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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밤의 닷컴

철없는 밤의 닷컴 [한겨레]2001-04-28 05판 12면 1304자 국제·외신 컬럼,논단 토머스 하트 벤튼은 1930년대초 산업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되는 미국의 모습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벽화에 담아냈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도시활동'은 거대 도시에 피어오르는 밤의 이미지들을 콜라주로 구성해 유명하다. 벤튼의 이 응축된 작품에서 하나의 이미지 파편을 떼어내어 영상으로 담는다면, 중국계 미국인 웨인 왕 감독의 (세상의 중심)이란 영화가 제격일 것이다.다음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칸영화제 본선 진출작인 이 영화는 벌써부터 내용의 선정성으로 말들이 많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같은 주요 일간지들은 개봉을 앞둔 이 영화 광고의 지나친 선정적 문구와 도안으로 배급사와 조율해 광고 내용을 제한하는 촌극까지 벌였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저예산 에로물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닷컴 세계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밤의 문화가 놓여 있다. 웨인 왕의 제작 동기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밤이면 스트립쇼로 향하는 젊은 닷컴 재벌가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부터다. 마치 사탕가게에 들어온 코흘리개 아이들처럼, 매일 밤무대 아래에서 환각을 구매하는 닷커머들의 철없는 모습을 통해 감독은 닷컴 현실의 일그러진 단면을 발견한다. 영화는 닷컴 붐으로 재벌이 된 젊은 리처드가 스트립걸인 플로렌스에게 1만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로 3일 간의 여행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리처드는 3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닷컴계의 거부가 돼 스트립걸을 만나고 헤어졌던 한 실제 인물을 배경으로 삼았다. 두 주인공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지만 꼭 닮았다. 뛰어난 경영능력 없이도 쉽게 일확천금을 거머쥔 닷커머에게 컴퓨터는 세상의 중심이다. 육체적 접촉 없이도 약간의 자극적 몸놀림으로 돈을 버는 스트립걸에게는 자신의 신체가 그 중심이다. 영화는 서로에게 세상의 중심으로 보이는 것들이 화폐에 중개될 때 한낱 허상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문화사가인 브라이언 팔머는 (어둠의 문화)라는 최근 책에서, 흔히 밤은 비록 모호하지만 권력과 힘의 파장이 수그러든 시간대라고 서술한다. 밤의 느슨한 문화를 통해서 낮의 지배 논리를 유추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된다. 팔머의 논의에 따르면 한 닷커머의 환각 여행은 왜곡된 어둠의 문화를 통해 본 낮의 지배적 닷컴 현실을 다루고 있다. 닷커머의 화폐로 매개된, 탐스럽지만 만질 수 없는 스트립걸의 육체에서 느끼는 허망함을 통해 관객은 현실 닷컴의 과장된 신기루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닷컴의 환상이란 마치 계속해서 꿈꾸길 바라는 몽정과 같은 것"이라는 감독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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