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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41년 감옥생활은 '가혹했다'?

우리와는 멀리만한 프랑스 선진국이다. 경제대국만이 아닌...

 

 

그에게 41년 감옥생활은 '가혹했다'?
[해외리포트] 프랑스 전대미문 아동살해범 뤼시앙 레제 출소 '파문'
텍스트만보기   박영신(jocaste) 기자   
"나는 충분히 죄를 뉘우쳤다. 사회로 돌아가면 건실한 소시민으로 살 것이다."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관들 앞에 선 무기수 레드. 하지만 간절한 호소에도 그의 요청은 번번이 묵살된다. 그렇게 40년이 흐른 어느 날, 이제는 자유에 대한 의지도, 어쩌면 삶에 대한 희망마저도 가물가물한 모습으로 심사관을 마주한 레드.

그에겐 더 이상 이들을 설득할 의지도 희망도 없다. 그 순간 레드의 서류에 힘차게 찍히는 도장, 가·석·방! 영화 <쇼생크 탈출>(1995, 프랭크 다라본트)의 한 장면이다.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던 이 영화에서 무기수 레드를 연기한 것은 실력파 배우 모건 프리만이었다.

이제 현실의 레드가 감옥에서 출감했다. 현실의 레드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은 41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통틀어 최장기수로 알려진 뤼시앙 레제(68)는 1964년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전대미문의 아동살해범이다.

유럽 최장기수 41년만에 출소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 프랑스 최장기수 뤼시앙 레제의 출소를 전하는 <프랑스2> TV.
지난 3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간, 결코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두터운 철문이 열렸다. 뤼시앙 레제가 장장 41년만에 감옥 밖의 공기를 호흡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철창 밖 레제를 맞이한 것은 경찰의 철통감시 아래 허용된 1개의 TV채널과 1개의 일간지가 전부였다. 여론의 동요를 우려한 불가피한 조처이기도 했지만 '조용히 세상으로 복귀하고자' 한 레제의 주문이기도 했다.

1984년부터 레제의 옥바라지를 도맡아온 뤼시앙 베르나르의 자동차가 나타났고 레제가 올라탔지만 밖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종이상자와 가구들로 채워진 베르나르의 자동차 속에 레제도 가구 일부처럼 몸을 숨겨야 했던 것이다. 입양한 5명을 비롯 총 8명의 자녀를 키워낸 전직 제빵사 베르나르의 자동차가 향한 곳은 프랑스 북부 인구 2400명의 작은 마을 랑다. 여기서 레제는 베르나르 부부와 함께 기거하며 지역 적십자센터의 자원봉사자로 활동, 극빈자들을 위해 음식물과 옷가지들을 배급하게 된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TV채널 <엘쎄이(LCI)>의 카메라를 통해 전파된 레제의 첫 마디였다. "나와 감옥 사이에 차이는 없다"거나 "자유와 나는 같은 것"이라는 등 냉소적인 선문답으로 일관한 레제의 자기애적 태도는 41년의 긴 세월에도 녹슬지 않은 듯 보였다.

41년 전 레제의 손에 죽어간 어린 뤽의 어머니 수잔 타롱은 그의 석방에 유감을 표하기는 했으나 최대한 말을 아꼈다. "종신형 선고는 거짓말이었나?" 레제 석방 며칠 전 <프랑스2> TV를 통해 정부 당국을 원망하는데 그친 수잔 타롱은 그러나 레제가 혹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저서를 출판하는 일만은 막아줄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1979년부터 석방청원 자격을 갖게 된 레제는 지금까지 13차례의 가석방, 3차례의 대통령 사면청원을 법원에 제출했으나 매번 기각됐다. 올해 7월 다시 14번째 석방청원 제기. 마침내 지난 8월 31일 두에 관할 법원이 조건부 석방을 결정함으로써 사회의 공기를 호흡하게 됐다. 그러나 앞으로 10년간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거주지역인 빠 드 깔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등 까다로운 규율을 따라야 한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저니 홀리데이가 한창 인기를 끌었다는 게 레제가 기억하는 프랑스의 전부였다. 레제가 복역하는 동안 프랑스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었고 17명의 총리가 내각을 거쳐 갔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아동 살해범들이 교도소로 흘러들었고 상당수가 20여년의 복역을 마친 뒤 출감했다. 그렇다면 레제의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41년 전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동살해, 그리고 39일간의 숨바꼭질

1964년 5월 27일 이른 아침 프랑스 에손 지방의 베리에르 숲에서 어린 아이의 사체가 발견됐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파리 8구 경찰서로 이브 타롱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의 11살 된 아들 뤽이 실종됐다고 신고했다. 실종된 아이와 발견된 사체의 인상착의는 정확히 일치했다.

이어 그날 저녁 익명의 전화 한 통이 라디오 <유럽1>의 데스크로 걸려왔다. 마리냥 3가에 세워진 자동차 앞창에 끼워둔 쪽지를 회수하라는 것이었다. "베리에르숲 사건. 뤽의 아버지가 아이의 몸값을 거절했고 오전 3시에 나는 아이의 목을 졸랐다. 이것은 다음 유괴를 위한 경고다. 몸값 아니면 죽음!"

다음날인 28일 <아에프페(AFP)> 통신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뤽의 유괴범이다.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정보를 준다…." 그 정보는 뤽의 웃옷을 버린 장소였다.

이같은 쪽지는 6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 라디오로, 신문으로, 경찰서로 심지어 내무부로까지 무차별적으로 배포됐다. 차례로 순번이 매겨진 쪽지의 발신자는 'XXX'였다.

6월 2일, 뤽의 장례식에 분산 배치된 경찰은 장례식 참가자들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했다. "장례식은 완벽했다. 참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다음날 경찰을 비웃듯 도착한 새로운 쪽지, 그리고 이때부터 'XXX'라는 발신자 서명은 '교살자'로 바뀌었다.

지하철역 벤치나 파리교통공사(RATP)의 분실물 보관소 등이 교살자가 애용한 '숨바꼭질'의 주무대였다. 신문 전단지에 끼워진 '벅스 버니의 모험' 광고에서는 손으로 직접 휘갈겨 쓴 글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신병원 간호사 뤼시앙 레제가 범인이다!

▲ 프랑스 최장기수 뤼시앙 레제의 출소를 전하는TF1 TV.
"정면을 보고 후두 부분을 엄지손가락 두 개로 누르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나는 뒤에서 단지 손가락 네 개만으로 목을 졸랐다. 시간이 좀더 걸렸다."

대다수 언론의 1면을 장식하기 시작한 '교살자'는 점차 '썩어빠진 사회'를 힐난하거나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가 행한 고문 등을 고발하는 등 까탈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거나 혹은 이미 저질렀다고 협박하는 '교살자'의 쪽지 내용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6월 10일자 쪽지는 뤽의 아버지 이브 타롱을 겨냥했다.

"고통스러운 사실을 상세히 알려주마. 아이의 목을 조르다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손가락에 쥐가 났기 때문이다." '교살자'는 자신이 주도하는 숨바꼭질을 '술래'가 따라잡지 못한다며 간혹 역정을 부리기도 했다. 쪽지가 발견되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6월 26일, 뤼시앙 레제라는 이름을 가진 빌주이프의 정신병원 간호사 한 사람이 자동차를 도난당했다며 파리 앵발리드 경찰서에 모습을 드러낸다. 7월 1일 다시 경찰서를 찾은 남자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자동차를 되찾았다고 했다. 같은 날 저녁 '교살자'는 <라디오-뤽상부르>에 전화를 걸어 피갈에서 죽은 부랑자의 사체를 처치하기 위해 '뤼시앙 레제라는 사람의 자동차를 훔친 것은 본인'이라고 밝힌다.

그로부터 5일 뒤 프랑스 최대 석간신문 <프랑스수아르>에 도난당했다던 자동차를 운전하는 뤼시앙 레제의 사진이 긴 인터뷰와 함께 실리고 경찰은 이 미심쩍은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 즉시 가택수색에 돌입한다. 그들이 레제의 아파트에서 발견한 것은 벽에 도배된 '교살자' 관련 신문 기사들이었다.

같은 날, 밤을 새워 경찰의 취조를 받은 레제는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자백하기에 이르렀으나 11개월 뒤 생각을 바꾼다. 1966년 5월 3일 성난 군중이 '사형'을 외치며 법원을 에워싼 가운데 처음 열린 재판에서 레제는 '교살자' 명의의 쪽지를 본인이 쓴 것은 맞지만 뤽 타롱의 죽음과 자신은 무관함을 주장한 것.

"나는 가증스럽고 추악한 소설의 인물을 창조했을 뿐이다."재판이 진행된 5일 동안 레제의 주장은 횡설수설로 일관했고 전문가들이 그의 정신장애를 진단함으로써 사형판결에서는 비껴갔다. 1966년 5월 7일 레제에게 떨어진 것은 종신형이었다. 이날 프랑스의 언론은 '레제, 목숨은 건졌다'고 썼다. 레제의 나이 27세였다.

뤽의 아버지 이브 타롱은 1980년대 초 <파리마치>를 통해 '내가 곧 법'이라며 레제가 출소하면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경고하며 별렀으나 2001년 이브 타롱도 아들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이로써 '교살자'는 프랑스인의 머리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듯했다.

41년 후... 레제의 출소가 불러온 '장기복역' 논란

그러나 레제는 지난 3일 41년만에 세상으로 복귀했다. 41년이라는 세월은 41년 전에 레제가 저질렀던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보다 그가 '갇힌 채' 지내야 했던 오랜 시간을 더 많이 상기시키며 또 한번 세상을 흔들고 있다.

지난 4월 레제의 변호사 드펠리스는 유럽인권재판소에 프랑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한 사람을 40년 이상 감옥에 가둬두는 '국가의 비인간성'에 정면 도전한 것. 드펠리스는 종신형 장기 복역자들을 '느린 죽음'의 희생자로 규정하며 2001년 10월 26일자 일간지 <르몽드>를 통해 아래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인권국가를 자처하는 프랑스가 사형제도를 폐지한 것은 1981년의 일이다. 사회보호의 미명 아래 필요 이상으로 형벌을 가한다거나 속죄의 수단으로서 사형제도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연구가 뒷받침됐고 국가에 살인면허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의 범죄를 합법화는 도구라는 인식,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오판, 많은 경우 사형집행이 정치적으로 이용돼 온 점 등 사형제도는 실질적으로 보호해야 할 생명의 존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한 이후 이제는 종신형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느린 죽음'이라 불러도 무방할 종신형은 사회로부터 한 개인의 생명을 제거하고 구석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가 지난 5월 1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2000년 이후 평균 20년을 복역한 20여 명의 종신형 장기수들이 매년 출감하고 있다.

1995~2005년 사이 실시된 같은 조사를 보면 프랑스 장기 수형자들의 수감기간은 80년대 말부터 평균 3년이 늘었다. 같은 기간 조건부 석방, 사면, 만기출소 등으로 석방된 사람들의 3분의 2는 20년 이하의 징역을 살았고 나머지는 그 이상이었다. 프랑스에서 종신형으로 복역하는 수감자는 현재 562명이며 그중 131명이 복역한 지 20년 이상된 사람들이다. 이들 131명 중 17명은 30년 혹은 그 이상 감옥에 갇혀 있다.

'종신형 폐지' '최고 30년형과 조건부 석방' 실현을 위해 싸우고 있는 국립과학연구소 범죄학자 피에르 투르니에는 "장기수들에게 출소는 '제2의 탄생'"이라며 "감옥은 실제 수형자들이 범한 죄보다 과한 벌을 가하고 있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범죄자들이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질 정도로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들이 출소할 시기가 되면 '현기증 없이 거리를 걷는 법, 두려움 없이 군중과 섞이는 법, 돈 쓰는 법, 먹는 법' 등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 투르니에는 "장기수들에게 출소는 한 마디로 '난폭한 충격'으로 어쩌면 진정한 형벌은 출소와 함께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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