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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FocuS][기획대담]기아차 해고자를 만나다

 

 

[편집자주] 지난 해 발간된 포커스 5월호에서 소개한 바 있는 <기아자동차 구속·해고·고소고발·손배가압류 분쇄를 위한 현장석방대책위원회(이하 ‘석방대책위’)>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수감되어 있던 김수억, 이동우 조합원이 최근 출소하여 구속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고자 복직문제와 현장에 난무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고소고발과 자본의 폭력적인 인력·생산 유연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기존 석방대책위의 방향을 복직투쟁을 중심으로 전환하여 가칭 <기아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기아해복투’)>를 건설할 계획이다.
현재 기아차에는 복직투쟁을 하는 해고자가 4명 있다. 김수억, 윤주형, 이동우, 이상욱 4명은 각기 해고된 시점과 사유가 다르지만 모두 비정규직 투쟁과 조합활동을 하다가 해고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기아해복투를 통해서 복직투쟁과 더불어 현장에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각자의 고민을 풀어놓은 동지들에게 감사드린다.

 

비정규직투쟁과 조합활동으로 당한 해고


해고된 순서대로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이나 지난 해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동우 : 나는 기아차 2·3차 하청노동자이다. 2004년에 입사했고 2005년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가 건설되면서 거기에서 여러 노동조합 활동, 선봉대 중대장이나 상집간부 등을 하면서 함께 투쟁했다. 2005년도에 비정규직지회가 단협을 체결했는데 그 과정에서 2·3차 업체 노동자들이 배제되었다. 그래서 2·3차 노동자들의 단협체결과 2006년 비정규직지회 임투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해고되었다.
당시 비정규직지회 상집간부를 하면서 병가신청을 했는데 사측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단협이 체결되지 않아서 취업규칙과 사규에 의거해서 정당하게 병가를 냈는데. (하청 사측은) 말로는 정당하지 않은 절차라고 했지만, 뒤로 돌려서 얘기하는 것은 원청에서 노동조합 열성 간부이기 때문에 병가를 받아주지 말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고 했다. 당시 비정규직지회 집행부는 정당한 절차이기 때문에 우리는 병가 들어간다고 결정해서 병가 들어갔다. 사측은 병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단결근이 계속 쌓임으로 인해서 ‘당연면직’이라고 얘기했다.
사측은 ‘당연면직’, 우리는 ‘부당해고’라고 맞서서 결국에는 2006년도 특별교섭으로 원청과 합의를 했다. 10월 임단투 끝나고 업체에 복직을 권고한다고 합의서를 썼다. 그리고 후속조치로 하청사측과 복직 협의를 했는데 당시 내가 일하던 공간이 원청 사측에 의해서 계약해지되었다며 공장 밖으로의 복직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공장 밖 복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측은 해고수순을 밟았다. 사측은 결국 공장 밖으로 발령을 냈다고 했고 우리는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시간이 지났고 사측은 무단결근, 우리는 합의사항을 깬 부당해고, 그런 형식으로 2006년 10월에 해고되었다.

이상욱 : 해고자를 두 번 죽인 거다.
나는 업체가 기아다.(웃음) 정규직 해고자이다. 해고는 3년이 되어가고 있다. 2008년 12월, 구치소에 있을 때 3차 징계로 최종 해고되었다. 1차, 2차 징계는 현장에 있을 때 날렸는데 그 때에는 우리 완성3반 동지들이 대거 몰려와서 항의집회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동지들과 함께 투쟁했던 때가 그립다. 마지막 3차 징계는 그렇게 대응하지 못해서 좀 아쉽다. 하지만, 감옥에 있을 때 현장조합원들이 대의원 옥중출마를 권유하고 직접 추천 싸인도 받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감옥에 있던 것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해고 사유는 2007년 화성 조립2부에서 생산되던 카렌스가 단종 되면서 사측은 일자리를 축소시키고 남는 인원을 책정하여 다른 부서로 전환배치 시키려 했다. 현장조합원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노동조합하고 사측이 현장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전환배치 합의를 했다. 합의사항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현장의 반발이 극심했는데 당시 조립2부의 천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수차례 현장공청회, 현장집회, 식당공청회, 노동조합 앞 항의농성을 하는 등 분란이 많았고 그런 힘이 긴급한 대의원대회까지 소집하게 만들었다.
사측은 현장에 주도권을 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일부 대의원들의 동의만 얻어 일방적으로 신차(모하비)를 1라인에 투입해버렸다. 현장을 대표하는 대의원들과 회의록도 쓰지 않은 채 노사합의가 안된 상황에서 차를 라인에 투입한 것을 나를 포함해 2명이 라인 점거를 통해 막았다. 그렇게 해서 징계가 시작됐는데 최종적으로 나는 해고, 또 다른 동지는 3개월 정직이 되었다.
유추해 보건데 당시 내가 재판받으면서 기소되었던 내용을 보면 그 전에 비정규직 연대투쟁이나 현장의 안전사고대응 및 사측현장통제 대응투쟁 등으로 기소된 것들이 쌓여 재판을 받았다. 업무방해부터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선봉대장하고 징계양정이 틀리잖나, 행위는 동일하지만. 당시에는 이해가 잘 안되었는데 지금 보면 회사로선 당연한 일은 한 거다. 그 때까지 쌓여왔던 것을 털어버린 것이다.

이동우 : 여기 있는 네 동지 모두 다 현장에서 가장 열심히 투쟁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원하청 사측에 의해서 극심한 탄압을 받고 공장에서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사측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누적 과정 속에서 해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수억 : 나는 2010년 2월에 해고되었다. 2007년도에 비정규직 점거파업이 있었고, 그 전에 이동우 동지와 (비정규직지회) 집행부 했던 시절 한미 FTA총파업 건, 이젠텍 연대투쟁 건이 있었고. 06년 겨울에 민주노총 비정규악법 총파업이 있었는데 그 건까지 해서 2009년 1월 달에 구속이 되었다. 마지막 대법원 상고가 2010년 2월 달에 최종 기각 되었다. 실형 확정이 되니까 바로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통지가 왔고 그 뒤에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에 ‘출근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면직 되었습니다’라는 해고통지를 구정 직전에 받았다. 그렇게 해고가 되었다.

윤주형 : 나는 사내하청 기현, 현 창명산업에서 일하다가 2010년 4월20일 최종 징계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측의 해고 사유는 쌍방

 

△ 정파갈등으로 인해 해고자 복직투쟁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하는 윤주형 활동가

폭행, 라인을 잡아서 업무방해, 생산지연, 기타 등등이다. 이동우 동지가 해고자들은 현장에서 투쟁을 제일 열심히 한 사람들이다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니다.
폭행사태가 있었고 시발점이 된 작업거부투쟁이 있었다. 통칭 에어블로우라고 하는 4명이서 일하는 조그마한 작업장이 있다. 거기 작업공정이 수시로 변경되었는데 그게 3년 동안 한 번도 노사협의나 합의, 논의를 거쳐서 된 적이 없다. 예전에 불파문제도 얘기를 했지만 정규직이 와서 업무지시를 항상 했다. 그래서 ‘왜 정규직이 와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고 가냐, 우리는 노동조합, 분회체계에 의해서 공정변경은 반드시 노사합의대로 해야 되고, 정규직의 지시 받지 않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처음에는 ‘믿어 달라, 해결하겠다, 약속하겠다’했고 나는 공개적으로 회의록을 남길 것을 계속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야간 근무조 출근하기 직전에 회사 소장과 통화를 해서 정확하게 ‘오늘 야간 라인 개시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무기한으로 작업을 거부하겠다’, 선전포고를 하고 밤새 작업을 하지 않았다.
저녁 9시 반부터 아침 8시까지 밤에 작업을 안 해버린 거다. 라인이 서지는 않았지만 작업 안 된 차들이 정규직 작업장으로 가니까 눈치봐야할 하청사측은 크게 압박된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사측과) 만나서 오후 1시까지 5시간정도 릴레이로 회의를 해서 안을 만들었다.
(사내하청)분회도 그렇고 (정규직)지회도 그렇고 다 ‘적당히 해라’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대의원이 혼자서 난리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지 않나. 그럼 작업거부를 더 진행하기 어려운 상태이고 투쟁의 수위를 높여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여기서 칼을 이만큼 뽑았는데 다시 접을 수 없었고 결국 회의록을 작성하진 못하고 구두 합의를 했다.
그런데 노사합의내용 알리러 들어간 자리에서 틀어지게 되었다. 그 에어블로우 작업장에서 수시로 공정변경이 일어나고 모든 문제를 만들어왔던 사람이 전직 주임이었다. 전직 주임이란 인물은 당시 작업장 주야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관리자였다. 과정에서 책임소재 얘기가 되어서 ‘도대체 누가 공정변화를 마음대로 했고 노동조합은 왜 여태까지 그걸 얘기 못 했냐’, 이렇게 되니까 ‘그 공정변화 3년 동안 계속했던 사람이 전직 주임이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노동조합의 대의원으로서 개인에게 책임을 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이런 것을 암묵적으로 도와주고 방관하고 했던 책임이 있으니까 회사하고 싸운 것이다, 내가 나이 많은 사람(주임)하고 멱살 잡고 싸우겠냐 답도 안 나오는 걸’, 이러니까 이 사람(전직 주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하고 멱살잡이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노동조합은 당시 나와 같은 현장조직 출신인 한규협 분회장이 와서 상황파악하고 사측의 사과, 재발방지, 당사자 징계, 세 가지를 걸고 회사를 만나자고 했는데 회사는 ‘노동조합은 참견하지 마라, 나중에는 윤대의원은 윤대의원 갈 길 가고 우리는 우리 갈 길 가겠다’ 했다.
당시 회사가 정당한 협의를 거부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분회는 잔업거부를 한 차례 했고 잔업거부하고 15분 지나니까 사측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협의하겠다 해서 그 자리에서 세 가지 합의를 했다. 사실관계 조사를 회사가 하겠다, 그리고 징계양정에 따라서 징계하겠다, 현장에서 안전교육 시간에 들어와서 사과하겠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또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차기 만나는 날에 윤주형 대의원도 징계하겠다는 내용으로 15분 만에 결렬이 돼서 2차 잔업거부를 그날 저녁에 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집행부 선거로 사태가 흐지부지 해졌다. 그러니까 잔업거부가 11월9일에 해서 11월 달에 두 번 잔업거부를 하고 (사태가) 흐지부지되고 해가 지나고 4월에 대의원선거 끝나고 직후에 기현사측의 징계가 1차, 2차해서 들어왔다. 집행부가 바뀌고 나서 이상언 분회장이 들어왔고 <금노힘(금속노동자의힘)> 집행부가 들어왔고 회사는 윤주형은 ‘이제 끈 떨어진 영양가 없는, 그래서 이제 징계해도 될 것 같다’, 그래서 징계가 쭉쭉 나갔다.
현장에서 해고된 것은 잔업거부가 직접적인 사유가 되었다. 그러나 사측의 논리는 전직 관리자(주임)이었던 사람과 다투어가지고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윤주형이라는 사람이 대의원이라는 자기 기득권을 이용해서 라인을 잡았다고 주장한다. 지난 수년간의 탄압과 투쟁은 사라지고 말초적인 본질 흐리기만 있다.

김수억 : 노조활동 때문에 해고된 것은 똑같은데 해고투쟁의 원칙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사측 논리대로 이러저러한 과정 또 근거를 대면서, (해고사유의) 본질은 현장투쟁이었고 그것으로 인한 해고투쟁이니까 노동조합과 현장에서 함께 투쟁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회피하고 있다.


정규직 운동질서라는 커다란 벽


기아차 해고자들의 복직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단지 사측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노동운동의 상태는 조합주의와 관료주의, 정파논리, 선거주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한 가운데서 4명의 해고자들은 어쩌면 사측보다 더 힘겨운 내부의 적으로 인해 많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조합주의는 지난 비정규직지회 시절부터 끊임없이 나타났고, 활동가들의 ‘해고’라는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각자의 해고문제에서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그리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물었다.

사회자 : 윤주형 동지의 해고와 관련해서 대의원대회에서 조합활동으로 승인하냐 마냐하는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집행현장조직과 여타 세력 간의 입장이 달라 그 갈등 속에서 아직도 ‘공식적으로’ 조합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조직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윤주형 : 현장에서 윤주형이라는 활동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것이냐면 <전국회의(민주노동자전국회의)>, 현장에선 <자주노동자회>라고, 또 조직통합하자고 앞에 나와서 얘기하던 사람. 현장에서 정규직 활동가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기노회(기아자동차 민주노동자회)>하고 친하다, 이런 시선과 캐릭터가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다. ‘윤주형이 <전국회의>, <자주노동자회>, <기노회>와 연관이 있는데 쟤 왜 저렇게 황당하게 그냥 해고되냐’. ‘하청업체에서 1차, 2차까지 징계해고를 하는 동안 무기력하게 구경하고 있다가 그냥 해고가 되었냐’는 말이다.
노동조합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전직 관리자도 다 조합원이다, 등의 사유를 들어서 대의원대회에서 해고철회를 승인하는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복직투쟁을 위해서 요구되는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 미온적이고 어렵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해왔다.
나는 내 해고에 대해서 정파 간의 갈등과 노동조합의 관료주의, 두 가지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투쟁을 막 잘하고 이런 게 아니라 온갖 모략과 협작 이런 지저분한 배경이 있다.
심정적으로 많이 힘들다. 예전에는 어디에 딱 속해서 내 위치와 자리가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바쁘고, 야, 고생한다 그런 얘기도 들었는데. 요즘은 외롭게 동떨어져서 혼자 고민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부터 해고투쟁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할 거냐,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하려는 얘기는 처음에 윤주형이 가지고 있던 이런 (정파적인) 캐릭터가 있지만 해고된 이후에 현장에서 같이 투쟁했던 동지들로부터 느꼈던 배신감과 인간적인 서운함 이런 것들 때문에 이후에 해고투쟁이나 이후의 해고투쟁에 대한 전망을 세우고 이런 건 많이 없는 상황이다. 과거에 (현장)조직활동이나 이런 것을 많이 했는데 요즘엔 무용스럽다, 이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사회자 :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도 불승인을 받았다. 심정이 어떠한가.

윤주형 : 억장이 무너진다. (금속노조) 김현미 부위원장이 신보위(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 위원장이다. 신분보장 승인을 요구하는 안건을 화성지회와 지부를 통해서 올렸는데 안건을 올리는 것조차도 굉장히 곡절이 많았다. 왜 올려 주냐, 왜 안 되냐, 지부 운영위에서 해라, 그 과정에서 석방대책위에서 법률원에 공문도 띄웠다가 답변도 받고 굉장히 복잡했는데.
그 때 한마디로 느낀 것은 ‘이게 동네 동사무소보다 더하다, 이게 관료구나, 진짜’. 관료적이라는 말을 실제 나의 경우로 느낀 게 처음이었고. 그 전에는 이런 정도까지는 못 느꼈다.
김현미 부위원장이 계속 (처리를) 연기하니까 한 번은 동지들하고 서울에 올라가서 항의를 하러 갔는데, 시끄러웠다. 그 때 기아차지부 실장도 있었는데 ‘왜 자기한테 허락도 안 받고 여기를 올라 오냐’ 이러고. 한 쪽에서는 ‘아니, 조합원이 억울해서 올라오는데 그것도 허락 받냐’ 이러고. 삿대질하고 난리 났다.
시끄러워지니까 김현미 부위원장이 나를 불러서 하는 말 왈,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승인 불승인 결정을 못 내리니까 기아차지부하고 사이좋게 정리하고 와라, 그래야 정리된다’, 그렇게 얘기를 딱 하더라. ‘아, 결국엔 대공장 권력이 금속노조 안에서 강하게 움직이는구나’. 그런 상황이 되니까 그렇다고 내가 <전국회의> 안에서 대단한 인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주노동자회> 안에서도 그동안 열심히 조직하고 했는데 문제가 되고 여론이 불리하니까.
여하튼 과정에서 느꼈던 노동조합 권력이라고 하는 게 말하자면 함부로 도전해서도 안 되고 그냥 의지나 운동적인 걸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아주 정확하게 알았다. 예를 들어 지금도 21대 집행부 선거 진행되는 기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한다. 야, 그래도 <기노회> 2번, <자민통>과 친하니까 좀 나을 거야,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답답한 게 뭐냐면 나는 그 권력 안에서 인정에 호소하거나 이게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이렇게 관료, 금속노조와 기아차지부 권력에 대한 시선을 바라보는 차이가 확 생겨버리니까 동지들과도 틈이 생기는 거야. 예전에는 웃으면서 만났는데 이제는 웃으면서 안 되는 거지. 윤주형이 그 동안 이 투쟁을 왜 해왔나, 이런 생각이 들고 그야말로 다 무너지는.

사회자 : 자민통 연합이 집행부에 당선되면 윤동지에게 유리한 점은 없나.
윤주형 : 특정후보의 당선이 해고자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몇 집행간부의 의지로 되는 일도 아니다. 개별 해고자의 유·불리를 따져 해고투쟁을 각자 할 수도 없다. 활동가들 역시 대화를 해보면 해고와 투쟁의 과정도 잘 모른다. 그러면서 대의원대회에서는 자기 입장 얘기한다. 복직이 정치적 협상으로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이 민주화되어야 하는데 어렵다.

(윤주형 동지가 속한 기아차 화성지회 의집행부는 자민통 연합이 당선되었다. 대담이 있었던 다음 날 부정투표 문제제기 속에서 치러진 기아차지부 선거에서도 자민통 연합 선본이 지부장으로 당선되었다.)

사회자 : 기아차지부의 관료적인 행태는 예전 이동우 동지 조합원 인정 문제와 2·3차 하청노동자 조합원 인정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최근에도 계약직 노동자들이 가입원서를 냈는데 처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동우 : 기본적으로 나는 윤주형 동지를 비롯한 네 명 모두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라고 생각한다. 노동조합활동으로 인한

 

△ 2·3차 하청노동자로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이동우 전 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

해고자 복직투쟁의 가장 기본적인 수순이 있다. 그런데 초입에서 막히는 것이 있다. 일단 투쟁은 했는데 조합원이냐 아니냐, 윤주형 동지 같은 경우에는 조합원인 건 맞는데 이 투쟁이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이냐 아니냐, 이 문제가 있다. 거기까지 진행이 되고 나면 이 투쟁을 어떻게 지원하고 함께 할 것인가 문제로 간다. 민주노조라고 하면 이런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노동조합 차원으로 받아 안으면서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 하는 게 기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진입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가장 첫 번째로는 내가 조합원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기아차지부가 조직통합이 되면서 2·3차 하청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 였다.
근데 당시에는 2·3차 문제가 크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당장 비정규직지회와 기아차지부가 조직통합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더 큰 문제였다. 까놓고 얘기하면 기아차지부가 비정규직지회한테 들어올 것이냐 말 것이냐, 라고 많은 압박과 조직을 해체하고 와해시키면서까지 흡수하려고 했다. 여하튼 이후에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불거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비정규직지회가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표결 때 나는 끝까지 반대했다. 종국에 가서는 마지막까지 조직통합 가입원서를 쓰지 않았던 동지들이 한꺼번에 가입원서를 썼다. 그것으로서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었던 동지들이 전부다 정규직 지부 조합원으로 전환하는 과정 속에서 내 가입원서만 반려가 되었다.
즉 그것은 기아차지부가 2·3차 하청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근데 이것은 당시 여러 가지 이슈들과, 나도 대단한 패배감에 있었기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이제 해고자 복직투쟁을 받을 수 없는 가장 좋은 핑계는 이 사람이 조합원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 말의 의미는 나의 해고자 복직투쟁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2·3차 하청노동자들을 기아차지부로 받지 않겠다는 의미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기아차지부 집행부나 정규직의 보수적인 정서에는 업체의 문제, 2·3차의 문제 등 많은 논란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비정규직지회에는 2·3차 하청 노동자들이 가입했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탈퇴를 하거나 업체가 계약해지 되어서 해고투쟁을 하다가 포기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대중적으로 비정규직지회는 2·3차 하청노동자, 이주노동자, 즉 기아차에 있는 노동자를 모두 조직대상으로 두겠다고 얘기했다.
사측이나 보수적인 정서를 가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1차냐 2차냐 3차냐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실질적으로는 글로비스가 끼어있어 2차로 볼 수 있는 PDI가 있고 현대푸드 같은 경우는 업종이 다르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반대하면서 소위 말하는 계급적 입장, 노동자는 하나라는 입장으로 조직했다. 이것이 관철되어야 비정규직 노동자들 내부의 분란, 서열이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자,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주장의 정당성이 생긴다는 가장 기본적인 대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조직했다.
개인적으로는 조합원 인정투쟁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대단히 어렵고 지난한 과정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서 기아차 공장에 있는 2·3차 노동자들이 지부 조합원으로 조직될 수 있게 물꼬를 트는 하나의 사업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기아차지부나 대공장에서 말로는 민주노조, 노동해방, 비정규직 철폐라고 얘기하면서 2·3차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시키는 것을 문제제기 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이슈화시키는 것 속에서 조합원 인정문제를 풀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조합원 인정 문제, 그리고 그렇다면 정당한 조합활동이었나에 대한 문제, 그리고 난 다음에 해고자 복직문제, 3단계이다. 갈 길이 먼거지.

사회자 : 분회조합원들 같은 경우에는 같이 투쟁했던 경험이 있으니 동지가 복직해야 한다는 문제는 당연하게 생각할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2·3차 하청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는가.
이동우 : 2005년도에 처음 비정규직지회에 가입했던 동지들이 2·3차 노동자들이 40명 정도 됐었다. 그런데 투쟁과정에서 거의 떨어져 나갔지만, 비정규직 내부에 차별을 두면 정규직한테 정당성 없다는 얘기는 그나마 투쟁 속에서 (조합원들이) 다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말과 직접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입장과 입장의 대결이 되었을 때는 또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2·3차 하청 노동자 중에 계약직 관련해서 조합가입을 집단적으로 열심히 했는데 절차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즉 반려도 아니고 진행도 아닌 중간(분회)에서 그냥 정지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조합원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2·3차 조직화에 동의하는 기본적인 인식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대중적이진 않았지만 KD지역의 백상에서 계약직 당사자들이 아니라 백상업체 조합원들이 계약직의 조합원 가입을 요구했다. 오히려 당사자들이 함께 투쟁하면 더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나는 원하청 연대의 또 다른, 비정규직 내의 1차와 2·3차 연대(웃음) 이런 것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런 것들을 보면 시혜적 입장이 되었든 아니면 원하청 연대의 비정규직 내의 또 다른 판이 되었든, 가장 기본적인 동의지반은 있지 않나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투쟁으로 전화되거나 실물적인 조직화 과정을 밟지 못하는 것은 그 주체들을 형성시키고 함께 투쟁을 해야 될 사람들이 지금, 소위 말하는 활동가들 그리고 노조집행부가 애써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억 : 계약직과 2·3차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3차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이중적인 의식과 태도가 있는데. 2005년 비정규직지회 출범식에 이동우 동지가 얘기한 것처럼 조합 가입의 문을 최대한 넓게 열었고 그래서 사내하청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비정규직지회라는 했던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2005년 단협 체결이 되면서 2·3차가 단협에서 배제가 되었고 그 평가에 있어서 어쨌든 2차, 3차 적용이 안 되고 1차만 단협 적용이 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2005년 단체협약 체결이후 06년투쟁을 경과하면서 07년은 기아차비정규직투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한계는 있었지만 06년 사내하청노조간의 연대투쟁과 네 시간의 공동파업투쟁의 물꼬를 텄다. 07년에는 보다 확대되고 강화된 사내하청노조간의 공동파업과 공동투쟁을 실현하는 과제가 꿈이 아닌 현실로서 제기되었다.
둘째로 당시 광주, 소하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일이었다. 당시 07년까지는 화성공장에만 비정규직지회가 건설되어 있었고 05년, 06년 투쟁의 경험과 성과들을 기반으로 광주, 소하리의 비정규직을 직접 조직해야하는 과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주요하게 2,3차 하청노동자에 대한 조직화를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다. 이동우 동지가 당시 2,3차 하청노동자로서 부지회장에 있었기 때문에 2,3차하청노동자 조직화특위 형식으로 기구를 구성하고 이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집행을 맡자마자 부딪힌 1사1조직은 조직파괴 작업이었다. 전투적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조합 자체를 파괴하고자 했다. 그래서 2·3차 하청 투쟁이 그렇게 한 시대가 가버린 거다.
2·3차에 대한 (조합원의 인식) 부분도 이중적이라고 본다. 이동우 동지는 부지회장이었고 같이 싸웠던 동지란 말이다. 그래서 이동우 동지 복직되어야지, 이런 것에 대해서 감히 누가 앞에서 뭐라고 할 사람 당연히 없다, 그 진심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도 말 못한다. 공인된 것이고 조합원이었고.
그 동안에 물질적인 조건들이 많이 변했잖나, 솔직히. 무쟁의가 4년 동안 진행되면서 조합원 의식 자체도 많이 보수화됐고 안정적인 분위기로 갈려고 하는. 그래서 무투쟁에 플러스알파해서 정규직 정도는 아니지만, 고령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내가 지금 나가면 어디 가서 이정도 받겠어’ 이런 부분이 더 강화됐을 것이다.
투쟁안하고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2·3차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낮다. 05, 06년보다. 그리고 2·3차노동자와 이동우 동지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이중적이다. 이동우 동지 복직은 싸웠던 경험들이 있고 조합원이었으니까 OK이지만 2·3차에 대한 고민은 주장하는 사람도 없고 전무하고 선언적으로만 얘기됐었고, 이동우 동지가 얘기했던 대로 조합원 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감옥에 있을 때에는 (분회 집행부가 정규직) 지부지회에 책임을 넘기는 과정이었다. 지부지회에서 (이동우 동지를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대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근데 이상언 집행부가 공약사항으로 첫 번째로 걸었던 게 이동우, 김수억 해고자복직이었다. 그거 걸었었다. 당연히 조합원이었고.
그러면 지부지회에 그러한 부분이 잘못 됐고, 요구하는 진정성이 있다면 제일 먼저 분회에서 조합원이라고 공표하라 요구했다. 분회에서 이동우 동지는 분회조합원이다 선언하고, 분회에서 조합비 받고. 이것을 왜 홍보물로 내지 않는지 공개화시키지 않는지. 계속 요구했지만 관찰되지 않았다.

이상욱 : 2·3차에 대해서 조금 더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건들은 있다. 아까 거론했던 백상 중원에서 계약직 동지들을 위해 1차 하청동지들이 투쟁했던 과정이 있었고. 비슷하게 PDI에서는 이번에 로봇 들어올 때 계약직이 충원되는 과정 속에서 인스테크업체 여성동지들이 마찬가지로 투쟁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조합가입을 권유하는 과정이 있었다. 국지적으로 주목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일말의 (투쟁의) 불씨가 존재한다고 보이는데. 조합에서 어떻게 받아 안을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투쟁이 아니라 지금 옆의 동료, 계약직이든 임시직이든 2·3차든. 이런 인식들이 불씨로 남아있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투쟁도 있었고, 인식도 있고.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된다면 향후에 진행을 적극적으로 해볼 필요가 있다.

윤주형 : 이동우 동지의 문제가 크게 두 개잖나. 2·3차와 해고자. 나는 이 것을 나누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복직되려면, 어렵겠지만, 노조가 민주적 원리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민주노조의 원리는 단결, 투쟁, 연대다. 기아차지부에서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더 큰 연대’를 내세웠던 주장에 따라 부지회장을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2·3차 하청의 문제는 집행부내 기구를 설치해 장기전망을 볼 수 있다고 본다. ‘더 큰 연대’가 함께 투쟁한 동지를, 그것도 핵심간부를, 힘없는 약자라 하여 쫓아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내하청 조합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현실에서, 계약직, 2·3차 하청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기아차지부 민주노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제안이자 의견이기도 한데 우리가 2·3차 하청투쟁을 그렇게 신명을 바쳐 해보진 못했잖나, 2·3차 문제는 열어놓고 관철할 수 있는 방황으로 얘기됐으면 좋겠다.
2·3차 조직화의 핵심은 주체의식보다 노조와 활동가에 대한 불신을 크게 보아야 한다. 노조가 투쟁의 기풍을 상실했기 때문에 1차든 2·3차든 믿고 함께 싸워보자는 생각, 그 자체가 시작도 못한다. 이 지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2·3차 조직화는 불가능하다.

김수억 : 우리 앞에 놓인 것 중 2·3차가 두세 번째가 되다보니 그게 안 된다. 근데 이 문제는 실제적 문제가 되어버렸잖나. 복직요구와 구분이 안 되다보니. 그래서 좀 더 기아해복투에서 그 부분에서 조직적으로 중점을 두고 조직하지 않으면 현장의 상태가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 어려울 것이다, 열심히 해야 될 것 같다, 이런 얘기였다.

사회자 : 이상욱 동지는 완성차공장에서 정리해고가 아닌 이상 유일한 정규직 해고자인 것 같다. 동지의 해고문제는 왜 해결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어떤 어려움이 있나.

이상욱 : 나는 요즘 맘이 아픈 게 현장의 소문인 소하리 재입사, 이걸 회사에서 소문내고 있는지 아니면 노조 안의 세력이 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소문들 속에서 많은 노조 관료들의 압박이 있다. 소하리공장으로 재입사하는 안을 받아라, 받아서 소하리가서 처우 문제는 계속 싸우는 문제고 전환배치 받아 내려오면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얘기하고.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는가. 노조 집행부 세력은 나의 해고문제를 투쟁이 아닌 처우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해고자에게 타협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해고자를 처우를 개선해주는 사람으로, 이런 것으로만 바라보면서 해고투쟁 자체를 깔아뭉개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이건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 마찬가지일거다. 해고문제를 투쟁으로 바로보지 않는다는 거다. 아주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처우 개선시켜주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것, 활동가들로서는 치욕스러운 거잖나. 이런 것들의 얘기를 듣는 순간 거부감이 일어난다.
그래서 하도 화가 나서 지부로 올라가서 삼자대면하자, 이래가지고 누가 이런 소문을 퍼트리는 거냐 라든지 항의를 몇 차례 했다. 그 답변이 어쨌든 간에 항의하면서 맘이 좀 풀어지기는 했다. 했지만 어쨌든 그런 흐름들이 있다는 사실은 회사의 입장이 소하리 재입사를 툭 던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스스로 발목을 잡는 거잖나.
그래서 앞으로 동지들과 같이 투쟁이 개별화되는 것, 해고자 원직복직투쟁이 개별화되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해 나가면 좋은 성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성과가 나머지 동지들에게 파급과 영항을 미치면 더 좋겠고. 해고투쟁 자체를 통일적으로 바라보고 공장 안팎을 넘나들면서 하는 순간, 과정 속에서 투쟁의 상호 대답이 되고 영항을 받지 않을까 한다.

 

석방대책위 활동을 지나오며......

 

해고자들 중 이상욱 동지는 3개월여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고 김수억 동지와 이동우 동지는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상욱 동지를 대표로 현장탄압으로 발생하는 구속, 징계, 해고 등에 대응하기 위한 석방대책위가 꾸려졌고 윤주형 동지는 해고된 이후 석방대책위에 결합했다. 석방대책위는 기아차에서 발생한 구속자를 중심으로 구속된 노동자들과 소통과 교류를 하며 구속자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활동해왔다.
석방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과 평가, 그리고 석방대책위를 통해서 현장과 소통할 수밖에 없었던 구속자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보았다.

이상욱 :두 동지를 감옥에 보내놓고 석방대책위가 뭘 해야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윤동지는 해고되기 전 상황이었고 석방대책위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느냐에 대해서 고민했고, 예전에 소개해드린 것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몇 명의 동지들과 같

 

△ 석방대책위를 이끌어온 이상욱 활동가

이 얘기를 나누면서 현장에서 해고자들이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거니까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위한 어떤 정기적인 선전과 캠페인을 해야 되겠다 라는 것이 논의가 돼서 많은 동지들이 도움을 주셨다. 퇴근장 선전전 등을 하면서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앞으로 우리 석방대책위가 어떻게 전망을 세울 거냐에 있어서 도움을 주셨던 동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전망 속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하나가 있고.
오늘 자리를 빌어서 이동우 동지나 김수억 동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있다. 이런 얘기를 아직 못해봤다. 뭐냐면 석방대책위를 그동안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감옥에 있는 두 명의 동지들이 정말 감옥에 있기 때문에 현장에 있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 현장 돌아가는 것, 혹은 현장에서 여러 가지 복잡미묘한 것들을 최대한 얘기해주고 싶고 그런 분위기를 알려주고 싶었다. 석방대책위를 운영하면서 제 딴에는 그런 것들을 공급해주고 싶었고 공장 얘기들, 가끔 가다 드리는 편지들, 속에서 옆에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 정도는 안 되니까 최대한 할려고 했었고.
그리고 여러 가지 공장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하면 애기를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인터넷 출력을 계속 해왔다. 다양한 기사들 여러 정치조직을 떠나서 정파를 막론하고 다양한 조직에서 나오는 애기들 문건들 이런 거. 심도 깊은 내용의 논문들, 등등을 보내주면서 현장에 있는 것만큼은 못되더라도 문제의식이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심 그런 것을 석방대책위는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래서 다른 사업장 다른 동지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는 어떻게 옥바라지를 했을까, 이런 것도 간혹 궁금했다. 사측의 탄압이나 정권의 탄압으로 감옥에 가 있는 동지들, 다른 사업장 동지들이 있으면 우리 얘기륻 듣고 또 해줄 수 있는 일들, 얘기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김수억 :나는 아주 큰 도움이 됐다. 구속을 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단절이지 않나. 현장과 단절되고 세상과 단절되고. 시간이 서너 달이면 우리가 보통 휴식기간이라고 하잖나. 2005년 구속되었을 때는 4개월 있다가 나왔는데 그때는 돌아보고 휴식할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 2년6개월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현장에 있다가 나와서 갇힌 긴 시간이니까.
단절이 가장 큰 적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인데 석방대책위가 운영되고 2년6개월 동안 현장홍보물, 그리고 인터넷 및 매체에 담긴 여러 기사들 글들 이런 것들이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안정적으로 계속 공급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현장홍보물 들어왔던 것 중에 중요한 현장기사나 관련 한 것들은 그대로 남겨서 갖고 나왔다. 그런 부분들이 제일 크다. 홍보물은 이상욱 동지 외에 다른 분들도 보내주긴 했지만 석방대책위에서 챙겨준 그런 부분들이 가장 컸으니까.
메일이 특히 기다려진다. 홍보물은 내가 보고서 내가 판단을 해야 되는데 메일에 그려지는 내용들은 이상욱 동지가 현장을 전체적으로 판단하면서 보내는 의견이나 종합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그런 메일들이 소중했다.
그리고 아주 마음이 급하고 정말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을 때는 아주 간혹이었지만(웃음)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지만 답장 속에 담아서,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안에 있으니까 전체 상황을 잘 모르니까 ‘이러이러한 고민이 있으니까 동지의 중장기적 전망은 뭡니까’ 이런 답답한 소리를 하면 답장이 안 오는 거야(웃음) 아, 내가 (괜)한 소리를했나 나중에 뒤늦게 깨닫고 내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사과를 하면서(웃음). 내가 과도한 정세파악을 한 것 같습니다(라고).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그런 정보나 현장에 대해서 고민을 끊이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석방대책위 동지들이 전적으로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일동 박수)
기본적으로 고민이 드는 건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무력감에 힘들었던 것 같고. 그래서 현장투쟁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 조건에서 안 되는 구나 이런 부분을 뼈저리게 느꼈다.
결론은 현장에 진행되고 있는 투쟁에 직접 개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좀 감옥에 있다 하더라도 감옥에 있는 동지들이 현장과 소통해서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지점이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때. 그 때 가장 느꼈다고보는데 감옥에 있다 하더라도 구속자 동지들이 석방대책위에 적극적으로 요구를 하는만큼 우리 또한 안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투쟁에 대한 연대를 조합원들에게 호소를 담아 편지를 쓸 수도 있고. 구속자들의 조직적인 단식농성이나 그런 것을 하면서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쟁점화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고.

이상욱 :그렇다고 다시 감옥에 들어갈 수 없잖나

김수억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면 이번을 경험 삼아서 정기적 소통을잘 해야 되겠다.

이상욱 :석방대책위가 지나온 과정 중에서 현장에서 또 구속자가 있었다. 정규직 구속자들. 물어보더라. 그 동지들이 저에게 석방대책위 동지들에게 어떻게 옥바라지를 해야되는가. 그래서 석방대책위 홍보물로 한 번 나간 적 있었다. 석방대책위 활동은 이렇게이렇게 해야 합니다 해서 석방대책위가 해왔던 것과 소통한 것과 어떤 방식으로 편지든 뭐든 그런 것들을 구속자 동지들의 각 반에서 최대한 석방대책위를 조직하고 그 석방대책위들이 나름 활동할 수 있도록 운영할 필요가 있다 해서 나름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이 과정 상에 있어서 남는 거다. 여전히 그 동지들, 감옥에 갔다 온 동지들은 석방대책위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주시고 또 도움을 주시는 동지들이 됐고 그리고 반 석방대책위를 맡았던 몇몇 동지들은 소통하고 있는 좋은 관계로 유지가 되고 있다. 다른 사업장에도 마찬가지고 간간이 구속자들이 발생했을 때 석방대책위의 형태와 감옥에 있는 동지들과 소통하고, 현장에 있는 동지들도 마찬가지로 김수억 동지가 말씀하셨던 대로 감옥에 있는 동지들이 결의를 내어 왔을 때 서로 공감하면서 시너지 작용이 일어나면 좋은 거고. 그런 경험을 했다.

 


기아해복투와 현장활동의 전망


김수억 이동우 두 명의 구속자가 최종적으로 출소하면서 석방대책위 활동의 초점이 구속자 석방투쟁에서 해고자 복직투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석방대책위의 이후 전망과 현장활동에 대해 다소 거친 고민을 나누었다.

이상욱 : 지난 비정규직 노동자대회 때 해고자 동지들이 만나서 앞으로 어떻게 꾸려나갈지 이야기를 했다. 확인한 것은 기존 몇 차례 석방대책위의 현장 대응을 보면서 이 관료적인 노동조합의 상황에서 사측도 마찬가지지만 해고자들의 개별적인 상황을 갈가리 찢어놓으려고 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방어하면서 해고자들이 같이 투쟁해 나갈 것인가, 이런 고민 속에서 첫 번째 했던 것은 과거에 몇 차례 경험을 반추해 보건데 향후에 어떻게 전화가 되든 간에 해고자 4인이 공동의 논의와 결정을 통해서 행동을 통일해 나가자는 얘기를 했다. 소중한 경험을 통해서 확인했다.

이동우 : 미리 말해둘 것은 아직 다른 석방대책위 동지들과 얘기해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이후에 다른 석방대책위 동지들에게 제안을 하고 대중적으로 토론을 거쳐서 정리하고 전화할 계획이다.

이상욱 : 아이디어로 제출되었던 것을 소개해드리고 지지연대했던 동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그 아이디어가 무엇이냐 하면 석방대책위를 가칭 기아해복투로 전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지연대를 계속 해주셨던 소중한 동지들을 뿔뿔이 흩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지금 이동우 동지와 윤주형, 김수억동지가 생계비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상정이 됐다가 철회가 되거나 거부되거나 노동조합 안에서도 여러 가지 마찰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정당한 조합활동이고 노조를 탄압 과정에서 당한 해고이기 때문에 신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노조 안에서 그것이 승인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생계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해고자들의 일정부분 생계비를 지원하기 위해서 후원회원를 조직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제출되었다. 해고자 4인의 기아해복투와 지지연대를 해주셨던 동지들 후원모임으로 향후에 전환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라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이것이 골격인데 아직 내용이 없다. 내용과 살을 붙이기 위해서 석방대책위 운영위원들과 운영위원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연대해주신 동지들과 사전공유를 통해서 대중토론회를 할 생각이다. 대중적인 토론회를 통해서 합의를 거쳐서 전환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중지를 모았다.

사회자 : 합의된 원칙이나 기조가 있는가

이상욱 : 향후에 가칭 기아해복투가 어떤 지향을 가지고 어떤 원칙을 가지고 투쟁할 것이냐 라는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을 단순히 해고자 4명이 확정할 수 없다고 공감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석방대책위 운영위원들과 연대해주신 동지들과 토론회를 거쳐 기조와 원칙을 확정할 계획이다.

이동우 : 가칭이지만 기아해복투라는 이름에서 갖는 가장 기본적인 건 해고자라고 하는 건 노동조합 활동하다가 사측의 탄압, 현장탄압에 의해서 해고된 사람을 해고자라고 우리가 얘기하지 않나. 그런 동지들이 복직투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인하진 않았지만 기저에서 동의했던 것은 해고자 원직복직은 가장 기본적인 거다.

윤주형 : 심각한 건 아닌데 조금 걱정되는 것은 자기 정파조직이 있지 않나. 자기 입장과 노선이 있는데 다른 정파 동지들과 속 얘기를 해보고 그런 적은 없었던 터라 얘기하다보면 의견충돌이 되고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비슷한 그룹들끼리 만나면 의견이 대동소이하게 차이가 있으면 심각하지 않으면 적당히 정리되어서 사업진행이 되는데. 내가 불필요하게 주장을 과도하게 주장하진 않겠지만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생각은 다른 게 없는데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또는 핫이슈가 되는 투쟁을 놓고 마지노선에 대해서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천막에서도 뭔가 제안할 때 저는 어용그룹이라도 다 제안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있고. 그게 좀 걱정이 된다. 이런 낮은 수준의 얘기들은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어느정도 진행이 되고 현장토론이나 대중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여러 이야기가 나올 것인데 의견조율이 될지.

이상욱 : 그건 동지 혼자가 고민할 것이 아니라 나도 고민된다. 많은 토론 속에서 공유지점들이 생길 것이다. 내용의 수준과 수위라는 것이.

사회자 : 기아해복투가 현장에서 다른 조직이나 활동가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이상욱 : 공동의 활동과 공동의 투쟁이 지금의 공장 상황에서 대단히 필요하다는 판단은 개별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 생각한 것이 후원회는 돈만 내는 후원회로는 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럼 후원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음을 스스로 가지면서 후원회 이름은 뭘로 해야 할까, 희망, 요즘 희망이 유행이니까. 해고자 후원회 희망. 그럼 기획사업으로 무엇을 할까, 촛불집회, 희망걷기대회 뭐 이런 것을 후원회원들과 한 달에 한 번 하자, 그래서 참가비 1만원을 다른 사업장 해고투쟁 사업장이나 예를 들어 쌍용 동지들이나 이런 쪽에 의무적으로 그런 행사를 할 때마다 모금을 해서 지원을 하자 이런 식의.
기존 현장 조직의 딱딱한 그런 사업의 방식 보다는 기아 화성에만 해고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한진중공업을 포함한 해고자 동지들이든 많은 사업장에 해고자들이 있으니까 그런 해고투쟁을 남의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참여하는 후원회원들과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도 해봤다.
그런 사업을 기획적으로 짜서 무겁지 않게. 해고 자체가 사안이 굉장히 무겁지 않나. 어차피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동지들은 그 해고의 사안이 무겁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같이 하면서 지지연대하는 실천을 가볍게 해도 상관없다. 해고라는 내용 자체가 무겁기 때문에 실천은 가볍고 발랄하게 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인 아이디어가 든다.

김수억 : 기아해복투와 이후 공투체 결합을 고민하는데. 나는 기아 지금 현장투쟁을 복구하지 않는 한은 해고자 투쟁 자체가 제대로 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석방대책위가 대중사업을 해 나가면서 그동안 해고자 복직문제가 대단히 고립 속에서 진행이 되어왔잖나. 고립을 뚫고 여론을 환기시키고 조합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우리가 해고자 복직투쟁을 사업으로 해나가겠지만 현장 다른 조직과 활동가 동지들의 연대나 투쟁이 함께 조직되지 못하면 여전히 같이 비슷한 고립으로 갈 거라는 거다.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동지들은 이미 제한적이다. 앞으로 우리가 사업을 다르게 제안한다고 해서 확 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그래서 공투체에 대한 부분들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기아차는 2년 무쟁의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복구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지금은 우스갯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현중 꼴 된다는 그런 말들이. 그래서 이러한 인식을 우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파적인 정치조직도 입장 때문에 그렇든 선거에 대한 또다른 이해 때문에 그렇든 아니면 기존의 현장조직들이 자신의 세 유지를 위해서 정세에 개입을 하든 공투체에 대한 부분들은 각 자기 단위들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서 제안될 수밖에 없는 시기인 것 같다. 여러 단위 동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근데 우리 기아해복투 같은 경우에는 각 제 조직들 혹은 개별들의 이해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투쟁을 왜곡하지 않도록 공투체를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내용을 좀 더 우리가 개입해서 최대한 현장투쟁을 복구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결합시킬 거냐 하는 것이 고민이다. 현장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는 문제,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공투체에서 어떤 내용을 얘기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새롭게 현장조직 운동에 대한, 최근 새롭게 건설되기도 했고 그걸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 입장이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어떤 내용으로 어느만큼 개입할 건지가 기아해복투에 분명히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본다. 그래서 금방 말씀드린 기아차 현장조직운동에 대한 내년 전망들이 서로 전제되고 그 속에서 기아해복투 투쟁도 별개의 부분이 아니라 같이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해고자 복직투쟁이 우리의 가장 주요한 과제이고 원칙으로 서겠지만 전망논의가 영향을 분명히 미칠 것이기 때문에 11월 달에는 속 깊게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어야 이후 투쟁에 있어서, 불협화음이나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것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한다.

윤주형 : 나도 옆에서 보니까 세 명의 동지가 사기꾼은 아닌 게 확실하다(웃음).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하는데 우리 안에 그걸 만들어 가는 게 쉽진 않을 것 같다.

김수억 : 출소한지 한 달 반 동안 다른 사내하청동지들 만나면서 제일 많이 들었고 했던 얘기가 “미안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다시

 

△ 2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김수억 전 비정규직지회장

조직을 해야지요” 이런 얘기였다. 왜냐면 기아차투쟁이 근 4년 동안 전무 했잖나. 동희오토 투쟁, 지난하지만 정말 끈질기게 싸워서 한계가 있지만 단계적인 복직 쟁취를 했고. 기륭투쟁이 있었고, 그 정점에 현자 울산, 아산, 전주동지들의 점거파업투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아차 현장은 침묵했다는 것이다. 그 동지들이 2005, 2006, 2007년을 바라보면서 기아차 투쟁이 희망이라고 하는 얘기를 4~5년 전에 들었다. 그랬던 기아차 현장은 어떠했는지 투쟁하는 동지들의 엄혹한 평가, 비판과 요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아차 투쟁을 어떻게 다시 세워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정규직 비정규직 현장 구별되지 않는다. 2003~2006년 투쟁하면서 정규직 동지들에게 들었던 따듯한 말은 “비정규직 투쟁하면서 정말 요새 투쟁하는 맛이 난다.” 현장에서 새롭게 파업의 질서를, 예전이 마치 화석화된 파업, 일정파업이었다면, 이건 우리들도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역동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주위 활동가들보다도 계급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삭제된 것 아니잖나? 그걸 기억하고 있는 동지들이 여전히 기아 현장에서 개별로 남아 있든, 해고자로 남아있든, 다시 그걸 어떻게 복원시키고 지금 조건에 맞춰 만들건가 고민을 하고 있다.
지난 번 <단노회> 총회를 했는데, 마침 회의 들어가기 직전에 국회진입이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은데, 한미FTA 투쟁하면서 국회 진입했다는 사진, 공권력과 싸움 붙고 있는 사진을 회원동지들과 공유하면서 이야기했다. 기아차 내의 담벼락 안에서만 보면 우리들이 대단히 어둡고 앞으로 어떻게 되겠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지만, 당장 밖에만 눈 돌려봐도, 그리고 사내하청투쟁을 바라보더라도, 한진을 봐도, 벌써 옛날 얘기 같지만 08년 촛불을 봐도 지금 처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민중이라는 대중들은 끊임없이 싸움하고 있고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화약고를 여는 투쟁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동지들이.
결정적으로는 한진의 희망이 희망으로 확대 안 되고 촛불이 더 등불로 안 되고 결정적으로 조직노동자들이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했고 집행부를 현장에서 견인해내지 못했고 견제하지 못했고. 그래서 <단노회> 동지들과 올해 말 내년 바라보면서 이미 담벼락 밖은 들끓고 있는데, 현장에서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는 부분들, 기아현장에서 못하는 부분들이 절망이 아니라 담벼락 밖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하고 조직할 것인지, 희망으로 좀 더 봤으면 좋겠다. 대단히 희망스럽다, 객관적 상황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장의 새로운 지도력을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해보자!
결론은 초라하지만 우리가 앉아있는 이 기아해복투, 그게 하나의, 11년 12월부터는 현장에서 첫 계기가 될 거라고 본다, 이 활동들이. 집행부도 생각하겠지만 그런 거 말고. 그래서 장황하게 얘기한 전체적인 전망에서 기아해복투 활동부터 하면 내년도 여러 변수들에 부딪히지 않을까, 또 변수들을 기회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이상욱 : 지금 현장의 척박함과 현장조직들의 이전투구, 관료화된 노조의 암울함 이런 것들 속에서, 현장 밑바닥의 그나마 하고자하는 동지들이 해고자 투쟁을 함께 하면서 보내줬던 연대와 지지는 암울하진 않았다. 그것이 현장조직을 뛰어넘고 좌우의 문제를 뛰어넘어서 어쨌든 해고문제가 풀려야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석방대책위가 결국 쭉 해오면서 그런 지지와 연대는 종파적이지도 않았고 현장조직에 가두어지지도 않았다. 노조의 관료적인 체계에 억압받지도 않았다. 단 우리들이 무능력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좁은 공간, 퇴근장이라는 좁은 공간 혹은 천막이라는 좁은 곳에서만 이렇게 얘기되어 졌던 것에 안타까움과 한계가 있던 것 같다.
이제 가칭 기아해복투가 만들어지고 후원회가 만들어졌을 땐 이 공간을 열고 확장시키는 그런 활동을 조금 더 열린 마인드로 해봤으면 좋겠다. 공장 울타리가 아니라 밖의 해고자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그런 활동이 그나마 대단히 암울하다고 느끼는 활동가들의 숨통을 좀 틔을수 있지 않을까. 그 속에서 나도 소통 받고 공감을 할 수 있는 활동이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인 거다.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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