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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되는 신체정보

거래되는 신체정보 [한겨레]2001-05-12 05판 12면 1308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980389559|WatchTV|recorded|KDVR|3134603|980127000'긴 암호처럼 보이는 이 숫자.문자 조합은 한두 가지 의미만 알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내용이다. 980으로 시작하는 숫자는 1970년 1월1일부터 지난 시간을 초단위로 계산한 것이고, 3134603은 지정된 프로그램 이름이다. 즉 "한 시청자가 (KDVR방송)에서 2001년 1월21일 일요일 오후 6시30분에 송출한 '킹오브더힐'이란 프로그램을 녹화해 같은해 1월24일 수요일 7시26분에 보기 시작했다"란 뜻이 된다. 시청습관이 이런 식으로 하루에만 100장쯤 기록된다면 당사자의 기분이 섬뜩할 것이다. 먼 미래의 얘기쯤으로 봤다면 완전 오산이다.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는 디지털 기술의 현주소다. 디지털기술을 응용한 텔레비전 녹화장치인 티보(TiVo)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영상테이프 없이도 내장된 하드웨어에 녹화해 입맛대로 골라 시청할 수 있는 차세대 개인용 기술이다. 문제는 인터넷에 연결된 티보장치가 가입자의 시청습관을 기록한다는 사실에 있다. 언제 무슨 내용을 몇번이나 봤는지에 대한 가입자 정보를 차곡차곡 기록해 장치 제공업자에게 즉시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시청습관에 대한 티보의 파악능력이 직접적으로 사생활침해 문제와 맞닿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서 발견된다. '데일리미' '협송' '원클릭' 등의 기술처럼 티보는 소비자가 보길 원하는 정보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디지털 기법이다. 취향과 기호에 부합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맞춤형 정보기술들로부터 얻는 혜택은 대개 소비자가 기업에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는 대가로 받은 것이다. 마치 자유계약의 미명 아래 '산노동'을 기업주에게 파는 노동자처럼, 소비자는 신체의 '산정보'를 닷컴기업과 거래한다. 얼마 전 (리퍼블릭닷컴)이란 책을 펴낸 미국 시카고대학 법학 교수 카스 선스타인은 닷컴기업의 맞춤기술에 지배될수록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파편화하고 개인화한 정보 서비스에 길들여진 소비자는 점점 현실의 다양성을 고려할 능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사고의 협소화가 사회적 관심사의 공유를 막는다는 논리다. 다소 비약된 감이 없지 않지만, 그의 주장 또한 기업에 관리되는 신체의 가능성을 겨냥하고 있다. 이.삼중으로 짜여진 상업적 그물코에 걸려들어 분류.관리되는 소비자 정보란 확실한 상품가치를 지녔다. 티보가 '텔레비전은 바보!'를 외치며 맞춤서비스의 장점들을 늘어놓을 때, 이에 넋나간 소비자들은 자신의 알몸정보가 슬그머니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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