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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특집]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②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적 구성의 변화는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세력들에게 저항의 주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1968년을 전후해서 유럽과 북미, 일본에서 벌어진 혁명적 투쟁들은 그전까지 분배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던 여성·환경·인종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1970년대 이전까지 사민주의든 공산주의든,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사회진보의 담지자로 상정된 공업노동자들은 오히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결과는 급진 정치의 분열로 나타났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업노동자 운동의 보수화는 1980년대 이들을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반대운동의 주체로 세우는 데 실패한 것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흔히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에 투쟁해야 하는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은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기술진보로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생산성의 향상으로 총 노동자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필요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이들 부분에서 총임금은 줄어들게 된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줄어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정정도 유지시키면서 생산을 지속시키는 것이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오히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길들이고 산업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싸게 먹힐 것이다. 

1980년대 서구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졌지만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대응전략은 구조조정을 인정하고 남은 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0년대를 거치며 대규모 작업장의 조직노동자들과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는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임금저하 경향은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임금이 하락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저임금 노동자층의 창출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들과 여타 분야의 노동자들의 이해는 크게 달라졌다. 90년대 들어 많은 나라들에서 조직노동자와 정부의 협약에 의해 비정규·불안정노동자들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제조업 고용의 노동량이 줄면서 9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시행되었지만 이는 노동유연화의 확대와 직결되며 정규직과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차별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그 속에서 대규모 작업장은 마치 불안정 노동자들의 거대한 바다에 뜬 작은 섬들처럼 고립된 별천지가 되었다. 

공간적으로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산업 국가들에서 대규모 작업장은 폐쇄적인 지역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로 대규모 작업장의 입지조건과 노동자들의 의식상태는 19세기 농민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19세기 자영농민들처럼 사회적 변화에 둔감하고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집착하는 경향을 뚜렷히 드러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90년대 주식투자 같은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며 자본가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노동자본가(worker capitalists)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대규모 산업단지에서 보수정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는 사례에서 보듯이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은 퇴행적 측면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이후 저항 담론은 다양하고 분산된 영역에서 저항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주요한 문제로 제기했다. 이런 상황은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문제의식이 세계를 풍미하는 현실적 배경이 되었다. 전통적 좌파이론이 여전히 보수화된 공업노동자들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개인의 저항에 기초한 포스트구조주의는 보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운동의 이념적 좌표를 가리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구체적인 위치에서 저항을 하다보면 어쩌다가 집단적인 투쟁이 된다는 식 이상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개별적인 탈주의 선들이 어느 순간 접합해서 흐름이나 덩어리가 된다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이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조업이 축소되고 기존의 노동운동은 쇠퇴하고 있으나 종래의 공업노동자계급을 대체할 동질적인 사회집단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대적 한계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위적 정치정당으로 집약되어 그의 지도를 받는 동질적인 노동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결국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 운동은 개별화된 운동의 연합일 뿐이라는 생각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앙드레 고르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계급이 아닌 새로운 사회집단이 광범위하게 창출되지만 이들은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적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非)노동자”이며, 집단적 주체로 등장할 수 없는 “특수한 개인성”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고르는 그들이 미래 사회 전체적인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역사적 사명의 부여받았다고 상상한 과거의 계급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끝에 그가 제시한 대안은 국가의 지배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3장 "사회주의를 넘어서"를 보라) 

완고한 맑스주의자들도 이런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 초반, 포스트주의자들에 맞서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 중심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90년대 들어 평조합원 전략을 포기했다. 대신 이들은 자신들이 비판해 마지않던 반전·반세계화와 같은 인민전선 운동의 새로운 버전으로 후퇴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맑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80년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객관적 실체로서의 계급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즉자계급”이라고 표현한 객관적 계급관계는 그가 “대자계급”이라는 말로 표현한 의식적 계급 형성의 바탕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리바르는 실체로서의 계급을 부정하고 이를 사회적 투쟁의 효과로 환원시켰다. 그것은 결국 전통적 노동계급의 개념을 넘어 계급의 확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급진적 맑스주의자로 아우토미아 운동가였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노동계급의 개념을 대단히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풍부하게 흡수한 네그리는 결국 “계급”이나 “노동자”라는 개념을 사실상 포기하고 “다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기했는데, 그에 의하면 다중은 과거의 공업노동자 계급과 달리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종족, 젠더, 성적 지향 및 상이한 노동형태와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과 같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차이의 정치와 맑스주의의 절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입장에서는 동질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단일한 전망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외양적인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민주의적 전망에 흡수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네그리 역시 여전히 코뮤니즘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한 전지구적인 시민권, 사회적 임금, 지식정보 공유권 같은 요구를 볼 때, 그 역시 다중으로부터 급진적 민주주의 이상의 공통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중 이론은 90년대 들어서 활성화된 반세계화 운동, 반전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영물이다. 반세계화·반전운동은 멕시코 농민들로부터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치조직들까지 매우 다양한 구성요소를 포괄했다. 이 투쟁들은 전통적인 조직노동운동의 참여가 높지 않는 대신 개별적인 참여가 높은 특성을 보였다. 노조나 정당 같은 기존의 조직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은 매우 격렬한 투쟁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속에서 모종의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지시하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precarious)이라는 형용사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인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 반세계화 투쟁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던 이탈리아에서 2003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단어는 이후 유럽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기존의 조직노동운동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행사를 상징하는 용어로 널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000년대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프리타가 양산된 일본에서도 2006년 메이데이부터 프레카리아트 행사가 기획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도 올해 메이데이에서 프레카리아트 총파업 행사가 개최되었다.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앙드레 고르가 신프롤레타르라고 부르고, 90년대 들어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노동자라고 불리던 사회집단의 최신 명명법이다. 모두 다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와 다른 무언가가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시하고 있는 개념이지만, 특히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기존에 상대적·부분적·비정상적인 개념으로 정립되던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이 사회다수적인 새로운 사회집단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는 사회집단이야말로 전통적인 조직노동자들보다 오히려 초창기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더 가까운 사회집단이다. 1840년대 영국과 유럽에서 사회적 용어로 떠오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당대에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달라진 경제현실은 언론인과 사회평론가들이 ‘빈민(pauperism)’과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용어를 많이 쓰게 된 세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빈민이니 프롤레타리아니 하는 말은 뿌리 없고 재산도 없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들로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사회안전망의 보호대상도 되지 못하는 층을 뜻하는 말이었다. 칼 가는 사람, 구두장이, 재단사, 비숙련공, 직물노동자 등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이 라인란트 일대 중소 도시로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쾰른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20~30퍼센트가 빈민 구제 대상이었다. 독일 사회이론가 로베르트 폰 몰은 현대의 공장 노동자 - 도제 훈련을 받거나 장인이 될 가능성도 없고,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없으며, 기술을 습득할 기회도 없다 - 를 ‘수레바퀴에 묶인 농노’와 비슷한 존재라고 묘사했다. 정치개혁가 테오도르 폰 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표현을 ‘집이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이광일 옮김, 글항아리, p.99) 


2011년 초, <프레카리아트 : 새로운 위험계급>이라는 책을 쓴 영국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전 지구적 변환이 초래한 최근의 사회·경제 위기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불안정한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불안한 노동 생애를 날마다 보내고 있는 프레카리아트는 전세계적으로 수십억 명에 이른다. 대부분은 ‘도시 유목민’처럼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미래에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이들은 정체성도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고, 자기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지도 못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일자리를 갖고 있어도 사내 복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공적연금 복지도 제한적으로만 받는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비정규직으로 서비스 섹터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 이들은 하루 일을 끝내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채팅을 하고 축구 경기에 광적으로 흥분하면서 여가를 보낸다. 극도의 불안정으로 인해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없기 때문에 인터넷과 축구와 같은 스포츠에 여가를 많이 의존하는 것이다. 현대판 ‘빵과 서커스’(로마시대에 민중에게 먹을거리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 정책)라고 할 수 있다. … 프레카리아트는 비정규직 범주와 다르다.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고용형태나 임금수준 등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 삶의 안정과 불안 등의 측면에서 폭넓게 노동자 집단을 파악하는 개념이다.


19세기 중반의 프롤레타리아트와 21세기 초의 프레카리아트는 1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용역·계약직·일용직 등 종래의 비정규직과 거의 유사한 의미이지만 프레카리아트는 고용형태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그들이 공유하는 ‘불안정’이란 측면에서 범주화되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뜬 구름 잡는 다중이 아니라 “저임금”과 “불안정”이라는 코드를 공통점으로 19세기 중반의 프롤레타리아트처럼 명확한 실체를 가진 동질적인 사회집단이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영향 받은 여러 담론들이 제기하고 있는 탈노동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새로운 빈곤 인구들이 고용이 불안정한 저임금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들 생존조건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와 함께 스스로 프레카리아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투쟁도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2011년 세계를 휩쓴 미국의 아큐파이 운동을 본격적인 프레카리아트 투쟁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점차 사회 인구의 다수를 점해가고 있는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어디로 갈지는 아직 매우 유동적이다. 


프레카리아트는 소득 불안정으로 인해 삶의 방식도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인다. 대다수 프레카리아트는 창의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가져다주는 윤리규범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 프레카리아트는 외국인이나 이주노동자, 경제적 약자 등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이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침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이 불안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 외국인과 이주노동자에게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 전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는 청년과 여성층에서 많아지고 있다. 인종적 소수자가 새로운 노동인구로 유입되면서 이 층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유연한 저임금 노동력의 원천이다. … 특히 주목할 대목은 프레카리아트가 되기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자녀·친척·친구들이 프레카리아트가 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경우 포퓰리즘과 정치적 극단주의의 구호에 휩쓸리기 쉽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 세계 경제위기가 직면한 가장 두려운 측면이다. 불안정의 진창에 빠진 프레카리아트들은 자신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프레카리아트의 공포”를 이용하는-인용자] 선동가 혹은 극단주의자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이코노미 인사이트> 5호, 「21세기 위험계급 ‘프레카리아트’(가이 스탠딩 교수 인터뷰)」) 


현재로서 이들은 아직 독립적인 계급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에 종속되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요구보다는 “1%에 맞서는 99%” 같은 추상적인 구호로 대표되거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위치에 있는 중장년층과 달리 노동시장에 새롭게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불안정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88만원 세대” 같은 세대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위 프레카리아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주로 비교적 학력이 높은 20대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은 흔히 이 운동을 비계급적인 운동 또는 중간계급 운동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 현재 이 운동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불안정·저임금 노동자들의 주체화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지, 조직노동계급의 결합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운운하는 낯익은 레퍼토리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가이 스탠딩을 비롯해 앙드레 고르나 제레미 러프킨 등 이런 새로운 빈곤층의 등장에 주목한 진보적 학자들은 대부분 기본소득제도를 지지하고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모든 국민에게 일정 금액의 화폐를 나누어주어 임금노동의 불안정화·저임금화로 빚어지는 사회적 불안을 무마하고 저소득계층의 소비력을 진작시켜 유효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급진좌파들은 기본소득제에 대한 요구가 자본주의 체제를 침식하고 사회 혁명의 가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제도는 이미 알래스카 등지에서 시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제도의 법·제도적이고 국가의존적인 성격 때문에 사회 변혁의 성격을 가지기 보다는 프레카리아트를 새로운 정치기반으로 만들려는 의회주의 사민당의 정치 슬로건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누가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에 따라 미래 운동의 지형이 바뀔 것이다. 이들을 포섭하거나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지배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의 기획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공업노동자들에 매달리며 이들을 여전히 중간계급, 혹은 반(半)프롤레타리아로 배제하거나 조직노동운동이 보살펴야할 부차적인 영역으로 취급하고 있다. 


 

중공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부분 서비스산업에서 창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자본주의 초기 공업에 대한 중농주의자들의 태도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중농주의자들은 공업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못하며 다만 가치를 변형시킬 뿐”이기 때문에 농업만이 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비슷하게 대다수의 맑스주의자들은 서비스노동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철학적 노동개념을 기초로 한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노동을 인간에게 고유하게 잠재된 추상적 에너지로 보고 인간의 노동행위는 자연에서 채취한 물질에 그 에너지를 투여하여 가치를 부여한다는 논리를 취한다. 이는 사실 17세기 존 로크나 윌리엄 페티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부르주아들의 소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논리였다. 

헤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던 초기 맑스 저작에도 이와 유사한 인간주의적 노동가치론이 드러나 있다. 특히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그것이 상당히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무렵의 맑스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자본주의적인 소외를 노동의 소외와 극복으로 바라보았다. 헤겔에게 있어 자연에 대한 파악은 정신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으나 초기의 맑스는 노동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즉, 자연을 파악하고 그것과 동일성을 회복하는 철학적 매개는 정신이 아니라 노동이며,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소외는 노동의 소외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노동 개념은 자연에 대한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이른바 “물질적” 노동생산물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성(性)노동, 감정노동, 돌봄노동 등은 공업노동에 비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헤겔 철학의 영향은 맑스와 엥겔스가 1845~6년 <독일이데올로기>를 쓸 무렵부터 극복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들에게 소외 같은 철학적 범주는 더 이상 중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소외라는 문제의식은 더 이상 철학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잉여가치의 착취라는 경제학적 개념으로 제기되었다.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가하는 문제는 그것이 어떤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냐 아니냐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며 스미스가 농업노동이든 공업노동이든 상관없이 자본과 임금노동이 직접 교환되고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면 생산적 노동이라는 것과 특정대상이나 팔 수 있는 상품에 구체화된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두 가지 규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 노동이란 그것이 산출하는 것의 물질성과 무관하게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명확히 규정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의미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가변자본 부분(임금으로 지출되는 자본부분)과 교환되어 이 자본 부분(즉 그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 만 아니라 그밖에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도 생산하는 임금노동이다. 오직 이것 때문에 상품 또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며, 자본으로 생산된다.

예컨대 연극배우나 어릿광대도, 만약 그가 자본가(기업가)에게 고용되어 그에게 임금 형태로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그 자본가에게 돌려준다면 그는 생산적 노동자이지만, 수선 재봉사가 자본가의 집에 와서 자본가의 바지를 고쳐주고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가치만을 창조하여 준다면 그는 비생산적 노동자이다. 전자의 노동은 자본과 교환되는 것이며 후자의 노동은 소득과 교환되는 것이다. 첫째 종류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둘째 종류의 노동에서는 소득이 소비된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은 여기에서는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서 구분되어 있으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가닐 등등은 어리석게도 사태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 못하였던지 매춘부, 하인 등등의 노동 즉 봉사 또는 기능은 화폐를 가져 오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작가가 생산적 노동자인 것은 그가 사상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서적상을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떤 자본가의 임금노동자인 한에서 생산적이다. (칼 맑스, <잉여가치학설사>, 아침, p.165, 171)


이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이냐, 비생산적 노동이냐 하는 문제는 오로지 자본과 관계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잉여가치학설사>의 관점과 달리 <자본론>은 아마포처럼 기계가 도입된 제조업에서 가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다루고 있을 뿐, 불변자본의 비중이 낮은 서비스 부분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자본론>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의 운동이었다. 이는 아마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제기한 “연극배우, 어릿광대, 매춘부” 등등의 노동은 제조업에 비해 사소하고 부차적인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잉여가치학설사>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조업의 확대 발전과 함께 맑스주의는 극히 공업중심적인 이론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자본의 유통을 다룬 <자본론> 2권에서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밝힌 견해와 언뜻 보기에 모순된 견해를 개진했다. 여기서 그는 자본이 유통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인적·물적 비용을 유통비용이라고 부른 다음, 그것이 순수유통비용·보관비용·운수비용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중 순수유통비용에는 상업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과 부기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이 포함되는데, 이 경우 그들이 받는 임금은 자본가의 비생산적 지출이며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자본가가 획득한 잉여가치에서 공제되는 비용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보관비용과 운수비용은 생산과정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여기에 드는 노동은 가치를 추가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자본론> 2권의 이 부분은 이후 맑스주의자들이 사무·유통·서비스노동자들을 비생산적 노동자로 간주하는 단초가 되었다. 스위지와 바란은 <독점자본>에서 이러한 분야들을 경제잉여를 흡수하기 위한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파악했으며, 에른스트 만델 역시 기본적으로 그 주장을 받아들여 <잉여가치학설사>와 <자본론> 2권이 모순적이며 후자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만델은 <자본론> 2권을 근거로 맑스가 결국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은 모두 생산적 노동이라는 주장을 사실상 포기하고 “물질적인 상품의 생산에 참여하여 있고 따라서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를 생산적인 노동자로 규정”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그는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서비스 부문의 확대는 기껏해야 작은 악(惡)일 뿐”이라는 현실의 전개과정과 상반되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 영역은 총잉여가치량 증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이윤을 쫓게 되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자가용, 텔레비전, 비디오처럼 서비스 제공 기능을 가진 물질적 상품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맑스가 살던 시대에는 만델이 말한 대로 부기노동이나 유통노동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당시 공장 모델은 수십에서 수백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기업주와 소수의 인원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구조였다. 브레이버맨이 지적한 대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규모가 큰 사업장에서도 대개 여섯 명을 넘지 않았으며, 기업주의 친척과 친지인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당시 사무실 직원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예비 경영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상업, 특히 소매상업은 소규모였으며 지금 같은 대규모 유통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맑스가 이러한 부분들을 자본가 전체의 지출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영역을 자본가 개인의 필요에 의해 자본가의 수입과 교환되는 비교적 작은 부분으로 상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부문들 역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 자본가에게 이윤을 확보하는 독립적인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에 다양해진 서비스 부문까지 합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부분은 고용은 물론 경제적 비중에서도 이미 공업 부분을 압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정도로 거대한 부분을 비생산부분으로 설정한다면 현실 파악에 곤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이런 주장을 펼치는 논자들이 대개 이 공제되는 비용을 개별자본의 것이 아닌 일종의 사회적 공비로 취급하면서 난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이토록 거대한 부분이 공비로 잉여가치에서 공제되고 있다는 관념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이냐 비생산적 노동이냐는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가 물질이냐 서비스냐가 아니라 맑스의 말대로 자본과 관계로 설정되어야 마땅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이윤을 추출해낼 수 있는 노동이 생산적인 것이다. 

18세기 중농주의자들이 공업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본 것은 농업생산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만 공산품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 사치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주의자들이 살던 시대에서 불과 3백 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공산품이 없는 삶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회적 필요는 인간 사회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3세기 전에는 공산품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영역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공업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를 창출하고 마침내 그것을 인류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 생산력의 발전이 전통적인 서비스 영역을 넘어 사회 및 대인 서비스를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필요로 만들고 상품화하고 있다. 이 속에서 제조업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농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적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은 비제조업 부분의 증가를 자본주의 쇠락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 산업사회가 발전할 사회적 여력을 준 것처럼, 제조업 생산성의 발전으로 사회의 노동력 전반이 공장 노동에 투입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은 사회의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우리는 서비스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공업노동만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특화시키는 논리들은 제조업 비중이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 사회가 공장 노동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기묘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산업화되어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서비스 분야의 노동 역시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비생산적이라는 인식, 부차적인 영역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오히려 자본으로 하여금 이들을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사슬이 되고 있다. 이런 노동이 성인 남자의 가족 부양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여성, 청년, 청소년 같은 사회 잉여층의 부차적 노동이라는 인식이야 말로 이 노동의 가치를 낮게 묶어두는 인식적 장애로 기능하고 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공업중심주의자들은 제조업이 높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제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제조업 자체가 고임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업 노동이나 서비스 노동이나 자본과 결합할 때 동일한 노동인 것이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사회적 가치와 인식인 것이며 그 역시 변화하는 것이다. 

자본은 이러한 인식과 불안정 노동자들의 특수한 존재양식을 최대한 이용하여 극악한 노무관리를 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이 특유의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작업장의 단결을 통해서 자본에게 직접 권리를 요구하기 어렵다는 현실, 파트타임으로 노동시간이 분산되어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강제하기 어렵다는 현실, 이런 존재양식 자체가 또 다시 이들의 저임금·불안정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8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월마트이다. 월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는 서비스 산업에서 비교적 대규모의 집약된 현장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이며 1962년 창사 이래 지금까지 무노조 사업장이다. 미국 디트로이트의 자동차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6만 달러(약 7천만 원)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는데 반해 월마트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연봉은 미국 1인당 국민소득에도 크게 못 미치는 1만8천 달러에 불과하다. 

임금소득이 보편화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단지 임금소득의 여부를 가지고 계급을 따지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가들마저 임금소득자의 외양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사회는 일반 노동자들의 수백, 수천 배에 이르는 고임금을 받는 극소수의 자본가들과, 블루칼라냐 화이트칼라냐 무관하게 안정된 고용을 바탕으로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중간계급, 그리고 광범위한 불안정·저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물론 중간계급의 성격 상 이들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위 역시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현재적인 의식이 중산층의 그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위 맑스주의자들이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간혹 사용하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는 부분적인 임금소득자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지 전적으로 임금소득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고용의 단속성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사회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일 수는 없다. 오히려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이나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조직된 중간계급들은 자신들이 이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정체성과 이해, 예컨대 동일한 노동자계급, 동일한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과거 부르주아들이 그랬듯이 이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며 독자적인 이해로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담지자가 되고 있다. 이들의 전반적인 저임금은 자본주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인구 다수부분의 저임금화에도 불구하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는 지난 십여 년 간 주식·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높게 유지되면서 소비력을 지탱해 왔다. 공산품 가격의 전반적인 하락도 이들의 생활수준을 일정정도 유지시켜 주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자산 거품을 유지해왔던 마지막 지렛대인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자 이들은 곧바로 당장 의식주마저 보장받기 힘든 집단으로 전락했다. 기본소득제도와 같은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능성과 잠재성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은 제조업에 비해 현장에 집약된 노동자들이 아니다. 대규모 유통업체처럼 밀집한 사업장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이러한 사업장들 역시 수천, 수만이 일하는 제조업 대공장의 집약성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반적으로 이들의 존재양식은 파편적·분산적·유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세계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 지 20여 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의 역사는 최소한 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조직화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가입률은 2.8% 밖에 되지 않으며,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15만 조합원 중 사내하청노동자는 5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 미미한 조직조차 대개 기존의 정규직노조에서 조직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금속대공장에서 사내하청운동을 일구고 노동조합을 건설한 것은 대개 민주노총과 적대적인 좌익 정파의 활동가들이었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그 집약성과 사회적 파급력 때문에 흔히 노동계급의 대표자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을 배경으로 고용과 고임금을 보장받고 있는 조직노동운동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요구는 전통적으로 노동계급 공통의 요구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정규직노동자들에게만 유리하고 노동유연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제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현상은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연장으로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장에 집약되지 않고 분산적이고 유동적인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존재양식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기존의 노동조합 모델로 조직하기는 매우 어렵다.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공장의 집약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68년 혁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개별화된 인자들의 투쟁은 폭발했다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 이런 경험의 현학적인 표현이었으며, 맑스주의자들은 그 이론들의 실천적 무력함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공업노동자들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신뢰가 포스트구조주의자들보다 결코 더 많은 것을 보여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근 십여 년 간의 경험은 전통적 공업노동자들과 그들의 조직에 속하지 않는 개별적인 인자들의 투쟁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전·반세계화 투쟁들은 소위 조직노동자들의 질서정연하고 정형화된 투쟁이 아니라 무정형적이면서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인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2001년 9․11 사태가 빚은 국제적 공안국면과 이어진 세계경제의 호황으로 주춤했다가 2008년 위기 이후 극적으로 폭발했다. 

일방적인 매스미디어를 대체하고 있는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투쟁들이 보다 쉽게 확산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발생한 중동의 민주화 투쟁,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의 투쟁, 미국의 아큐파이 투쟁은 모두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공간의 집약성은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러한 투쟁들이 입증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사람들이 새롭게 발전한 매체의 지원을 받아 어떻게 실물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지 이들 투쟁은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어떻게 일상적인 조직과 실천을 만들어가며 그것을 기반으로 보다 급진적인 의식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연적인 폭발이나 계기만을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선진적인 부분이 필요하며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사전조직화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양식은 일정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층을 기본 조직 대상으로 상정한 기존의 노조와 정당을 뛰어 넘는 모델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하여 노동조합의 주요한 형태가 된 산별·업종·기업별 노조 등 전통적인 조직 모델들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틀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최근의 시도들은 대개 기존 노동조합의 특성보다는 생활 공동체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단일한 현장에 모여 있지 않고 유동적이고 분산적인 노동자들에게 “지역”과 “생활”이라는 것이 주요한 코드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공동체들이 친목단체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의식, 정치적 운동과 직접 결합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장에 집약되지 않았다는 상황은 흔히 약점으로 지적되지만 이는 반대로 현장과 노조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들을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공장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계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딜레마의 하나였다. 맑스가 활동하던 시대부터 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계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독일의 라쌀레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직 정치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은 정치투쟁은 부르주아 국가주의에 포섭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총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에 기초해서만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양자가 모두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며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은 현실에서는 독일 사민당의 예처럼 당과 노조의 기계적인 분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노조는 경제투쟁을 담당하고 노조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정치투쟁을 담당하는 이러한 활동방식은 노동자들을 표를 찍는 대중으로 수동화 시키고 정치와 경제의 부르주아적 이분법을 재생시키는 효과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 볼셰비키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이 허용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비합법적인 정당이 직접 현장의 당 조직을 통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890년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과 교육 중심의 활동에서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경제투쟁에 직접 개입하고 지원하는 활동으로 운동방식을 전환했다. 상대적으로 산업이 발전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분트 활동가 크레머가 쓴 <선동론>은 이런 운동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투쟁이 격렬해지면 자연스럽게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치투쟁을 배타적으로 강조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준 강렬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사실 이런 노선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의 경제주의 비판은 정치노선이라기보다는 조직노선 상의 논쟁에 더 가까웠다. 189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 각지에는 레닌과 마르토프의 페테르스부르크노동자해방투쟁동맹을 필두로 사회주의적 지식인과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결합한 활동가조직들이 많이 생겨났다. 경제주의자들은 대개 러시아 산업지대에 분산된 활동가조직들을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거나 혹은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했던 반면 레닌은 이를 중앙집권적인 정당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를 일반적으로 사회에 제기하는 투쟁도 정치투쟁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런 정치투쟁을 노동자들의 자생성에 굴종한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경제투쟁 자체로부터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정치는 조합주의적인 정치로 귀결되지 국가권력을 타도하거나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으로 제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닌이 제시한 해결책은 공장 외부에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공장의 노동자들로 정치의식이 불어넣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노선은 조직의 문제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정당은 직접 노동자들의 흔히 공장세포로 불리는 현장의 기초 당 조직을 통해 경제투쟁을 지원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정치선동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각성시켜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오해와 달리 레닌이 주요하게 제기한 정치적 선동의 내용은 제2인터내셔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민주주의적 요구들이었다. 

이러한 노선은 러시아 혁명 이후에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달리 노동조합이 하나의 제도로 확립된 서구 노동운동에 코민테른 조직노선을 이식하기 위한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공장세포는 독립적인 정치조직체라기 보다 노동조합 활동의 배후정치로 전락했다. 스탈린주의에서 당-세포-노조의 전달벨트 이론은 이를 정식화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 현장에서 정치선동과 경제선동을 직접적으로 수행한다는 공장세포 원래의 의의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초기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은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요한 요구로 내걸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아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가 가장 중요한 실천적 요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됨에 따라 8시간 노동제와 더불어 사민주의 운동의 두 축을 이루었던 민주주의적 정치투쟁의 요구가 사실상 기각되었다. 그 결과 코민테른의 전술은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실제적인 매개를 상실하고 오로지 노동조합적 요구들을 가장 전투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으로 경사되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가 제출한 「전술에 대한 테제」는 이러한 노선을 명백히 천명했다. 


자신들의 부분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동적으로 전체 부르주아 및 그 국가기구와 투쟁할 수밖에 없다. 부분적 요구를 위한 투쟁이나 개개의 노동자그룹의 부분적 투쟁이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투쟁으로 확대되어감에 따라 공산당의 슬로건도 또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고, 일반화되어 마침내 직접적인 적의 타도를 호소하는 슬로건에 이른다. (코민테른 3차 대회, 전술에 관한 테제 (1921년 7월9일))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은 이러한 코민테른의 전술을 그대로 강령으로 정식화한 것이었다. 독일 사민당의 강령이 사회주의적 이상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실천의 분리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 트로츠키는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요구를 배제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적 요구를 중심으로 강령을 구성했다. 이는 결국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적 제 요구를 기각하고 이른바 “생산의 정치”로 함몰되도록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경제투쟁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에서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되더라도 레닌이 조합주의 정치로 규정한 노동조합 요구를 법제화해서 정부에 요구하는 투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반대로 1968년에 나타난 것처럼 공장 외부의 사회적 위기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끄는 경우가 더 많았다. 

프레카리아트 운동은 차티스트 같은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처럼 현장의 자본가에 대한 요구보다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요구는 “1%에 맞서는 99%”라는 슬로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사회경제적 대안보다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 이들이 독자적인 사회경제적인 계급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인 위기의 심화가 필요하다. 다가올, 혹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위기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할 주체로서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실천과 구체적인 요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들의 존재 조건에 대한 더 깊은 연구와 직접적인 실천의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운동의 경향으로부터 일반적으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유럽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1차 대전 이후, 우리에게는 87년 이후 기각된 민주주의적 요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불안정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세계화된 자본의 힘이다. 그 앞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이해를 일정 조율하는 역할을 하던 국민국가의 대의제 합의구조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국가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자본에 종속되어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들조차 후퇴하고 있다. 대의제 합의구조를 보완하던 코포라티즘 체제 역시 세계화 된 자본의 요구를 조직노동운동이 추인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점차 사회적 인구구성에서 다수의 위치를 점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대변하는 제도 정치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은 한국에서의 촛불 투쟁이나 아큐파이 투쟁에서 나타나듯이 민주주의, 그것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끌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 의식을 유러코뮤니즘 같은 국가개조론의 방향이 아니라, 구체적인 요구들과 폭로를 매개로 하여 보다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요구로 이끌어야 한다.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여성, 청소년 등 우리가 흔히 주변부 노동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구성요소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대개 일터와 생활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고 있다. 공업노동자들을 배타적으로 기반 하려한 맑스주의자들이 대부분 여성, 환경 및 여타 소수자 운동에 대해 그 중요성을 폄하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조직하려는 대상이 주로 남성노동자들이란 점, 경제투쟁을 이들을 조직하는 중심 고리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진보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일본에서 프레카리아트 메이데이 행사 광고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뿔뿔이 해체되면서 전쟁 상황을 강요받고 있다. 노숙 생활자는 차별과 배제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자립’을 강요받고 시장에서 방출된다. 장애인들은 사회보장 혜택도 받지 못하면서 ‘자립지원 법’이라는 명목 하에서 자기 책임으로 일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 파트타임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고 정규직은 꿈도 못 꾸는 노동만 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는 인간성을 유린하는 지문 날인 따위의 치안 관리에 휘둘리면서 주변부 노동자로 혹사당한다. (아마미야 가린, 같은 책, p.25)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을 기본 모델로 현재 사회주의자들이 제출하고 있는 강령들과 달리 이런 부분들을 소위 ‘부문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요구들을 중심에 놓고 이를 극복한 사회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요구들을 기각할 수는 없지만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중점을 이동하고 민주주의·여성·환경 등 과거에 부차화 되어 왔던 문제들을 일상적인 실천의 요구로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낡은 전략·전술과 단절이 필요하다

투쟁에 대한 이론은 투쟁의 경험에서 나온다.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유럽 각지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의 경험은 이전까지 생디칼리스트들의 구호이던 총파업과 노동자통제를 사회주의자들의 전술과 요구로 받아들이게 했다. 1917년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실천을 중요시하는 코민테른 전술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모두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전술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산업 국가들을 휩쓴 세 차례의 국제적인 반정부운동, 즉, 68년, 99년, 2011년의 투쟁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투쟁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68년 혁명은 포스트구조주의를, 99년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다중이라는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2008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와 점령운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와 광장 점령을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의 대부분을 여전히 규정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1920년대 코민테른에서 정식화된 노선들이다. 프레카리아트라고 불리는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주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코민테른 노선으로 대표되는 대공장/정규직/남성중심의 전략·전술과의 단절이 필요하다. 우리가 맑스와 엥겔스, 레닌 저작들의 오타쿠가 아니라 진짜 현실을 분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이라면 이른바 “맑스주의의 역사와 전통”보다는 현실을 중심에 두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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