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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쟁점] 다시 ‘소련’을 말하다 ①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김성렬 (사노신 독자회원)


* 작년 노동자대회 때 발행된 <붉은 글씨>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온라인 상 가독성을 위해 각주를 삭제하거나 본문에 포함시켰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게 혁명이란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요. 혁명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어리석죠?”
“어리석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우리 -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죠….”
- 예브게니 자마찐, <우리들> 중에서

 


1. ‘상실의 시대’ 그 이후



소련은 무엇이었는가? 소련은 어떤 사회였는가? 역사의 무대에서 소련이 사라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규정에 따르자면 소련의 붕괴는 이른바 ‘단기(短期) 20세기’의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부터 사실상 시작된 지난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이후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만큼 10월 혁명에서의 승리와 환희를 뒤로 하고 후퇴와 변질의 역사적 단절을 통해 등장한 소련 역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

때문에 지구 영토의 1/6을 점한 그것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린 소련의 붕괴가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역사의 종언’을 운운하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앞에 대부분의 좌파세력은 무기력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인 실수로 매도당했고,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며 매장당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회주의를 향한 전망과 정치는 역사의 오류를 답습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소위 ‘상실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충족이 아닌 이윤추구의 경쟁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색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우익세력이나 사회주의의 실현불가능성을 외치는 자유주의 세력 모두 일반화된 상품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속수무책이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어 생산과 소비 역시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사슬에서 어느 한 쪽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위기는 발생하고 늘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IMF 경제위기’로 기억되는 지난 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미국 등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은 수출호조로 일시적인 극복이 가능했지만 현재 가중되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다. 때문에 중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출하고 미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글로벌 불균형’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른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올 정도로 세계경제는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스스로 붕괴된다거나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여태껏 경험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대공황을 비롯해 자본주의 체제가 그간 겪었던 수많은 경제위기의 역사가 예증해준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국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때 이른 낙관도 성급한 비관도 아닌 점차 확산되고 있는 대중의 자각과 정치적 각성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11년은 유럽과 미국,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맞서 대중의 직접행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과 역동성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성찰로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고, 남한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과 목마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만큼 과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역시 더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세기 동안 존재했고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과 판단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급의 폐절로 집약되는 사회주의는 오직 ‘지나간 미래’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불편한 진실’은 결코 우회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이하 <소련>)가 남한에서 1993년에 이어 2011년에 재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지난 1993년 당시 <소련>이 출간되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이야 지금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소련>이 맑스주의 운동에서 고전으로서 지닌 역사적인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서 소련 문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고민하는 데 있어 여전히 그 방향을 설정하는 시금석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소련을 말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2. 1917년 10월 혁명 : 과연 혼돈의 기원인가



소련 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대한 재검토부터 필요할 듯하다. 사실 10월 혁명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로 삼을 만큼 오래된 쟁점이다. 역사 속에서 10월 혁명은 레닌의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열정과 행동으로 권력 장악에 성공했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고 압도적인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탓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혁명의 성격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체제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준다는 점에서 10월 혁명과 소련 사회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소련 사회를 놓고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규정한다면 10월 혁명과의 연관성은 한층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러시아는 왜 그토록 빠르게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는가? 그렇다면 10월 혁명은 처음부터 세계사에서 일탈해버린 잘못된 행동이거나 기껏해야 부르주아 혁명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소련 사회에 대해 살펴보기도 전에 숙명적인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태적인 사고로는 1917년 당시 10월 혁명의 본모습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10월 혁명과 세계 혁명

19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제국주의 세계질서는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인식되었다. 자본주의의 자유경쟁과 달리 독점자본이라는 거대한 힘과 국가라는 거대한 힘이 서로 유착된 제국주의 열강들이 출현했고, 이들 사이의 알력과 갈등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 국제적인 정치경쟁은 이윤 극대화에 혈안이 된 경제경쟁의 양상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세계전쟁으로 전례 없이 유럽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곧 전유럽은 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 광란에 의한 대량살육이라는 비극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의 깊은 수렁은 불과 1년도 채 안 되어 대중의 의식을 애국적 열정에서 변모시켰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각성된 대중은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빵’을 공공연하게 직접 요구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1915년 이후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혁명적 정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반동적인 차르체제의 러시아에서 최대의 혁명적 정세가 성숙하리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혁명 전략과 관련된 레닌의 구상은 과거 1905년의 러시아 혁명 때와 비교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1905년 혁명기에 레닌은 러시아에 있어 부르주아 혁명을 제기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농민의 지지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외적 조건에 좌우되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 주장했다.

이 같은 시각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이어졌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과제가 여전히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증대하는 위기가 서로 결부되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만큼 이 결합이 직접적임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을 관철시킨다는 것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이제 서구 사회주의 혁명의 서곡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분한 구성부분이 된 것이다. (레닌, 「러시아의 패배와 혁명적 위기」, <사회주의와 전쟁 外>, 오영진 옮김, 두레, 1989, pp.211~212)”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엇보다 1918년 당시 세계 제2의 산업대국이자 유럽 최강국이던 독일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자 세계혁명은 더 이상 헛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것으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10월 혁명은 세계혁명이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이제 겨우 첫 전투에서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나라에 있어 혁명의 발전과 지원, 그리고 각성을 위하여 러시아라는 일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술은 당시 유일한 국제주의적인 전술로 입증되었다.

이런 까닭에 10월 혁명은 애초부터 러시아의 일국혁명이 아닌 세계혁명이란 전망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이중권력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혁명보다는 더 나아갔지만 아직 노동계급과 빈농의 순수한 독재에는 도달하지 못한 과도적인 국면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중권력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해야 했고, 우선 대중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화부터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의 고통에 놓인 수많은 대중들의 당면한 요구를 즉각 해결하기 위한 각종 혁명적 민주주의의 방책들이 시급하게 실행되어야 했다.

예컨대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러시아 부르주아 권력의 반동적 관료주의에 맞서 혁명적 노동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민주주의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⑴모든 은행들의 단일 은행으로 합병, 그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 또는 은행들의 국유화 ⑵신디케이트들, 곧 가장 대규모의 독점적 자본주의적 기업연합들(설탕, 석유, 석탄, 철 및 강철 그리고 그밖의 신디케이트들)의 국유화 ⑶상업적 영업비밀의 철폐 ⑷생산업자들, 상인들 및 고용주들의 강제적인 신디케이트화(즉, 강제적 연합체로의 합병) ⑸소비자 조합으로의 주민의 강제적 조직화, 또는 그러한 조직의 장려, 그리고 조직 통제 행사”(레닌, 「임박한 파국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레닌의 세계사회주의 혁명이론>, 淺原正基, 한유승 옮김, 다락방, 1990, p.347)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러시아에서 직접적인 사회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과거 1980년대 남한의 PD 강령과 그 방침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민중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하고 이를 정식화 했지만 그것은 10월 혁명의 의미를 단순히 일국혁명의 차원으로 협소하게 재단한 결과 나타난 이론적, 실천적 왜곡이었다. 오히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이후 1921년까지 계속된 세계혁명의 시기에서 그 출발점이자 구성부분으로 보아야 하며 세계혁명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다. 일국적 잣대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으로 제한될 수 없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물론 사회주의의 완성은 바로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보증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좌절된 세계 혁명, 포위된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의 혁명적 정세는 분명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요구했다. 세계혁명의 붉은 물결은 유럽 곳곳에서 넘실거렸다. 그러나 1921년 3월을 기점으로 세계혁명의 고조되던 분위기는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볼쉐비끼당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사민주의에서 분화한 유럽 공산당들의 경우 대중의 자생적인 파업과 가두투쟁을 넘어서서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기 위한 임무를 사려 깊게 수행할 능력은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이 곧 드러났다. 특히 세계혁명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독일혁명에서 독일 공산당이 보여준 좌충우돌과 반복되는 오류는 혁명적 정세를 유실시키기 일쑤였다.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성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노동자권력 하에서 이제 막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로 들어섰고 또한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볼셰비키 그 누구도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와 지원 없이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기를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에 속했다.

이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대공업적 팽창은 더 이상 소규모의 고립분산적인 지역적 시장이 아니라 서로가 연결되고 통합된 세계시장을 창출해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혁명도 그 자체로 세계혁명이고 또한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일국에서 노동계급이 권력 장악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세계혁명으로 확산되지 않고 고립된다면 필연적으로 반혁명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국민국가 단위로 노동자권력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러한 사회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궁핍이 일반화되어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등 지극히 퇴행적인 형태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이 겪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혁명의 잇따른 패배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현실적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 세계혁명을 표방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계적인 생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들에서 혁명의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전에 이미 대공업의 주요 부문과 은행, 무역 등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고, 전쟁 동안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와 집중화가 강화된 유럽에서 정작 기대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은 무위에 그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포위된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자신의 모든 노력과 전쟁 이후 유럽이 경험한 사회적, 정치적 동요에 불구하고 그들이 고립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결코 달갑지 않는 현실에 마주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차츰 ‘정상 체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물론 1914년 이전처럼 팽창하는 시장과 자유무역으로 대표되는 전지구적 경제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와 달리 일국적 자본주의가 규준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지배질서마저 위협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혁명의 고립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정권의 장기적 전망과 그 방향은 아직 미결의 상태로 열려 있었다. 레닌은 전쟁 이후의 국제관계를 일종의 ‘계급간 휴전상태’로 판단하며 식민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나뉜 서구 제국주의 열강간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피억압 민중들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터져 나올 또 한 번의 ‘군사적 대결’을 전망하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혁명을 지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몰두했다.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여전히 세계혁명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혁명과 괴물의 탄생


분명한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장기적으로 지연될수록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한가운데서 언제까지나 온전히 존속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이후 러시아 혁명의 비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 체제의 등장을 놓고 그 원인을 불발된 세계혁명만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혁명의 실패가 곧 10월 혁명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로의 변질을 자동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단선적인 도식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반혁명 중에서도 역사상 유례없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국가관료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을 강제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소련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를 가능하게 한 내적 원인에 대한 규명 역시 필요로 한다.

실제로 1921년 무렵 러시아 혁명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다. 1918~1920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볼셰비키 정권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지만 10월 혁명을 만든 계급의 기껏해야 잔영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끔찍한 경제위기와 공장폐쇄 속에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어 갔고,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대중의 자연적 지도자로 부상한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과 볼셰비키들은 내전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탈계급화 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내전 중에 강요된 식량 징발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다수를 점점 더 볼셰비키 정권에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 정권은 내전기의 처참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강제된 ‘국유화의 가속화와 국가통제의 강화’를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 즉 계급이나 국가가 없는 사회주의를 위한 당장의 실행조치로 혼동하며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던 전시공산주의(1921년 3월 신경제정책이 채택된 이후 그해 4월 레닌은 소책자 「식량세론」에서 처음으로 전시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인용부호로 묶어 사용했다. 이 용어는 한때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보그다노프의 개념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전쟁 중 서구 여러 나라에서 등장한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대체로 군대란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코뮌이며 전쟁의 영향으로 생산과 분배에 대한 국가통제가 확립됨에 따라 전시․소비공산주의가 군대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보그다노프는 전시공산주의가 계급투쟁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에 서구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 또한 부정하였다.)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시적 후퇴로써 정책적 방향을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변함없이 중시된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였다. 이는 탈계급화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수의 소부르주아 농민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다음번의 세계혁명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네프 시기 농민에게 경제적 이익추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불가피했고 또한 필요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문제는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기초한 소비에트 권력 그 자체가 내전이라는 반혁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대단히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나날이 강화되어 가는 국가권력과는 대조적으로 혁명의 활력은 급속도로 퇴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오직 자신을 방어하고 세계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가를 이용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계급과 국가권력의 사멸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내전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중앙집권화되고 군사화된 볼셰비키당의 등장이었다. 국가방위와 권력유지를 명분으로 한 군사적인 방법들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지녀야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당과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운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곧 인민에 대한 전면적인 강제의 일상화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발성의 위축을 가져오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권과 대중 사이의 이러한 균열 양상은 네프 도입 이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네프 초기 가장 주된 쟁점은 자본주의로의 후퇴와 양보의 한계였으며(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로의 급격한 전환을 주도했던 레닌은 후퇴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현실이 가르쳐 줄 것이라 공언했지만 네프의 시작과 더불어 투기가 만연해지고 당 안팎에서 부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는 후퇴의 중단을 외치며 당 대열의 재정비를 요구했다. 실제로 네프 시기 자본주의로의 퇴행은 사회경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자유로운 물품교환의 욕구는 너무나 필사적인 것이어서 일단 어떤 상거래가 합법화되자(1921년 3월)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져 모든 제약을 쓸어버릴 정도였다. … 사적 상인들은 점차 거의 모든 종류의 상거래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 사회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폐를 폐지하자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국영공업과 국영상업은 경제적 혹은 상업적 회계(khozraschyot, 독립채산제) 위에서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윤을 남기고 손실을 피하는 것이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김남섭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8, pp.94~98)) 상당한 위험이 내재해 있었던 만큼 당의 결속은 더욱 더 강조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전시공산주의 시기와는 다르게 노동의 탈(脫)군사화가 추진되었음에도 정치적 독점을 확고히 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위계질서와 군대화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형성이 금지되고 1921년 후반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된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1918년 초부터 우려했고 생애 마지막까지 싸워야 했던 관료주의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국가 형태는 그들과는 괴리되어 있는, 곧 국가와 결합된 당의 독재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 결과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두고 이른바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네프 시기 국가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볼셰비키 정권이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집단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와 그들의 굳건한 계급의식이었다. 노동자대중은 반혁명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해야 했지만, 그러한 국가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내전을 경과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심지어 소멸되어 가는 상황에서 혁명의 물결은 급속히 그 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압도적 다수의 독재가 아니라 단호한 소수의 독재로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1920년대 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볼셰비키당의 독재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당의 일각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으며 1923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노동계급의 독재를 볼셰비키당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테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레닌 역시 내전 때 국가와 당의 관계가 바뀌자 그 이전과는 다르게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볼셰비키당원들이 곧 국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대체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당의 독재를 관료주의의 독재로 대체한 것에 대해 주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10월 혁명의 이듬해인 1918년부터 발발된 내전과 그 후과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고려는 매우 중요하다. 소련 사회에서 발생한 혁명의 변질과 퇴락, 즉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에서 부르주아 계급 국가로의 전환을 놓고 대개 스탈린주의의 궤적을 따라 1937년(대숙청)이나 1928년(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 1927년(좌익반대파의 패배와 트로츠키의 축출)을 짚거나, 혹은 그 이전인 1921년(크론슈타트 반란 진압과 네프의 도입)에 주목하는 등 두드러진 연도와 관련해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 대중의 혁명운동에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퇴조하게 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경직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내전 시기가 미친 전사회적인 영향력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셰비키 정권이 곧바로 권력을 포기했다면 볼셰비키당은 제국주의 열강들과 결합된 부르주아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적 야당은 고사하고 철저하게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세계혁명의 좌절과 내전을 거치면서 본격화된 볼셰비키 정권과 노동자대중 사이의 균열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화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결국은 세계혁명의 꼬리표마저 떼어내고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만을 영속적으로 주장했을 때, 그 귀결은 일국사회주의로 치장된 또 다른 반혁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볼셰비키 정권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를 행사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누적적인 과정들을 주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는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빅토르 세르주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르주는 10월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대중의 혁명참여가 퇴조한 것이 1918년 말부터였다고 파악한다. 이 책의 원제가 ‘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등장한 코뮌국가가 불과 1년여 만에 당 독재의 국가로 전환되었다며 내전을 비롯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누적적인 역사적 과정들에 주목했다. 그럼에도 세르주는 내전 기간 내내 볼셰비키 정권을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며 그 생존을 위해 앞장섰는데, 이는 사회경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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