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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노조 만들어야 경제 민주화 온다

“삼성에 노조 만들어야 경제 민주화 온다”
삼성 무노조 경영 /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인터뷰

 

이태준 기자 ltj@digitalmal.com

 

   
상복을 입고 모친 빈소를 지키고 있는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사진/송은정 매일노동뉴스 기자
지난 4월 29일 서울 태릉 성심병원 영안실.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이 모친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무노조 경영’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워왔던 그는 지난 2월 22일 울산지법에서 ‘삼성그룹을 명예훼손했다’는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울산구치소에서 수감 중이던 그는 4월 28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님은 평소 지병을 앓고 계셨다. 올해 76세인 노모께서 마지막 눈감는 모습을 그는 결국 보지 못한 것이다. 5일간 구속집행정지를 받고 일시 석방된 그는 임종 당일날 버스마저 놓쳐 29일 아침에야 빈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태준 기자 ltj@digitalmal.com

“어머니가 평소 신장이 안 좋으셨습니다. 4, 5년간 혈액투석을 받으셨는데. 이번에 돌아가신 계기도 병원에 가시다가 넘어지신 거랍니다. 머리에서 피가 나실 정도였다는데, 병원에선 연세도 많고 살 가망도 적다 하더군요. 결국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27일 사고가 나 중환자실로 실려온 뒤 산소호흡기로 연장하시다 28일 새벽 임종하셨어요”

김 위원장은 담담하게 얘기했다. 울산구치소에서 3월 28일부터 16일 동안 단식농성을 해서인지 무척 야윈 모습이었다.
“지금이 군부독재 시절도 아니잖아요. 무슨 정권을 쓰러뜨리자는 조직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만들자고 한 건데, 이런 일이 생기네요. 어머니 임종도 결국 지켜보지 못하는....”

김 위원장은 이천전기에서 일하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는다. 1996년 그는 이 회사 노사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불법단체 구성’과 ‘불법홍보물 배포’로 징계해고됐다. 이천전기는 김 위원장을 해고한 뒤 삼성계열사로 편입됐다. 1997년 삼성중공, 1998년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도 노조설립을 시도하다 쫓겨난 그는 2000년 1월 삼성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삼성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노조설립 시도가 있을 때마다 회사쪽 사람들은 이를 주도하는 노동자들을 미행, 감시했다.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악용해 회사쪽에서 먼저 노조설립 신고서를 관청에 내는 식으로 노조 설립을 막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2001년 경북 삼성에스원, 서울 삼성캐피탈, 2003년 호텔신라 노조 설립 시도들이 무산됐다. 2002년 삼성은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법원은 그에게 징역 3년과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2003년 1월 마침내 해고자를 포함해 모든 삼성 계열사 노동자와 사내 하청업체,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하는 초기업 단위노조인 ‘삼성일반노동조합’이 출범한다.

이천전기에서 해고된 뒤 10년 가까이 김 위원장은 삼성을 상대로 한 수많은 사건 속에서 싸워왔다. 삼성에스원, 호텔신라, 삼성SDI, 중앙일보 인쇄노조, 분당 삼성플라자, 삼성코닝과 같은 삼성계열사에서 노조를 건설하려는 싸움, 최근에는 삼성SDI 휴대전화 위치추적 사건과 신세계 이마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노조설립 싸움에도 관여했다.

“군사독재시절도 아니고, 감옥에서 어머니 임종을 맞다니...”

10년 가까이 삼성과 싸워오는 동안 김 위원장이 가족들을 챙길 겨를은 거의 없었다.
“20년 전부터 저는 ‘좋은’ 자식이나 아비로서 노릇을 포기했습니다. 가족들을 호위호식 못 시켰죠. 명절날 부모님을 찾아뵈면, 제가 용돈을 드리기 전부터 어머니가 눈치를 먼저 보면서 ‘저녀석 세뱃돈이나 줘야 하는데’ 하셨어요. 올해 설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뵜습니다. 그런데 차비가 없는 줄 알고 엄마가 저한테 ‘이거 복돈이다, 받아라’ 하시면서 5천 원을 주시더군요”

그가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부터 꿈이 안 좋더라구요. 책을 읽다가 슬픈 얘기가 나오면 왠지 서럽고 눈물이 고이고. 야 이거, 무슨 다른 일이 생겼나, 했어요. 그날 삼성 동지 한 명이 면회를 와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하더군요. 그날 저녁부터 밥이 안 먹히더라구요.”
어머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 아들이 무엇을 상대로 왜 싸웠는지 모르셨다. 팔순이신 아버님 또한 아들이 왜 임종도 놓치고 늦게 왔는지 사연을 모르신 채 장례식장 한 켠을 지키고 계셨다. “어머니는 저한테 ‘처자식이 멀쩡히 있는데 나이 먹어서까지 아직도 데모질이냐’고 하셨어요. 그렇게만 알고 계셨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계속 하니까, 어머니도 ‘나름대로 무슨 이유가 있겠지’하셨습니다. 삼성과 싸운다는 건 부모님 두 분 다 모르셨어요. 어머니한테 이번 수감 사실도 알리지 않았어요. 제가 수감됐다는 걸 모르고 돌아가신 거죠. 아버님한테도 형님이 ‘성환인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갔다가 밤에야 온다’고 말씀드렸답니다”

“절대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삼성노조 설립에 몰두하던 김성환 위원장은 자신도 모르게 ‘감시’를 당해왔다. ‘누군갗 김 위원장 휴대전화기를 몰래 복제해 친구찾기 서비스에 가입시키고, 죽은 사람 명의인 휴대전화로 ‘친구맺기’를 한 뒤 2003년 8월부터 2004년 3월까지 위치추적을 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같은 방법으로 위치추적을 당한 삼성 전현직 노동자들과 함께 지난해 7월 여러 정황을 근거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삼성 임직원을 고소했다. 7개월 동안 이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지검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지난 2월 기소중지를 결정했다.

오히려 삼성은 “「삼성재벌 노동자 탄압백서」같은 홍보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삼성SDI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김 위원장을 다시 고소했다. 김 위원장은 울산지법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당했다. 집행유예 기간에 법정구속된 그는 2002년에 같은 혐의로 받은 징역 3년형을 더해 모두 3년 10개월 실형을 살아야할 처지가 됐다. 검찰이 위치추적 사건수사를 중단하고 삼성 관계자들에게 무혐의 판정을 내린 뒤 6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 사건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발의한 특별검사법 관철을 요구하며 16일 동안 단식농성을 벌였다.

“수감자 가운데 몸에 문신이 있는 조폭 한 명이 있어요. 단식한 뒤 죽을 먹는데 그이가 ‘이거 드시고 형씨 밥먹으슈’하면서 뭘 주는 거예요. 보니까 우황청심환이예요. 그거 보고 반인륜죄가 아니라면 여기온 이들 누구나 다 ‘양심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재벌이나 정치인들은 수천억 원씩 돈을 해먹는데, 여기 온 사람들은 음주운전이나 단순사기, 이런 걸로 들어 왔거든요. 이들은 스스로 죄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죄를 져도 풀려나는 사회지도층에 대해 욕을 해요. 사실 자기들도 돈 몇천만 원만 쓰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러기 싫어서 안한다는 겁니다. 양심수란 게 따로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감옥 안이 오히려 이해관계가 없어요”

월간『말』은 지난 5월호에서 ‘삼성에스디아이 위치추적사건’ 수사기록을 분석했었다. 그 결과 삼성이 관련된 이 사건에서 검찰이 핵심 용의자나 결정적인 단서들을 적극 파헤치지 못하고 맥없이 수사를 중단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말』5월호 표지사진 인물이었다. 담담하게 말을 잇던 그는 유일하게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조금 전에 단병호 의원실 김건태 보좌관이 다녀갔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말』지 5월호를 보여주면서 어머님 영정 앞에 올리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올라 오면서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거든요. 그런데 김건태 보좌관 말을 듣는 순간, 결국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양대노총, ‘삼성 전담기구’ 만들어달라”

김 위원장은 “어머니 임종은 볼 수 있을 거라 의심하지 않았는데, 임종을 못 본 게 평생 한으로 남을 거 같다”란 말을 되풀이했다. 이날 장례식장에서 김 위원장 옆을 지켜주던 삼성에스디아 해고노동자 박경렬씨도 그런 ‘한’을 갖고 있었다. 박씨는 삼성에스디아이 수원공장에서 노조설립에 관여했다. 이 회사 관계자들은 1999년 말 6일 동안 박씨를 외지로 끌고 다니면서 ‘노조 포기각서’를 쓰라고 회유하고 압박했다. 각서를 써주고 풀려난 박씨는 2000년 2월부터 두 달 동안 말레시아에 파견을 가야 했다. 귀국한 뒤 다시 노조설립 문제로 회사와 맞선 박씨는 가방에 칼을 넣고 다니며 ‘자살’까지 불사했다. 박씨는 회사쪽 신고로 경찰에 연행됐고 수원구치소에서 수감 중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남인 박씨도 지병을 앓아왔던 아버님 임종을 결국 지켜드리지 못했다.

장례식장엔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당한 피해자 가운데 고소를 취하하지 않고 회사에서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삼성에스디아이 수원공장 노동자 강재민씨도 있었다. 강씨는 “회사에선 동료들이 나를 피하고 밥 먹으러 혼자 가고. 완전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러다 우울증에 걸리는 건 아닌지...삼성에서 싸웠던 이들은 이런 ‘한’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 계열회사들과 싸웠던 노동자들 사례를 보면 회사쪽의 집요한 회유와 압박을 이길 수 없어 결국 노조가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 쪽은 그 대가로 수천만 원의 돈을 주면서 사태를 매듭짓곤 했다. 김 위원장은 삼성과 싸워본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면서 그는 노동계에 ‘삼성 전담기구’를 조직해달라고 호소했다.

“민주노총은 ‘삼성일반노조는 돈만 받고 문제를 해결하는 노조’ ‘삼성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도 곧 삼성한테 돈을 받고 그만 둔다’하고 의심해요. 실제 삼성 노동자들은 노조경험이나 투쟁경험이 없어서 돈을 받고 쉽게 깨집니다. 하지만 싸우다 포기한다고 그 사람을 쉽게 욕할 수 없어요. 현장에서 겪는 고통은 당사자만이 압니다. 1, 2주일을 끌려다니며 ‘너 하나 죽여서 묻더라도 세상을 모른다’ ‘대한민국 헌법은 삼성 밑에 있다’ 이런 소리를 듣는데, 단 하루나 이틀이라도 이 엄청난 재벌과 싸운다는 것은 삼성 노동자한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 고통을 당사자 처지에서 이해해줘야 합니다. 민주노총에서 삼성 조직화를 결의했지만 실천은 안 됐어요. 양대노총에게 삼성 노동자 조직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드리고 싶습니다. 삼성을 상대하는 전담기구없이 개별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탄압을 이겨내며 삼성에 대응하기는 힘들어요”

그는 삼성 노동자 투쟁을 보도하는 언론 태도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어느 한 노동자가 삼성과 싸운다고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보도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거대자본권력과 싸우는 노동자들의 숨소리와 삶을 그대로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삼성 족벌세습과 무노조 경영이 문제라면, 그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이 겪는 생생한 활동과 아픔들을 언론에서 좀 더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써주셨으면 합니다. 삼성 노동자들은 그 고통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어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결을 못해서 진다”

그는 삼성 노동자들한테도 문제를 지적했다. 박경렬씨와 강재민씨와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침울한 분위기를 걷어내려 노력했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삼성 노동자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날카롭게 지적했다.

“복수노조를 악용하고, 미행과 감시, 휴대전화로 위치추적까지 하고, 검찰은 수사를 중단하고. 문제는 이런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면서 노동자들 스스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신비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성의 정보력은 막강하다, 삼성은 전지전능하다,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은 삼성의 ‘무노조 신화’를 깨지 못하는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어요. 스스로 주눅들게 만들고 패배의식에 빠지고. 삼성에서 노조가 안되는 건 삼성무노조 경영이 워낙 세다는 점도 있지만, 큰 이유는 우리 노동자들이 단결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 삼성한테 깨지는게 아니라, 단결을 못하기 때문에 지는 겁니다“

여기에다 그는 “국가권력 자체, 특히 사법부가 삼성의 노조탄압을 비호하고 있다는 졈도 지적했다. “눈앞에서 부당노동행위를 하는데 그 증거를 줘도 검찰은 삼성이라면 무혐의 처리를 합니다. 법원도 삼성을 옹호하고. 삼성구조본 법무실 변호사들 면모를 보면 대검, 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로 화려하잖아요. 이종왕 법무실장은 노 대통령과 사시 동기이고 구조본 부사장인 서 모 검사는 에버랜드 불법주식증여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지검 특수부 부장검사였답니다. 수원지검 특수부 이모 검사는 삼성전자 사건관련 공판검사였는데, 재판이 진행중에 삼성구조본부로 그야말로 공직자 윤리의식도 없이 옮겨갔습니다. 제가 법정진술에서 출세욕에 사로잡힌 검사와 삼성이 야합했다고, ‘법경유착’이라고 비판했더니 재판관이 ‘허위사실 유포’라 하더군요”

삼성에서 노조를 만든다는 의미

10년 동안 그는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워왔다. 그렇다면 그에게 ‘삼성에서 노조를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삼성 노조 건설은 그동안 삼성노동자들이 지녀온 숱한 패배의식을 다 날리는 일입니다. ‘삼성 정보력은 막강하다, 삼성에서 노조는 꿈도 못꾼다’는 패배의식 말입니다. 이건 어느 한 계열사에서 노조를 만들어 그곳 노동자들만 잘먹고 잘살자는 게 아닙니다. 삼성 노조건설 싸움에서 이긴다면 20만 삼성 노동자가 진정한 노동자로서 권리, 인간이기 위한 인권과 생명권을 주장하는 싸움들이 뒤이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정치민주화 뒤 사회경제적 평등을 뜻하는 경제민주화는 이제 노동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초일류 최첨단 기업인 삼성이 족벌세습과 무노조 경영과 같은 시대착오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걸 지지하는 정치권력과 언론, 사법권력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이에 맞서는 삼성노동자들과 양심있는 개혁세력이 다른 축에 있습니다. 삼성노조 건설투쟁은 이 두 세력 사이의 싸움이죠. 경제정의와 실질적 평등과 같이 가는 싸움입니다. 삼성에 노조를 건설한다는 건 이제 진정한 경제민주화와 평등사회를 위한 시작을 의미합니다“

 

월간말 2005년 2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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