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과 저항

칼럼

사람들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근본요법이 없으면 대증요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 대증요법은 사회의 다양한 증상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기계적인 반작용이며
사람들은 그런 방법을 적용하면서 그 기계적인 반작용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입한 것이지만 그 방법을 적용하면서 그 방법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요리사가 요리에 몰입하면서 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그래서 대증요법에 취해있는 사람들은 근본요법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저항이 존재한다. 그들은 관성 때문에 자기의 움직임을 수정하는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근본요법을 발견한 것 만으로는 사회유기체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회개혁가가 사회유기체에 근본요법을 적용하고 싶다면 대중들이 대증요법에 이르게 되는 사고의 노선을 추적해서 그들이 진실로 가는 길의 어느 지점에서 발을 헛딛었는지 정확히 지적해주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사회개혁가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어리석어져야 한다. 어리석음의 늪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만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그 사회개혁가는 아마도 맑스주의에 빠진 노동자의 머리 속으로, 통화팽창정책을 지지하는 통화주의자나 적자재정을 지지하는 케인지언의 머리 속으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방임주의자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봐야 한다. 또, 그는 기존 진보운동에 거부감을 느끼며 소외감과 불안감을 이기려고 일베에 가입하는 어느 외로운 젊은이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보다 수면제를 원하는 중산층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기계적인 반작용의 여러 양상들을 스스로 체험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 속에서 그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보는지 그리고 실제로 삶을 어떻게 느끼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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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9 09:44 2015/07/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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