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17

2007/05/17 23:57

모처럼 도서관에서 공부를 늦게까지 하고 나오다가 공부가 여전히 잘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나마 하루하루 나아지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 암담함과 희망사이에 있는 기분으로

 

컴퓨터실에와서 '사랑이라는 이유로'  를 듣는데,  몇배의 감동이 느껴진다.

 

나는 시험이라는 것에 적합한 인간인지. 애초부터 이런거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건가.

 

그나마 수험에 적합하게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서 방향은 잡은거 같다.

 

모르는 것은 적당히 넘어가기,

 

이해가되지 않는 것은 적당히 외우기, 

 

생소한 내용을 처음부터이해하려고 한 문제에 천착하는 행동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기.

 

(막판에 가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때가서 적당히 외우거나 누군가에게 질문하여

 

해결하면 되지 초중반에 절대로 그것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면 금방지쳐버리고

 

진도도 못나간다는 불변의 사실.)

 

명백한건 다른 한 길을 갔으면 이것보다는 조금은 나았으리라는 믿음은 있지만 지금와서

 

그렇게 하기는 싫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체념하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거다.

 

그래도 결국 사람은 고정된 게 아니라 고쳐나가기 나름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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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밝은 시간.

2007/05/16 08:21

밝고 또렷한 시간이 진행중이다.

 

그리고 나는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솔직한 (예외적인 상황도 있지만)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영원히 그런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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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2007/05/14 08:43

교통사고는 막상 사고당시의 충격보다

 

그 후의 오랫동안의 후유증이 더 문제이다.

 

특별히 수술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교통사고라는 것의 성격이 원래 그런것이니.

 

상대와 쉽게 합의를 하여 배상금을 받았으나,

 

연이어나타나는  후속 질병들을 고치기에는 배상금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제 법정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기한도, 기회도 지나갔다.

 

어쩌겠는가, 만인이 안고 살아가는 흉터라고 생각하고

 

에너지로 승화시켜서 살아가야지.

 

.......나는 아직 너무 나약한 걸까?

 

남들은 몇달이면 까맣게 잊을 것을

 

나는 되새기고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해서 더 깊게 가슴에 아로새기는 것 아닌지.

 

신촌에서 홍대쪽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순대집을 보며

 

 그 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간절하게 아무일도 없이 평화로웠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제 아무리 지구의 중력처럼 강한 흡입력으로 날 끌어당긴다고 해도

 

버스를 타고 헤어지는 그 순간 돌아보지 않을텐데.

 

잘 들어갔냐는 쪽지에도 형식적으로 답할텐데.

 

정말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후회한다.

 

나의 어리석음과 경솔함과 순진함과 가벼움에 대해서.

 

그리고 후회하는 만큼 원망한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머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을텐데.

 

내가 주의 깊게 볼 일도 없었을텐데.

 

나의 모든 수치심과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감과 다시 잘 살아가고 싶은 의지 모든 것을

 

합친것만큼 원망한다.

 

살면서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혹시 마주치게 된다면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듯이 나에게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을때

 

나에게 전혀 없었던 사람을 만나는 것같은 기분이 되었을때에 마주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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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2007/05/10 20:07

1.  성장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참 보기 좋은 일이다.

 

   나도 '조금은'   자랐고,  나 말고도 많은 다른 이들이 예전에 모습과 달리

 

   많이 자랐음을 보게된다.

 

   갓 스무살때는 혼란에 싸여서 무엇을 해야할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막막함을 갖고 대학에 입학한다.   '관계' 에 있어서 날이 선 태도로 대하고 충돌에 있어서

  매끄럽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반박하고 분노하면서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함에 괴로워한다.

 

 내가 썩 괜찮고 잘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부푼꿈을 안고 세상을 대하지만,  '너의 생각은

 착각이야' 라고 비웃는 듯한 상황을 수없이 접하게 된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나만큼 똑똑한

 사람은 수백여명이고, 나보다 강하고 단단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수천여명이다. 책을 읽어도

 인생경험이 활자를 읽는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다보니 이해력이 떨어지게 되고 그러다보면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나이만 먹고 대학만 들

 어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와 다른 형태로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가 맞나' 라고 혼란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상처와 감정은 과잉으로

 확대하여 해석하지만,  정작 타인의 상처를 돌아볼만한 샤려깊음은 없다.

 

 이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세상과 화해하게 된다.  '화해함' 이 곧 '타협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싸우고 부딧히고 그만큼 눈물을 흘리며 살이 깎여나가는 통증을 겪어야 한다.  자신이

 '이만큼'  밖에 안됨을 인정하게 되지만, 또 '이만큼'  밖에 안된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싫은것'   '다른 것'  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게 된다.  어느것에는 기대

 를 가져도 되고 어느것에는 가지지 않는 편이 좋은 지 알게 된다. (물론 이건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  에 대해서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도 조금은 배우게 된다. 자학하는데에

  너무많은 감정을 소모하는 것도 '내가 유한한 인간이라서 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겸허해진다. 작은것에 일희일비해지지 않게 된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에서 짧게 커트하고 예전에 우울함과 고뇌에 가득찬 모습은 없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사진을 찍던 그녀가 나에게 왠지 모르게 힘이 되었다. 

 

 2.  노동법

 

     전공수업중에서, 시간이 꽤나 빨리간다고 느껴지는 수업은 이것이 첨이다.

    그리고 공부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과목도 이게 첨이다.

    과목의 성격도 있지만 이건 솔직히 교수가 학생들을 흡입하는 능력이 상당히 크기때문이다.

    역시 인간은 자신의 삶을 해명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즐거울 수 있다.

   

 3.  어쨌든

 

   어쨌든  극복해가고 있다.

    고장난라디오처럼 같은 얘기 여러번 떠들어댔다. 무슨 자랑처럼.

   왜냐면 자꾸 얘기해야 나아지기 때문이다.

 

   던져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없었던 일로 치부해버릴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몇년씩 사귀고도 안좋게 헤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정도 가지고 엄살을

  떠는지. 그 정도의 깜량이라면충분히 던져버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왜냐면 그 감정과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속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속상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내가 괜찮은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몇번보지도 않고 괜찮은 사람일거라고 생각한것은 단지 내가 마음이 끌려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일 것이다.  또 그렇게 믿었으니까 마음이 끌렸을테고.  내가 사람을 아직 다면적으로

파악할 줄 모르고 신중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뭐, 사실 보편적인기준으로 보아도 특별히

비상식적이거나 비열하거나 그런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는 모르겠다.

 

  내가 내 반경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standard가 높은 것 같다. 나를 좋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그 한달정도의 시간동안 그 사람이 보여준 우유부단함

  에 대해서는 안좋은 감정을 지울수가 없다. 적어도 전형적인 이기심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고 타인의 괴로움에 대해서 쉽게 외면하는 스타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침묵했고, '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라는 말만 반복했다.

 

   바쁘고 자신에게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은 알지만, 그냥 나에게 ' 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확신을 못가지겠다. 이유는 이전 사람을 극복을 못해서 인것 같다.   이런 나를 이해하고

   그 사람을 잊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줘라.' 라고 말하든지 아님 '  아무래도 넌 나와 아닌

  것 같으니 그만두자.'  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 말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린다고.

 

  

 

아니면 당장의 결론도 결정도 아니어도 좋으니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얘기만 해줬어도

 내가 온갖 오해는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왜 말을 안하냐고. 말을.  ( 이 말에 한 친구도 부르짖으며 동의하더만)

 

 

 이십대 초반 철없는 남자아이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행동해.

 

 

   이렇게 모호한태도로 질질 끌다가 나중에 자기 바쁜일 다 끝나고, 나는 너덜너덜할정도로 녹초가

  되면 ' 미안해'  하고 보내버릴 생각이었을까.

 

 빚을지거나 직업상의 실수를 지는 일 등에는 전전긍긍하지만,  '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실수' 

 에는 '에잇 뭐...'  하고 가볍게 넘겨버리는 데 익숙한 '사회인'  이고 ' 어른' 이라서 그런 걸까. 

 

 그 정도로 내가 그에게 사소한 인간이었을까.

 

 나 역시 과거에 그에 못지 않은 잘못을 한 적이 있지만, 적어도 좋아함의 유무를 떠나서 옆에

 있는 사람을 사소하게 여길 수는 없었는데.

 

  어차피 '사람' 에 대해 생각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나와 틀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태도

 자체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건가.

 

  

 

 두번째로 속상한 이유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 우리 그만둡시다'    라고 했을때 그 사람이 한 말은 ' 넌 괜찮은 아이인데,  이전 사람을

 감정적으로 정리하지 못해서 네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라는 말이었다.  

 

  그것 참 일단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내가 무슨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 이전 사람을 극복하지 못한 것'  이  문제라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처음에는 시큰둥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면서 점점 나와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한것은 단지 전 애인을 잊지 못해서 뿐만이 아닐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몇번 봤을때의 인상과 달리 가까운곳에서 보다보니 기대한  바와  달랐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진게 아닐까? 관계란 상호적인 것인데 이쪽에서 보내는 텔레파시가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잔여 에너지로 움직였던 것이지 나는 무형물이 아니지 않은가?

 

  이를테면 처음에는 신선하고 당찬 이미지가 좋았지만, 알고보니 딱히 그렇지 않았다든지.

 

  나라는 사람이 예술가에게 긴장감과 자극을 주기에는 부족했다든지.

 

  고양이처럼 밀고 당기는 맛이 없었다든지

 

  알고보니 그렇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든지

 

  너무 논리적으로 따지기만 하고 따뜻하지 못했다든지

 

  좀더 마음을 표현해주기를  바랬다든지

 

  장래성이 불투명하고 자기일을 독하게 하지 못하는 수험생의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다든지

 

  아니면 딱히 짚을 것없이  전반적으로  매력이 없었다든지

 

  나의 ' 세계관' 또는 '정치적 성향'  이 강해서 그에게 부담스러웠는지

 

  혹은 반대로 딱히 '사상만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듯한 내가 미숙하게

 

 혹은 모순되게 느껴져서 실망했는지.

 

 

  가장 최악으로 드는 생각은,  상대적으로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멀어지고 자유롭고 즉흥

 

 적으로 살아가는 전 애인에 비하여  신중하고 원칙주의에 도덕적(!) 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내가 ' 얽매인 것 처럼'  느껴진 걸까.

 

 

  이 최악으로 드는 생각에 무척 마음이 아팠었다.  내가 긍정하여 살아가고 또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은 부분을 누군가에게 정면 부정당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지레

 

 짐작일수도 있지만. (만일 어릴때에 이런 경험을 했으면 정말 상처받고 자아가 흔들렸을수도

 

있는데 어느정도 나라는 사람이 형성된 후에 겪게 되어 다행인걸까. )

 

 

 한 마디 해주었으면 내가 의혹속에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내가 왜 그 사람에게 부족했는지 알 수 없이 수많은 의혹만이 남았다.

 

 한 친구는 이제 그만 그 의혹에 대한 답을 알려고 하지 말고 덮어버리라고 한다.

 

 그래, 이제는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

 

 그의 마음을 알고 싶지 않다.

 

 의혹을 분명히 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박스안에 집어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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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2007/05/10 14:04

전공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도 전혀 글쓰기의 감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가 단념하고 있지

 

않고 또 앞으로도 단념하지 않을것은 괜찮은 글을 쓰는 것이다.

 

사실 글을 재밌게 쓰는 능력이라든지 이런것은 훈련을 통하여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담고 싶은 내용이 흉중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도 세상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만큼의 1단계의 자격은 갖추었다고 봐야겠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고 또 세밀하게 보려고 늘 노력은 하지만, 어느새 내가 세상을 보는 패러

 

다임이랄까, 틀이랄까 하는 것이 좀 고정되어서 그런지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무엇을 바

 

라보는 시선이 너무 문제---> 분석----> 해결방식 도출   이런식으로 도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금 나처럼 이렇게 정해진 가치관 아래에서 다소 도식적(?) 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기다 좀더 단순해지고 성실(!) 해지기만 한다면 세상적으로 뭔가를 성취해나가는

 

것에도 좀더 가까워지겠지.  그러나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삶은 뭔가를 하나만 바라보고 돌진해야

 

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한두시간만이라도 내가 느끼는 바에 집중해보고 싶다.

 

'효율성' 을 위하여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단순하게 '도치' 하고 ' 절단' 해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느끼는 것들에서 얻어지는 깨달음과 관심들을 깊이 있게 구성해 내는것.  끊이지 않고 생각에

 

오랜시간 몰두하는 것.  내가 요즘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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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07/05/04 23:48

상처는 덮는 것이 아니라 완전 후비고 쑤셔서 곪지 않게 터트려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명백하다.

 

그래서 그럴려고 했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아무것도 정말 남은 것이 없다.

 

슬픔, 그리움, 증오, 질투, 경멸

 

이 모든 감정들이 강렬해서 아예 절정의 카타르시스로 애도의 시간을 가지면

 

찬찬히 가라앉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것조차 크지 않을 것 같다.

 

 

왜 이렇게 됬는지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렇게 감정이 쉽게 증발되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일수 있게 되는 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잘 따져보다보니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된건가

 

단지  쓸쓸함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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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다시는 하지 않을말.

2007/05/03 07:16

 

 모든 말을 다 하고  끝내고 나면 시원해질거라고 생각했지.

 지금 나는, 그래 시원해.  골머리 아플때보다는 훨씬 시원한것 같아.

 그런데 끝이 아니네.

 

 

우리사이에는 별다른 추억이 없지.

 함께했던 시간도 얼마 길지 않아서 그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울까봐 무섭다.

 

 내가 한 두번인가밖에 본 적 없는 눈을 가늘게 찡그리고 미소짓는 모습

 손을 잡았을때의 꽉 차는 느낌.

 피곤할 때 전화받았을때에 잠긴 낮은 목소리

 옆에 누워있다가 키스하던 뜨겁게 떨리던 느낌.

 칼국수에서 소심하게 조개를 하나 집어서 주던 것

 유쾌하게 머리를 날리며 내 옆에 걸어들어올때 그 내 주변이 충만해지는 느낌.

 표현하지 않는 마음속에 여린 심성

 뭐라고 묘사하기는 힘들지만 당신이 표현하고 바라보는 그 머리속의 세상

 

 

 

내가 만들고 싶은 내용의 영화가 있어? 하고 물었을때

 

" 약자를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라고 대답했을때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겠다. 싶었지.

 

 

 

생각해보면 나의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까지 기억될 사람도 아니라고.

 나와 결국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들지.

 하지만 그건 나를 위로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던지 간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원한것이 사실이고

 당신은 줄 수 없었다는 것이 명백한데.

 

 

나와 당신을 함께 아는 사람들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시선들

 그것도 너무 차갑게 느껴지는 건 왠 약해빠진 나약한 마음인지.

 

 

 

 떠올릴때마다 마음이 쑤시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질것 같아 두렵다.

그때마다, 어떻게 할지....

어찌어찌 적당히 잘 살겠지만....

 

 

 

당신이 혹시 더 외롭고 초라하고 힘들어질까

 그런 우려도 들기도 하고.

 

 

 

 

이 모든게 이제 무슨 소용인지.

당신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아픈것을 당신이 느끼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인지.

 내가 어떤 상실감과 그리움이 있던지 돌아보지 않을텐데.

 아무 소용이 없어.

 

 

 

 

생각하면 할수록 그냥 계속 눈물만 흘러.

 사람 많은 환한 컴퓨터실에서 이러고 있어.

 계속 눈물을 흘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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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도 못가고

2007/05/02 08:10

4.30도 못갔다.

 

개인적 영역안에서 침잠하며  자해하는 짓을 딱 멈추고 싶은마음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경험과 인생을 주워모아, 또는 자신을 의기충전한 사람으로 의식하며

 

자신을 확인하려는 심리가  좀 유치하다는 생각을 해서 이제까지 입을 다물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건,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연대와 대화없이 살면

 

결국은 많이 힘들어지고 괴로워질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미묘하게 노출하는 것에 경직되지 말고, 언제나 솔직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내보이며 살

 

아가는 것, 원하는 바와 주장하는 바를 드러내어 표현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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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시작

2007/04/30 23:45

5월이 시작된다.

 

5월은 언제나 약간의 설레임을 가져다 주었다.

 

어릴때는 어린이날, 그리고 내 생일 때문에

 

나이가 들고보니 생일이나 어린이날은 뭐 그냥 그렇고

 

시험이 끝나고 무언가 한 짐 던듯한 기분으로 꽃이 만개한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학교마다 축제기간이라서 약간 떠들썩한 분위기라는 것이 설레임을 준다.

 

5월에는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서 실없이 수다떠는 시간도 가지고

 

주저없이 후회없이 일상을 열심히 살아나가야 겠다.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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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을 참가하는 심경.

2007/04/28 22:26

나는 집회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집회에서 투쟁가 부르는 것과 문선을 하는 분위기 자체를 무척 흥겹게 여기고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것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팜플렛을 주워서 읽거나 거기에 쓰여진 내용에 관해서

옆에 선배한테 물어보거나 하는 것이 좋았고, 시끄럽고 격렬한 분위기에 결코 몸을 맡기고 동화

되지 못했다.

 

 

2002년 이후로 노동자대회, 메이데이 등 어떤 큰 집회도 참가해보지 않았다.

그 5년동안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때그때마다 어떤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는지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마 2001년-2년쯤에는, 집회에서 얘기되는 것들이 모두 세상에서 필요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내가 그것과 관련되어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또 나의 행복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싶었었다.

 

 

오히려 나는 학내 에서의 학생 정치집단의 형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서 그와 관련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등을 읽으며 학생회는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지금 이 시점

에서 노학연대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할 사람들이 없었고 또한 나의 문제의식도 매우 개인적

욕구를 채우는데에만 멈췄다.  사실 내가 그런것에 관해 정말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면

시행착오일지라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많은 시도를 해보았어야 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그 당시 학생사회를 '판단' 하고 '분석' 하기만을 즐겼을 뿐 어디에도 나의 몸을

던질 용기도  여유도 없이 자기만족을 위해 뒷말만 하는 사람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비정규직' 이라는 말이 '지금정도로' 일반인들도 문제의식을 가질정도로 공론화된

단어가 아니었고,  나와 내주변의 많은 이들이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비정규직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아서인지 나도 그랬다. 

 

 

2003-4년에는 학교를 떠나있고 또 책속에서 해답을 찾아보려고도 하면서 나도  '내가 노력한다면' , ' 온건하고 자유롭지만 어느정도 의식을 지닌 시민으로'    '두루뭉술하고 사이좋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이라 생각했던  '일반사람들' 이 살아가는 사회가 결코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면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뼛속 깊히 체험했다. 

 

저학년일때 학교에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다른이들에 비하여 별다르게 문제의식을 깊이 느끼지못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조직안에서 크고작은 좌절과 패배를 많이 겪게될수록 나는 나의 성격, 나의 성장환경, 나의 계급

그리고 나의 지식과 또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의 한도내에서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 조금씩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변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꼭 내가 생각한 졸업후의 운동의 길 -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꼭 직업운동가가 아니라 어떤 직업에서든지- 최소한 자본가와 공권력의 하수인이 아닌 한도에서- 자신이 학생때 가져왔던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고  실존의 문제들을 풀어내고자 노력하는 길- 을 내가 예상했듯이 당연하게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 이다. ) 그걸 보고 내가 깨달은 것은  한순간에 보여준 열정이 그 사람의 성향이라고 판단할 수 없고, 결국 사람은 호흡이 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때 무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비록 그 순간에는 진실하고 진지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보면 매우 쉬운일이고, 자기손으로 밥을 벌어먹게 되는 생활을 하게 될때 그 직업으로써 한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직면하게 되는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자기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짜란 생각이 든다 요즘은.  그건 결코 쉽지 않은, 내가 풀어야 할 숙제겠지. 조급해지지 않는 것.

 

5/1 당일날 참가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문제라고 인식하면서도 ' 연대' 라는 이름으로 4.30에 참가한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4.30 전야제가 예전처럼 크게 보이지 않는다. 달리 보인다.   '운동권 학생들의 여가'  처럼 느껴질 정도로 학생운동사회가 별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학생들의 문제와 4.30에서의 노동자의 문제가 결합되어 논의될 정도로 제대로 조직화가 이뤄지지도 못했다는 슬픈 현실이 있다.  학내 자치권탄압, 등록금 인상, FTA타결로 인하여 더욱더 가중될 교육의 공공성 붕괴 이 모든 문제가 서서히 담론으로 떠오르고는 있지만 조직화의 현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도 4.30을 해방감으로 대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밤에하는 문화제에 오랜만에 참가해보고 싶다.  (낮에는 수업때문에 5/1일 참가는 어렵다. )

 

 4.30 문화제가 기대가 된다.

 현재 치열한 정세의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의 발언들도.

 그리고 얘기되는 현안들을 내가 예전보다 한 단계 나은 시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리고 지난 세월들을 통하여 조금 성숙해졌음에 나 자신에게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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