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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특집]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①

새로운 주체를 위한 노동계급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이정인 (사노신 독자회원)
 




* 작년 노동자대회에 발간된 <붉은글씨>에 실린 글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대공업을 자본주의 생산의 집적과 집중의 필연적 결과물인 동시에 세상만물의 가치를 창출하는 물질적 생산의 중심이자 계급의식이 집약된 혁명 혹은 사회진보의 기지로 상정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촛불투쟁, 희망운동의 경험들은 이러한 가정이 단순히 환상이나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역사적 경험이다. 객관적인 계급과 당위적인 계급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2차 대전 이후 세 번의 주요한 국제적인 반정부투쟁, 즉 68혁명, 90년대 반세계화 운동,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의 대중투쟁들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보조자나 주변부에 머무를 뿐 무대의 주인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공업노동자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 최후의 순간 분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메시아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믿음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역사적 고찰을 통해 다시 점검해 봐야할 시기에 서 있다.


 

대공장의 등장과 노동자의 보수화

1885년 엥겔스는 가장 산업화한 영국의 노동운동이 왜 사회주의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처음으로 “귀족화된 노동자”, 즉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지속적인 개량은 노동자 계급 중 보호 받는 두 부류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 중 첫 부류는 공장 노동자들이다. 이들을 위하여 적어도 비교적 합리적인 표준 노동일이 법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 상태는 상대적으로 회복되었고 정신적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는바, 이 정신적 우월성은 그들이 한 장소에 집결되고 있는 관계로 더욱 강화되었다. … 둘째는 대형 노동조합이다. 이것은 성인 남자의 노동만이 사용되거나 또는 그러한 노동이 지배적인 노동부문의 조직이다. 여기에서는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의 경쟁도 기계의 경쟁도 지금까지 그 조직적 역량을 타파할 수 없었다. 기계공, 목공, 소목, 건축 노동자들은 각각 그 자체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건축 노동자의 경우와 같이 그들은 기계 도입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그들의 처지는 1848년 이래 의심할 바 없이 현저히 개선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지금까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노동자계급 중에서 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엥겔스는 노동귀족이 생기는 원인을 영국 공업의 독점적 위치에서 찾았다.


영국의 공업 독점이 지속되는 한 영국 노동자 계급은 어느 정도 이 독점의 이익에 참여하였다. 이 이익도 노동자들 사이에 극히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대부분은 특권을 가진 소수가 차지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대중도 때때로나마 일시적으로 한 몫을 얻곤 하였다. 바로 이것이 오언주의의 몰락 이후 영국에 사회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독점이 무너지면 영국 노동자 계급은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들 전체가 ― 특권적이고 지도적인 소수들도 포함하여 ―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에 처하게 될 날이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가 영국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 독일어 제2판 서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이수흔 옮김, 박종철출판사, p.385)


엥겔스가 예측한 대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미국과 독일 같은 새로운 산업국가의 도전에 의해 세계시장에서 영국 산업의 독점은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 노동운동이 급진화 되진 않았다. 오히려 20세기 초 노동운동의 보수화가 서유럽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대규모 제조업의 등장과 궤를 같이 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대공업의 발전을 예측했지만, 당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한 장소에서 일하는 대공장은 아직 미래의 것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맑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고 있던 1850년대와 60년대에는 영국에서조차 공장 규모는 수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자본론>이 아마포를 예로 들어 상품생산을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주도적인 산업은 면방직 공업이었다. 

공장제 도입을 이끈 직물업에서 기계의 도입은 아동노동과 여성노동 같은 미숙련 노동을 광범위하게 사용할 여지를 만들었다. 이들 공장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50%도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값싼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으로 채워졌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엥겔스가 1845년에 쓴 <영국노동계급의 상태>에 잘 드러나 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형태는 파괴되었다. 조그만 쪽방 하나에 온 가족이 거주하며 부모와 아이들 모두 공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른 집단은 바로 이런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로부터 맑스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은 점차 사멸할 것이며 이는 기계제 공업의 발전으로 여성/아동과 남성 성인의 육체능력의 간극이 좁혀짐에 따라 사회성원 전체의 노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래의 가족제도의 붕괴가 아무리 무섭고 메스껍게 보일지라도, 대공업은 가정의 영역 밖에 있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에서 부인·미성년자·남녀 아동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가족과 양성관계의 더 높은 형태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창조하고 있다. … 또한 남녀노소의 개인들로 집단적 노동그룹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연발생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형태[…]에서는 부패와 노예상태의 해로운 원천으로 되지만, 적당한 조건 하에서는 이와 반대로 인간적인 발전의 원천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명백하다. (칼 맑스, <자본론 I (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제 2개역판), p.656)


따라서 맑스는 원칙적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참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동노동 일반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자본주의적인 아동노동의 폐지와 교육과 생산의 통일이라는 요구를 지지했음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맑스가 <자본론>의 집필을 완결지은 1860년대 이후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경향으로 제시했던 생산 규모의 거대화 즉, 공장 규모의 거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시기 영국 자본주의 생산의 중심은 면방직 같은 소비재 산업에서 점차 철강·기계·조선·철도 같은 중공업으로 이동했다. 이와 함께 비로소 오늘날의 대공장처럼 같은 작업장에서 수천, 수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강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강화되고 노동자운동이 정치적으로 급진화 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산업 변화에 따라 제조업에서 여성과 아동 노동력은 점차 축출되었다. 중공업의 발전과 함께 소위 ‘가족임금’이 등장하여 노동자 가정도 부르주아 가족과 유사하게 남성노동자 1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형태가 되었다. 노동계급의 여성은 가사노동으로 돌아갔고 아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보통교육제도에 의해 학교로 흡수되었다. 엥겔스가 1880년대 영국의 “귀족화된 노동자”에 대해서 썼을 때, 그가 노동귀족으로 보았던 집단은 전자본주의의 유제로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수공업적인 노동자들과 새롭게 등장한 공장노동자들이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던 산업의 이동, 즉, 2차 산업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철도·조선·탄광·철강·공작기계 산업의 상호 연관된 발전과 생산단위의 거대화는 북서유럽국가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일반화되었으며 이들 산업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은 대략 1880년대에서 1920년대 사이에 단일한 조직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되었다. 생산의 대규모화와 산업구조의 변화, 기계에 의한 숙련의 대체 등에 의해 장인·직인·숙련공 중심의 노동운동이 몰락하고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매우 동질화된 반숙련·미숙련 육체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노조·정당·공제조합·협동조합·소비조합·취미클럽 등을 통해 ‘노동자 문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동질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세대는 전 시대에 제기되었던 보통선거제의 실질적 확대를 쟁취하며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구성했으나, 보통선거제의 점진적 확대와 생활수준의 전반적 향상과 함께 자신의 정치행위를 평화적인 시위와 투표행위로 제한하고 작업장 투쟁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 결과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맑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 영국에서 목도한 “잃을 것이라고는 노예의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 밖에 없었던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후예들은 여전히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들과 달리 더 이상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을 중심으로 대륙에 새롭게 등장한 노동운동은 맑스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았고 사회민주당과 인터내셔널로 정치적으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노동운동이 엥겔스가 생각한 것처럼 영국의 노동운동보다 급진적인 운동이었는가는 꽤나 의심스럽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노동운동의 형성 초기부터 국가, 가족, 여성에 대한 입장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맑스는 1875년 고타 강령이 나오자 “자유로운 국가”라는 강령의 요구가 라쌀레주의 국가관에 타협한 것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실은 맑스 파라고 불렸던 아이제나흐 파, 즉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의 강령 역시 그 제 1조에 “자유로운 인민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다고 버젓이 밝히고 있었다. 국가주의적 경향은 엥겔스가 당시까지 나온 강령들 중 가장 맑스주의적인 것이라고 논평한 1891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카우츠키가 쓴 에르푸르트 강령 해설은 여전히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제2인터내셔널은 아동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와 여성노동에 대한 제한을 주장했다.

사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실천적으로 노동조합 운동과 결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었으며 이념의 혁명적 성격과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엥겔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사민당 지도부에 의해 맑스·엥겔스의 저술에 대한 왜곡과 조작·누락이 나타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죽기 얼마 전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에 붙인 새로운 서설에서 19세기의 혁명 전술이었던 도시 바리케이드 투쟁이 더 이상 적절한 전술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문서는 상당 부분이 삭제되면서 폭력투쟁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게끔 편집되었다. 그 결과 이 글은 독일 사민당에서 엥겔스를 의회주의적 평화주의자로 해석하는 주요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자 사민주의 운동은 곧바로 수정주의 논쟁에 휩싸이며 내적으로 분열되었다. 엥겔스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당내 가장 권위 있던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의 변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수정주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독일 사민당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서유럽 노동운동의 실체는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회원 단체들은 전쟁 이전에 이미 반전운동을 결의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노동자들을 사로잡은 애국주의 열풍에 굴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은 전쟁공채 투표를 반대했지만, 당의 공식적인 이론적 지도자 카우츠키는 전쟁공채에 조건부 찬성 입장을 내놓았다.

서유럽 사민주의 운동의 변질에 충격을 받은 레닌은 이 변질 과정을 제국주의 분석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는 엥겔스의 노동귀족 이론을 더욱 확대하여 서유럽 전반에 적용시켰다. 레닌은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주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주민에 대한 초과착취를 통해 자국의 노동계급 중 일부를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로 유럽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보수화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분열

엥겔스와 레닌의 노동귀족이론은 당대 노동운동의 보수화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이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노동귀족이론은 몇 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어디까지 노동귀족이고 어디까지 노동자계급인가는 애매한 문제로 남았다. 특히 레닌의 노동귀족이론은 식민지에서 뽑아낸다고 상정된 초과이윤을 실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칫 산업국가 중심부에서 혁명의 전망이 없다는 논리로 귀결될 여지가 있었다. 이에 대한 맹아적인 문제점은 부하린과 레닌의 미묘한 차이에서 나타났다. 1차 대전 발발 이후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볼셰비키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조직자본주의”라는 개념과 함께 소위 “약한 고리론”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런 논리가 잘못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을수록 혁명이 일어나기 쉽다는 논리가 될 가능성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래서 레닌은 대신 흔히 알려진 것처럼 “약한 고리”가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중간정도의 약한 고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노동운동이 보수화된 서구도,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동양도 아닌 러시아처럼 어느 정도 산업이 발달하고 노동자들이 중첩된 모순에 고통 받고 있는 중간 정도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 분석을 기초로 이 혁명은 일국의 혁명에 제한되지 않고 즉시 세계혁명으로 전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간정도의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 혁명은 서유럽의 공업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사회주의 혁명과 동양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과 결합하여 세계혁명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런 레닌의 전망은 민족해방 투쟁 일반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적대시한 서유럽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에 상대적인 중요성을 두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1968년 이후 자국의 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한 급진적 좌파운동은 유럽이 아니라 제3세계 해방투쟁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런 논리들은 보다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이단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에게 노동귀족이론은 일반적으로 기각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유럽의 공산당들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기본으로 한 운동을 계속했다. 반면 보다 좌익적 맑스주의자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운동의 보수화를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의 중심성을 방어하기 위해 노조관료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기했다. 이런 논리를 특히 정교하게 제시한 것은 토니 클리프를 위시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가들이었다. 

한국에서 노동귀족론과 노조관료론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조관료이론은 이론사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귀족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적 장치였다. 이 이론은 사실 맑스주의 역사에서 이질적인 전통을 수용한 것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레닌과 엥겔스의 논의가 아니라 베버를 시조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학적 분석의 틀을 도입해 노조관료이론을 만들었다. 주로 독일 사민당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제의 발달에 대한 막스 베버의 분석을 독일 노동운동에 적용했다. 그는 1911년에 쓴 <정당사회학>을 통해 독일의 노조와 사민당 모두에서 관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이들 조직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서술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만든 노조관료이론은 베버와 미헬스의 분석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적 경향은 결국 이들이 서유럽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나 레닌의 주장처럼 영국이나 서유럽의 공업노동자들이 노동귀족이라면 이들 나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집단이라고 상정된 노동귀족을 대상으로 조직화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토니 클리프를 비롯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유럽에서 전통적인 산업노동자들의 투쟁이 크게 벌어졌던 1920년대와 1960~70년대 투쟁을 근거로 노동귀족이론으로는 영국 같은 선진 산업국가에서 벌어진 대규모 노동자 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신 자본주의 사회의 노사관계에서 일상적인 교섭을 담당하는 노조관료층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집단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일상적 시기에 일반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겉보기에 보수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잠재적인 혁명성과 투쟁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 시기에 일반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과 결합된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은 노조관료라는 자본주의 완충장치를 뚫고 나와 이들을 다시 혁명적 계급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1920년대 영국 총파업이나 1960~70년대 벌어졌던 숍스튜어트 투쟁 같은 일반 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했으며, 그것은 반관료 평조합원 노선으로 정식화되었다.

그러나 노조관료이론은 사실 전통적 공업노동자에 대한 혁명적 신뢰 이상,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관료주의는 일반 조합원들의 조합주의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노조관료들은 조합주의의 인격적 화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미 1950년대부터 산업노동자들의 부르주아화 되었다는 주장이 등장했고 특히 지난 40여 년간 주요 산업 국가들에서 벌어진 주요한 반정부 투쟁에서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형성된 공업노동자계급은 2차 대전 이후 급속하게 보수화되었다. 1950년대 장기호황 이후 노동조건이 급속히 개선되었으나 이러한 투쟁은 공장 밖의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미래의 산업노동자들은 48년간의 고용보장, 연간 48주, 주 48시간의 노동시간이라는 세 가지 48을 기대할 수 있었다. 호황에 따라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1950년대 말이 되면 사회학자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메그나드 데사이, <마르크스의 복수>, 김종원 옮김, 아침이슬, p.380)”

60년대 말, 서유럽 국가에서는 학생들의 투쟁이 불러일으킨 전사회적 위기에 호응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의 물결이 휩쓸었다. 북미에서 195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생활개선이 서유럽에서는 대중투쟁의 성과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1968~1970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파업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예년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임금인상을 획득했다.

2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와 북유럽 3국, 네덜란드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 존재하던 국가관료·기업관료·노조관료의 3자 협의체인 코포라티즘 체제가 1970년대 들어 서유럽 국가들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제도주의자들은 코포라티즘을 케인즈주의, 포디즘과 함께 장기호황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 양식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코포라티즘은 사실 68~72년 사이에 유럽을 강타한 노동자 대중투쟁을 포섭하기 위한 대응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노동자투쟁은 70년대 들어 빠르게 퇴조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주목했던 영국의 평조합원 운동도 흔히 ‘불만의 겨울’로 불리는 1978년 말 대규모 투쟁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1980년대 몰락했다. 70년대 불황이 강타하자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키는데 급급했고, 80년대 정치적 반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맑스주의자들은 사실상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았다. 유럽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조직노동운동의 경제주의를 정당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클리프 류의 노조관료이론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전통적인 공업노동계급의 혁명성을 관념적으로 정당화하고 그들의 보수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맑스주의자들이 공업노동자들의 보수화라는 현실에 눈을 감으려 하고 있을 때, 부르주아 사회학에서는 70년대 초 이를 반영하여 내부노동시장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부노동시장이론은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시장의 경쟁에 제약받지 않는 폐쇄된 노동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1980년대 들어 노동계급의 분절화 이론, 이중 노동시장 이론으로 발전해 들어갔는데 그 핵심은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폐쇄된 노동시장이 존재하며, 여기서 배제된 하층 노동자들의 노동시장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되린저와 피오르가 처음 제기한 내부노동시장이론은 공장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소위 기업특수적인 숙련에서 원인을 찾았다. 기업 특수적 숙련이란 공장의 기계설비에 고착된 모종의 숙련이 있다는 가설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기술혁신으로 공업 부문에 전반적으로 탈숙련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노동시장은 건재했다. 되린저와 피오르는 미국 현장 특유의 직무급제를 내부노동시장 형성의 중요한 기제로 파악했지만 직무급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대규모 제조업에서 내부노동시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제조업 대공장의 폐쇄적 노동시장이 숙련이나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대공장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런 폐쇄성의 형성은 엥겔스가 지적한 대로 대규모의 인적 집결성이라는 대공장 자체의 잠재력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20세기 초 공장규모가 일반적으로 확대되는데 주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포디즘 체계는 그 형성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유인하는 경향을 보였다. 1914년 헨리 포드는 ‘T-모델’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일 작업 8시간 당 5달러를 지불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공장 노동자들이 받는 금액의 세 배에 가까운 임금이었다. 대공업의 단순 반복적인 업무와 인적 집약성으로 인한 조직화 가능성은 비교적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좋은 노동조건을 제시하게 했다. 

이런 포드 유형의 대공장은 대규모 기계 설비를 놀리지 않기 위해 안정적인 고용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포드 유형의 대공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풀타임 노동자, 소위 말해 정규직 고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고용관계의 안정성은 다시 노동조합의 조직을 이전에 비해 용이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조직노동운동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 고용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적인 공공부문과 대규모 제조업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장기 호황 국면에서 높은 조직률을 가진 서구의 노동조합은 안정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9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확대되었다고 흔히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노동유연화에 의해 내부노동시장이 해체되었는가? 여러 연구 결과들은 전통적인 화이트칼라 분야에서는 노동유연화의 진행과 함께 내부노동시장이 일정정도 붕괴되었으나 대규모 제조업에서는 축소된 형태긴 하지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유연화는 탈공업화와 함께 새롭게 창출된 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추진되었다.



탈공업화와 계급논쟁

1973년 이후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제조업 고용이 뚜렷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럽 좌파와 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 여러 가지 논쟁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은 대개 탈공업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는 전통적인 계급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었다. 

19세기에 중간계급, 즉 맑스주의 용어로 쁘띠부르주아는 임금이 주요 소득이 아닌 자영농민과 수공업자를 의미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일반적으로 임금소득자와 동의어로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공무원, 기술자, 감독자, 사무직, 판매직 노동자 등 임금소득이 주수입이면서도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와 출신성분, 생활환경, 정서, 의식에서 큰 차이가 있는 새로운 계층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미 이 당시 사민당 내부에서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인지 아니면 중간계급에 속하는 자들인지 논쟁이 벌어졌다.

베른슈타인은 제2인터내셔널 주류의 계급양극화 이론을 비판하며 이런 부류의 임금고용인들을 중간계급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 하에서는 계급 양극화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이 늘어나며 오히려 사회가 안정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우츠키를 위시로 한 독일 사민당 주류는 임금소득자들은 결국 양극화 경향을 피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집단으로 간주했다. 이 두 경향은 사실 1970년대 논쟁을 예기하는 것이었는데, 논쟁과 무관하게 독일 사민당은 비(非)공업노동자 당원들이 증가하며 점차 “국민” 정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계급의 범위에 관련된 논쟁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장노동자만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해지면서 끝이 났다.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는 당의 기반을 공장에 두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새로운 임금소득자들은 동맹의 세력도 계급적 연대의 대상도 아니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는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세력에 맞서는 노동자와 부르주아적인 중간계급의 동맹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조차 혁명의 주체는 공업노동자와 농민들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장노동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는 독일처럼 중간계층이 발달하지 못하고 대규모 작업장이 외자유치를 통해 이식된 러시아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주도성이 강화된 1차 대전 이후 국제 사회주의 진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노동자와 동일한 개념으로 수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1930년대 들어 하급 사무직 근무자들이 파시즘의 지지자로 드러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공장노동자들의 보수화와 제조업 비중의 축소에 따른 정치적 실천의 변화가 제기되며 유사한 계급 논쟁이 부활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조업 생산의 거대화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친 뒤 활짝 꽃을 피웠다. 두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업의 변화는 2차 대전 이후 서유럽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일반화되어 내구소비재, 전자산업, 자동차, 철강, 석탄, 석유생산 산업이 상호 연관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산업의 융성은 이중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호황 동안 생산이 확대되고 생산규모가 거대화되며 제조업 고용이 증가했지만 비제조업의 고용은 더 빨리 증가했던 것이다. 미국의 좌파 학술 잡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의 대표적 이론가 폴 스위지와 폴 바란은 1966년에 발표한 <독점자본>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전통적인 독점자본주의와 연관시켰다. 그들은 독점자본 시대에 등장한 생산의 거대화는 대규모의 경제잉여를 창출하고 이 경제잉여를 처분하기 위해 커다란 비생산 영역이 창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 이후에 서구 사회에서는 공공부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거대해진 생산을 기획·관리하고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상품을 광고하고 유통하는 영역이 비대하게 발전했다. 스위지와 바란은 이를 대규모 경제잉여를 처리하기 위한 자본의 노력으로 규정했다.

1970년대 계급 논의는 주로 이런 부분은 일하는 임금소득자, 흔히 화이트칼라라고 명명된 사회집단의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집중되었다.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던 사민당과 공산당,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은 새롭게 늘어나고 있는 화이트칼라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를 놓고 다양한 논의를 시작했다. 사민당들은 베른슈타인과 유사하게 이들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반면 공산당은 여전히 공장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유지하며, 이들이 노동계급이 아니라 새로운 중간계급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럽 공산당들은 반독점민주주의라는 폭넓은 전선 하에서 이들과 동맹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유럽 공산당의 전략을 주도한 그리스 출신 사회학자 니코스 풀란차스의 계급론은 반독점 민주주의 전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계급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공산당과 사민당 모두의 정치적 우경화로 귀결했다. 

이 두 경향과 다른 제3의 이론을 제기한 것은 스위지와 바란과 같이 <먼슬리 리뷰> 그룹에 속한 해리 브레이버맨이었다. 그는 1976년에 <독점자본>의 분석을 현대 자본주의 계급분석에 적용시킨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브레이버맨은 제조업 뿐 아니라 다른 산업 영역에서도 단순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창출되고 있으며 이들의 성격은 제조업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레이버맨의 주장과 달리 이후의 연구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의식은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무엇보다 비제조업 화이트칼라 임금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제조업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1980년대 들어서자 서구 산업 국가들의 탈공업화 경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산업공동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좌파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는 1980년 선견지명적인 통찰력을 담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의 역사적 역할이 끝났다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이제 특혜 받은 소수층일 뿐이다.” 앙드레 고르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전통적 노동계급에 속하지 않는 신(新)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들은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도 동일성을 가질 수 없는 비(非)계급이다.

인구의 대다수가 후기산업사회의 신프롤레타리아에 속한다. 이 신프롤레타리아는 불안정한 지위의 보조직·기간직·구(舊)기술의 노동직·대체직·파트타임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일도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는 자동화 때문에 상당수 폐기될 것이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현웅 옮김, 생각의 나무, p.110)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972년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였던 에른스트 만델은 <후기자본주의>라는 책에서 본질적으로 비생산적 분야인 서비스산업의 팽창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그것은 기술발달에 따라 상품 산업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교통 서비스는 자가용에 의해, 극장이나 영화 서비스는 개인 텔레비전 세트에 의해서 대체되며 장래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교육훈련이 비디오 카세트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다. (에른스트 만델, <후기자본주의>, 이범구 옮김, 한마당, p.396)”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에 대한 답변으로 공업노동자들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 국가로 이전되고 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북미와 서유럽에서 제조업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대만 등 신흥공업국의 등장으로 전체 공업노동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탈공업화 경향이 단순한 이전이나 정체가 아니라 역전불가능한 자본주의의 경향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졌다. 2003년 발표된 미국 알리안스 자산관리의 세계 20대 경제국 고용 동향 분석에 따르면 1995~2002년까지 제조업분야의 일자리는 2200만여 개가 줄어들어 11%가 넘는 감소를 기록했다. 이 기간 미국의 제조업 고용은 11.3% 하락했으며 일본은 16.1% 하락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공업노동자 증가의 예로 제시한 브라질과 중국, 한국에서도 제조업 일자리는 각기 19.9%, 15.3%, 11.6% 감소했다. 이런 결과는 그들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창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한 신흥공업국가에서도 제조업의 비중이 계속 줄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후반 전통적인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여전히 탈공업화를 부정하고 있을 때, 탈공업화 논의를 넘어 인간의 노동력 사용 자체가 종말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고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5년 출간된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과 1996년에 나온 프랑스 작가 비비안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는 제조업의 축소를 넘어 인간노동의 종말을 예상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은 자동화의 진전이 결국 인간 노동력 사용에 종말을 고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제조업뿐 아니라 농업과 서비스업 등 모든 산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유의 주장이 옳다면 당연히 실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주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실업률은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에 급속히 증가했다가 1990년대 이후 정체되거나 심지어 미국의 경우에는 감소세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경제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공업노동자들의 절대적 숫자가 감소 혹은 정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탈공업화는 노동의 종말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과 노동방식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탈공업화의 배경이 된 1970년대 북미와 서유럽의 경제침체는 이윤율의 저하 때문이라는 것이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합의되었다. 이로 인해 맑스주의 이론진영에서도 종래의 과소소비설에서 맑스가 <자본론> 3권에서 제시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새삼 자본주의 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부각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구성에서 불변자본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잉여가치를 낳는 노동자의 수는 불변자본 요소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생산성을 계속 상승시켜서 경쟁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확보하고자 노력하므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갈수록 고도화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의 변화는 이윤율의 저하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근래의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특성으로 많은 논자들이 금융화를 꼽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융부문의 팽창이 생겨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금융의 팽창이 완전히 새롭고 특이한 현상은 아니었다.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화폐자본이 생산으로부터 유리될 때 일반적으로 금융적 팽창이 형성되었다. 이런 금융의 과도한 팽창은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새로운 산업, 새로운 투자처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해소되곤 했다. 문제는 1970년대 이후 이렇게 웃자란 자본을 흡수할 만한 제조업의 확대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소위 제1부문과 자동차를 비롯한 내구소비재 부문의 발전이 경제성장과 고용확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40여 년 동안 제조업에서 그에 상응할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휴대폰,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제조업 영역이 창출되고 있지만 이들이 지난 시대의 기계·철강·자동차산업처럼 경제성장을 이끌기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단 이들은 그것들에 비해 비교적 값싼 소비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제조업 부분에 보다 쉽게 적용되는 기술혁신은 전보다 훨씬 줄어든 노동자로 필요한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브레너는 <혼돈의 기원>에서 1965년에서 1973년 사이 제조업에서의 이윤율 저하 때문에 금융부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 시기 이후 비제조업의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제조업에 비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레너는 맑스의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이 지나치게 단순한 모형이라고 비판하며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 원인을 과잉축적과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브레너는 자동화 혁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위기 자체는 제조업 분야의 과잉축적으로 촉발된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의 개발로 출발한 소위 극소전자 혁명,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혁신이 70년대 이후 모든 제조업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대로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산업자본가들의 대응이었다. 기술혁신은 제조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을 줄이고 선진산업국가에서 제조업의 이윤율을 전반적으로 더욱더 하락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능한 것이 분명하다. 

지난 40년 동안 모든 주요 산업국가에서 서비스 산업의 고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제레미 리프킨이 주장한 대로 기술의 발전으로 서비스 영역에서 퇴출되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가 자동화의 결과로 노동력 사용이 줄어든 서비스분야의 예로 제시한 전화 교환수, 우편 서비스, 일반사무직, 유통업과 같은 부분들은 공공서비스, 사무, 유통 등 2차 대전을 거치며 급증한 서비스산업의 보다 전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서비스영역에서 고용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서비스산업 종사자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체 임금노동자의 60~70%를 차지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비스산업을 넘어서는 또 다른 확대과정이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제조업을 비생산영역으로 바라보는 사고로는 이 부분들의 팽창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서비스산업의 낮은 노동생산성과 따라서 여전히 제조업이 경제성장에 중요하다는 논리들로는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른바 서비스 사회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하나의 유력한 가설은 제조업 이윤율보다 서비스산업의 이윤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비스산업의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정자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이윤율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고정자본의 비율이 낮은 산업은 당연히 생산성은 낮겠지만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서는 자유로울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즉, 기계 설비를 사용하는 제조업에 비해 노동력 사용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 서비스산업은 노동생산성은 낮으나 이윤율은 높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 제조업으로부터 금융부분의 팽창을 거쳐 가변자본 비율이 높은 비제조업, 특히 대인 서비스 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합리적이다. 맑스의 <잉여가치학설사>에는 “농업에서 이윤율은 공업에서의 이윤율보다 떨어지므로 자본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현상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라는 책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필리프 프티는 제레미 리프킨이나 비비안 포레스트의 주장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그녀에 따르면 기술혁신의 영향으로 제조업이나 기존의 서비스산업에서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보 과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공동생활의 한 분야가 있다”고 한다. “육체적·정신적, 지적으로 아이들·청소년들·노인들·병자들·장애인들, 그리고 심지어 생산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성인들을 돌보는 것, 가르치고 보살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 사람들의 요구는 무한하다. 따라서 이른바 일자리의 광맥도 무한하다. (도미니크 슈나페르,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 - 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김교신 옮김, 동문선, p.75)” 

그녀는 앞으로 이런 일자리들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최근의 자본주의는 이런 분야들을 지속적으로 상품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돌봄 노동,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전반적인 실업 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가 제3부문이라고 이름붙인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영역에 국가가 사람들을 고용하고 일정정도의 소득을 지급해 줄 것을 제기한다. 자발적인 사회적 서비스의 영역을 저소득층이 일하는 저임금 일자리로 만들자는 리프킨의 위험한 아이디어는 하지만 이미 사적 자본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나 필리프 프티는 사회서비스 영역의 노동화가 인간에게 기본적인 생활보장과 함께 새로운 사회 참여의식을 고양해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만, 2006년 일본 메이데이 프레카리아트 행사 광고의 글귀는 이런 노동이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고용주 측은 “노동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친구 같은 동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감언이설을 남발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싼 시급으로 불평 없이 일해주길 원하고 때로는 기꺼이 무급으로 노동해주기를 바란다.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나 감정, 대인 서비스같이 사람의 생 자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 잠시 착각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를 기대하고 하찮은 작업에서 ‘보람’을 발견, 감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직업인이 된 듯한 기분’도 ‘사이좋은 클럽’에 대한 기대도 곧 배신당한다. 일하는 장소는 수시로 바뀌고, 그때까지 손에 익은 기술은 곧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후에 낚시를 하고 밤에 토론을 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고 집에 돌아가면 녹초가 된다. 그런데도 “일할 의욕이 없다, 엄살이다.”와 같은 비난 세례를 받고 있다. 문제는 항상 이것이 개인의 자질 탓이라며 ‘인간력’을 높이라고 참견하는 설교가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비정규직인 사람들은 이런 적의나 조소와 겨루고 있다. 이 전망 없고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견뎌야 한다. (아마미야 가린,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김미정 옮김, 미지북스, p.24)


이러한 일자리들은 과거 인격적으로 종속된 신분사회에서 하인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신분사회의 붕괴와 함께 예속적인 기능에서 풀려나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영역으로 존재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변화는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공통체적 본성에 기인한 자발적인 영역이던 사회서비스, 혹은 인간서비스의 영역을 자본이 이윤을 찾아 상품화시키고 있는 걸로 보아야 한다.

제조업에서 노동유연화가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데 반해 노동유연화의 확대와 서비스 노동의 확대가 서로 중첩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후발 공업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대규모 작업장에서 사내하청이라는 전근대적 고용관계가 초기부터 존재했고, 90년대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포디즘에 기초한 대규모 작업장의 형성과 함께 정규고용을 중심의 노사관계가 확립된 서구의 경우 신자유주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에서 노동유연화의 확대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유연화는 법률과 조직의 보호를 받는 이들 부분을 비껴나 대개 비제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유동적이고 분산적인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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