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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하는 팔레스타인

뮈닉을 보고나서 압박

 

 

거꾸로 읽는 세계사 中 --- 유시민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


 

1972년 8월 26일, 제 20회 올림픽이 서독의 뮌헨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세계 인류의 대제전, 평화와 상호 친선의 큰 잔치는 처음 열흘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9월 5일, TV중계를 지켜 보던 세계 각국 국민들을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졌다.
검은 복면으로 몸을 감싼 무장 게릴라가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 둘을 사살하고 아홉 명을 인질삼아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그들은 '검은 9월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의 전사들이었다.
평화의 제전은 순식간에 팔레스타인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시온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증오와 투쟁의 무대로 돌변하였다.
게릴라들은 결국 모두 사살되고 말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인류 앞에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
9월 8일 이스라엘 공군은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이 사건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와 이스라엘 정부가 수없이 교환한 테러와 보복공격을 가장 명료하게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잊을 만하면 또다시 신문 외신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곤 했던 크고 작은 폭탄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은 본질적으로 이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며, 이스라엘과 인접 아랍국가 사이의 끊임없는 무력충돌 역시 같은 이유로 일어난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야말로 중동의 화약고이며, 그 화약고가 폭발할 때마다 기름으로 가득한 중동 일대에는 으레 화염이 치솟았다.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의 정치체계의 차이점과 각국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중동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명확히 이해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팔레스타인문제를 중심으로 복잡한 중동문제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시온주의와 유태민족주의

이스라엘 건국을 가져온 시온주의(Zionism)가 싹튼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사건의 폭풍우 속에서였다.
1896년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 군중의 반유태주의 폭동에 놀라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유태인 언론인이 있었다.
유럽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던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Teo Herzl)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유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음을 고백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끼리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순수 유태국가를 세울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에도 이같은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헤르즐의 책은 시온주의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어디에다 유태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검토한 끝에 유태인들이 2천년 가까이 떠나 살았던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시온(Zion)은 유태교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신앙심 깊은 유태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열정, 성서가 일깨우는 정감들, 게다가 유태교를 등진 유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민족적 전통들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이었다.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수상 베긴이 한 연설은 이같은 유태인의 열망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외국 사람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에 돌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과 이 땅(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 바로 이곳에서 우리듸 예언자들이 성스러운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들려 오며, 이 성벽(예루살렘의 성벽)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옛날 유태 나라의 임금님들과 이스라엘 임금님들이 이곳을 통치하셨습니다.
    ...... 이땅에서 폭력에 의해 쫓겨나 있던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도 이 땅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 시온으로 돌아온 것, 이 권리와 특권은 발포어선언에 의해 우리들에게 승인된 것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의 철폐를 포함하는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땅을 사 이민을 갔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무시했다.
이는 당시 유럽을 풍미한 철학 사조에 물든 탓이었다.
유럽인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없는 땅'처럼 여기고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유태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때,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 역시 같은 성격의 이념, 즉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실은 비록 시온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미 두 민족 사이에 던져진 크나큰 불행의 씨앗임에 분명했다.

1880년대에는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중 유태인은 2만5천이었으며 민족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에 열을 올려, 1914년에는 총인구 74만 가운데 유태인이 8만5천명으로 늘어났다.
아랍인들은 경계심을 품고서 터키 의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터키의 부패한 관료들은 단지 형식적인 이주 제한조치만을 취하면서 제몫을 챙겼을 뿐이다.
이같은 시점에서 터키가 독일의 편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자 팔레스타인 땅에는 회오리가 일어났다.

영국은 1915년 10월,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소위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의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메카의 수호자' 휴세인은 1916년 6월 5일을 기하여 스스로 아랍민족의 왕임을 자처했다.
그의 아들 파이잘과 영국인 T.E.로렌스가 이끈 베두인(사막 유목민) 부대는 신화적인 전투 끝에 터키군을 궤멸시키고 다마스커스에 입성했다.
그런데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내려고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발포어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사이에 던져진 불씨는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아랍민족을 배신했다.
통일 아랍국가를 세우려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열망과는 달리,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가 신탁통치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신턱통치하기로 마음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합국은 터키가 지배했던 아랍지역을 무려 20여 개의 식민지로 분할점령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리아왕 파이잘을 공격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했다.
영국은 발포어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반(反)시온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군의 비호를 받으며 이민을 계속한 유태인들은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가 시작되자 홍수처럼 밀려들어 1936년에는 총인구 150만 가운데 28%인 43만에 이르렀다.
더욱이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온 유태인들은 효율성이 높은 농업 정착촌과 협동조합, 각종 산업시설과 금융기관, 노동조합과 정당, 행정조직들을 활발하게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과격 시온주의자들은 비밀리에 군대조직까지 만들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했고, 영국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이같은 분쟁에 골머리를 썩이던 끝에 유태인의 수를 제한하고 팔레스타인을 유태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태인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 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건국인가 침략인가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예멘 등 아랍국가의 대표들이 카이로에 모여 아랍연맹을 결성하고 아랍민족의 상호협력과 결속을 다짐했지만 분쟁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다.
유태 비밀군대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제한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테러와 습격, 맹목적인 보복이 난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넌더리가 난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칸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 국제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이 없었고 영국은 무책임하게도 1948년 5월 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양측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이 반복된 몇 달간 이미 팔레스타인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유태인 특공대가 아랍인 마을에서 254명의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한 48년 5월 9일 사태는 전 아랍민족의 가슴에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1948년 5월 15일, 영국군은 마침내 골치 아픈 땅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는 아랍민족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국가들의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진 것이다.
유태 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사기가 높은 데다가 시온주의에 헌신적이었으며 무기 구입과 지원병 모집, 수송과 군사 전술 등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반면 아랍 해방군은 전투경험이 부족한 데다 장교들이 나태하고 부패한 탓으로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 합동작전을 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우세한 입장에서 휴전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 유태국가의 수립을 기정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일단 만족했다.
그러나 아랍민족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외래 식민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영토위에 수많은 동포를 쫓아내고 세운 국가라고 생각했다.
요르단에 46만, 이집토에 20만, 레바논에 12만, 시리아에 8만 등 거의 100만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침략자 이스라엘을 저주했다.
하루아침에 집과 농토와 생업을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길 없이 피난민 신세로 전락해 버린 자신들의 처지를 도저히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벤 구리온과 그가 속한 마파이당의 행정부와 의회를 수립하고 모든 유태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귀환법'을 제정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귀환 대열이 밀려들었다.
그 결과 전쟁 직전에 65만 유태인과 74만 아랍인이 거주하던 이스라엘 영토에는 1956년에 이르러 167만 유태인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아랍인은 겨우 2만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은 극히 간략하게 살펴본 이스라엘 건국사, 또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침략사이다.
이것이 건국사인가 아니면 침략사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주장만이 판을 쳤고 아랍의 처지를 옹호하는 의견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이같은 사태는 한국이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특히 외교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 여론은 결코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물론 유태민족이 2천년 동안이나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한 민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특히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그것을 방조하거나 적어도 방관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상당한 죄의식을 안겨 줄 정도였다.
유태인이 그같은 박해를 받아야 할 그 어떤 잘못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유태민족이 보든 박해를 저항하여 평등한 민족적 권리를 찾거나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세웠다.
과연 유태민족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그들 조상의 일부가 2천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말세가 되면 황금시대가 팔레스타인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는 유태쿄의 종말론적 예언이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유태인의 주관적 확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손을 퍼뜨리고 땅을 경작하면서 나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공동체를 가꾸어 온 것은 아랍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 종교의 메시아적 상상과 예언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은 어디까지나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시온주의자들은 자기의 불행한 처지와 고난에 대한 호소와 설득으로 협력을 구하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종교와 문화전통을 지켜 온 눈물겨운 과거와 그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 내게브 사막을 옥토로 가꾼 눈부신 업적과 나름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 아무리 몽매하고 그들의 정치체제가 아무리 낙후한 것일지라도,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랍민중이 나름의 민족 주체성에 눈떠 그것을 수호하려는 열망을 가진 20세기 중반에 유태인이 휘두른 무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시온주의는 유태민족주의와 같지 않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물리적인 힘으로 내쫓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천 년에 걸쳐 당해 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그 불행을 고스란히 떠넘기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치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전적으로 나쁜 짓이라고 단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국가 이스라엘이 밀물처럼 밀려든 이민자들을 먹여살기고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을 꺾어 자기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거의 전적으로 미국 유태인들이 보내준 성금과 미국 정부의 차관,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의 배상금에 힘입은 것이다.
물론 미국이 시온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은 아니지만, 개입과 간섭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던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이용했다. 때문에 아랍인들의 반(反)시온주의 항쟁은 반미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

팔레스타인문제는 중동 일대 아랍국가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통일 아랍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던 아랍민중은 이스라엘을 심장 깊숙히 들어와 박힌 제국주의 첨병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어느 나라의 지도자이든 이스라엘과 타협할 경우 민중의 저항에 부딪힐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아랍국가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유태국가의 토대를 더욱 튼튼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아랍 각국의 혁명세력은 국내의 지배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문제를 활용하려 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문제는 아랍 진영 내부갈등과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제 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전쟁은 이런 사정을 뚜렷이 드러냈다.
1952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혁명 4주년을 맞이하여 스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수에즈운하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자 격분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과 비밀협정을 맺어 수에즈운하를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갑자기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구과 프랑스군대가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의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토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이 막대한 경제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꾸었다.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다.

무기와 올리브나무 가지

이스라엘이 건국 초기에 부딪친 난관은 주로 인접 아랍국가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1964년부터는 새로운 사태와 마주하게 되었다.
1월에 열린 아랍 정상회담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5월 팔레스타인사람들을 대표로 하는 할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출현한 것이다.
아랍연맹은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PLO는 아랍 전역에 흩어진 난민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조직했다.
바야흐로 주변 아랍국가들의 시혜와 힘에 의지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이다.
그러나 PLO의 앞길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 군주국가인 아랍 나라들은 이스라엘과 정면충돌할까 두려워 PLO르ㅣ 군대를 자기 영토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집트, 시리아 만이 PLO를 지원했다.
지지부진한 PLO의 활동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몰래 소규모 테러조직을 만들어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기습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을 공격했다.
이같은 사태가 계속 심화되어 갔다.

제 3파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5일에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6일간의 전쟁에서 아랍연맹은 또다시 참패했고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PLO의 온건노선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을 비롯하여 수많은 급진적 게릴라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는 물론이요,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아랍세계의 수구(守舊) 집권층, 미국까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68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제3대 PLO의장으로 선출했다.
70년 9월에 아랍 민족주의와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가 암살됨으로써 PLO는 더욱 불리한 정세에 직면했다.
사회주의로 기울었던 나세르와는 달리 후임 대통령 사다트는 국유사업체를 민영화하고 미국에 접근하는 등 우경화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PFLP는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하여 이집트와 요르단의 사막에서 폭파했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던 요르단왕 후세인은 즉각 미제 전투기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게릴라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동족의 손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970년 9월의 일이다.
이같은 동족상잔을 기억하기 위해 좌익 게릴라들은 '검은 9월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뮌헨올림픽 선수촌 기습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 참패를 설욕하고 시나이 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걸고 1973년 10월 6일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그는 자기 군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아랍 민중의 정치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싶엇던 것이다.
이 전쟁을 팔레스타인문제를 전세계적 긴급문제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다름 아닌 석유 금수조치 때문이다.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토후국 연방 등 페르시아만 연안 여섯 나라는 석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했다.
이란을 제외한 다섯 나라는 석유 생산의 25%를 삭감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석유 자원을 무기삼아 서방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아랍의 힘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닉슨은 계속해서 하루 1천 톤씩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지만 아프리카와 유럽, 제3세계 나라들, 심지어 미국의 오른팔 일본까지도 재빨리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사다트는 3주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지안 몇십 년 동안 우리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벌인 결사적인 테러 행위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 난민촌 습격, 학살과 파괴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폭탄을 실은 트럭을 몰고 미군 숙소 건물에 뛰어드는 소녀 테러리스트의 행동은 세계인을 소름끼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75년 이후에는 35만 난민이 거주하는 레바논이 이스라엘 민병대와 게릴라의 군사충돌로 인해 무정부상태의 전쟁터로 변하였으며, 그 상태는 15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사다트는 1979년 3월에 미국의 카터대통령이 보증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대가로 시나이반도를 되돌려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찾아들지 않았다.
사다트는 아랍 미족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페르시아만을 두고 이란과 미국이 벌인 군사 충돌, 이라크의 쿠웨이크 침략으로 일어난 걸프전쟁 등 큼직한 사건 때문에 한동안 팔레스타인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듯 보였다.
1971년 1월 이슬람 승려 호메이니를 앞세우고, 미국정부와 석유 메이저의 앞잡이처럼 행동했던 팔레비를 몰아낸 이란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반미 민족혁명이었다.
그래서 미국정부는 이란 혁명정부에 이를갈며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심가 후세인은 미국 정부한테서 지원받은 무기를 들고 쿠웨이트를 집어삼켰다.
기르던 개한테 물린 꼴이 된 미국은 유엔연합군을 이끌고 들어가 이라크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세인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패전했지만 미국을 혐오하는 아랍 민중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보복이 두려워 자기 땅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내쫓은 아랍의 반동적 군주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과 같은 민족주의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나라 안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이 모든 비극은 본질적으로 시온주의자의 침략과 미국의 제국주의 간섭정책에 대한 아랍 민중의 거부에서 비롯되었다.
아랍민족의 바다위에 뜬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선지자가 예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수천년 살아온 고향이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운명과 그 땅에 정착한 시온주의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박해가 박해를 낳고 불행이 불행을 부르며 증오가 증오를 일으키고 테러와 보복학살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는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
분명한 것은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민족의 자결권과 그리고 고행을 되찾으려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것뿐이다.

1974년 11월 13일 팔레스타인 게릴라 차림으로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유엔총회 연단에 오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고와달라고 호소하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팔레스타인 인민의 자결을 위한 투쟁은 저세계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무력과 탄압에 의해 강제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비자발적 유배 상태는 종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토와 재산, 그리고 한 민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전세계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우리 자신의 고유한 영토 위에 민족 주권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호소합니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화해의 상징)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戰士)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는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PLO의 공식 대표로서, 또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한 지도자로서 현재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들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평등하게 살고자하는 유태인들에게 선언합니다. 내일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우리 모두의 희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들의 전망 속에 포함시킬 것입니다. ...... 우리들은 가장 관대한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 단일민주국가를 수립하여 우리 모두가 정의로운 편화 속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유태인에게 권고합니다. 그곡에서야말로 기독교도, 유태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정의 평등 우애, 그리고 발전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은 그것이 탄생한 이래 인종적, 종교적 동기에 의하여 고무된 적이 없으며,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 목표는 유태인 개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건물(유엔 본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토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미국)에 대하여 저지른 범죄가 모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들과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의 이익에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나는 미국과 아랍세계 사이의 진정한 우호 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93년 9월 13일 아라파트는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 나타났다.
그는 여기서 '철천지 원수'인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정부가 이스라엘 점령지역인 가자지구와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회담에 서명한 것이다.
이 행사를 이끈 것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었고 미국 구무장관과 러시아 외무장관이 증인 자격으로 서명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라파트는 '전사의 무기'를 버리고 '올리브 가지'를 치켜들었다. 암살을 피하려고 매일 잠자리를 옮기며 살아온 이 혁명가는 이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치가로 변신한 것이다. 아라파트는 실로 '쓰디쓴 결단'을 내렸다. 2쳔년 전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유태인들은 이 협정을 통해 자기네가 세운 나라를 인정받은 셈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고향 땅 한 귀퉁이에서 자치 정부를 세우도록 허락 받았다." 역시 국제사회는 힘 센자가 왕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80만 명의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몰려 사는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의 중심지인 동시에 해방기구와 그보다 더 과격한 무장투쟁 조직들의 거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서 정착촌을 만들 유태인도 5천 명이나 되는 탓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이스라엘 군대의 유혈 충돌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주 일어나 이스라엘 정부는 골치를 썩이는 터였다.
요르단 강가 유명한 휴양지인 예리코 시는 예수가 기도하는 중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산 가까이 있는 도시이다.
아라파트는 튀니스에 있는 해방기구 본부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이라고 한다.
예리코 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장차 경제 재건을 위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다.

이 평화 협정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심각한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협정의 산파 노릇을 한 사람은 노르웨이 외무장관 요한 외르겐 홀스트였다.
그는 이스라엘과 해방기구의 공식 평화협상이 벽에 부딪치자 말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양측 밀사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숙식을 함께 하며 회담을 중재했다.
반 세기가 넘게 목숨을 걸고 싸운 두 진영 대표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협정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정착촌을 만들어 이스라엘 영토로 만드는 정책을 밀어분였지만 국제사회의 따가운 비난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력한 인티파타(민중봉기)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반세기 넘게 군사력으로 나라의 생존을 확보라혀고 해보았지만 중동 형화를 파괴하는 효과만 낳았을 뿐 수천 년 박해와 수십 년 전쟁에 지달린 유태인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력충돌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해방기구보다 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더 큰 힘을 얻게 되자 이제는 대화 상대조차 잃어버릴 지경에 빠졌다.
해방기구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기구도 비슷한 처지였다.
아라파트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외부의 군사지원을 잃어버렸다.
걸프전쟁 떼 미국과 싸우는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을 지지한 탓으로 인근 아랍국가의 경제원조마저 끊어졌다.
이렇게 되자 조직 내부에서 아라파트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는 땅을 내주고 평화를 얻어 보려는 라빈 수상과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 였다.

아라파트는 "이 협정으로 한 세기나 계속된 고난과 괴로움이 끝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며 평화와 공존의 시대, 모두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새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치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고 해방기구는 경찰병력을 만들어 치안을 넘겨 받았다.
이스라엘은 감옥문을 열어 팔레스타인 정치범을 풀어 주었도 수만 명에 이르는 추방당한 사람들이 고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과도정부로 변신했고 이 협정을 두손 들어 환영한 서방 선진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팔레스타인 재건을 돕기 위해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주변 모든 아랍국가와 평화회담을 맺어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왔다거나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 땅에 얽힌 문제가 너무나 복잡한 대다 그 동안 치른 희생이 너무나 컸고 쌓인 원한이 너무나 깊은 탓이다.
그래서 화해를 추구하는 라빈 정권과 팔레스타인 과도정부가 과연 험난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장애물을 넘어 평화와 공존과 번영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회교 원리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상대방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치협정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가 하면 아라파트를 암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한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과 민주해방전선 등 급진파는 PLO와는 별도로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벌써 이스라엘 점령지구 안에서 자치협정에 반대하는 총파업과 시위를 벌였고 독자적으로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하기도 했다.
만약 자치정부가 짧은 시간에 경제를 재건하고 치안을 확립하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면 이들 과격파가 득세하여 자치협정이 무의미해지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위험요소는 이스라엘 쪽도 있다.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민병대를 만든 유태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며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1994년 2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헤브론사원 사건이 그 본보기이다.
요르단강 서쪽 헤브론의 한 이슬람 사원에서 한 유태인 정착민이 예배를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마구 쏜 이사건으로 50명이 넘게 숨지고 수백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군대는 시위를 진압하면서 팔레스타인 젊은이를 여럿 쏘아 죽였다.
경비를 맡은 이스라엘 군일들이 무장한 유태인이 사원에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였다고 해방기구가 강렬히 비난하고 나서 자치협정의 앞길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정착민들이 가진 무기를 회수하는 등 몇가지 조치를 취하여 사태가 진정되디는 했지만 과격 시온주의자들이 이런 사건을 벌일 가능성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날의 잘잘못은 덮어둔 채 지금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일단 군사력 행사를 자제함으로써 아랍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슴 밑바닥에 쌓인 증오와 원한을 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유럽 기독교도들에게 수쳔 년간 박해와 수모를 당한 불행한 유태민족이 과격 시온주의를 잠재우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웃과 화해하는 일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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