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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
  정운영선생 추모…아카데미즘-저널리즘의 조화도
  2005-09-25 오후 5:46:01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림잡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인데,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지난 봄에 뵈었을 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냥 잔병치레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갑자기 그런 말씀을 듣고 불안했지만, 추석쯤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니 그때 다시 의논하자고 덧붙이신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추석을 넘기고도 퇴원하지 못하신 선생을 다시 찾아뵈니 힘겹게 단 두 마디 말씀만 하셨다. "돌아가야겠어." "이승에서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진가봐." 내일 다시 찾아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그 '내일' 아침에 훌쩍 떠나셨다.
  
  어느덧 나도 50줄에 접어들고 보니 사람이란 결코 단순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나름대로 몇 가지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경우처럼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조화시킨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일반 시민들은 한겨레나 중앙일보에 실린 그의 칼럼이나 그가 사회를 보던 텔레비전 시사토론을 더 기억할 것이다. 하기야 1850년대의 마르크스에게도 저널리즘이 단지 호구지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나 정 선생이나 모두 경제학자로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1944년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북중학교와 온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셨다. 64학번으로 이른바 6·3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학부 '5학년'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하셨고, 1972년에는 한국일보사를 거쳐 중앙일보사에 잠시 몸을 담기도 하셨다. 대학원 시절 상대와 문리대 후배들을 아우르는 한국사회연구회(한사)를 조직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데, 아직도 노동운동의 일각을 지키고 있는 김승호 선배는 선생이 아끼시던 한사 구성원 중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가톨릭 노동사목이나 학생운동과도 관련이 깊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얻게 되었다. 1973년 루뱅에 도착한 선생은 학부 과정부터 경제학 공부를 새로 시작했고, 1981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 중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피아노 전공인 박양선 여사와 결혼하신 선생은 유학 중에 유경·유신 두 딸을 얻으셨다.
  
  학위를 끝낸 후 루뱅대학교 경제사회연구소에 남을 수도 있었던 선생은 귀국을 결심하셨다. 누구나 알다시피 5공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대 초는 너도나도 도피성 유학을 떠날 때였고, 학위를 끝낸 사람은 망명객을 자임하면서 귀국을 꺼릴 때였다. 그러나 1982년에 선생은 영국과 서독에서 학위를 끝낸 김수행·박영호 두 선생과 함께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부임하셨다. 1984년에는 나도 이영훈·강남훈 교수와 함께 경상학부 교수로 초빙되어, 선생과의 인연도 그때쯤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창설된 한신대학교 경상학부는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가. 1986년 말 학내 민주화 투쟁에 연루되어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해임되면서 한신대학교 경상학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선생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저널리즘에 몸을 담게 되었다. 박현채 선생의 선례에 따라 경제평론가를 자처하신 선생은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1988년부터 1990년대 내내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내셨다. 그때의 성과가 바로 1989년부터 매해 한 권씩 묶어낸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이다. 2002년까지 거의 격년에 한 권씩 나온 경제평론집은 모두 8권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1년에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변질을 고발하는 <중국경제 산책>을 쓰기도 하셨다.
  
  한신대학교에서 해임된 후에도 선생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셨다. 선생의 강의는 언제나 학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1987~89년에는 당시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였던 한국사회성격 논쟁의 이론적인 쟁점을 해명하기 위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4권을 편역하셨다. 이는 1984년에 나온 2권의 편저 <한국자본주의론> 및 <세계자본주의론>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1992-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의 변화를 향한 계기로 삼자는 취지로 시작된 동인지 <이론>의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기도 하셨다.
  
  <노동가치이론 연구>가 출판된 것도 바로 1993년이었는데, 이윤율 저하를 통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자본주의를 분석한 박사 논문을 중심으로 <자본> 전체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한 이 책은 아직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문헌으로 남아 있다.
  
  1997년 <이론>이 폐간되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게다가 서울대와 고대의 강의도 없어지면서 선생은 부쩍 쓸쓸해 하시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덕분에 산에서,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선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마냥 즐거운 일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노동가치이론 연구>의 후속작을 구상하여 2년 전쯤 원고를 거의 완성하셨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결국 출판이 미루어지고 말았는데, 아마 마지막까지도 못내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광대의 경제학자' 정운영 선생 24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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