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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FocuS][국제]리비아 민주화 투쟁, 어디로 가는가!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1/11/18 14:40
  • 수정일
    2011/11/18 14:4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10월20일 카다피가 최후를 맞았다. 반카다피 진영의 공세로 수도 트리폴리를 내주고 자취를 감춘 지 두 달 만이다. 지난 42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카다피의 비참한 몰골을 담은 동영상은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됐다. 리비아인들은 이제 카다피가 복귀해 압제를 다시 가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는 확실히 벗어나게 되었다.
반카다피 진영이 무장투쟁에 나선지 반년 만에 리비아의 민주화 투쟁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고 있다. ‘카다피 없는 세상’은 더 이상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등장했다. 민주화 시위의 격랑에 맞서다 종말을 자처한 카다피는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에 이어 쫓겨난 ‘세 번째 독재자’이자, 내전 끝에 자국의 시민군에게 붙잡혀 생을 마감한 ‘첫 번째 독재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
하지만 ‘카다피 이후’ 리비아의 앞날에 대해선 우려 섞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인구 600만의 리비아에서 반카다피 진영이 지난 6개월간의 내전으로 5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밝힐 정도로 민주화 투쟁은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카다피 정권의 붕괴, 더 나아가 카다피의 죽음이 당장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리비아는 다시금 새로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카다피의 몰락

튀니지를 시작으로 촉발된 아랍의 민주화 투쟁에서 최근 리비아 사태는 중대한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민주화 시위가 장기화 되고 있는 시리아, 예멘 등에서 리비아의 반카다피 진영이 거둔 승전보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국가권력의 무차별적인 유혈진압으로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연이어 발생함에 따라 평화적 정권교체보다는 리비아식 무장투쟁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카다피 체제의 종식은 ‘아랍의 봄’ 이후 리비아에서 예외적이고 독특한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물론 시민혁명의 불길이 먼저 타오른 튀니지나 이집트처럼 리비아에서도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된 독재체제가 몰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저항은 권위주의 정권의 강경탄압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으며 되레 광범위한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앞선 사례와 달리 리비아의 민주화 과정은 내전을 통해 달성되었다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카다피가 거리에서 움터 나온 민주적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시위대를 향해 대규모 학살에 나서자, 반카다피 진영으로 결집한 리비아의 수많은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발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후 내전에는 서방세계의 군사개입까지 이뤄졌다.
결국 내전 6개월 만에 카다피가 트리폴리를 버리고 도주함으로써 철옹성 같았던 카다피의 권력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것은 끝내 카다피의 죽음마저 불러왔다. 그런데 리비아에서 카다피 체제의 종말은 말 그대로 ‘구체제의 몰락’을 의미했다. 기존의 국가권력 그 자체가 증발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카다피 정권의 붕괴에서 정부 인사 몇몇의 교체, 권력기구 일부의 개편 등 체제 개혁조치는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튀니지와 이집트만 해도 민주화 투쟁 이후 기존의 국가기구에는 어떠한 파괴도 없었다. 특히 군대·경찰·정보기관과 같은 핵심적인 권력기관은 해체되지 않았다. 지난 10월23일 첫 민주 선거를 치른 튀니지에서는 온건 이슬람주의와 서구식 의회주의와의 결합을 표방한 엔나흐다당이 승리하며 서방세계를 안심시켰으며, 11월 총선을 앞둔 이집트의 경우에도 군부가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 여태껏 체제의 연속성을 지켜내고 있다.
문제는 ‘공공의 적’ 카다피에 대항한다는 단일한 목표로 묶인 반카다피 진영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구심점의 해체다. 카다피의 죽음으로 반카다피 진영은 축제 분위기를 맞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혼란을 예고하고 있다. 게다가 카다피 추종세력의 영향력이 리비아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도 아니다. 카다피가 “최후까지 항전할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긴 순교자로 부상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카다피의 절대 권력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리비아는 지금 거대한 권력공백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혼돈의 기원

리비아에서 나타나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지난 42년 동안 지속된 카다피 체제의 권력 시스템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카다피 정권의 특성으로 대체로 시민적 권리의 부재, 카다피의 변덕스런 통치 스타일, 카다피 가족 및 친족집단 간의 부패 등이 거론되지만 이러한 점들은 아랍권뿐 아니라 그 밖의 여타 독재정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리비아의 현 국면을 이해하기 위해선 카다피 체제가 지닌 고유한 특징 역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69년 리비아 왕정을 무너뜨리고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1977년 ‘인민의 권력’라는 뜻의 ‘자마히리야’(Jamahiriya) 체제를 선포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통치 시스템은 ‘혁명·군대·부족’이라는 세 가지 지렛대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지난 봄 아랍권의 민주화 열풍이 리비아로 전파되기 전까지 심지어 내전의 와중에서도 그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카다피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맹신한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혁명위원회는 국가의 모든 조직과 기업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카다피의 저서『그린북(The Green Book)』(1976)에 기초해 자마히리야 교의를 지키고 민중을 동원하는 보증인 역할을 했다. 기존 회원들의 지명으로 선출되는 3만여 명에 이르는 혁명위원회 회원들은 승진과 물질적 보상의 혜택을 누렸다. 때문에 이들은 체제수호 세력으로서 지난 2월15일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이를 진압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카다피와 그의 가족 보호를 전담하는 친위부대가 있었다. 친위부대는 1만5천 명의 육·해·공 통합군 형태로, 이 부대의 병사들은 주로 카다피 체제에 충성해온 리비아 중부와 남부의 두 거대 부족 카다파족과 마가리하족에서 충원되었다. 친위부대 역시 카다피 체제가 제공하는 수많은 재정적 혜택을 받았으며, 이들은 민주화 투쟁이 내전으로 격화되자 카다피의 뜻에 따라 반카다피 진영을 향한 무차별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다피는 리비아의 부족사회 전통을 자신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리비아는 사회문화적으로 아직까지도 부족사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다. 카다피도 집권 이후 줄곧 각 부족들을 상대로 포섭과 배제의 정책을 펼치며 리비아의 부족사회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카다피 시스템에 깊이 연루된 부족들의 구성원이 많이 사는 리비아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내전 중에 중립을 지키거나 민주화 투쟁에도 거의 가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카다피라는 한 명의 절대적 통치자와 그 지지자들은 체제의 운명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민의 권력, 즉 자마히리야를 자임한 카다피 정권의 실체였다. 이런 까닭에 카다피의 실각은 곧 억압적 통치권력 자체의 붕괴로 이어졌고, 친카다피 세력이 카다피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저항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카다피의 권력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지만 당장 리비아는 전쟁의 내상 치유와 사회통합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군웅할거’의 시대

지난 10월23일 반카다피 진영의 대표를 자임하는 국가과도위원회(이하 ‘과도정부’)는 ‘리비아의 해방’을 공식 선언했다. 현재 과도정부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을 비롯해 세계 30여국으로부터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승인 받으며, 이를 근거 삼아 리비아의 재건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과도정부가 앞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과도정부를 이끄는 잘릴 위원장조차 “새 정부 출범작업이 일정한 계획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없다”고 실토할 정도다.
오히려 반카다피 진영의 상당수는 과도정부의 노골적인 친서방주의와 권력집중화에 경계하며 이후 정치권력의 분할과 경제적 보상을 놓고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단적으로 수도 트리폴리의 경우 리비아의 무장그룹들이 서로 분점하고 있는 상황이며, 서방의 입장을 대변하는 과도정부의 통제에는 따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리비아의 민주체제를 위한 독자적인 방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도정부 중심의 권력강화와 이권통제에 반대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트리폴리는 지금까지는 약탈이 거의 없는 등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편이지만 향후 민주화 투쟁의 성공과 실패를 가를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반카다피 진영의 분열상은 지난 2월 벵가지 도심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카다피 축출이 머나먼 미래에 지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소통하는 청년세대의 다양한 요구와 불만이 거리에서 막 분출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카다피의 유혈진압으로 사태가 확산되면서 민주화 투쟁은 내전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동안 카다피 체제로부터 소외되거나 불이익을 받았던 세력들도 하나둘씩 반카다피 기치 아래 결집해 들어갔다.
부족주의 성향이 강한 리비아에서 몇몇 유력 부족들은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고, 카다피 체제에서 불법화된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들도 무장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따라 반카다피 진영에서 나타난 초기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정형한 무장투쟁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재편된 것으로 보인다. 반카다피 진영이 수개월 동안 내전을 치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리비아 사람들의 민주화 열망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총과 차량, 그리고 자금을 댈 수 있었던 부족세력과 과거 게릴라 투쟁의 경험으로 카다피 친위부대와의 교전을 직접 지휘한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도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지난 8월21일 트리폴리의 해방에서는 리비아 서부의 거대 아랍부족인 진탄족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이후 트리폴리 서쪽에서 본격화된 진탄족의 공세가 점차 성과를 거두며 카다피를 압박했고, 이에 따라 카다피는 트리폴리를 놓고 동부와 서부의 반군으로부터 협공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8월 들어 전세는 반카다피 진영으로 역전되었다. 8월20일경 트리폴리 진공작전이 결정되자 이를 감지한 트리폴리 시민들도 비로소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반면, 서방세계는 자국의 경제위기 여파로 내전의 장기화를 부담스러워하며 6월 이후부터 공습은 유지하면서도 카다피와의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다. 군사개입에 앞장섰던 프랑스조차 카다피의 해외망명을 추진했고, 미국은 8월 초까지 카다피 측과 비밀협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협상은 카다피의 최종거부로 결렬되었고, 서방세계는 출구전략 찾기에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리비아 서부 반카다피 진영의 군사적 공세가 뜻밖의 변수로 출현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서방세계는 트리폴리 진공에 동참하며 리비아 내전에서 승자의 자격으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결과 카다피가 사라진 리비아에서는 소위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의 종결에서 그 누구도 압도적인 권위와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까닭이다. 여기에 리비아 최대의 국부인 석유와 천연가스를 놓고 서방 국가들의 이권다툼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벌써부터 프랑스가 적극적인 군사개입의 대가로 원유 생산의 35%를 할당받기로 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주도권과 경제적 이권을 놓고 벌어지는 이 같은 쟁탈전이 아니라 애초에 리비아 곳곳에서 터져 나온 민주화 요구의 실현에 있다.

 

 

 

카다피 없는 카다피 체제

현재 리비아 사람들이 카다피 체제를 전복시켰다는 해방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변화에 대한 갈망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총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을 무장한 전사로 바꾸어 놓았고 결국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들은 민주화를 지지하고 그 투쟁에 직접 참여했다는 자부심 속에서 리비아의 내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관계는 ‘카다피 없는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과도정부는 카다피가 제거됨에 따라 지난 10월31일 이후 서방의 군사개입이 종료된 것에 내심 불안해하고 있다. 그만큼 국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탓이다. 과도정부는 반카다피 진영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에서도 실패를 거듭하며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그럴수록 반카다피 진영의 개별화, 분권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지역과 부족, 그리고 이슬람주의의 내부 갈등에 따라 반카다피 기치를 내세운 민병대만 300여개에 이를 정도다.
과도정부가 사회 질서의 원칙으로 전면에 내건 ‘온건 이슬람주의’ 역시 해결책이 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과도정부는 튀니지처럼 서구식 의회주의와의 결합 가능성을 열어놔 서방세계에 눈도장을 찍는 한편, 이슬람 율법에 따른 통치도 강조함으로써 부족세력과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을 순치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온건 이슬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포섭만으로는 반카다피 진영 내부의 반목을 진정시킬 수 없는데다가 민주화 투쟁으로 상승된 대중의 기대에도 못 미치면서 오히려 새로운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지난 10월23일 과도정부의 잘릴 위원장이 “이슬람 율법과 상충하는 일부다처제의 제한을 폐지해야 한다”고 밝히자, 카다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선에 함께 섰던 수많은 리비아 여성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카다피 체제조차 ‘예외적’으로만 인정했던 일부다처제의 전면 허용에 새로운 압제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처럼 과도정부에 대한 좌절과 실망에서 비롯되는 마찰은 단순히 일회적인 충돌로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의 일자리와 교육, 의료, 주택 등에서 다양한 요구가 분출하고 있지만 서방에만 기댄 과도정부의 정치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민주화 투쟁을 전후로 하여 리비아는 분명 바뀌었다. 리비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로의 회귀를 원치 않는다. 그 대신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또한 전쟁의 참상을 치유하고, 서방의 간섭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하길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의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 요구의 목소리는 아직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결집하진 못한 실정이다. 반면 리비아의 실질적인 권력은 무장투쟁을 주도한 각 부족과 급진 이슬람주의 집단처럼 기존의 전통적인 세력들과 서방세계가 밀어주는 과도정부로 분산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들 사이의 정치적 파워게임은 이제 본격화되고 있다.
이처럼 ‘아랍의 봄’ 이후 분출한 리비아의 민주주의는 카다피 정권의 붕괴로 전에 없는 새로운 기회를 맞았지만 반카다피 진영의 분열과 서방의 제국주의적 이권쟁탈 속에서 오히려 후퇴되거나 훼손될 위험에 처해 있다. 때문에 리비아 사태에서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카다피 없는 세상’의 혼란스러움이 결국은 또 다른 지배 권력의 통치에 지나지 않는 ‘카다피 없는 카다피 체제’로 변질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잣대나 기준이 아닌 리비아 사람들의 구체적 현실이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현재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요구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비아의 민주화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 발걸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단되어선 안 된다.

 

 

 


‘반제투사’ 카다피와 맹목적인 반제국주의


한때 카다피는 제3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식민의 역사로 점철된 리비아에서 카다피는 서구 제국주의를 몰아낸 최초의 지도자였다. 카다피는 리비아 내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다. 석유와 도로, 해운, 항만 등의 기반시설에 대한 국유화 조치도 단행했다. 카다피의 반제투쟁은 제3세계에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국내에서도 1980년대에 카다피의 저서『그린북(The Green Book)』이 민주화 운동진영에서 제법 읽히기도 했다.
카다피는 “리비아는 사람들의 빈곤, 굶주림, 후진성, 무지를 제거하는 길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며 일종의 ‘리비아식’ 사회주의(‘자마히리야’ 체제)를 제창했다. 하지만 카다피는 1970년대 트리폴리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하며 이후 노동자의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또한 정당을 건설하거나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하기도 했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 즉 단지 기업의 국유화나 계획경제의 도입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전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며 노동자 대중이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강경일변도의 반제투쟁 기치도 사그라졌다. 지난 2003년 카다피는 스스로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공식 선언하며 서방세계와 손을 잡았다. 동시에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풀리면서 리비아의 석유 개발도 붐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산업이 국유화된 리비아에서 카다피와 그의 일가는 서방과의 경제개방을 주도하며 막대한 오일머니를 축적했다. 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독재체제의 결과로 누적된 대중들의 불만은 국가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자마히리야 교의로 통제당해야 했다.
그런데도 카다피에 대해선 늘 ‘반제투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심지어 아랍의 봄 이후 카다피 체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이러한 시각은 여전하다. ‘카다피의 친구’를 자처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카다피를 찬양하고 나섰다. 지금 이들은 카다피를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순교자’로 추앙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외 일부 좌파세력들도 동조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고 대중을 통제하는 한, 그것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든 ‘반제국주의’를 선전하든 그 어떤 사회체제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카다피 체제는 그 몰락을 통해 반제국주의라는 것이 대중의 직접적인 이해에 기반하지 않을 경우 대중 위에 군림하는 지배세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음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다피 체제를 끝까지 지지했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또는 ‘21세기 사회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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