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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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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소품 걸작들

 

출처 블로그 > 學古山房
원본 http://blog.naver.com/anathema81/110027945092

 

 

 

 

김홍도. 목동귀가도. 지본수묵담채, 서울 개인 소장.

 

김단원은 18세기 말, 정조 치세를 별같이 장식한 화원이다. 자고로 역사를 보면 국가적으로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한 시대에 문화와 예술도 절정으로 발달한다. 김단원은 조선시대의 화가로 그 절정에 우뚝선 유일무이한 화원이다. 김단원의 역사적 중요성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김단원은 그 손꼽히는 솜씨로 화면 위에서 노니는 화선의 경지를 보인 사람이다. 단원이 소소한 즐거움 속에서 그린 그림을 우리는 무거운 역사적 의미를 벗어놓고 즐겁게 보아야할 필요도 있다. 김단원은 정조의 배려를 받음인지, 무거운 화원업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듯, 여가를 즐기면서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다. 공을 안들였다고 할 수 없는 작품이면서도, 단원의 이러한 소품 그림들에는 그 교묘함을 넘어서는 즐거움과 여유가 있다. 화원이라면 이렇게 전통대로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단원은 자신의 개성과 단원이 친숙하고 눈여겨본 것들을 오롯이 표현한 경우가 많다. 기량은 이미 익을대로 익어서 물이 흐르듯 붓이 손을 따른다. 사소한 신경에 대한 고뇌적인 집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태평성대에 사소한 행복들이 스며든 삶에 대한 만족감이기도 하리라.

 

 그래서인지 단원의 그림 중에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많다. 고느적하고 무한히 펼쳐지는 시골 들판의 풍경들이 그렇다. 단구 낙관이 있으므로 60 즈음에 그린 그림일듯 하다. 무심한 듯하고 평범하기 그지 없는 붓질이다. 그 속에 오랜 기량이 명쾌하게 녹아있다.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무엇일까? 맨앞 둔덕의 하엽준이 단원의 어느 그림보다도 맛깔난다. 음악의 선율이 지배하는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을 뒤로하고 해질녘 목동은 집으로 향하고 있다. 

 

 

김홍도. 총석정도. 을묘년화첩, 1795년, 지본담채, 23.3 x 27.7cm, 개인 소장.

 

 

 

김단원은 그의 나이 50이 되서,

그 꼼꼼하기 그지 없는 붓질이 다소 느슨해진다.

가득채우던 경물은 줄어들고 깍듯한 선은 적어진다. 

필치는 명쾌해지고 구도는 더욱 기묘하다. 

거기엔 비로소 새소리와 물소리가 노닌다. 

조선의 산천이 비로소 조선인의 손에서

조선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머금고 다시 태어났다.

 

 

김홍도. 백로도. 병진년화첩, 1796년, 지본담채, 26.7 x 31.6cm, 호암미술관 소장.

 

 

 

 근대화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땅들, 우리는 그 고느적한 습지들을 잃어버렸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북한을 다녀오고서 였다. 그 곳의

천연의 손대지 않은 땅들을 보면서 '김단원이 그린 것은 이 들녘이었구나.'

감탄하고 감탄했다. 하지만 이는 또 남한의 땅으로 돌아오면서

느낀 아쉬움이었으니, 우리의 풍경들은 왜이리 변한 것일까.

 

계속 이어지는 들녘과 작은 연못, 그리고

살찐 고기를 찾아 이곳에 몸담은 백로들이 이 그림의 전부이다.

참 아쉬운 것은 이러한 풍경들을 그린 조선화가는 김단원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오고 가며 보아오던 평범한 풍경들이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 값어치가 큰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단원이 손에 익은 붓을 써서 그린 평온하기 그지 없는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에 아무래도 불편한 마음 구석을 어쩔 수 없다.

다만 조선 땅의 아름다움과 김단원의 솜씨에 감탄하고 감탄할 뿐.  

 

 

 

김홍도. 비학도. 지본수묵담채, 27,5 x 33cm, 서울 개인 소장.

 

 

 갈필로 그려진 바위산과

키 작은 고목 왼편으로

두루미가 날아오른다.

아마도 단원은 참선중이었나보다.

비워둔 것이 허공이 아니라 

가득차서 날아오르니

선학임을 비로소 알겠다.

 

 

 

김홍도. 선유도. 지본담채, 32 x 42cm, 평양 조선미술관.

 

김단원의 그림은 산수와 풍속이 만난 명작이 많다.

깔끔한 구도며, 명료한 경물이 즐거운 선들 속에서 노랫소리가 가득하다.

저리 날아가는 3마리의 새가 그림에 보다 활력을 넣는 듯하다.

풍속이 들어간 단원 그림으로 50대 이후의 득의작이다.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1791년, 지본수묵담채, 25.5 x 32. 개인 소장.

 

 

 

 김홍도의 절정의 가장 입구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미 기이한 구도며 가득한 시정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47세의 득의작이다.

 

 

김홍도. 좌수도해도. 지본담채, 26.6 x 38.4cm, 간송미술관 소장.

 

 달마는 어느새 아이가 되었다.

지푸라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며,

그만 곤해 잠들었다.

이 가득한 맑음은 무엇일까?

 김단원이 화선이라 함은

바로 이러한 그림들에서 당당해 지는 것이다. 

그 격식은 간략하게 하면서

그 뜻은 더 높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기 그지없는 파도, 

동자를 이룬 선들이며,

그 붓질 몇번이나 들어갔고

번개보다 느렸을까. 

그리고선 그림을 살려서

이토록  감동은 가득하니,

마치 도를 이룬 스님의 발걸음같다.

선적인 경지를 내포한

단원 말년 단구 낙관의 걸작이다.

 

 

 

김홍도. 청명낭화도. 지본수묵, 41.7 x 48cm, 간송미술관 소장.

 

 홍도라고 관서가 되어있는 특이한 그림이다.

그림을 채우고 있는 것은 파도와 안개일 뿐이다.

그 속에서 파도소리만 가득하다.

단원의 그림은 항상 가득히 자연의 소리들을 들려준다. 

 

 

 

 

 

 

 

p.s) 댓글을 읽어보다가 적어봅니다.

 사실 우리에겐 우리 과거의 그림들이 익숙치 않기 때문에 그 미감을 못느끼기 쉽죠.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리 뛰어난 현대화가도 시각적 예술성만에서라도 김홍도는 따라가기 힘들다고 봐요. 요즘 기량 좋은 젊은 화가분들많죠. 하지만 20~30대 때 김홍도만한 기량을 가진분은 못본거같아요. 특히 초상화, 영모화에서는 두드러지죠. 조선의 초상화는 현대의 누구도 재현을 못해내니까요. 제가 올린 위의 그림들은 그러한 꼼꼼한 초상화와 좀 다르죠. 더 꼼꼼하고 자세하고 반듯하게 그릴 수도 있는 거지만, 그렇게 그리면 그림의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그리지 않은거에요. 이러한 미감에 대해서는, 유학, 도가 등 동양 고전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있어야 쉽게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조선사람을 현대의 동양화가들이 못따라오는 한가지 이유는, 조선처럼 현대가 일반적으로 붓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붓쓰는 것에 익숙했던 조선 사람들에 비해서, 그 붓질의 맛이 덜하기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붓을 안쓰다보니, 그 붓맛을 모르게 되고 자연 우리의 미감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술로써의 회화는 공예가 아닙니다. 공예처럼, 세세하게 장식적이고 화려한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흐, 모네, 피카소 등이 위대한 이유가 장식적이고 화려한 공예성을  추구한 데 있지 않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하지만 그런 피카소도 초기 뎃생이나, 유년 작품을 보면 치가 떨리도록 섬세하고 이상적입니다. 이 점에서는 김홍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김홍도는 초년 그림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20대인데, 그때 그려진 군선도와 30~40대에 그려진 송하맹호도 등의 영모화는 김홍도 이래로 제대로 재현한 화가가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발군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년가서 고흐, 피카소 등의 개성있는 화가들과 다름없이 김홍도도 자신의 세계를 연 것이죠.

 

 제가 올린 그림들은 주로 50대 이후 말년, 이러한 그림 수련의 최고경지에 이른 후, 유가나 도가의 사상처럼, 덜어낼 것을 덜어내고 즐거움과 화목함을 가득 표현해낸 그림들입니다.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 삼엄한 그림에서 화가가 일상의 어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김홍도는 홍도라는 그의 예명처럼 유학을 깊이 공부하고 불교와 도가학문에도 관심이 많았고 당시를 즐겨읽었던 사람입니다. 비록 출신은 중인이었으나, 선비나 다름없었던 것이죠. 이는 홍도 자신도 자인했을 뿐더러 주변사람들도 항시 찬탄했던 바입니다. 홍도는 자신이 공부한 것들을 말년에 와서 그림에 투영시켰던 것입니다. 단원의 그림은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그 의미를 투영하였기 때문에 더욱 훌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홍도는 기량도 기량이지만 그의 인품이 있기에 이러한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시 화원들이 대부분 화업에 치어 항시 정통적인 회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김홍도는 어찌된 영문인지 유독 독창적인 화법을 만들어내고, 독창적인 소재들을 많이 씁니다. 기존의 소재를 이용하면서도 상당히 그전과는 다른 그림을 그려냅니다. 이것은 김홍도가 당시에도 이미 인지도가 상당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법이나 소재 면에서 자유로웠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김홍도 작품이 모조리다 훌륭하고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너무도 위대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슬픈 것은 정작 김홍도와 같은 땅에 사는 현대인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훌륭한것이 있는데도, 다른 나라 것보다 덜 좋다는 관념에 싸여서 비하하고 아쉬워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 문화유산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보았습니다. 식민지를 거치면서 느껴왔던 감정들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것이죠. 우리 문화유산 모든게 다 훌륭하고 뛰어나고 부족한 점은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훌륭한 점이 있다면 적어도 그것이 어떻게 훌륭한지는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가요.

 

 우리 선조들과 문화유산에는 어떤 훌륭한 점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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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 '들불'

 

이순구의 들불 연작

 

작가 블로그 - 이순구 그림 Yi, Soongu Painting Art'


 
이순구, <들불>, 유화, 30호 , 2007
 
 
 
 

 
이순구, <들녘>, 유화 , 60호, 2007
 
 
 
 
 

 
 
이순구, <들녘>, 유화 , 60호 , 2006
 
 
 
 
 

 
이순구, <들불>, 유화 10호, 2007
 
 
 
 

 
이순구, <들녘>, 유화, 80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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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민국 청소년입니다.

미니홈피에서 발견한 이 사진들을 보면서

어릴 적 나의 중고딩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변함것이 무엇이지.. 분명 많을텐데 무엇이 변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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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이 말하는 화가 박항률

박항률 그림 - 정호승   

 

Meditation at Noon/2000/65.1 x 100/Acrylic on Canvas

 

 

 

박항률 그림

 

                                                                                 정호승

 

 

박항률님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갑자기 "쿵" !  하고 바위 하나가

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 바위가 꽃잎이 되어 내 가슴의 또 다른 한 곳에

사뿐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그림에서

우러 나오는 고요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정적, 그 고요함의 깊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박항률님의 그림 앞에 서면 늘 침묵과 고요함을 느낀다.

그것은 이 소란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어느 한순간,

담벼락 모퉁이에 홀로 피어 있는 백일홍을 보고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추었을 때 느껴지는 고요함과 같다.

은행나무나 모과나무 가지에 달려 있던 열매들이

바람 부는 어느날 땅에 떨어져 말없이 침묵 가운데 이루는 고요함과도 같다.

 

 

untitled/1992/130 x 130/Acrylic on Canvas

 

나는 그의 고요함 앞에 언제나 옷깃을 여민다.

그의 고요함은 고맙게도 내 현재적 삶을 정지시킨다.

더 이상 과거의 고통이나 미래의 불안 속으로

처벅처벅 걸어들어가지 않게 만든다.

내가 가장 기뻐했던 삶의 어느 한 순간에 영원히 나를 머무르게 한다.

나뭇가지 끝에 고요히 앉아 있는 잠자리를 보면 마치 오랫동안

나 자신이 그렇게 나뭇가지 끝에 고요히 앉아 있는 것 같고.

 

The Dawn/2000/72.7 x 60.6/Acrylic on Canvas

 

노랑 저고리를 입은 소녀의 머리위에 앉아 있는 새를 보면

나 자신이 그렇게 한 소녀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듯

문득 영원과 연결 된 것 같기만 하다.

나는  그 고요함과 영원함 앞에 늘 무릎을 꿇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묵상하는 자의 겸손함과 경건함이 있다.

침묵이 부족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자의 고뇌가 있다.

천년 세월 동안 가슴위로 두 손을 모우고 선 채로 살아온

운주사 돌부처들의 침묵이 있고 ,

성당의 장궤대에 무릎을 꿇고 고요히 기도하는 소녀의 순결한 묵상이 있다.

 

 

비어(The Secret Story)/2000/80 x 80/Acrylic on Canvas

 

 

박항률님의 그림 속에서는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상상의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소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날개 달린 물고기 비어(飛漁),

인간의 얼굴을 한 새 인면조(人面鳥),

해 속에 사는 세 발 가진 까마귀 삼족오(三足烏),

등에 소년을 태우고 달리는 천마(天馬) 등은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의 현재적 삶에 신화적 상상력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나는 그가 열어놓은 상상력의 문에 기대어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고 싶어하는 세계가

어쩌면 동화나 신화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A Boy/2000/39 x 29/Acrylic on Paper

 

 

아,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고요히 지구로부터 멀어져가는 초승달의 발소리가 들린다.

잠든 우리의 창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새벽별들의 발소리도 들리고,

비어가 날아다니는 푸른 하늘의 바람소리도 들린다.

나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통해서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자연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인간의 길이 있다.

그 길을 걸어가면 자연과 합일된 아름다운 인간들의 얼굴이 있다.

말이 된 소년, 새가 된 소녀, 

머리에 나뭇배를 이고 나뭇배가 된 인간의 본질적 모습이 있다.

그런 모습들이 이루는 고요함 앞에, 자연과 인간이 만나 이루는 고요함의

어느 어느 한 순간 앞에 서면 나의 마음은 평온하다.

만일 내가 새가 된다면 그가 그린 인면조가 될 것만같다.

 

 

시도 그렇지만 그림도 가난한 인간의 마음을 위안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그의 그림은 마치 가난한 동생을 염려하는, 정신없이 물질의 세계를 향해

바쁘게 살아가는 동생의 소매 끝을 살며시 끌어당기는, 누님의 손길 같다.

나는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이 무슨 생각에 그리 깊이 빠져 있는지,

어떠한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분명 인간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독과 사랑의 고통에 대하여 꿈을 꾸고 있는듯하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고통을 뛰어넘은 자의 한 순간이 엿보이는 듯해서 아늑하다.

눈물 끝에 열리는 미소가 엿보여서 평화롭다.

특히 창가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는 소년의 맑고 투명한 눈빛은 잊기 힘들다.

그 소년의 눈빛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존재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소녀(A Young Girl)/1997/40.9 x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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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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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누구는 겁이나서 못보고

누구는 빠져들어 떠나고

누구는 돈들여서 꾸미고

누구는 컴플렉스 갖는다

 

나는 어떠한가.............

 

 

아래 자화상 순서 *^^*

 

고흐,쿠르베,다빈치,뭉크,

샤갈,프리다,피카소,윤두서,

쉴레,라파엘로,모딜리아니,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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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 &quot;

 

John Singer Sargent

Carnation, Lily, Lily, Rose
1885-86,
Oil on Canvas, 

68 1/2 x 60 1/2 in.(174 x 153.7cm)

Tate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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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내리던 날

빗방울 촉촉
마른 땅 젖더니

거친 내 맘에도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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