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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의 인물파일 7]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연재기사 | 정지환의 <인물파일> + 종합
이회창씨 40년전 오늘 기억하십니까
[정지환의 인물파일 7]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텍스트만보기   정지환(jhjeong) 기자   
▲ 31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고(故)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그는 오늘로부터 꼭 40년 전인 1961년 12월 21일 오후 4시 6분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첫 번째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된 그의 당시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조용수 사장의 마지막 순간은 원희복 경향신문 기자에 의해 1995년 씌어진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언론노련 총서2) 제1장 '한 젊은이의 죽음'에서 각종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생하게 재연된 바 있다.

이 '비극의 무대'에는 또 한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8월 28일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던 순간 혁명재판소 법정 정면에 마련된 판사석에는 26세의 '젊은 법관' 이회창 판사(현 한나라당 총재)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금복리 산 200번지. 지난 일요일(12월 16일) 조용수 사장의 무덤이 있는 남한산성의 골짜기에서 열린 조용수 40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기자는 인상적인 체험을 했다. <민족일보> 기자 출신인 김자동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던 중 갑자기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장래를 촉망받던 한 젊은 언론사 사장의 죽음, 판사와 피고로 만난 두 젊은이의 불행한 인연, 겨울산에 울려퍼지던 산새의 처연한 울부짖음…. 각종 자료를 뒤적이며 조용수 사장의 일생을 정리하던 중 주마등 스치듯 떠오른 장면들이다. 문득 기자는 '새로운 형식의 인물파일'을 작성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수가 이회창에게 보내는 가상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회창 총재님께.

안녕하십니까. 40년 전 혁명재판소 법정에서 몇 차례 만났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입니다.

1961년 12월 21일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때의 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로부터 꼭 40년 전이로군요.

"조용수! 부소장 면회!"

평소와 다르게 아침부터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감옥의 정적을 깨고 일단의 교도관들이 내 방 앞에서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뺑끼통에 있던 고무신을 손에 들고 내 독방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부소장실 쪽이 아니라 구치감 담장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교도관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내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나의 어깨를 지그시 사형장 쪽으로 밀더군요.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큼성큼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가슴은 아프게 떨렸지만 이왕 닥친 죽음이라면 좀더 당당하게 맞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형장의 쪽대문을 들어서기 직전 다시 멈춰 섰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국의 하늘을 쳐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본 서쪽 하늘은 유리알처럼 투명했습니다.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한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 재판관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26세의 초임 판사 이회창 씨.


나중에 알고 보니 양수정 <민족일보> 편집국장이 미결 8사 14감방에서 내 마지막 가는 길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더군요.

이회창 총재님.

나는 총재님이 출생하기 5년 전인 1930년 정월 초이튿날 경남 진양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집안은 영남의 명문가였습니다. 함안에서 2, 3, 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자유당 원내총무까지 지낸 조경규 씨가 숙부이고, 진주에서 반민특위 위원과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하만복 씨가 외숙부입니다. 정치적 성향으로 보자면 양가 모두 우익 쪽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지요.

해방 무렵 나는 진주중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학생들도 좌우대립의 홍역을 앓고 있었지요. 진주중에서 대구에 있는 대륜고로 편입한 것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지요. 지금 국회의장을 하고 있는 이만섭 씨가 내 동기동창인데, 그와 함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나는 1951년 우연히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내 나이 20세 때의 일인데, 한국전쟁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재일동포 민단계 학생 중 절친한 친구의 유학 권유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됐지요. 일본에서 나는 메이지대에 진학해 학업을 계속하면서 조총련과 경쟁하고 있던 민단에서 기관지 <민주신문>의 편집부장과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분단된 조국의 두 모습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이든 북이든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면 맞서서 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말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는 구명운동을 전개했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재일교포 북송을 추진할 때는 온몸을 내던져 반대운동에 나섰습니다. 이 총재가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던 무렵의 일이었지요.

그렇게 세상의 장벽과 맞서던 나에게 4·19혁명은 엄청난 기쁨이자 희망의 출구였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운동하며 쌓았던 경험과 열정을 새 조국 건설에 던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곧바로 귀국해 7·29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선거구는 경북 청송이었고, 정당은 대중사회당이었지요. 조선일보 주필과 논설위원을 지낸 진보적 성향의 최석채 씨와 양호민 씨가 그때 나와 같은 정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나는 8명의 후보 중 3등으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혁신정당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사분오열된 혁신정당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나는 국민에게 혁신정당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혁신세력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신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민단계 재력가들로부터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됐습니다.

▲1961년 2월 13일 창간호를 낸 <민족일보>는 창간되자마자 가판부수 1위를 차지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민족일보>는 비록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1961년 5월 18일 92호로 단명했지만, 약 석 달 동안 독자들의 선풍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발행부수가 4만 부였는데, 당시 가장 잘 나가던 경향신문이나 동아일보가 4만5천 부 정도를 찍었으니 신생신문치고는 엄청난 성공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가판에서는 <민족일보>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지요.

'젊은 의원' 김영삼 씨도 종로통에서 <민족일보>를 사서 옆구리에 끼고 국회(지금의 서울시의회)로 출근하는 것을 몇 차례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서울역 양동의 부랑자들이 신문을 떼다 팔려고 신문이 나올 때쯤이면 신문사(조선일보사 뒤편 오양수산 건물 자리) 앞에서 장사진을 치기도 했고요. 오죽하면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송지영 씨와 고정훈 씨, 경리국 고위 간부였던 전승택 씨가 조선일보를 버리고 민족일보로 왔겠습니까.

이회창 총재님.

기억하시겠지요? 나는 총재님이 몸담았던 혁명재판소에서 "<민족일보>를 통해 평화통일과 남북교류의 논조를 펼쳤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세상에! 평화통일과 남북교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다고 하면 요즘 세상에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직도 "주석궁에 탱크가 진주하는 날 통일은 완수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대명천지에 어느 국민이 과연 그런 해괴한 논리에 넘어가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40년 전에 <민족일보> 창간사에 담았던 다음과 같은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오늘날의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전쟁을 운위하는가 하면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 문화인들이 도발적인 언사를 쓴다는 것은 시대의식을 지니지 못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인류를 구제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할 때 인류를 위한 평화적인 노력 같이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좁은 이 땅이라는 지역에 있어서나 또는 널리는 세계라는 지역에 있어서나 같게 고귀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이 총재가 생각하는 정치는 어떤 모습입니까. 1960년 7·29 총선 당시 나는 "송진우, 김성수, 조병옥 선생의 전통을 잇는 보수정당과 여운형, 조봉암 선생의 전통을 잇는 혁신정당을 상호 육성하여 이념과 정책이 대결하는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는 출마의 변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발언을 했다고 나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장은 지금 대다수 정치지도자들이 하고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40년이 지나고도 정치는 더 후퇴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한국정치가 이념과 정책보다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후진정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회창 총재님.

나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와 죽음은 '사법살인'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무엇보다 먼저 나에게 적용된 법적 근거부터 잘못됐습니다. 나는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 즉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선동 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총재님이 잘 알고 계시듯, 나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아니라 '주식회사 민족일보사' 대표이사였습니다.

이회창 총재도 5인의 재판관 중 1인으로 참여한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는 내가 "조총련계 자금줄인 이영근의 지령과 지원을 받아 북한이 지향하는 목적 수행을 위해 적극 활약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내가 신문사 설립자금을 이영근 씨로부터 제공받았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설립자금은 이영근 씨만이 아니라 박용구, 배기호, 정동필 씨 등 수많은 민단계 재력가들의 기부와 국내 인사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신문용지 공급을 위하여 내 부친의 땅까지 팔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영근 씨는 간첩이나 조총련계 인사가 아닙니다. 1990년 그 분이 별세했을 때 당시 노태우 정부가 그의 '애국행위'를 높이 평가하여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 것이 대표적인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총재도 기억하시겠지만, 당시 판결문에는 이영근-조용수 사이에서 자금을 전달한 사람으로 조소수 씨의 이름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범죄행위'(?)를 누구보다 가장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당국은 조씨를 며칠만에 석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일본으로 출국시켜 버렸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이상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당시 변호인은 혁명검찰부가 자금 출처를 문제 삼자 <민족일보>의 출자자 명단과 출자액 명세서를 증거로 제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번에도 '자금 출처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 물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법의 기본 원칙을 철저히 무시한 '부실한 재판' 끝에 1961년 8월 28일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는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날 판사석 맨 오른쪽에 앉아있던 이 총재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더욱이 10월 31일 상고심에서는 변호사의 변론도 없이 사형이 확정됐습니다.

이회창 총재님.

당신이 생각하는 '언론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최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사주들이 탈세행위로 구속됐을 때 당신이 보여준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조선일보의 '밤의 주필'을 자임한 진중권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이회창 총재)가 점잖지 못한 죄목으로 수감된 어느 언론사주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을 보았다. '언론자유'를 내세워 국민들의 여론을 거슬러가면서까지 탈세 혐의자를 싸고도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언론의 자유'를 귀중하게 여기는 그 분이 민족언론인 조용수에게는 왜 그렇게 야박한 판결을 내리고, 아직까지 그 판결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일까? 단지 언론인이라면 탈세 혐의자라도 구치소에 면회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분이, 왜 정작 '민족언론인'에게는 사죄와 반성의 말을 아껴두는 것일까?"

진중권 '주필'은 또 이런 말도 했더군요.

"40년 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 그는 좌익경력을 가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이라는 반공주의 사제 앞에 드리는 고해성사에 희생양으로 바쳐졌다. 그때의 재판이 조작된 증거에 입각한 '사법살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내 친구 이만섭 국회의장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언젠가 "조용수의 죽음은 박정희 장군이 본인의 사상적 문제(남로당 활동경력을 지칭)를 의식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회창 총재님.

1961년 당시에는 초임 판사로서 당신이 어떤 결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젊었고, 차출 명령을 거부하기에는 군부의 힘이 너무 셌다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쩌면 그저 들러리에 불과했을 당신에게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어긋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에도 법관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서 그런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불이익을 감수한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판결문에 적혀 있는 당신의 이름 석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젊은 우리'의 만남은 너무나 비극적이었습니다. 다만 이 총재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아름다운 원칙'을 아직도 버리지 않으셨다면, <민족일보> 사건과 관련하여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선택'이 될지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1년 12월 21일 오후 4시 6분.

조용수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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