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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친절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이다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텍스트만보기   정민호(hynews20) 기자   
천만 관객 시대가 알려주듯 영화는 이제 국민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 어느 때보다 영화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진 때가 오늘이다. 더군다나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나타난 영화가 아니더라도 비디오나 TV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영화들까지 생각한다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국민의 문화행위 중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2005 효형출판
그런데 이러한 문화행위는 어느 정도나 그 값어치를 해내고 있을까? 양적인 팽창과 달리 질적으로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소도구적인 역할로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보고 난 뒤에 곧바로 잊게 되는 무의미한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이왕주, 그 역시 이러한 의문을 품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의문을 품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분야인 철학을 살려 영화들을 한 단계 높은 단계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영화와 철학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는데 그리하여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가 등장하게 됐다.

<디아더스>는 푸코, <친절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영화들을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여겨지는 철학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디 아더스>는 푸코의 것으로, <친철한 금자씨>는 들뢰즈의 것으로, <슈렉>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는 칸트의 것으로, <피아노>는 에리히 프롬의 것으로, <북경자전거>는 하이데거의 것으로 해석하는 등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철학을 만나고 철학을 말하면서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영화와 철학의 만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가령 지은이는 <북경자전거>에서 하이데거의 이름을 찾아내는데 그 근거는 '부숴질 수는 있으나 패배할 수는 없는 자', 즉 '존재'라는 개념이 영화 속에 우뚝 솟아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대하는 지안과 구웨이의 서로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에서 자전거를 다루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속 주인공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구웨이가 자전거에 달려드는 그것은 자기 세계의 주인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강한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물론 구웨이를 욕하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자전거에 보이는 그의 병적인 집착 그리고 한갓 도구인 자전거를 부순다고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돌로 해치는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물건과 생명은 그렇게 단순하게 부를 수 있는 고정된 명칭이 아니다. 생명 같은 물건이 있는가 하면 물건 같은 생명이 있다. 혹은 소유물로 위장된 존재가 있고, 존재로 위장된 소유물이 있다. 영웅은 먼저 그것을 준별하는 눈을 가진 자요, 또한 그것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용기를 가진 자를 말한다. 영화에거 구웨이는 그런 눈과 용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문' 중에서

또 다른 영화 <디 아더스>에서는 푸코의 이름이 등장한다. <디 아더스>는 깜짝 놀랄 반전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 반전을 만들고 가능케 했던 일련의 서사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느 영화에서나 나와 타자의 관계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그것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디 아더스>는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보는 가치관에서 벗어나 '타자로 전락해 버린 나'를 다룸으로써 흥미로운 사실들을 제공해할 수 있었는데 이것에 대한 메시지들 또한 자연스럽게 푸코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다.

<나비>에서는 '니체'이름 등장

마찬가지로 <트루먼 쇼>는 안주를 넘어서 떠나려는 열망을 표출하는 유목민의 갈 길을 다루기에 들뢰즈의 이름이 등장하고, <나비>는 삶의 시간을 과거나 미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서 찾는 것임을 보여주기에 '니체'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최상의 조건에서도 안나는 낙태를 선택했으나 최악의 조건에서도 유키는 분만을 선택했다. 한때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때로 진저리치며 잊고 싶은 기억들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까지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 사상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본문'중에서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의 이러한 과정들은 낯설면서도 대단히 흥미롭다. 영화가 인생살이를 말하고 철학 또한 인생살이를 기본 바탕으로 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공통분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와 철학의 만남은 전문가들을 넘어 대중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허나 이왕주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영화와 철학, 그 절묘한 만남으로 영화를 보는 문화행위에 지적유희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 철학은 목적 그대로 인생사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는 영화와 철학, 모두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철학과 영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까지 지적유희를 가능케하고 있다. 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장 친근한 문화행위를 통해 효과적으로 설명했으며, 가장 친근한 문화행위를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니 그 즐거움을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품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언급한 영화들로 시작하거나, 또한 책에서 지은이가 언급한 철학도서들로 시작한다면 강물에 몸을 맡기듯 그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으리라.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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