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5월호][Focus]민주주의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05/06 13:31
  • 수정일
    2011/05/06 13:3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3월 이후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는 내부 논쟁에 휩싸였다. 발단은 3월 16일 사노위 서울지역위원회에서 발간한 온라인 정치신문 <사회주의자 통신> 창간호의 한 기사였다. <사회주의자 통신> 비평 꼭지에 실린 사노위 임천용 활동가의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한 간략한 비평’(이하 ‘비평글’)이 사노위 내부에서 논란이 되면서 그 파장이 일파만파 확산된 것이다. 임천용 활동가는 사노위에서 발행한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를 놓고 비평글에서 “소책자의 전체 기조는 사회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판적, 공상적 사회주의로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을 뿐인 비평글은 그러나 곧바로 삭제 요구에 직면하게 됐다.
사노위 중앙집행위원회(이하 ‘중집’)가 긴급 소집되어 비평글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진 데 이어, 중집의 요청으로 입장을 밝힌 서울지역위원회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원회’)는 조직 내 혼란을 부추기고 소책자 사업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비평글의 삭제와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다. (운영위원회의 최종 입장은 삭제를 뺀 사과로 결정됐다)

 

비판의 자유

 

현존하는 사회에 머물지 않고 그 대안을 찾고자 하는 한, 비판의 자유는 필수적이다. 여느 진보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스스로 비판을 억압한다든가, 토론을 금한다든가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존의 체제로부터 비판의 자유를 요구하며 정치적 활동을 펼쳐내려는 것은 그 내부에서 그러한 자유를 폐지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일부에서는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조직 내부가 가장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뛰어난 전위들의 조직이라는 모종의 관념은 조직 밖에선 민주주의 투쟁을 지지하면서도 조직 안에선 민주주의를 도외시하게 했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불가피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내부 단속에 가까운 관료적 통제를 정당화 하는 구실로 악용되기도 했다.
사노위 내부에서 불거진 논란은 이와 같은 과거의 오류와 폐해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때문에 비평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운영위원회가 취한 삭제와 사과 요구 역시 비판의 자유를 부정하는 관료주의적인 조치로밖에 볼 수 없다. 비평글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비판과 토론이 어우러지는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운영위원회는 사전 검열을 통해 개인의 정치적 의사표현이 공론의 장에 들어설 기회를 가로막고자 했다.
이는 소통의 단절을 꾀하는 위계적인 명령으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떠한 의견도 자유롭게 표현될 수 없고 그래서 검열을 의식하게 된다면 남는 건 결국 은연중에 강제되는 정치적 수동성의 강화일 것이다. 기본적인 요구인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존중받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그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오직 공문구로 치장된 민주주의만이 활개 치게 될 것이다.
하물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에서도 중앙당의 입장이나 정책에 대한 당원들의 비판은 당내 언론을 포함한 각종 매체나 당원 게시판 등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이때, 의견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의제를 앞에 두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사노위 중집과 운영위원회가 보인 위로부터의 통제와 검열은 민주주의가 후퇴된 정도가 아니라 박정희이나 전두환을 떠올리게 할 만큼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시대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사실 이 같은 지적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며, 지난 2008년 촛불시위에서 거리의 민주주의를 계기로 확인된 것이기도 하다. 촛불이 타오르던 그때 거리로 나선 수많은 노동자서민들은 아래로부터의 소통과 연대가 무엇이고, 집단적 의사결정을 통한 직접 행동이 무엇인지 체험하고 느낀 바 있다. 그러나 대중의 민주주의적 요구에 대해 지배계급은 비판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과 논쟁이 아닌 이데올로기적인 색깔론과 표현과 비판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최근 원전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방사능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자 ‘친(親)원전’을 표방한 이명박 정권은 반동적인 보수언론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방사능 색깔론’ 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방사능 불안감을 조성하는 불순세력이 있다”,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불순세력에 맞서 제압해야 한다”며 강경한 언사를 쏟아냈다. 공권력은 방사능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인터넷 게시물을 엄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상황은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여러 국가는 TV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일부 에피소드가 방사능 공포를 확대시킨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비판의 자유’에 대한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국내 원전이 밀집되어 있는 경북 지역의 주민들은 오히려 원전의 수명연장 반대 및 영구폐쇄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들어갔으며, 4월 23일에는 환경시민단체들과 함께 고리 1호기 인근 월내항에서 고리 1호기의 폐쇄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3월 26일 전국적으로 반(反)원전 시위로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고, 심지어 재난으로 인해 비상상황인 일본에서도 4월 1일 1만5000명이 모여 원전 반대 거리행진을 벌였다.
원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갈등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세계화 등에 반대하여 대중의 직접 행동이 증가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안착되어 있다는 서구 사회에서도 국민국가의 재량권을 뛰어넘는 거대 자본의 이해와 사회구성원의 이해가 충돌하고 있는 모습은 대중의 광범위한 직접 발언과 직접 행동으로 등장하고 있다. 원전 반대시위 역시 이른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람들은 민주적으로 소통된 이해를 가지고 집단적인 저항에 나서길 주저하지 않고 있다.
몇 달째 지속되고 있는 아랍의 민주화 투쟁은 민주주의를 향한 또 다른 모습이다. 이집트에선 소셜 미디어가 대중집회와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으며, 리비아에선 카다피의 탄압 공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장한 반정부 시위대가 해방된 지역에서 한때 민주적 통제를 경험하기도 했다. 수많은 난관과 제약이 뒤따르고 있지만 고조된 투쟁의 활력이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아랍 각국에서 불붙은 민주화 시위 또한 새로운 저항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민주주의적 요구와 투쟁의 중요성은 이 시대에 들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내부의 비판에 대해 토론과 논쟁이 아닌 “조직적 혼란을 부추긴다”, “사업을 파괴한다”는 따위의 논리로 비판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는 사노위 지도부는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는 지배계급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관료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은 능동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과 열망은 지지받고 확대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구성원이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회주의를 향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사회의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이해와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해 사이에서 민주적 권리를 놓고 빚어지는 대립과 마찰은 대중투쟁을 더욱 더 공공연하게 확대된 형태로 나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그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권력을 움켜쥔 지배계급의 질서가 타도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게 달성될 수 없는 권리의 선언으로 그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민주적 기본권의 확대가 생산수단의 전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 권리를 확장하고 누구나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려는 노력과 이를 통한 직접적인 경험과 자각 없이 사회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노위 내부 논쟁에서 드러난 운영위원회의 반민주적인 관료적 조치는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정치조직에서 발생한 까닭에 더욱 우려스러운 일이다. 경제혁명이 사회정치적 억압을 제거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조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과 경제혁명으로 그러한 억압 모두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만일 ‘사회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다’ 하는 식으로 사고를 한정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하기까지 한 앙상한 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노위는 430 정치대회를 준비하면서 “사회주의 정치활동 보장은 민주주의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지난 2월24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 유죄판결에서도 드러났듯 소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전하는 남한의 지배권력은 정치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기는커녕 되레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 악습을 들이밀며 탄압하는 작태를 보였다. 때문에 이에 맞서 더 많은 지지와 연대를 위해서라도 운영위원회가 결정한 제재 조치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사노위 내부 논쟁은 더 이상 사노위만의 문제로 제한되지 않는다. 사노위 명의의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는 이미 공개되어 있으며 소책자가 말하고 있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판단은 사노위 밖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비평글은 그 내용과 무관하게 이러한 판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단지 사노위 내부에서 이견이 제출되었을 따름이다. 운영위원회가 주장하듯 비평글이 조직 내 혼란을 부추겼다면 그와 같은 혼란은 장려되어야지 거부되어선 안 된다.
비평글과 같은 정치적 견해의 표출은 더 활성화 되어야 한다. 비단 사노위 뿐만 아니라 어느 정치조직, 운동단체에서든 그러한 능동적인 참여가 전제될 때 서로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배제가 아닌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노위 중집과 운영위원회는 소책자의 내용을 비판한 비평글을 구속하기에 앞서, 소책자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문구부터 되짚어 봐야 한다.

 

 

△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아무리 당의 방침이 올바르다 해도 당원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집중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비판과 토론의 자유’를 아무리 보장해도 당원이 ‘침묵’하거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실제로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당원들이 민주적 참여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춰나가도록 힘쓴다. 그리고 ‘비판과 토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넘어 당내 지위와 체제가 위계화, 관료화, 권력화 되지 않도록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