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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

암살되지 않았으면...

이정도야 학자들에게 기본이지

 

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
[전격인터뷰] “‘6·25는 통일전쟁” 강정구 교수 심경 토로
이본영 기자 이정아 기자
▲ 강정구
[관련기사]
“6·25는 통일전쟁” 등의 글이 문제가 돼 보수언론의 집중표적이 된 데 이어 구속 위기에까지 몰린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과 심경을 털어놨다.

강 교수 입장은 한마디로 “분단과 전쟁의 한국 현대사를 학술적으로 접근하는데, (보수언론과 수사기관 등이) 자꾸 오늘날의 기준에서 몰역사적인 결과론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체제를 편들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분단체제가 다행스런 것일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의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한 접근은 어디까지나 당시 상황의 객관적 전개에 기반한 것이지, 오늘날의 북한 체제를 추켜세우려는 데 본뜻이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11일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1시간30분간의 인터뷰에서 던져진 비판적 관점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논리를 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북한 입장에서든, 남한 입장에서든, 유엔군 입장에서든 통일전쟁”

-최근 보수언론이나 수사기관이 문제삼는 여러 문장이나 발언 중 대표적인 것이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통일을 지상 과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북한이 선제공격해 일어난 한국전쟁을 합리화한다는 인상을 주는 면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6·25가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거나 나쁜 것이라는 가치평가가 아니다. 전쟁 전에도 북한은 민주기지론, 남한은 북진통일론을 주창하며 무력통일을 추구했다. 유엔은 1950년 10월7일 총회결의안을 통해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추인하면서 “한반도에서 통일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북한 입장에서든, 남한 입장에서든, 유엔군 입장에서든 통일전쟁이었다는 얘기다. 그것을 북한 식의 사회주의적인 통일을 하자는 주장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렇게 뻔한 얘기를 가지고 사법처리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주류 종이신문이 그렇게 몰고 가서 그렇지, 과연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충격적인 표현인지 의문이다.




“학문한다는 진중권씨의 부화뇌동에 ‘미쳤구먼’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한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전쟁론’을 언급하며 강 교수를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고 했다.
=진씨는 진보적인 사람으로 분류되는데, 그런 역사적 서술을 전쟁하자는 의도의 표현으로 둔갑시켰다. 극우진영의 색깔몰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학문한다는 그가 그러는 것을 보고 “미쳤구만”이라고 해 줬다.

-맥아더가 있어서 남한체제가 유지됐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강 교수가 그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나.
=맥아더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고 인정한다. 처음엔 ‘생명 박탈자’로 묘사하려 했는데, ‘은인’과 대비되는 말을 찾다보니 ‘원수’가 떠오른 것이다. 마침 맥아더 동상 허물기 논란이 일어, 60년 동안 구세주이고 생명의 은인이라고만 생각해 온 그를 재평가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했다. 논쟁을 통해 맥아더에 대한 ‘은인론’, ‘구세주론’, ‘영웅론’을 검증하자는 거였다. 그러자면 점령사령관으로서의 역할, 이승만과의 관계 등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 달 안에 전쟁이 끝났을 것이고, 사망자는 1만명 이하였을 것이다. 미국의 대량살상무기와 민간인학살이 겹치면서 사망자가 400만명에 달했다. 맥아더가 모든 한국인들한테 원수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사망자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맥아더를 원수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

▲ `한국전쟁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 발언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강정구 동국대 교수 지난 4일 오전 옥인동 보안분실앞에서 3차 소환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제자들이 선물한 엽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연합)
-그렇다고 전쟁의 숱한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을 맥아더한테만 지우는 것은 적절치 않고, 오히려 북한이 침공을 하지 않았거나,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줄었을 것이라는 반박도 가능하지 않나.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났어야 좋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국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표현했지, 모든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맥아더를 논하다 보니까 미국 부분이 강조된 것이다. 중국의 책임을 따질 기회가 되면 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북한의 얼굴을 그리라고 해서 얼굴을 그렸더니, 왜 주체사상이나 개인독재 같은 발바닥은 안그리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을 비판했다고 해서 중국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

-강 교수의 입장은 한국전쟁은 1948년 이후부터 진행된 남한 내 내전의 연장이라는 이른바 수정주의적 시각인가.
=꼭 무슨 시각을 들지 않더라도, 당시 역사가 그렇게 전개됐다. 1948년 2월 이후 1950년 6월24일까지 남한의 내전 과정에서 10만명이 죽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에서, 지리산과 오대산에서, 또 38선에서 전투가 계속됐다. 난 한국전쟁이 1948년에 시작됐고, 6·25는 그런 한국전쟁의 부분집합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강 교수는 인터넷매체 기고문에서, 해방 직후 고압적인 내용의 맥아더 명의 포고문과 소련군 치스챠코프 장군의 포고문을 비교하며 미군의 점령군적 성격을 강조했다.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는 포고문을 가지고 당시 한반도 주둔군의 성격을 재단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은가.
=소련군도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본다. 미국은 직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소련은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줬다는 차이가 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동유럽에서 그랬듯, 그냥 조선인들한테 맡겨도 사회주의로 가니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외세척결이 제일의 과제였다는 점에서, 미군이나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곧바로 철수했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소련 개입안했으면 김일성집권도 불가능…여운형 집권했을 것”

-해방공간이나 한국전쟁에서 미국이나 맥아더의 개입이 없었다면 결국 김일성이 지도하는 북한체제가 남한을 삼켰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가정 아닌가.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운형 선생이 집권했을 것으로 나는 본다. 또 해방정국에는 김구 선생도 있었고, 김규식이나 안재홍 등 중도파들도 있었다. 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연립정권 형태의 정치체제를 향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해방 후 남한 민중의 77%가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게 당연했다는 논리 역시 지금의 일반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지 않나.
=1946년 미국무성과 미군정의 보고서 등은 여론조사 결과 등을 근거로 “조선은 공산화되기 쉬운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부분은 1988년 강만길 교수의 논문에 나온 것을 내가 89년에 재인용한 것이다. 만약 외세개입이 없고 조선사회가 스스로 결정했다면, 인민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근거들 중 하나를 거론한 것 뿐이다. 어떤 신문은 사회주의 지지가 70%고, 공산주의 지지는 7% 뿐이라고 반박했는데,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공산주의가 탄압받는 분위기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해도 사회주의라고 답했을 수도 있다. 그게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조선 사람들이 원하는 식으로 했어야 한다는 게 내 시각이다. 그런 시각을 오늘날의 기준을 적용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몰역사적 결과론이다. 민주적 기준으로 봐서 다수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지, 지금 기준으로 잘됐다거나 잘못됐다고 한 게 아니다. 어제(10일) <미국의 소리>와 인터뷰하며, “만약 당시 여론조사 결과대로 갔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나쁜 것이 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지식인으로서의 내 성격상 입도 뻥긋하기 힘든 북한체제가 더 힘겨울 것이다.

“해방공간 여론대로 갔다면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 나빴을 것”
“지식인으로 입뻥긋하기 힘든 북한체제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부분을 묻겠다. 한 신문에서는 강 교수의 부인을 인터뷰해 큰아들이 미국에서 법률회사에 다니고 있고, 작은아들은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쳤다고 보도했는데.
=반미하는 사람이 미국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식의 생각으로, 참 한심한 얘기다. 그렇다면 내가 미국에서 유학한 것부터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인터넷에는 심지어 내가 (사실과는 다르게) 타워팰리스에 산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집사람과 함께 유학생활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란 큰아들은 내가 육군에 가라고 해서 육군으로 복무했다. 그러고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녔는데, 미국은 로스쿨을 다니는 과정에서 직장을 잡기 때문에 미국 회사에 취직했다. 작은아들도 큰아들처럼 군복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유학 등의 사정으로 부모와 오래 떨어져 살아 그런지,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다. 집사람은 그런 애가 적응을 잘 못해 사고를 당할까봐 카투사로 보내려고 했다. 나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집사람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강 교수는 현재의 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보는가.
=점령군은 아니지만,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실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작은아들 일은 부끄럽다.

“논문에 통일한국 체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여야 한다고 썼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강 교수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한 뒤 ‘반시장경제적’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게 취업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동국대나 동국대 학생들이 도마에 오른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람이 내 강의를 들어봤는가? 파쇼적인 얘기다. 나는 1998년 학술지 <경제와 사회>에 게재한 논문 ‘4월혁명과 자주·민주·통일의 과제’에서 “통일된 한국의 사회경제체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돼야 한다”고 썼다. 좋아하든 않든, 이미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또 북한도 개혁·개방으로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번 논란에 대한 심경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이런 시련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에 쓴 글은 지탄의 대상은 될지언정 사법적 잣대가 동원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이제는 소모적이고 과거지향적인 게 아니라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진통이 필요하지 않나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시급하다. <한겨레> 글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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