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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우리의 삶을 저들에게 내맡길 순 없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1/11/30 00:11
  • 수정일
    2011/12/02 14:22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진출처 : 참세상


지난 11월22일 한미FTA 비준안이 결국 국회에서 통과됐다. 모두의 예상대로 한나라당은 어김없이 날치기 수법을 꺼내들었다. 한나라당이 “국가 중대사”라고 그토록 강조해온 국제 통상조약인 한미FTA는 이처럼 ‘그들만의 리그’에서 제멋대로 처리되었다. 지난 2006년 2월 남한과 미국이 FTA 협상에 들어간 지 5년 9개월만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미FTA가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는 철저히 왜곡되거나 탄압당할 뿐이었다.

민주주의는 없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한나라당의 한미FTA 날치기 통과는 기존의 기습처리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한미FTA 비준안 처리에 앞서 ‘본회의 비공개 진행 동의안’부터 통과시켰다. 국회 본회의장의 모든 출입구는 봉쇄되었고, 영상중계를 위한 내부의 CCTV 작동도 멈춰졌다. 그리고 국회 의사봉의 소리가 울리기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집권 여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안건을 비공개 날치기로 처리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여의도 밀실처리의 대표 격으로 회자되는 지난 1996년 12월 노동법 날치기 때보다도 더 퇴행적인 것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성탄절 새벽 노동법을 기습적으로 처리했지만 그 과정을 적어도 언론에 노출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비공개’ 회의를 기획했다. 때문에 민주노동당 일부 당직자들이 본회의장의 유리로 된 출입구를 깨고 들어간 돌발 상황은 한나라당으로선 불시의 일격을 당한 격이었다. 국민의 위에서 군림하며 국민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려던 그들의 완전범죄에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취재진이 본회의장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면 한미FTA 처리 과정은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끝까지 비밀에 부쳐졌을 것이다.

파행을 겪으며 한미FTA가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명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다행”을 외쳤다. “옳은 일에는 반대가 있어도 해야 한다”며 대국민 훈계도 잊지 않았다.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는 “국익을 위한 선택”이라며 합리화했고,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국회를 빠져나오다가 “매국노”라는 고함소리에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며 그들의 거사를 자축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렇듯 그 어디에서도 민주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이명박 정권의 독선과 일방주의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미FTA 강행처리 소식에 11월22일 저녁 명동에서는 500여명의 시위대가 불과 30여분 만에 5000여명으로 확대됐다. 그만큼 한미FTA 후폭풍은 거셌지만 되돌아오는 것이라곤 공권력의 차디찬 물대포 세례였다.

정권의 위기, 체제의 위기

한미FTA에 항의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이명박 정권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초겨울의 추위에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무자비하게 퍼부어댔다. 그리고는 집회 참가자들을 한 번에 이십여 명씩 연행해갔다. 사회 여론이 더 악화되자 기껏 한다는 게 물대포 사용을 자제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종로서장 폭행’을 이유로 언제든 경찰의 물리력을 행사하겠다며 시위대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집회․시위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기본권은 철저히 묵살당하고 있다.

오히려 이명박은 한미FTA를 왜 반대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지난 11월15일 국회를 찾은 이명박은 야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나라 망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으냐”며 구구절절 읊어댔다. 한미FTA 강행처리를 위한 정치적 명분을 쌓으려는 속셈이었지만 이것이 현 집권세력을 대표하는 이명박의 신념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11월29일 한미FTA 이행법안 서명으로 이명박의 신념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그런데 한미FTA에 매달린 건 비단 이명박만이 아니다. 한미FTA 반대 여론이 확산되자 여권 관계자들은 공공연히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노무현의 한미FTA’와 ‘이명박의 한미FTA’가 뭐가 다르냐며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미FTA 협상안의 내용을 뜯어보면 이명박 정권이 미국에 ‘퍼주기 협상’을 했다는 자동차 분야 재협상을 제외하곤 달라진 게 거의 없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은 재협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미FTA의 최대 수혜자로 거론되고 있다. 자동차의 수출 효과가 크지 않다는 반론 역시 국내 완성차 업체의 미국 현지생산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지 재협상 때문은 아니다. 쟁점으로 부각된 투자자국가소송제(ISD)도 이미 다 나온 이야기다. ISD를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가장 강력하게 옹호한 사람은 바로 노무현이었다.

때문에 민주당은 한미FTA 국회통과 국면에서 이른바 ‘노무현의 원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적전불열의 양상까지 보였다. 민주당 소속의 일부 지자체장들은 한미FTA를 대놓고 지지했고, 민주당 내 소위 협상파는 한나라당에 투항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손학규가 나서서 ‘한미FTA 비준저지’라는 당론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민주당은 한미FTA를 반대하는 제스처를 통해 지지율을 올리려 했을 뿐 적극적인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의 이 같은 태도는 이명박 정권에 한미FTA의 국회비준을 사실상 방조하겠다고 하는 정치적 메시지와 같았고, 결국 한나라당이 11월22일 날치기 결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제도 정치권 전체에 대한 환멸과 민심이반이 분출하고 있다. 한미FTA 정국에서 한나라당은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했고,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더불어 공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도 정치권 세력들이 한미FTA와 같은 첨예한 갈등 사안을 조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졌다. 정권의 주인이 자유주의 세력이든 보수 세력이든 간에 이른바 1%가 아닌 99%에 해당하는 사회구성원 다수의 이해를 포섭하기란 불가능한 까닭이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사진출처 : 참세상


세계화의 덫

지난 1970년대 경제위기 이후 세계화가 본격화 되면서 세계시장의 힘은 더욱 커졌다. 전 세계를 무대로 휘젓고 다니는 거대 자본들의 덩치는 웬만한 국민국가의 경제규모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국민국가의 재량권을 뛰어넘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와 사회구성원의 이해가 충돌할 경우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국민국가 내 제도 정치권의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국민국가 차원에서 대의제를 통해 사회경제적 대립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역시 점차 붕괴되어 왔다.

한미FTA 역시 그 배경에는 이와 같은 세계화된 거대 자본의 이해가 놓여 있으며, 마찬가지로 동일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 한미FTA는 그 본질상 제조업 분야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남한 자본과 금융․서비스․농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미국 자본의 이해가 상호 교환되는 것이다. 결국 남한의 어떤 집권세력도 자본의 이해에서 벗어나 한미FTA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미FTA가 세계화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한미FTA로 인해 초래될 사회적 충격에서도 드러난다. 이명박 정권은 보수언론을 앞세워 “전기, 가스, 지하철, 의료보험료가 급등할 것이다” 하는 이른바 한미FTA ‘괴담’이 근거 없는 낭설이라 일축했다. 가스, 전력, 상수도 등 공공분야는 개방대상이 아니며 민영화는 물론 공공요금 폭등도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남한 내 공공․사회서비스 부문의 대부분은 민영화가 이미 된 상태다. 굳이 한미FTA를 통해 더 개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한의 소위 자발적 민영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특히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김대중 정권 때부터 강하게 추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미FTA를 빌미삼아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조건을 완비하는 것이다. 즉, 자본의 이윤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사회정책과 공공제도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것이다. 한미FTA를 비롯해 FTA의 핵심은 관세뿐 아니라 비관세 무역장벽의 일체를 없애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무현 정권 때부터 FTA 도입을 상정한 사회적 재편은 강화되어 왔고 FTA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기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이명박 정권이 동북아 질서 속에서 각각 설정한 정권의 핵심과제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남한이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FTA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그 전부터 자발적으로 민영화를 해왔다면 지금에 와서 정권의 명운을 걸고 다른 나라도 아니고 굳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자 하는 이유는 남한이 위치한 동북아 지역질서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른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구도의 등장이 그것이다.

중국의 급부상을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한 노무현 정권은 집권 후반기에 들어 미국과의 정치경제적 협력 강화를 모색했다. 2006년 1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2월 한미FTA 협상 개시는 이러한 정황을 방증해준다. 현존하는 미국의 힘을 활용하여 대중국 견제에 나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어느 정도 군사적․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미국과 정치경제적인 협력관게를 강화하려 했다면, 이명박 정권의 한미FTA 추진은 친미 행보의 가속화로 볼 수 있다. 오바마 정권이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며 이전의 부시 정권과 마찬가지로 대중국 포위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자 여기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FTA에 따른 직접적인 사회적 고통은 당장 눈앞에 나타나진 않는다. 하지만 5년이고 10년이고 지난 다음에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한미FTA를 내세워 더욱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끔찍한 미래’가 현실로 등장할 수 있다. 또한 미중 간 신냉전 구도의 전개에 따라 사회구성원 전체가 누려야 할 평화와 안전의 요구는 그만큼 위협당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미래가 자본의 이해와 이를 반영한 집권세력의 정책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촛불의 저항

실제로 한미FTA 반대집회에 참가한 다양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요구와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저당잡힌 미래’에 대한 분노만큼은 동일하게 표출하고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의 심화 속에서 각종 사회적 폐해들은 누구라도 이미 생생히 체험해 왔다. 넘쳐나는 비정규직과 절망적인 청년실업, 그리고 치솟는 전세자금과 비싼 대학등록금에 불안한 노후까지.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고 갈수록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지금 직감적으로 한미FTA가 가중시킬 고통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공감대는 지난 2008년 촛불투쟁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가장 대규모로 치러진 11월26일 한미FTA 반대집회에서는 세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고등학생의 참가자부터 ‘좋은 어버이들’ 깃발을 든 노년의 참가자까지 그야말로 다양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명박퇴진”, “비준무효”를 끊임없이 외쳤다.

이 같은 체험의 공유는 올해 들어서만 반값등록금 집회, 희망버스,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제는 한미FTA 반대집회에서 대중의 직접 행동이라는 그 힘이 다시금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위계와 경쟁의 질서가 아닌 연대와 상생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자유로운 발언과 자유로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다. 대안은 대의제를 통해 대중의 여론을 포섭하고 지배분파들 간의 이해를 통합하는 구태의연한 제도 정치권에 있지 않다. 한미FTA 반대집회에 결집한 수많은 사람들의 항의는 이미 이러한 정치질서에 균열이 생겼음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새로운 대안은 능동적인 정치참여와 직접적인 의사표현을 공공연히 펼쳐내며 거리에서 함께 행동하고 함께 투쟁하는 노동자서민 그 자신이다.

물론 거리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 요구는 아직 반MB 수준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다. 한미FTA 반대집회 역시 자유주의 세력이나 이들에 영합한 민주노동당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기에 앞서 현재 분출하고 있는 대중투쟁에 집중하고 그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미FTA과 같은 사안은 자본주의 세계질서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며 누가 집권하든지 간에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의 후퇴와 사회적 갈등은 더욱 첨예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소위 진보개혁 세력들의 실체와 한계도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중투쟁의 광범위한 확산이며, 그것을 위한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 그리고 직접적인 참여와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김성렬 기자 (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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