 70년대 학생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학생운동사에서 그 출발점은 80년 학림(전민학련) 사건이었다. 부림 사건 자체도 부산에서 일어난 학림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었으며 사건의 발단 자체가 전민학련/전민노련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태복과 연관성 때문이었다.

공안기관이 명확한 증거 없이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행한 조작과 고문은 당연히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부림 사건이 영화에서 묘사되듯이 순진하고 비정치적인 독서모임은 결코 아니었다. 일단 피의자들의 연령대부터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랐다. (대부분 졸업생들과 직장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폭력혁명을 부르짖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나? 부림 사건에 대한 <변호인>의 접근 방식, 재현방식은 과거에 대한 매우 부정직한 재현이다. 나는 이런 태도가 단순히 극적 장치가 아니라 과거 자신들이 가졌던 급진주의와 단절하고 회피하려는 현재의 386세대들이 가진 자유주의적 집단의식의 현주소라고 생각한다.

386세대들은 90년대 들어 집단적으로 거대한 사상전환과 의식적 변화의 시기를 거쳤다. 내가 여기서 이를 “전환”이나 “변화”라고 지칭하는 것은 변절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한 세대가 통째로 급진적인 사상에 푹 담가졌다가 빠져나왔다. 변호사 노무현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 속의 송우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정의로운 사람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송우석이 오래 전에 떼먹은 얼마 안 되는 돈을 갚기 위해 다시 국밥집을 찾는 대목은 그의 타고난 정의감을 보여줌으로써 후반부의 변신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설정인데, 반면 그가 이 재판 과정에서 어떤 사상적, 의식적인 변화를 일으키는지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허문영의 글은 영화 <변호인>이 의도적으로 기각하고 있는 사상의 문제에 대해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90년대 후반 이후 영화 산업의 부흥 자체가 이 집단적 전향 과정의 산물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일본 문학의 탄생이 메이지 유신 이후 자유민권 운동의 패배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했다. 정치가 패배한 곳에서 미학적 영역으로 도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90년대 영화 붐과 영화 산업의 부흥 역시 이와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업전야>를 사실상 감독했다고 알려진 창작집단 ‘장산곶매’의 장윤현은 97년 한국 영화 산업 부흥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상업영화 <접속>을 감독했다. 패배한 운동에서 자신을 실현시킬 수 없었던 많은 운동권 출신 젊은이들이 영화계로 들어갔고 이들이 90년대 말과 200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인적 자원이 되었다. <파업전야>가 제작된 1990년과 <접속>이 나온 97년 사이 세대 전체가 일으킨 의식의 변화는 그 두 영화의 정서적 차이와 엇비슷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응답하라> 시리즈나 <건축학개론> 등 2000년대 이후의 살벌한 신자유주의 시대와 다른 탈정치적이고 평화로운 시대로 90년대를 향수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고 있지만, 최근까지 한국 영화에서 90년대를 다룬 작품은 드물었다. 너무 가까운 과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도 이 세대에 있어 그 시기는 굳이 별로 돌아보기 싫은 사춘기 같은 때였을 수 있을 듯하다.

지금 386세대는 영화계에서 문화적 권력의 위치에 있다. 그 때문인지 2000년대 말부터 한국의 상업영화는 간간히 80년대를 다루었으며, 특히 지난 정권 시기에 이러저러한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80년대 혹은 80년대의 기억을 소환하는 영화들이 제법 많이 등장했다. 이 영화들이 80년대를 불러오는 방식에는 하나의 전형성이 있다. 그것은 고문과 같은 80년대의 폭력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부각이다. 그 시대가 갖고 있던 이념성 뿐 아니라 그 세대가 내면화했던, 적어도 90년대 초의 영화와 소설들에서 자주 지적되곤 하던 그들 내부의 폭력적, 억압적, 권위주의적인 성향들은 이제 까맣게 망각되고 386세대는 정의감에 넘친 순결한 세대로 영화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민주주의의 후퇴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나 전두환 정권 같은 억압적 체제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런 식의 태도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이야기하며 다른 문제들을 가리는 효과를 낳는다.

386세대들에게는 고문과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를 투쟁으로 뚫고 나왔다는 자긍심이 있는 것 같다. 한때의 혁명가 지망생에서 자유주의자·진보주의자로 변신한 이후에도 과거의 화려한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학생운동 시절을 잘 나갔던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다. 결국 <변호인>과 같은 영화들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우리를 따르라’는 그들의 선민의식을 자극한다. 이런 태도는 현실의 변화와 차이들을 지우고 (민주 대 반민주라는) 낡은 전선과 (노무현이라는) 낡은 상징으로 돌아갈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반성 없는 퇴행적 서사

<변호인>은 87년 6월에 정지한다. 그런데 과연 이 87년의 승리는 무엇을 갖고 왔던가? 여기서 <변호인>은 아무 대답하지 않는다.

송변의 후일담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87년 이후 제도권 정당에 투신하여 국회의원이 되고, 청문회로 전국구 스타가 된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장관이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자살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규직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해놓고 그 뒤통수를 후려치던 노통을, 한미FTA 체결을 강행하며 신자유주의를 설파하던 노통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변호인>의 태도는 이 모든 것이 지금 와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변호인>이 기대고 있는 영화적 전통은 프랭크 카프라의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1939)> 같은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인민주의적인 영웅담이다. 이런 인민주의 영웅담은 많은 문제가 있지만 결국에는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역설한다. <변호인> 역시 87년이 만들어낸 이른바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군사정권의 비정상성을 문제 삼을 뿐 이 체제 자체에 대한 반성적·비판적 의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변호인>은 매우 잘 만든 상업영화이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위대한 과제를 회피하던 주인공이 결국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숨겨진 자질을 발휘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오래됐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이런 전형적인 영웅서사를 통해 <변호인>은 관객의 동일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현실로 믿고 싶은 욕망에 부응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종국에 가서 자막을 통해 아예 스스로 “실화”, 현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환상을 완성한다. 이것은 퇴행이다.

이정인 (wjddls72@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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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도사쿠와 김연아

  • 분류
    문화
  • 등록일
    2014/04/03 10:37
  • 수정일
    2014/04/03 10:57
  • 글쓴이
    사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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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고대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천 년 넘게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바둑의 테크닉이 폭발적으로 발전한 것은 근세 일본에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바둑은 지배계급이 여가를 보내는 단순한 유희에 불과했으며 바둑에 빠져 그것을 지나치게 잘 두는 것은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었던 반면, 근세 일본에서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분열에서 근세 일본을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둑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그는 명인기소라는 것을 설치해 바둑고수들에게 녹봉을 주어 바둑에 전문적으로 정진할 수 있게 해주고 그중 최고 고수를 명인으로 임명하여 부와 명예와 권세를 보장해 주었다. 이로 인해 명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바둑을 연마하는 혼인보, 야스이, 이노우에, 하야시 등 세습가문이 생겨나, 이 집안의 아이들은 명인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오직 바둑 기술의 연마에 집중하도록 교육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명인기소를 설치한지 불과 100년도 안 되어 17세기 일본에 도사쿠라는 바둑의 천재가 등장했다. 도사쿠가 바둑에 일으킨 변화는 그 이전 천 년 동안 일어난 발전을 다 합친 만큼 큰 발전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의하면 동시대 조선에서 더 이상 적수를 찾을 수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이약사라는 고수가 있었는데 그는 도사쿠와 넉점 치수를 두고 패배한 뒤 미친 듯이 웃으며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 야사는 이미 당시에 중국, 조선과 일본 바둑의 실력 차이가 오늘날 프로와 아마의 차이 이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바둑에서 아마와 프로의 차이는 3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미술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회화가 급속도로 발전한 것은 봉건영주나 교황청이나 왕가에서 화가들에게 높은 영예와 부를 보장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안정적 후원 아래에서 15, 16세기 근대회화의 혁명적 발전이 일어났다. 전문성과 그에 대한 높은 보상이 주는 문화의 발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봉건 지배계급들의 후원이 시장과 부르주아로 대체되었을 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일본에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나자 봉건영주 대신 명인이나 혼인보와 같은 명예로운 이름들은 대형 신문사들이 접수했고, 바둑 역시 현대적인 프로 스포츠로 변모했다.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것을 포기하고 바둑에 매진할 것을 강요받는 것은 막부 시대나 현대 바둑계에서나 마찬가지 일이 되었다. 17세기의 도사쿠, 19세기의 슈사쿠, 20세기의 오청원을 바둑의 역사에서 흔히 3대 기성이라고 부른다. 유명한 망가 <고스트바둑왕>은 이중 슈사쿠가 현세에 환생하여 최고의 고수들과 겨루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무리 도사쿠, 슈사쿠, 오청원이라해도 다시 현대 바둑 시스템에서 배우지 않는 한 그들의 전성기 실력만으로는 한창 때의 이창호나 이세돌에게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 봉건제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둑기사들은 점점 더 어린 나이부터, 더욱 체계적으로 육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바둑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스포츠 일반이 다 그렇다. 자본주의에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대중교육의 발달은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상당히 평준화시킨 면이 있다. 타고난 재능과 숙련을 통해 인간의 육체에 체득된 기예의 벽은 과거 최소한 현대 예술의 영역에서는 많이 낮아졌다고 본다. 예술의 보편적 기준이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그 벽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다양한 예술제도들의 복합체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개인의 재능과 숙련에 대한 의존성이 명백히 더 강화되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스포츠의 영역이다.

국가적 경쟁에 결합된 개인의 부와 명예의 추구는 타고난 재능들을 더욱 전문적으로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엘리트의 영역과 일반인의 영역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엘리트 체육이야말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을 대체하는 자본주의 문화 발전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다.

다른 분야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제도적 영역을 침해하듯이 스포츠에도 평범한 선수를 위대한 선수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있긴 했다. 그것은 약물이었다. 9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를 스캔들로 얼룩지게 만든 스테로이드는 평범한 선수를 위대한 선수로, 위대한 선수를 더욱 위대한 선수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약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에와서 스테로이드 복용혐의를 받고 있는 배리 본즈와 로저 클레멘스, A-로드 등은 가장 경멸받는 이름이 되고 있다. 팬들은 당시 그들의 경기력을 충분히 즐겼지만 그것이 약의 효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들의 감동에 대한 배반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종합격투기 선수 예멜리야넨코 표도르는 한때 60억분의 1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완벽하게 단련된 그런 60억분의 1의 재능이다. 그 재능은 오늘날 복잡하고 지식이 필요한 예술 제도와 달리 일반인의 눈으로 확인가능한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메시나 조던의 위대함을 굳이 배워서 알 필요는 없다. 그들이 그 스포츠에서 거둔 기록과 성과가 누구의 눈에나 명명백백하게 그들의 위대함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라가 온통 김연아 얘기뿐이다. 한국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선수였던 천재 김연아에 대한 열광에 별다른 유감은 없지만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자본주의 문화의 꽃인 엘리트 체육을 볼 때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다. 한 개인에게 다른 모든 잠재성을 희생하고 한 가지 재능만을 저렇게 쥐어짜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그렇게 쥐어짜서 만들어낸 기예의 아름다움, 화려함을 그저 문명의 발전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렇게 휘발된 그/녀의 육체가 국가주의적, 지역주의적 동원의 이데올로기, 환상적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매개로 이용되고 있다면.

젊은 나이에 육체적 잠재성을 다 소진해야 하는 스포츠 선수들은 대부분 은퇴 이후 병을 달고 산다고 한다. 그렇게 일찍 휘발된 육체적 능력을 과연 정당한 자기실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김연아와 같은 60억분의 1의 재능은 그 대가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 이면에는 똑같은 노력을 들였지만 그 만큼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무수한 범재들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계속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스포츠 스타에게 막대한 부와 명예가 돌아가지 않고, 그것을 위해 어릴 때부터 가혹한 정신적, 신체적 단련이 강요되지 않는 사회에서 기예의 숙련이 후퇴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아마 다시 마이클 조던이나 김연아와 같은 최고의 기예를 가진 선수들을 볼 수 없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발전인가, 후퇴일까.

17세기와 18세기에 카스트라토라는 가수들이 있었다. 여성이 낼 수 있는 음역대를 내기 위해 변성기가 되기 전의 소년들을 거세시켜 만들어내는 가수들이었다. 카스트라토로 성공시키기 위해 팔려간 가난한 집안의 소년들 수만 명이 거세수술을 받고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이들은 1%도 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는 천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적인 인권의식이 성장하면서 당연히 이러한 관행들은 금지됐고, 지금 우리는 그 아름다운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발전인가, 후퇴일까.

어느 한 분야의 후퇴가 오히려 전반적인 사회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보다 발전된 사회라면 미적인 발전보다 인간의 권리, 즉 너무 어린 나이부터 단 한 가지의 재능으로만 고착되지 않는 인간으로서 다양한 잠재력을 개발시키는 권리가 더욱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원형경기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기예의 경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일정부분에서의 문화의 후퇴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언뜻 생각해 본다.

이정인 (wjddls72@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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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노동자신문 연속 워크샵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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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 적녹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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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글 모두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좌파의 대안>에 실려 있습니다

3월 20일 목요일 저녁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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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 010-7647-7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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