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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국사회와 노동계급 ─ 사회사적 개관 | 제삼노총 정책기획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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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호-157-184-논문-이영석,_현대_영국의_노동계급.hwp
 

현대 영국사회와 노동계급 ─ 사회사적 개관*

이  영  석**1)


1. 머리말

2. 번영의 시대와 노동의 변화

1) 경제성장의 두 측면

2)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정체성 변화

3. 노동조합과 정치

4. 장기불황과 신보수주의 개혁

5. 음울한 풍경화


1. 머리말


1945년 이후 영국의 쇠퇴는 세계체제 중심국가의 전락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은 아시아-아프리카를 휩쓴 탈식민지화 운동으로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전후 ‘번영의 시대’에 영국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하고 생활수준도 높아졌지만, 그것은 독일․프랑스와 같은 경쟁국들의 번영에 비하면 상당히 뒤쳐진 것이었다. 특히 1차 석유위기와 더불어 시작된 장기불황은 영국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 또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우선 전후의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제도의 확대로 노동계급은 이전보다도 더 안정된 고용과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다. 노동계급은 아직도 작업장에서 그들만의 관행과 조직노동운동을 유지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양차대전 사이에 진행된 것으로서, 주거․보건․교육 여건의 향상과 더불어 심화되었다. 그들의 여가 또한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성격보다는 소비사회의 일반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한편 번영의 시대에는 정부와 전국적인 노동자조직 사이에 집단교섭과 정책결정의 합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이 생산성의 정치는 일종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 체제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북유럽이나 독일의 제도에 비해서 더 취약한 것이었다 특히 노사교섭은 1960년대 중엽 이래 집단협상 대신에 개별 작업장에서 직장위원(shop steward)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번영의 시대에 노동계급이 누렸던 직업의 안정과 단체교섭력은 장기불황 및 보수당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대처 정권 아래서 노동자들은 높은 실업과 생활수준 악화를 겪었다. 보수당 정부는 일련의 노동입법을 통해서 전통적으로 자원주의(voluntarism)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온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 조직노동운동의 전망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불투명해졌다. 영국의 노동계급은 1980년대 이래 ‘효율성’과 ‘생산성’의 구호 아래 거의 모든 기업에서 진행중인 노동과정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2차대전 이후 오늘날까지 영국 노동계급의 변화를 개관하는 데 목적을 둔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적지 않은 위험을 수반한다. 이 시기의 노동사 분야는 19세기에 비해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편적인 주제들에 대한 개별 연구가 있기는 하지만, 에릭 홉킨스(Eric Hopkins)의 최근 저술1)을 제외하면 노동계급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는 종합적인 작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이 글에서는 홉킨스의 저술을 토대로 하면서 최근의 경제사 연구와 사회조사 결과, 그리고 산업관계론(industrial rela-tions) 분야의 성과들을 참조하여 기술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각 시기별로 노동계급에게 나타난 변화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측면들을 중심으로 살피려고 한다.



2. 번영의 시대와 노동의 변화


1) 경제성장의 두 측면


1945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계획경제와 고용 창출, 이자율 인하, 수출촉진정책 등 일련의 경제정책을 통하여 경제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정부는 ‘수출이냐 아니면 죽음이냐’라는 구호를 내세울 만큼 수출을 장려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복지제도를 확대하였다. 노동당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1951년에 노동당의 뒤를 이어 집권한 보수당 정부 또한 이전의 노동당 집권기에 이루어진 여러 경제정책을 이어받고 국민보험과 의료보험을 기본축으로 하는 사회복지제도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950년대에 널리 쓰인 ‘버츠켈리즘(Butskellism)’이라는 말은 당시 경제정책 면에서 두 당의 차이가 별로 없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2)

1950~60년대 영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속적인 성장이다. ‘성장’은 그 시대의 구호였다. 이 시기 경제성장의 원인에 관해서는 대체적인 합의가 있다. 우선 영국은 전쟁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와 함께 전후 복구계획, 기계 및 생산설비의 현대화, 미국의 자본 투자, 공공지출 증가 등은 성장에 유리한 여건을 만들었다.3) 1948~60년 사이에 연평균 산업생산 증가율은 3.7%를 넘었는데, 이것은 20세기 전반에 비해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양차대전 사이에 크게 위축된 전통적 수출산업(제철․제강 섬유․조선․석탄 등)이 다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이들 분야의 생산은 1950년대 이후에 계속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화학․정유․전기․자동차 분야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이와 관련된 가스․전기․수도․식음료․담배 분야의 생산이 급증하였다.

<표 1)> 선진 공업국의 GDP․노동생산성․산업생산 증가율  %

 

국내총생산

노동생산성

산업생산

국가

1950~73

1973~84

1950~73

1973~84

1960~73

1973~85

영국

3.0

1.1

3.2

2.4

3.0

0.6

프랑스

5.1

2.2

5.1

3.4

5.9

1.0

독일

5.9

1.7

6.0

3.0

5.5

1.1

미국

3.7

2.3

2.5

1.0

4.9

2.3

일본

9.4

3.8

7.7

3.2

12.6

3.4

자료: Kirby, “Economic Record,” p. 13에서 재작성.

그러나 전후 영국 경제의 성장은 다른 산업국가들의 성장률과 비교할 때에는 매우 낮게 나타난다. <표 1>은 1950~60년대에 영국의 국내총생산․산업생산․노동생산성 증가율이 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 경쟁국들의 증가율보다 낮은 수준임을 보여준다. 영국 경제의 상대적 쇠퇴과정에서 1950년대야말로 중요한 시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유럽 주요국가들의 경제부흥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에 영국인들의 생활수준은 이전에 비해서 급속하게 높아졌는데, 노동계급 또한 전반적으로 높은 소비생활을 누렸다. 영국인들의 소비 증가는 국내 생산물보다는 값싼 수입품에 의존한 것이었다. 대다수 영국인들은 그들의 번영의 이면에 쇠퇴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풍요의 사회’에만 집착하였다.

경제사가들은 1950~60년대 영국 경제의 상대적 쇠퇴과정을 검토하면서 제조업의 지속적인 위축과 정부의 통화정책을 주목한다. 우선 제조업의 쇠퇴는 다른 산업국가들에 비해서 두드러졌다.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영국의 공업생산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1.4%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비중은 1975~7년에 평균 9.1%, 1980년대에는 5%로 하락한다.4) 물론 이 시기에 서비스 분야는 상대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활동의 무게중심이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급속하게 이동한 결과인가? 1960년대 이래 선진 산업국가에서 서비스 분야의 팽창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서비스 혁명을 탈산업사회의 불가피한 변화로 파악한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제조업의 쇠퇴를 서비스 혁명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영국은 이전부터 오랫동안 국제금융 및 기업 서비스 분야에서 비교우위의 이점을 누려왔다. 1960년대 이래 서비스 부문의 팽창은 영국 제조업의 쇠퇴에 따라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이다.

다음으로, 영국 정부의 통화정책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일반적으로 전후 여러 나라들의 경제정책은 케인즈적인 수요관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의 경우도 사회보장의 확대와 주택 건설 등 공공부문의 지출 증대를 통하여 수요를 확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통화긴축, 즉 디플레이션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 까닭은 1950~60년대 보수당 정부가 국제수지 균형을 경제정책의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수입 증가로 국제수지가 불균형 상태에 빠지면 곧바로 통화량을 감축하였고, 불균형 상태가 개선되면 통화공급을 늘렸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은 금융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결과라는 비판이 있다. 국제수지 균형을 위해 금융제재의 강화와 약화를 되풀이하는 이와 같은 조치는 흔히 ‘스톱 앤드 고(stop and go)’ 정책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1950년대에 영국의 국내산업이 경쟁력과 기술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5)


2)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정체성 변화


제조업 분야의 고용인구가 감소한 것은 공업 자체의 쇠퇴를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공정의 자동화와 자동제어 시스템의 도입에 따른 변화를 반영한다. 이미 1954년 공장감독관 보고서는 공장의 자동화 과정을 언급하면서 ‘컴퓨터’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6) 이러한 자동화 추세는 주로 대단위 작업장에서 이루어졌다. 기술혁신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새로운 전기․자동차․식음료 분야의 경우 특히 ‘포디즘(Fordism)’과 같은 대량생산체제가 널리 자리잡았다. 자동화와 전자제어 추세는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한 작업장에서 두드러졌다. 포디즘 아래서 작업의 단순화와 반복이 과연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를 증가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전의 위험하고 불량한 작업환경과 포디즘의 역기능을 비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번영의 시대에 전반적으로 작업환경이 좋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 추세는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인 수출산업과 건축업의 경우 그 개선의 정도는 보잘 것이 없었다. 1960년대에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일련의 공장법7)이 제정된 것은 역설적으로 작업장의 위험이 산업분야에 따라 상존하였음을 보여준다.

시드니 폴라드(Sidney Pollard)의 추계에 따르면, 1970년의 주당 실질임금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950~75년 사이에 노동자들의 임금지수는 63.5에서 115.8로 높아졌다.8) 이와 같은 번영은 지속적인 성장의 결과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까지 그 성장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고용 안정과 복지제도의 확충 때문이었다. 우선 이 시기에 실업률은 이례적으로 낮았다. 1950년대에 1.5%, 1960년대에도 2%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9) 다음으로,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틀은 전후 노동당 집권기에 의해서 세워졌다. 노동당 정부는 집권 다음해에 국민보험법(The National Insurance Act)을 개정하고 국민보건의료법(The National Health Service Act)을 제정함으로써 사회보장의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이미 1942년에 간행된 이른바 ‘베버리지 보고서’(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가 제시한 사회보장의 청사진을 구체화한 조치였다.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노동계급의 주거환경 및 건강상태도 개선되었다. 우선 노동계급을 비롯한 서민주택 건설은 전후 노동당 정부의 우선적인 시책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1930년대에도 공공주택 건설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바 있다. 노동당은 1945년 선거에서 ‘서민에게 집을’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집권과 더불어 대대적인 주택건설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의료보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건장관 어나이런 베번(Aneurin Bevan)이 입안하였다. 그는 주택공급을 원활히 하고 집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련의 입법10)을 추진함과 동시에 주택 400만 호 건설이라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다. 노동당 집권기의 주택공급 물량은 대략 97만 호로 추정된다. 원래 계획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베번의 주택정책은 의료보험의 경우보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주택공급 정책은 1950년대 보수당 정부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노동계급의 주거환경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11)

1950~60년대 주택공급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주택공급정책은 지방정부와 민간회사의 주택건설을 지원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초기에는 지방정부에서 건설한 공영주택의 비중이 컸으나, 점차로 민영주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12) 이것은 지방행정당국이 점차로 주택부지를 공급하고, 민간 건설업자가 주택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유도한 결과이다. 또한 보수당 정부는 공영주택의 세입자가 임대주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금융상의 지원책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공영주택의 경우도 임대는 단기간의 형태이고 장기적으로는 개인이 분할 상환의 방법으로 매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주택의 규모나 형태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것은 주택보급률과 같은 양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기존의 서민주택을 대신하여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모델들은 이전의 주택에 비해 거실을 넓히고 주방과 욕실을 개량한 형태였다. 새로운 공영주택단지는 석탄․전기․가스를 이용한 개별 난방식에서 중앙난방식으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도 이전보다 나아졌다. 그것은 생활수준과 주거환경의 향상, 의료보험제도, 노동시간 단축, 가족원 감소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계급 가정의 식생활에 변화가 일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음에도 빈곤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이 시기에 빈곤선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극소수여야만 했다. 1899년과 1936년에 뒤이어 1950년에 세 번째로 요크의 빈민층을 조사한 시봄 라운트리(B. Seebohm Rowntree)는 이제 실업이 더 이상 빈곤의 기본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의 조사에서, 빈곤을 낳은 중요한 요인은 노령, 질병, 가장의 죽음 등의 차례로 나타났다.13) 피터 타운전드(Peter Townsend)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68년 당시 빈곤층이 전체 가구의 7.1%, 인구의 6.1%였다. 그러나 빈곤선을 오르내리는 불안정한 계층은 전체 가구의 23.8%, 인구의 21.8%였다.14) 1950~60년대에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졌음에도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1950~60년대에 노동계급의 정체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 노동계급의 정체성은 다른 사회세력과 그들 스스로를 구분할 만한 집단적 자의식과, 그리고 그 의식에서 비롯하는 고유의 문화형태 및 조직운동의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 19세기 이래 영국의 노동계급은 어떤 형태이건 스스로 집단적 자의식을 쌓았고, 작업장과 사회에서 그들 고유의 관행과 문화를 나타냈으며, 조직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회세력과의 경계가 약해지고, 시민사회의 일부로 편입되는 경향도 있었다. 그 단초는 이미 양차대전 사이에 나타났는데, 번영의 시대야말로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의 정체성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소득 수준 향상과 교육의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

소득 수준의 변화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향상이 다른 사회세력과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갔는가 여부이다. 이를 실증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과 다른 사회세력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국민소득 가운데 각 집단들이 차지하는 비율의 변화를 서로 비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업별 소득 분포를 통해서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통계치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소득 불균형의 추이는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소득배분의 문제를 다룰 때에 10% 단위로 소득분포층을 세분하여 이들 집단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서로 비교한다. <표 2>는 소득분포에서 상위 10%의 집단과 하위 20%에 해당하는 집단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변화를 살핀 것이다. 두 집단의 소득격차가 점차로 좁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과세전보다 과세 후에 상위 10% 집단의 비중이 더 낮아졌고, 하위 20% 집단의 비중은 더 높아졌다. 지니계수 또한 소득 불균형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번영의 시기에 전반적으로 소득이 증가하면서 노동계급과 다른 사회세력의 소득 격차는 좁혀지는 추세를 보여준다. 특히 정부의 조세정책으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심화되었다.

<표 2)> 계층별 국민소득 추이  %

 

과세 전 소득

과세 후 소득

구분

1949

1964

1973-4

1949

1964

1973-4

상위 10% 계층

33.1

29.4

26.8

27.1

25.9

23.5

하위 20% 계층

5.4

5.3

5.2

-

6.5

7.5

지니 계수

-

39.8

37.0

35.5

36.6

32.8

자료: Pollard, Development of the British Economy, pp. 316-17에서 작성.

다음으로 교육은 노동계급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계급 출신들에게서 교육을 통한 사회이동이 활발하게 나타났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정교한 실증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다만 교육제도의 변화에 따라 노동계급 출신에게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의 기회가 더 개방되었는가 여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960년대에 영국 정부는 교육 기회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부는 교육을 복지국가의 주요 내용으로 인식하였으며, 18~9세까지 학교에 재학중인 청소년층의 비율이 높아졌다. 전후에 영국은 의무교육 연한을 중등학교까지 늘리면서 공립중등학교를 세 범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대학 진학을 위주로 하는 전통적인 문법학교, 직업교육 중심의 기술학교, 그리고 두 특징을 아울러 지닌 현대식 중학교(종합학교)가 그것이다.15) 1960년대에 영국 교육당국은 전통적인 문법학교의 특권적 지위를 없애고 현대식 중학교를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일반 서민에게까지 고등교육의 기회를 넓히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1960년대에 정부는 노동계급 자녀에 대한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를 강조하였고, 기존의 31개 대학 이외에 더 많은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워리크, 요크, 브라이튼 등 지방도시에 ‘신대학’이 세워졌으며 이밖에 기술대학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고등교육기관도 증설되었다. 이 결과 1946~72년 사이에 대학 신입생은 1만 8,866명에서 6만 4,963명으로 늘었다.16) 그렇다면 노동계급 자녀들에게도 다른 사회집단에 못지 않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개방되었는가. 대학정원의 증가는 오히려 중간계급 출신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노동계급 자녀의 대학 진학이 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진학률은 중간계급의 경우에 비해 훨씬 더 낮았다는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43~52년 사이에 태어난 노동계급 자녀 가운데 3.1%만이 대학에 진학한 반면, 전문직․행정직․관리직․감독직 가정 출신 학생들은 26.4%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이다. 1932~42년 사이에 출생한 노동계급 자녀의 대학진학률이 2.3%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만하게 증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17) 그러나 전반적으로 1960년대에 노동계급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더 넓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노동계급의 정체성 문제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 사실 번영의 시대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이전의 관행과 규범이 이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물론 중간계급이었겠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노동계급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에게 일은 우선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낟알을 거두지 못하리라”는 성서의 구절은 오랫동안 서민의 숙명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일은 그 자체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특히 숙련노동자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얻은 기술과 숙련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들은 노동과정에서 자신의 정서와 가치를 반영하는 ‘규제적 관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그 관례들을 통하여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자동화와 전자제어방식이 주류를 이룰수록 작업은 좀더 단순하게 변하고 노동자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없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여러 사회조사 결과들은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18) 예컨대 1960년대 후반 루턴(Luton)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작업을 도구적 맥락에서만 바라보았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으로만 인식할 뿐 작업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가정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고 집안 가꾸기와 가족간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전의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수준도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일의 성격도 소중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루턴 노동자들, 특히 미숙련공들은 작업의 특성이나 분위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작업에 대한 만족도는 오히려 노동과정과 관련이 없는 다른 요인들, 즉 고용주의 태도, 작업규율, 동료와의 친교, 노동조합의 지원 등에 좌우될 뿐이었다. 1972년 북동부 대규모 화학공업단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사회조사 결과도 비슷한 변화를 보여준다. 노동자들이 좋게 여기는 직업의 척도는 아직도 보수, 직업의 안정성, 기업복지, 작업조건 등의 차례로 나타났다. 보수와 직업의 안정성이 중시된 것은 물론 예상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직종(또는 일)의 성격과 그에 대한 흥미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1960년대 영국 사회는 결혼과 성 관계의 패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혼전 동거, 이혼, 성 개방 풍조 등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고 이것은 노동계급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성 해방은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성 개방 풍조와 함께 여성의 의상도 노브라, 미니스커트, 나일론 스타킹 등 새로운 외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추세들 가운데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여성 취업자의 증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쟁기에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여성의 이미지는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채 빨래를 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 이미지는 직장에서 맞벌이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여성의 취업 증가는 성장기의 노동력 부족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이러한 추세가 가속화하는 데에는 내구소비재 보급, 가사노동의 감소, 피임 또는 임신중절의 확산 등도 영향을 미쳤다.

노동계급의 여가 또한 탈계급화 현상을 반영한다. 1970년 런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는 사회집단별로 여가 패턴의 차이가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긴 주말에 어떻게 시간을 소비하는가. 집안에서는 텔레비전 시청, 자녀와의 놀이, 집안 가꾸기, 자동차 닦기 등의 차례였다. 집 바깥에서는 자동차 드라이브, 팝하우스 출입, 산책, 외식, 교회 예배 등이 상위 목록에 올랐다. 여가 패턴은 대체로 직업에 따른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외식과 교회 예배의 경우 중간계급의 선호도가 노동계급보다 더 높았다.19) 여가와 문화에서 탈계급적 현상은 특히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와 단절현상을 보여주는데, 젊은이들의 새로운 여가와 문화는 탈계급적 성격을 지녔다. 청년문화의 단절성은 이미 1950년대 의상의 변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몸에 달라붙는 자켓과 바지는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앨런 실리토(Allan Sillitoe)의 ꡔ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ꡕ(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1958)은 주말을 술과 섹스로 탐닉하는 젊은 노동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20)

지금까지 노동계급의 정체성의 변화와 관련된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구분선이 무너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두 계급 사이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중요한 것은 19세기 이래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경험-집단적 자의식-조직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그 고유의 패턴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조직과 노동운동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집단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제도로서, 그 제도의 관행에 힘입어 작동할 뿐이었다. 루턴의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조사에서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의무와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21)



3. 노동조합과 정치


번영의 시대에 노동조합과 작업장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영국의 노동조합은 19세기에는 대체로 직종노조 또는 산업별노조의 형태였으나, 20세기에 이르러 일반노조로 변모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일반노조란 직업, 산업, 숙련/미숙련의 명확한 구분이 없음을 뜻한다. 오늘날에도 의료․교육․소방 등 사회서비스 분야의 직업별노조나 탄광과 같은 산별노조가 존속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일반노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일반노조 내부에는 몇 가지 직업과 산업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직업별 또는 산업별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60~70년대는 노동조합의 힘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시기이다. 우선 이 시기에 노동조합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1950~75년 사이에 노조원은 270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특히 조합원 수가 절정에 이르렀던 1979년의 노조조직률은 55%를 넘어섰다.22) 이러한 팽창의 배경으로는 특히 많은 노동조합이 클로즈드 숍의 원칙을 견지했다는 점과, 그리고 1960년대에는 화이트칼러 노동조합23)이 성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이 시기 노동조합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대규모 노동조합으로의 통합 추세이다. 25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거느린 대규모 노동조합은 1968년 9개, 1979년에 11개에 이르고 있다. 노동조합평의회(TUC) 산하의 이러한 거대노조는 파업이나 집단협상 또는 정부와의 교섭에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1970년대 노동당 정부 아래서 노조는 정부와의 교섭에서 노조에 유리한 일련의 입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24)

이 시기에 노동조합은 정부와의 교섭을 중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노동당 정부의 임금억제정책에 반발하여 대립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이 시기의 파업은 대부분 임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노조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해 임금을 억제하려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파업을 이용하였다. 당시 정부는 임금 인상과 인플레이션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하려면 임금을 동결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노조는 노동자만의 고통 감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조는 그들의 임금 유지를 위해서 집단의 힘을 행사하는 길을 택했다.25) 그러나 거대노조와 노동조합평의회에서 활동하는 노조지도자의 영향력 증대는 다른 사회집단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임금정책을 둘러싸고 노조와 교섭해온 정부는 물론이고, 전문직업인을 비롯하여 중간계급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조활동 자체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무모한 파업, 피켓팅의 폭력, 조합내 분쟁 등을 다룬 텔레비전 연속물이나 영화 또한 ‘영국병’이라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노조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26)

1960년대 이래 정부는 노조활동을 제약하고 노조의 힘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윌슨 내각 당시 노동부장관 바브러 캐슬(Barbara Castle)이 간행한 정부백서 ꡔ투쟁을 대신해서ꡕ(In Place of Strife)(1968)는 노조의 비정상적인 활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백서는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제한하기 위해 파업 전 냉각기와 찬반 비밀투표를 선행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그후 보수당 정부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1971년의 산업관계법(The Industrial Relations Act)은 1968년 정부백서의 제안대로 파업 이전에 냉각기를 가진 후, 전국산업법정(NIRC)에 대해 필요한 경우 노조에 파업 여부를 묻는 비밀투표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물론 이 법은 노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다음 노동당 정부 아래서 폐기되었다. 그러나 노조는 법을 없애는 대신, 정부와의 교섭에서 임금의 자발적 억제에 동의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0~70년대 노동조합과 정부의 관계를 일종의 ‘코포라티즘’ 체제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다.27) 일반적으로 코포라티즘 체제는 자본과 노동의 독점적(또는 전국적) 조직이 국가의 매개를 거쳐서 그들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는 비의회적 방식, 달리 말하면 국가․자본․노동간의 정책형성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28)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전형적인 사례는 영국보다는 오히려 북유럽과 독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전국적 수준의 노사협상에 의해서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별 또는 전국적 차원의 강력한 노조조직, 전국 수준의 단체교섭, 안정된 노사관계를 필요로 한다. 영국의 경우는 오히려 ‘취약한 담합구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산업노조보다 일반노조가 지배적이고, 노동조합평의회와 같은 전국적인 노조조직이 개별 노조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미약하며, 정부도 필요한 경우에만 이들 전국조직과 교섭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번영의 시대의 영국 사회를 코포라티즘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이 시기에 국가와 노동 사이의 협의구조가 존속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70년대 초반에 노동당 정부는 노사정 협의기구를 강화하고 있다.29)

복지국가의 모델을 따른 영국에서 코포라티즘 체제가 취약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연구자들은 전국적 수준의 자본가 조직이 발전하지 않았고 TUC의 대표성이 약했으며 전국적인 교섭도 주로 정부-노조의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지적한다.30) 여기에서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TUC의 대표성 문제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TUC가 산하 노조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TUC 산하의 거대노조와 개별 작업장노조와의 관계도 그러했다. 사실 1960년대 이래 영국의 노사협상은 집단교섭보다는 개별 사업장 단위의 협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급노조의 통제력이 강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직장위원’의 역할 증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점이야말로 영국 노조활동의 또 다른 특수성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직장위원의 역할 증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사실 1950년대 후반까지 직장위원은 사회문제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들의 성채가 굳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매우 수세적인 것이었다.31) 당시에는 공장감독관, 고용주, 노조지도자들 대부분이 직장위원을 노조 안의 사적 기구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노조의 위계구조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위원제도는 자발적인 발전, 직접 민주주의 방식, 공식적 노동조합 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기존 산업관계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도전”이자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의 씨앗”인 셈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이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직장위원은 “불만을 경감하는 관리적 기능”을 가진 사람이었다.32) 그들은 대체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영향력을 지녔으며, 노사관계에서 자극제라기보다는 윤활유와 같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직장위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식적 교섭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은 1968년 도노번 위원회(The Donovan Commission)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영국 노사관계가 산업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 관계와 개별 작업장에서 전개되는 비공식적 관계로 이원화되어 있음을 인정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적 제도는 “그 조합원에 대하여 그들의 결정을 지시할 수 있는 전 산업에 걸친 조직”을 상정한다. 그러나 비공식적 제도는 “개별 회사 경영자의 폭넓은 자율성과 산업노동자 집단의 힘”에 의존한다.33) 그리하여 작업장의 비공식적 노사관계를 오히려 공식적인 것으로 인정할 것을 권유한다. “직장위원을 말썽꾸러기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들에게서 가끔 말썽이 일어나지만, 좀더 일반적으로는 질서의 지지자로서 조합원에게 억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34) 보고서는 규제적 관례를 없애고 영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직장위원제도를 공식화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35)

직장위원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영국의 단체교섭 형태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사실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단체교섭은 노동조합과 산업의 고용주 대표가 참여하는 전국 수준의 산업별 교섭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전국적 수준보다는 지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단체교섭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와 함께 직장위원 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개별 작업장 노조가 노사교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노조지부의 교섭은 개별 작업장, 기업, 지역 단위의 세 가지 형태가 병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직장위원은 공식적인 제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직장위원은 조합원의 선거로 뽑힌 개별 작업장 노조의 대리인으로서, 고용주는 이들의 작업을 면제하고 사무실을 제공하였다. 1970년대에는 이 무급 직장위원이 노조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4. 장기불황과 신보수주의 개혁


1차 석유위기 이래 장기 침체에 빠진 영국 경제는 1978~79년에 다시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1973~77년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6%에 이르렀다.36) 이후 영국 경제는 두 가지 특징적인 면모를 나타낸다. 첫째, 전국적으로 제조업의 위축과 탈공업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둘째, 장기불황에 따라 실업자가 급증하고 이와 함께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떨어졌다.

먼저 제조업의 위축을 검토하기로 한다. 1차 석유위기 이후의 불황기에 제조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973~79년 사이에 산업 전체 생산 증가율은 1.5%, 제조업 분야의 생산 증가율은 -0.7%였다. 1979~88년 사이에도 산업 전체 생산 증가율은 2.1%였지만, 제조업은 0.8%에 지나지 않았다.37) 다른 통계들도 제조업의 쇠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1981~85년 사이에 자동차 생산량은 25% 줄었고 섬유공업의 경우 1979~81년간에 26%나 감소하였다. 공산품 수출입은 1984년경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했다.38) 제조업의 쇠퇴는 고용자 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984~88년 사이에 영국(북아일랜드 제외) 전체 산업분야의 고용규모는 2.9% 증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가는 제조업에서 6.1% 감소한 대신, 서비스업 분야에서 8.6% 증가한 결과이다. 제조업의 경우 지역별로 보면 스코틀랜드(-11.9%), 런던(-11%), 북서부(-10.5%), 요크셔(-8.6%) 등이 평균 감소율보다 높았다. 다만, 이스트 앙글리아만이 그 증가율이 12.1%에 이르는데,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39) 또 다른 고용통계에 따르면, 1984~7년 사이에 전체 산업 분야의 고용인구는 42만 5,000명(2%)이 늘었다. 이에 비해서 제조업은 21만 9,000명(4%)이 감소한다. 전체 고용규모 증가분은 서비스업에서 79만 3,000명(6%)이 늘어난 데 힘입은 것이다.40) 또 금세기 말까지 고용규모 변화에 대한 추정치는 더욱 더 비관적이다. 1989~2000년 사이에 제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용자 수가 감소한다는 전망이다. 감소율은 광업 -25%, 전기․가스․수도 -25%, 식음료 및 연초 -19%, 섬유 -19%, 기계․자동차 -15%, 금속 -14%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화학 분야만이 감소율이 비교적 낮은 편인데, -2%로 나타나고 있다.41) 요컨대, 1970~80년대 영국 경제의 장기불황은 무엇보다도 제조업의 쇠퇴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금융, 정보․통신, 공공서비스 분야가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탈산업화의 맥락에서 영국 제조업의 위축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표 3)> 실업자수와 실업률, 1960~88

시 기

실업자수(만명)

실업률(%)

1951-64

38

1.5

1964-73

58

2.3

1973-79

115

4.4

1979-88

281

10.3

자료: Feinstein, “Success and Failure,” p. 101.

제조업의 급속한 쇠퇴는 곧바로 실업자의 증가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표 3>은 번영의 시대와 1970~80년대의 실업 상태를 비교한 것이다. 1980년대에 연평균 실업률은 10%를 상회한다. 특히 1883~86년경에는 실업자 수가 300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것은 대공황기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42) 보수당 정부의 구조조정과 개혁으로 경제상황이 좀더 나아졌다고 평가받는 1990년대에도 고실업 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43)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은 제조업이 급속하게 쇠퇴한 지역과 일치한다. 1920~30년대에 실업자들은 섬유․석탄․제철․제강․조선 등 전통적인 수출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0~80년대에도 이런 산업분야는 다른 직종보다 그 쇠퇴의 정도가 더 심했다. 1984년의 경우 북부(18.1%), 북서부(16%), 미들랜드 서부(15.2%), 요크셔(14.3%) 등의 실업률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들 지역은 전통적인 수출산업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그 반면에 서비스업이 발전한 동남부와 이스트 앙글리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44) 1996년의 통계에서도 전국 평균(7.8%) 이상인 지역은 북부(10.1%), 북서부(8.4%), 요크셔(8.4%), 스코틀랜드(8.1%), 웨일즈(8.4%) 등이었다.45)

1980년대의 실업자들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는 대공황기의 경우와 비슷한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연령에 따라 실업률은 차이가 있다. 고령자와 청소년층의 실업률이 높은 편이다. 특히 노년층 실업자의 50%는 장기실업 상태에 있었다. 그 반면에 20~24세 연령층의 실업자 가운데 장기실업자는 20% 수준에 머물렀다. 미숙련노동층과 전문인력 사이의 격차도 크게 나타났다. 미숙련층의 실업률은 전문직종 종사자의 5배 수준에 이르고 있다.46)

경제불황기에 일할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982년의 한 사회조사는 실업자들의 태도에 관하여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47) 면접자의 19%는 실직 후에 스스로 비참하거나 불행해졌다고 응답하였다. 17%의 면접자는 불안하고 성미가 까다로워졌다고 말했다. 참고 인내한다는 응답자는 15%, 아직 용기가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13%였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1930년대의 현상과 대조적인 면이 있었다. 그 시대의 실업자들에게는 겨울에 따뜻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침대, 공공도서관, 영화관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의 경우 여성은 오전에 50% 이상이 집안일이나 상점 쇼핑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 시간대에 남자들은 집안에 있거나(20%), 상점에 들리곤 했다(20%). 오후가 되면 여성은 가사일․요리․친구 방문․사교․쇼핑․구직활동․텔레비전 시청으로, 남성은 대부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 조사결과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활동적이고 다양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쨌든 200~3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들은 일찍이 산업혁명기에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간파했던 두 국민, 다시 말하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특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문제가 좀더 심각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1979년에 집권한 보수당 정부는 당면한 경제불황과 고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처 내각의 개혁의 본질은 경제주체들을 좀더 시장원리에 내맡김으로써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었다. 보수당은 선거에서 특히 산업관계의 전반적인 개혁을 구호로 내걸었다. 이것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사관계를 시장원리에 충실하게 만들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당연히 이익집단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는데, 대처 내각은 국가의 재흥, 생산성과 효율성의 제고 등의 수사를 동원하여 국민의 이해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수사는 ‘빅토리아적 가치’이다. 이러한 수사는 영국인들의 복고적인 분위기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빅토리아적가치의 핵심을 이루는 ‘자조(self-help)’야말로 제도개혁의 정신에 걸맞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처 내각은 먼저 일련의 노동입법을 통하여 노조활동을 억압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80년, 82년, 88년, 89년, 90년 등 5차례에 걸쳐서 개정된 고용법(The Employment Act), 1984년의 노동조합법(The Trade Union Act), 1992년의 노동조합 및 노사관계법(The Trade Union and Labour Relations Act), 그리고 1993년의 노조개혁 및 고용권한법(The Trade Union Reform and Employment Rights Act) 등이 대표적인 입법이다. 이들 입법은 궁극적으로 노조의 파업을 억제하고 노조활동을 축소시키며 노동시장 자체를 유연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항들로 이루어졌고 점차로 그 내용이 강화되었다.48)

보수당 정부의 노동입법은 대체로 세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들 입법은 노조활동의 제약에 목적을 두고 있다. 피켓팅 제한, 2차 단체행동 금지, 파업 불참자에 대한 노조의 제재 불법화, 단체행동에 피해를 입은 시민의 소송권 등이 이에 해당한다(1980, 1992년 법). 둘째, 노조 운영방식의 개혁도 새 노동입법의 중요한 목적이다. 선거에 의한 노조간부 선출 의무화, 단체행동의 적법한 절차 준수, 노조 재정운영에 대한 감사기구, 직장위원의 작업면제 축소, 조합비의 원천공제방식 금지,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비밀투표, 입사 전 클로즈드 숍 금지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1982, 84, 88, 90년 법). 셋째, 새 노동입법은 노동시장에서 고용보호제도 및 규정을 철폐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임금위원회를 폐지한 것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1992년 법). 원래 이 위원회는 노조조직률이 낮은 직종이나 산업분야의 최저임금을 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1993년 노조개혁 및 고용권법에 의해서 26개 직종의 임금위원회를 폐지함으로써 비정규적인 노동력 또는 파트타임 노동력을 충원하는 길을 넓혔다.

이와 같이 보수당 정부의 노동정책은 산업 효율성 증대와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된 것이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시장경쟁을 되살리고 통화긴축을 지속하며 기업연합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이제 이전과는 달리 정책결정과정에서 노조의 참여는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76~79년간에 TUC와 정부의 협의내용이 정책에 반영된 비율은 40%였다. 그러나 보수당 정부 아래서 그 비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49)

보수당 정부의 이러한 노동정책에 노동조합이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반발은 1984년 전후 최대의 광부 파업으로 폭발하였다. 당시 전국탄광노조 위원장인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은 생산을 줄이고 고용인력을 2만 명 줄이려는 국영탄광의 결정에 반발하여 비밀투표 없이 파업을 결정하였다. 다음해 봄까지 이르는 52주에 걸친 장기간의 파업은 결국 광부들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 밖에 1986년 ꡔ더 타임즈ꡕ지 인쇄공들의 과격한 파업도 결국 새 경영주인 러퍼트 머독(Rupert Murdock)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신문은 인쇄공들의 독점권을 없앤 후에 완전한 전자인쇄 설비로 제작되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국을 뜻하는 인상적인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의 숙련과 노동의 집단적 힘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시장원리에 굴복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18년간의 보수당 집권기에 영국의 조직노동운동은 쇠퇴의 길에 들어섰고, 노동조합도 위축되었다. 노동조합은 1979년에 노조원 1,344만 7,000명, 조직률 55.4%를 정점으로 그 이후 계속 위축되고 있다. 1995년의 경우 조합원 727만 5,000명, 조직률 32.1%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후반 이래 노동자 파업 또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991~95년 사이에 노동자 1,000명당 파업손실일수는 24일인데 이것은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다.50) 이와 같이 조직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 쇠퇴한 것은 정부의 반노조정책과 일련의 노동입법의 영향 때문이다. 이밖에도 고용방식의 변화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파트타임 노동자의 증가가 그것이다. 오늘날 파트타임 노동자는 전체 노동력의 25%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노동조합은 좀더 거대한 규모로 통합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생존의 차원에서 진행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거대노조는 대부분 활력을 잃고 있다. 이보다는 오히려 각 작업장의 직장위원이 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실정이다.



5. 음울한 풍경화


노동에 미래가 있는가. 영국의 노동계급은 이중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우선 번영의 시대에 그들은 점차로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조직노동운동도 그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기보다는 기존의 관행으로 움직였다. 노동조합의 관료화와 타성화는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다. 다음으로 영국의 노동계급은 18년간의 보수당 집권기에 일련의 억압적인 노동입법에 의해 그 대부분의 활력을 잃었다. 원래 자원주의적 노사관계의 관행에 의존했던 노동조합은 국가의 억압을 받으면서 무력하게 변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넘어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지만, 신보수주의 개혁과 함께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조직노동운동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전의 활력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노동시장, 노동과정, 기업조직 등 생산과 관련된 모든 영역들이 유연화 과정을 밟고 있고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에 노동시장 및 노동과정의 유연화는 노조의 참여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제 기업들은 작업장 노사관계에서도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인적자원관리(HRM)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연화 과정을 급속하게 추진한 영국은 일시적으로 경제 회복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실 영국의 거대기업들의 일부는 구조조정, 생산과정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힘입어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을 인적자원관리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한 장기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을 내릴 수 없다.

오늘날 영국의 기업사회에서는 이른바 ‘유연한 회사(flexible firm)’의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이 모델의 중심노동자는 고임금과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받는다. 그들은 숙련된 매니저․디자이너․판매담당․숙련기술자로 구성된다. 그들은 고용주의 목표와 자신의 목표를 일치시킨다. 그들은 유연한 기능의 소유자이다. 달리 말하면 기술변화와 새로운 작업조직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중심노동자는 개별적인 지위와 보수체계를 가진다. 그들 주위에 회사에 직접 고용되는 제1 주변집단이 포진한다. 그들은 서기, 감독, 집합적인 작업에 필요한 반숙련 노동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외부는 제2의 주변집단인 파트타임 노동자와 단기계약자들이 둘러싸고 있다.51)

이것은 음울하고 비관적인 풍경화이다. 그리고 이 음울한 풍경화는 비단 영국의 노동계급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혁신과 정보통신혁명이 가속화하면서,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의 유연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소수의 중심노동자와 다수의 주변노동자로 분화하는 이러한 상황은 노동의 위축과 함께 전통적인 노동의 개념 또한 바꾸고 있다. 이 비관적인 노동의 미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이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과제이다.


/Abstract/


British Society and the Working Classes since 1945: A Social-Historical Survey


Lee, Young-Suk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British working classes have changed since the Second World War. Between 1950 and 1970, the British people experienced continuous economic growth and enjoyed a high standard of living. But the rate of British economic growth was not as high as in rival countries.

Economic growth and the extension of the social welfare system especially in the 1950s and 1960s enabled the British working classes to enjoy sustained employment and a higher standard of living than pre-war generations. In the process they lost their self-identity. This tendency which had appeared already between the two world wars, was accelerated by the improvement of housing, health and education systems in the 1960s.

We can see a general mood of respect for negotiation and policy making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trade unions in this affluent age. The politics of productivity meant a system of corporatism. But it is said that the British system of corporatism was weaker than that of West Germany or northern European countries. Negotiation between capital and labour was conducted not so much through national organizations as through shop stewards in each workshop. 

The sustained employment and negotiating power, which the working classes had acquired in this affluent age, declined rapidly in the 1970s. This was called “the age of the long slump.” The working classes experienced high unemployment and a declining standard of living. The conservative government attacked the traditional trade unions which had developed themselves on the basis of voluntarism. The possibilities of an organized labour movement became obscure to workers. British workers could not cope with the new trends of flexibilization in labour processes and labour markets which companies have been promoting under the name of ‘productivity’ or ‘efficiency’ since the 1980s.

 
제삼노총(cadline)

한국민주노동조합총동맹 창립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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