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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씨가 동막골에 밀리는 이유

돈 많이 들겠다.

동막골 디비디 나오면 사야쥐

박찬욱 감독 복수 삼부작 디비디 박스 셑 나오면 사야쥐...

 

금자씨 처럼 하고 싶다니까!!!

 

금자씨가 동막골에 밀리는 이유
<친절한 금자씨> VS <웰컴투 동막골>
텍스트만보기   김헌식(codess) 기자   
애초에 <웰컴투 동막골>에 더 눈이 갈 것이다라는 지적은 단지 <웰컴투 동막골>이 이미 연극 무대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검증'된 작품이라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웰컴투 동막골>은 < JSA >이후의 '남북 화해 코드' 영화라는 점, 강한 ‘유쾌 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독창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예술적 영상미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하면 다른 몇 가지 점이 흡입력을 지닌다.

복수 VS 화해

▲ <웰컴투 동막골> 포스터
ⓒ2005 필름있수다
만약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복수를 꿈꾼다면 <웰컴투 동막골>에서는 처절한 복수가 무수하게 진행될 듯싶다. 서로 간 증오와 미움으로 총부리와 수류탄을 겨누는 초반의 현실감 있는 긴장은 화해와 웃음의 공동체성으로 맺어진다. 더구나 남북 연합군이라는 개념 설정은 이전 남북화해 코드 영화에는 볼 수 없었던 점이다. 시선은 다자적이면서 통합적이다.

서로 가진 마음의 짐을 풀어주려 한다. 이는 <친절한 금자씨>가 보이는 미움, 분열과 복수의 연속성에 약간씩 어색하게 버무려지는 웃음의 파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시선은 내레이션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금자씨의 눈에 맞추어진다. 내레이션은 금자씨 일방 독주의 가치관에 간혹 브레이크를 걸어 균형성을 회복하려는 장치에 머문다. 철저하게 냉혹해지려는 금자씨의 위장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하고 속죄의 복수는 마음에 버겁기만 하다.

응징 VS 희생

<친절한 금자씨>는 절대악으로 설정된 인물을 속죄의식이라는 명분을 갖고 응징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절대악 백 선생에 대한 복수는 그의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악행 캐릭터를 통해 응징의 명분을 더 강화시킨다. 아울러 그의 비디오 테이프는 유괴되어 죽은 부모들의 복수심을 불러일으켜 복수를 더 정당화한다.

<웰컴투 동막골>에서 표현철(신하균 분)과 리수화(정재영 분) 등은 폭격의 위험에 처한 마을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한다. 결국 자신만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데 전력한다. 죽음 앞에 너무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이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 대한 처절한 ‘복수’보다는 다른 이들을 위한 ‘희생’이 도드라진다.

우울 VS 밝음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과는 마찬가지로 어둡고 음울하다. 복수의 완결이 반드시 어둡고 음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역시 박찬욱 감독은 우울의 미장센에 무게를 두었다. 이것을 불식하기 위해 희극적인 말들, "너나 잘 하세요"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웰컴투 동막골>은 일단 밝다. 문제는 상황이다. 영화에서 웃음이 만들어지는 상황은 평상 위 마을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긴장된 순간조차 유쾌하고 밝게 만들어 버린다. 단순한 말에 따른 우스개는 순간적 웃음을 짓게 하고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상황 설정의 희극성은 깊은 여운을 주는 법이고 기억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도시 VS 시골

강원도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대나무 자생 북방한계선을 생각할 때 산골에 왕대나무가 자생하는 설정이 이상한 <웰컴투 동막골>은 어쨌든 강원도 산골이 무대다. 사람이 그리운 곳,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푸근한 곳이다.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지만 사람과 자연에게는 열려 있다.

<친절한 금자씨>의 배경은 도시다.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곳. 그러나 서로 자신 안에 갇혀 있다. 사람을 미워하는 곳, 낯선 사람을 피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곳이다. 오히려 서로 친절하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복수는 이루어내지만 그 안에 갇혔다. 언제나 사람들은 시골의 아름답고 친절한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러한 이들이 어울려 사는 곳을 향수한다.

영악한 이영애 VS 천진한 강혜정

▲ <친절한 금자씨> 포스터
ⓒ2005 모호필름
금자씨의 눈 화장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이다.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냉혹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라이히가 말하는 성격 갑옷을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럴 때 순수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감옥의 13년 세월을 사람들을 포섭하고 작전에 도움이 되는 장치들로 활용하는 금자씨(이영애 분)는 순수한 당당녀라기보다는 상처받은 영악한 캐릭터다.

<웰컴투 동막골>은 문근영의 순수성을 뛰어넘어 여일(강혜정 분)을 아예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에서 미친 사람이란 정신 이상으로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맑게 하는 사람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서 여일은 오히려 이데올로기나 긴장, 대결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현실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사람이 스러져 가기만 한다는 점을 영화는 강혜정의 운명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몇 가지

<웰컴투 동막골>은 화해의 모색을 통해 남북 분단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순화시키려 하지만 영화적 쇼크를 주지는 않는다. 독창성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데 명장면이라는 옥수수가 터지는 장면이나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천진한 웃음들이 지나치게 낭만적이어서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아울러 이 영화는 여전히 도시인의 타자적인 시선이 강하다. 사람들은 너무나 순수하게만 그려지고 그들의 내면들은 역시 모두 박제화 되는 셈이다. 도시인들이 대부분 영화를 본다고 할 때 이점에서 벗어나서는 흥행에 힘들다는 게 흥행 공식이라면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도식화된 화해와 갈등의 봉합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선과 악이라는 절대 구분으로 오대수(최민식 분)라는 상대적 악인을 통한 <올드 보이>식 휴머니즘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점이 현실적일 수 있다. 다만, 대중문화 흐름을 거스르는 시도였다. 이는 거꾸로 예술적 전복성으로 볼 수도 있다. 예술적 전복성은 대중과 같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에서 다만, <올드보이>의 흥행의 중요한 한 개의 요소를 간과하는 선택이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의 장면에서 영화적 쇼크를 <올드 보이>보다는 덜 추구한다. 오히려 색의 배합을 통해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점은 매우 새로운 시도들로 보인다. 하지만 이점들을 따라가기에 사람의 눈은 쉽게 피로를 느낀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복수나 그것의 영화적 논리와 정당화의 코드보다는 화해와 밝음, 단순성의 순수함, 그리고 이를 연결해주는 유쾌함에 더 목말라 있는지 모른다.
gonews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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