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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에 관한 기사 하나

세상이 노랗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흔들린다. 진실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정의는 쓰러졌다. 3월을 맞으면서 내가 바라본 일본 정부의 몰골이다.

3.1절을 비웃기나 한 듯, 이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일본군이 아시아 여성들에게 성착취를 강요한 증거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른바 '고노 담화'에 대해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나 뒷받침하는 것은 없었다"고 입장을 드러냈다.

'고노 담화'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晋三) 당시 관방장관이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일본관리들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한 내용을 담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의 강제연행 사실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로서는 이 '담화'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는 최소한의 열쇠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베 총리가 부정하고 짓밟아 버린 것이다. 혼다 의원의 말마따나 그의 발언은 "역사를 수정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며,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일본 정부의 거듭된 입장 표명에 대해서도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역사도,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문화도 우월한 나라였는가. 인류의 궤도에 이탈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왔던 조선의 역사가 그대들이 보기엔 그렇게 우스운가. 왜 함부로 세상의 분노를 자초하는가.

나는 그의 '발언'을 망언으로만 받아들일 정도로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의 발언이 장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요, 침략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군 강제 성노예 계약을 지시한 일본정부와 군당국의 행위는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일본 우익들은 연행과정에서 피해자의 자발성 운운하거나 군 위안부제를 공창제와 동일시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관여를 밥 먹듯 부인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국제법마저 무시했다. '21세 미만인 여성이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원한다고 하여도 이는 불법'이라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에 가입한 일본은 과연 어떻게 했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어린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는가. 우리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16, 17세 정도가 가장 많았고, 심지어 12, 13세의 어린이도 있었다. 연행된 조선여성들은 일본군이 지정한 곳에서 혹은 오키나와 등지에서 그들이 만든 위안소에 감금되어 반복적인 성폭력과 비인간적인 성노예를 강요받아 왔다. 이는 조선 식민지 여성 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어마 등 점령지 식민지 여성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아베 총리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어저께(4일) 그의 보좌관인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가 아사히 TV 토크쇼에 나와 총리의 입장을 전했다. "고노 담화를 따른다는 데 변화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고노 담화와 강제연행을 부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발언과의 명백한 모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죄값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순서다. 잘못을 했으면 순순히 시인하라. 어물쩡 넘겨서 될 문제가 아니다. 잔인한 범죄를 묻어두거나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 일본군 위안소 내부 모습

아베 총리는 아는가. 당신네 일본군이 우리 할머니들의 순결한 영혼을 짓밟은 나머지 15년이 넘도록 황량한 길바닥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세계 그 어느 곳에서 이런 유례를 본 일이 있는가. 지난 2월 28일로 <수요시위>가 750회째를 맞이했다. 이 기록은 단지 수요일마다 되풀이 되는 우리 할머니들의 집회횟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750일을 외쳐도 외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부끄러움의 깊이요, 야만적 범죄를 옹호해온 반역의 숫자가 아니겠는가.

아베 총리는 인류 앞에 부끄럽지 않는가. 국제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독일 정부의 나치 역사 반성을 왜 교훈으로 삼지 못하는가. 일본 정부의 속셈을 모르지 않는다.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로 규정한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서 채택되는 것을 막으려는 얄팍한 수작인줄 나는 안다. 1996년 이후 미국 하원에 제출됐던 여덟 건의 소위 '종군위안부 규탄 결의안'이 일본 정부의 치열한 반대 로비로 모두 폐기된 전례를 지금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의 역사는 일본이 만들어 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저지른 침략의 역사는 일본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역사다.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 아시아 역사다. 이 역사적 사실관계를 부정해버린다면 일본은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면할 길이 없다. 그들의 야망을 정상적으로 이룰 길이 없다.

일본은 역사적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 무릎 꿇고 아시아 국가의 민중 앞에 사죄해야 한다. 자민당을 우두머리로 형성된 극우 반동 정치인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시대착오적 망언을 남발하면서 패전 이후 어렵사니 쌓아온 전후 민주주의의 성과를 스스로 깎아내린다면 우리는 아시아 역사에서 일본을 인정할 수 없다. 아무리 경제대제국이라지만 인류의 동반자로서 우리의 기억에서 그대들을 지워버릴 수 밖에 없다.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미래세상을 열어나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당연히 이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이다. 아베 총리여, 내말이 틀렸는가?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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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포로수용소내 조선인 성노예 여성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강제 성노예 피해사례를 당한 우리 조선인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개한다. 어려운 역경과 고단한 인생살이를 거쳐오면서, 더구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본군 '위안소' 생활과 또 다시 미군 성노예 생활을 겪은 할머니의 기록을 더듬는 동안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부끄럽다. 수많은 우리 할머니들이 통곡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몸은 천근 만근 무거운데 무턱대고 달려드는 군인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위안소라는 곳

1938년. 시모노세키와 타이완을 거쳐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국의 광동이었다. 광동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열다섯명의 여자들을 모두 군용트럭에 싣고 어느 호텔로 갔다. 첫날은 그 호텔에서 밤을 지냈다. 한 방에 침대가 두 개씩 있는 서양식 호텔이었는데, 우리들을 한 방에 다섯 명씩 들어가게 하여, 침대 하나에 2∼3명씩을 몰아서 재웠다. 다음날 아침 군용트럭이 다시 와서 여자들을 태웠다. 여자들은 모두 트럭 뒤쪽의 짐칸에 탔다. 한참을 타고 들어가니 군부대가 있었고, 다시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위안소였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위안부'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도착하기 전까지 여자들은 다들 공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솔자는 무엇을 할 것이라는 말은 비치지도 않았다. 막상 도착해서도 그 곳이 위안소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 실상은 남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며, 어떻게 위안해야 하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구나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 곳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칠 때에야 비로소 무엇 때문에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청천벽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위안소에는 먼저 와 있던 여자들이 이미 대여섯 명이 있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에는 상관없이 먼저 온 여자에게는 무조건 '언니'라고 부르며 군대식으로 고참으로서의 대접을 깍듯이 해야했고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했다. 나를 포함하여 그 집에 배정을 받은 여자들 대여섯 명은 그 날부터 언니들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새로 온 여자들은 남자를 접해본 경험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니까 남자를 어떻게 상대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끝나면 뒷처리를 어떻게 하는가와 삿쿠를 끼워주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교육을 받았다.


무섭고 쓸쓸하고 비참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집에서는 아직도 철없던 어린아이였는데,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다니 기가 막혔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와서 이제는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름도 '랑코'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제부터는 마산의 처녀 박연이(가명·1921년생)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랑코'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는 첫날부터 두 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이가 지긋한 장교가 들어왔다. 군인이 자꾸 몸에 달라붙는데 그게 싫어 자꾸 밀어냈다. 아프니까 찡그리기도 했지만 신음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언니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이미 기가 꺾일 대로 꺾여 있는 상태여서 심하게 저항하거나 반항도 못했다. 보초들이 하루에 여러 차례씩 위안소 주변의 경비를 돌았다.

중국사람이 살던 집을 개조한 위안소의 방은 침대 하나가 놓일 정도의 공간으로 마치 헛간과도 같았다. 그 방에 군인이 하나 들어와 상대하고 나가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군인이 들어오고, 그 사람이 나가면 또 다른 군인이 들어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루에 상대하는 군인의 수는 30명이 될 때도 있고 40명이 될 때도 있었다. 군인을 상대한 후에는 소독실에 가서 과망간산칼리 희석액이 나오는 소독 호스로 밑을 소독하게 되어 있는데, 나중에는 질이 퉁퉁 부어 소독 호스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군인들이 줄을 대서 오니까 미처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밥상을 방 문 앞에 들여다 놔주면 씻으러 가면서 한 숟가락 떠먹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또 한 숟가락 떠먹고 할 정도였다. 월경을 할 때도 군인들을 받았다. 한 번 받고 나면 씻고 와서 다시 받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과 군인들의 위생을 각별히 중시하는 훈련을 받았다. 위안소 입구에는 들어오는 군인마다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이 담긴 대야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군의가 와서 산부인과 검진을 하고 다른 병이 생겼을 때도 군의가 치료해 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견딜 수가 없이 아팠지만 차츰 시일이 지나면서는 그렇게 여러 명을 상대하는데도 죽지 않고 몸이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젊고 건강해서인지 몸이 견뎌낸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부대에서 연회식이 있는 날이면 여자들은 기모노를 차려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연회식이 끝나면 장교들은 보통 자기 막사로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일을 치렀다. 부대로 갈 때는 자동차에 태워서 데리고 갔지만 돌아올 때는 태워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서 왔지만 밤길은 역시 무서웠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위안소가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길을 걸어오려면 나는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며 울곤 했다. 내 처지가 마치 이 깜깜한 낯선 이국땅에 아무도 의지하거나 도와줄 사람 없이 내팽개쳐진 것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군인들을 받고도 몸은 견뎌낸다 하더라도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것처럼 무섭고 쓸쓸하고 비참했다.

저녁이 되면 주인은 그 날 여자들이 상대한 군인의 수를 점검하고 군인을 적게 상대한 여자나 그 날 잘못을 저지른 여자들에게 벌을 주었다. 한 되들이 병에 물을 가득 담아서 그것을 양손에 들고 서 있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물을 흘리지 않고 꼼짝없이 서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얻어맞았다. 그리고 반항이라도 하면 더 오래 벌을 세우거나 맞았다. 집안 치우는 일로도 꼬투리를 잡히면 맞았고, 특히 상대하는 군인한테 반항하면 맞았다. 상대하는 군인은 '손님'으로 깍듯이 대접해야 했다. 손님에게 잘못하면 주인은 여자들에게 가차없이 벌을 세우거나 때리는 것이었다. 또한 손님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순위가 매겨졌다. 손님을 많이 받지 않는 여자는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쓰레기 같은 음식을 주거나 변소 청소를 시키는 등 잡일을 시켰다.


죽음을 볼수록 살겠다는 의지가 더 강렬해

나는 처음에는 무서움에 떨며 고향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생각하며 자포자기가 되어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자 그 생활에 길이 들면서 처음의 무서움도 사라지게 되었다. 소극적으로 주인과 군인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추스리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행패를 부리는 군인에게는 맞대거리를 할 줄도 알게 되었으며, 못된 군인에게는 나도 술을 마시고 같이 성질도 부리게 되었고, 군인이 때리면 나도 함께 막 치고 박고 싸우게도 되었다.

▲ 1944년 일본 나고야의 조선여자정신대. 12~16세의 어린 조선여성들이 군인에 의해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다.(위) 버마 미군포로수용소 조선인 성노예 여성들(가운데)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나가는 조선인 성노예 여성들(아래)
어느 날 동료 중에 '다마코'라는 여자가 병에 걸렸다. 열이 올라 밥도 못 먹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군인을 상대할 때는 늘 삿쿠를 사용하지만 더러 터지는 수가 있어서 임신을 하는 여자가 있었다. 다마코도 임신을 하여 배가 불러 있는 상태였다. 다마코가 어찌나 심하게 떨며 발작을 하는지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사방에서 다리를 붙잡고 머리를 붙잡으며 간호를 했다. 그렇게 다마코를 살리려고 밤새도록 고생을 했건만 다마코는 이튿날 아침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느 날은 위안소 뒤쪽에 있는 사탕수수밭에 올라갔다가 밭둑에 옹기항아리가 여러 개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봤더니 그 속에서 참을 수 없이 역겨운 악취가 풍겨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뼈다귀들이었다. 가난한 중국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송장을 매장하지 않고 동이에 넣어 밭둑에 묻어둔 것이었다. 열어 놓은 뚜껑 속으로 빗물이 괴어들어 부패하여 물러터지면서 그 속에서 토악질을 일으킬 것 같은 악취가 풍겨나왔다. 단지마다 들어 있는 그 송장뼈를 보고 나는 아주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차하면 나도 저렇게 썪어 문드러지는 송장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양잿물이나 크레졸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동료를 보았고, 폐병이 들어 고생하며 죽어가는 동료도 보았지만,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그럴수록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렬해졌다.

나에게도 죽을 고비가 있었다. 남방에서 자칫하면 걸릴 수 있는 학질에 걸린 것이다. 열이 나고 몸이 심하게 떨리는 이 병은 여러 날이 지나도 떨어지질 않았다. 키니네를 오래 계속 먹으니 나중에는 얼굴이 노랗게 될 정도였다. 게다가 주사 놓은 자리가 곪으면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야전 병원에서 썩은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나서야 그 자리가 아물게 되었다. 고통이 엄청났지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참았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지긋지긋해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서 입구의 접수대에 돈을 내면 주인은 군인에게 표를 주었다. 그러면 군인은 여자의 방에 들어와 여자에게 그 표를 냈다. 여자들은 이 표를 모아서 저녁이 되면 주인에게 가져다 주고 주인은 그 여자의 하루 실적을 장부에 기록했다. 주인은 장부에 기록한 것을 다시 한달 단위로 합산을 하여 여자들의 순위를 매기는데, 1등, 2등을 하게 되면 여자들에게 배당되는 옷 중에서 좋은 옷이 차례로 돌아오고, 음식도 좋은 것을 주곤 했다. 그리고 계속 1등을 하는 여자에게는 몇 달에 한 번씩 금반지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순위가 처지는 여자에게는 부엌일도 시키고 변소청소 등 궂은 일을 시켰다.

한창 샘이 많은 나이의 여자들을 주인은 그런 식으로 얼르고 위협하며 다스렸다. 여자들은 대접을 잘 받으려고 자연스럽게 경쟁을 하게 되었다. 군인을 많이 받으면 좋은 옷, 좋은 음식이 차례로 돌아오고, 더구나 장교를 잘 사귀면 위문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져다 주기도 하니까 나도 열심히 군인들을 받았다. 하지만 수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군인들을 다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그렇게 여러 명이 달려드니 그들이 지긋지긋하게 지겨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몸은 천근 만근 무거운데 무턱대고 달려드는 군인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활을 이겨내려니 술을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군인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순한 자도 있었지만 술을 먹고 들어와 공연히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같이 있던 동료 중에는 군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휘둘러 머리를 내려쳐서 이마를 여덟 바늘이나 꿰맨 친구도 있었다.

주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3년 동안 그 위안소에서 일한 대가로 나는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다. 고향에서부터 나를 데려오는 데 든 수속비와 여비 일체, 그리고 위안소에서 먹고 자고 입는데 든 비용과 심지어는 배당해준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빚으로 계산되었다. 주인이 여자들에게 당신 빚이 얼마다 하면 그대로 그게 모두 빚이 되었다. 뭐라고 말대꾸를 하면 막 때리니까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군인을 받으면 거기서 분배되는 액수가 나에게는 한 푼도 돌아오지 않은 채 빚 갚는 것으로 쓰여졌다. 나는 그 빚을 3년이 지나서야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광동에서 싱가포르로

1941년, 이제 스물한 살이 되었다. 그 집에서 일해야 하는 3년 기한을 마친 후 나는 광동 시내에 있는 '마츠노야'라는 위안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마츠노야 위안소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배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배뿐만이 아니라 다리까지 지릿하면서 하체가 떨어져나갈 것 같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몸이 아픈 와중에 마츠노야의 주인은 여자들을 모두 데리고 싱가포르로 떠난다고 했다. 나도 아픈 몸을 이끌고 그들을 따라 배에 올랐다. 싱가포르로 가는 배에는 군인과 간호원, 위안부들이 모두 함께 탔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는 도중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군의들이 들여다 볼 사이도 없었다. 중간에 배가 사이공에 들렀기 때문에 일행은 20일 가량 군인 숙소에서 머물다가 다시 출발했다. 이동을 하는 동안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냥 내내 고생을 하면서 싱가포르까지 갔다.

싱가포르에 내리자 군트럭이 우리 일행을 그루앙 지구로 배치하였다. 파인애플 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그 위안소에 도착하자 군의가 나와서 신체 검사를 하고 검진을 했다. 그 때에야 비로서 나는 나팔관이 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서 차차 아픈 것이 가라앉게 되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위안소 건물은 중국 사람이 살던 크고 넓은 집이었다. 싱가포르의 위안소는 대개 중국인 부호나 서양사람들이 살다 피난을 가서 비어 있는 집들을 사용했다. 그래서 집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방도 넓직한 편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건물은 4층 건물이었다. 1층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는 커다란 홀이 있고, 2층과 3층에는 방이 있었다. 그리고 4층은 창고이고 옥상은 빨래를 널어말리곤 했다. 2층에는 주인과 아이들이 살고, 3층에는 여자들이 각각 방을 하나씩 배당받아 기거했다. 방에는 세면기와 욕조,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침대 하나와 서양 사람들이 쓰다 버리고 간 냉장고도 있었다.

그 건물에 도착하여 나는 2층 계단으로 돌아올라가다가 끔찍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계단에 로프로 목을 매어서 혀가 쑥 빠져나온 채 늘어져 있는 남자의 시체였다. 그 집에 살았던 중국 사람이 목을 매고 죽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혀가 빠져 죽어 있던 그 중국인이 생각나서 무서움증이 일곤 했다. '동족은 모두 후퇴하고 오갈 데도 없는데다 먹을 것도 없으니까 계단에 목을 매었구나. 그들도 어디 한두 가지 고통만 겪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도 얼마나 고통을 겪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생각에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감만 더해

위안소의 환경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절망하여 막 가는 심정이 되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술을 더 많이 먹게 되었다. 여자들 사이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함께 있던 동료 '가네코'는 소독하라고 나눠준 과망간산칼리를 먹고 자살을 하려고 했다. 가네코가 신음하고 있는 것을 다행이 내가 발견하여 먹은 것을 토하게 하고 군병원에 연락하였다. 광동에서도 자살하려고 양잿물을 먹은 동료를 보았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일주일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나온 가네코는 그뒤 목구멍이 쪼그라들어 일년 정도는 밥을 잘 넘기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하였다.

비참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자살을 하려고 하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나는 죽을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다. 내 처지를 생각해보면 막 가는 심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죽을 수는 없었다. '살아나가야 부모 형제를 다시 만나지' 하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그 생활을 참아나갔다.

지옥 같은 생활이지만 때때로 작은 위안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위문단이 오면 군인들과 관람을 하기도 했다. 위안소의 주인인 가네카와는 광동의 주인처럼 때리거나 벌을 주지는 않았다. 여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주인을 만난 것도 생각해보면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본 군인 중에는 때리거나 행패를 부리거나 심지어는 칼을 휘두르는 등 못되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 볼일만 보고 나가는 사람이 있고, 가끔은 인정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마츠노야'에서는 군인이 낸 돈의 6할을 위안부 몫으로 받았다. 먹을 것은 주인이 해주지만 옷과 화장품, 간식거리는 모두 자기가 받은 돈으로 해결을 했다.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으로 이 때부터는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몸이 받을 수 있을 만큼 군인들을 받았다. 그러니 하루에 상대하는 군인의 수가 광동에서 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군인들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는 내 몫으로 돌아오는 돈을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전시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위안부들에게도 저축을 적극 장려하고 강요하였다. 나도 순진하게 일본제국의 저축 장려책만을 믿고 은행('다이앙 유빙 겡꼬'로 기억하고 있다)에 돈을 받는 대로 모두 랑코라는 이름으로 저축했다. 그렇게 열심히 몇 년을 모으니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정확한 액수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당한 액수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 통장은 한낱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전쟁 직후에는 일본지폐로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을 정도로 일본돈은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통장을 한국까지 가지고 나왔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날 결국 찢어버리고 말았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무슨 희망으로 돌아갈까

어느 날 위안소에 오던 군인의 발길이 딱 끊어졌다. 군인들은 다른 곳에 집결하였다고 하고, 시내는 떠들썩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손을 들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아주 갑자기 닥친 일이었다. 그 날 이전까지 나는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이 방망이를 들고 다니면서 단속을 하는데, 위안소의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기쁜 마음보다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고향을 떠나서 낯선 땅에 내팽개쳐지더니 이제는 다시 일본군에게서 버림받고 아무 방패막이도 없이 또 다시 그 곳에 버림받을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막상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그 역시 비참했다. 몸도 망치고 가진 것도 없이 초라한 몰골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조국이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나 개인에게는 앞으로의 삶에 아무런 희망을 걸 수 없었다.

그 때 자주 찾아오던 일본군이 나에게 몰래 찾아와 자기는 일본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와 함께 이 곳에서 도망가자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하던 나는 그 군인의 말을 듣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그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산 속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말레이지아인 집에 나를 데려다놓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자니 하루하루가 두렵고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레이지아인 남자 하나가 나를 강탈하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밀어내며 가까스로 그 곳을 빠져나와 도망쳤다. 원주민 여자들은 내가 울면서 말을 해도 쳐다보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제 갈길을 갔다. '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이다지도 냉담할 수가 있나' 하고 서운한 생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으니 길을 물어보려고 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산 속을 헤매고 헤매다가 고생 끝에 겨우 조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조선 사람들은 첩첩산중인 '조롱'이라는 곳에 모여지내고 있었다. 거기 모인 조선 사람들은 위안부였던 여자들과 군속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깊은 산 속에 판자를 대충 엮어 하코방 같은 숙소를 닥지닥지 지어 그 곳에서 기거를 하고 있었다.

숙소는 모두 12동을 지었는데, 1호부터 3호까지는 여자숙소로 썼고, 4호부터 12호까지는 남자숙소로 썼다. 나는 1호 숙소에서 지냈다. 한 숙소에서 몇 십 명이 함께 지내기 때문에 숙소반장을 정해서 질서를 지켰다. 그 곳은 물이 아주 나빴다. 우물을 파면 일 주일이 지나지 않아 물이 썪어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물을 안 먹을 수는 없는 일이고, 매일 우물을 팔 수도 없으니 그 물을 떠서 끓여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물을 먹고 살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군이 나누어주는 배급식량이 턱없이 모자라서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칡이나 푸성귀를 캐다가 배급받은 밀가루나 옥수수에 섞어서 밀죽이나 수제비, 강냉이죽을 끓여 먹었다. 어느 때는 먹을 게 없으니까 고무나무꽃도 주워다 무쳐먹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아입어도 흙이 황토흙이라 흰옷이 벌겋게 되었다. 게다가 옷도 변변한 게 없으니 사람마다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숙소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젊은 여자들이 있으니까 어느 날에는 말레이지아인 남자들 몇이 여자들을 겁탈하러 들어왔다. 숙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인기척을 듣고 여자들이 모두 왁작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니까 남자숙소에서 남자들이 달려나왔다. 그 바람에 말레이지아인들은 모두 도망을 쳤지만 그 후로는 마음놓고 지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고 해가 바뀌어 1946년이 되었다. 마침 우리를 태우고 갈 배가 도착하였다고 했다. 커다란 미군화물선이었다. 우리 여자들은 룩색(등산용 베낭)을 둘러매고 군속들과 함께 배를 탔다. 배는 컸지만 풍랑이 심해 배멀미를 몹시 했다. 그 배는 타이완을 들러 부산에 닿았다. 부산에 도착하니 3월이었다. 싱가포르는 더운 지방이라 여름옷을 입고 나왔는데 부산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영도 다리 근처의 앞바다에 내렸다. 그 배에서 내려 작은 전마선을 타고 육지로 건너오는데 배를 젓는 사람이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조선 입성이었다. 나는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조선 사람을 보면서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내 처지를 생각하니 참 처량했다.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멀건 미역국에 밥을 말아주었다. 여자들은 그것을 먹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전에서는 여자들에게 돈 천 원과 차표 한 장씩을 주었다. 하지만 해는 다 져가고 차 시간도 맞지 않아서 나는 그 날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수용소의 숙소반장을 따라서 한 여관으로 들어가 그 날 밤을 묵었다. 한 방에 든 여자들 몇이 막걸리를 사다가 마시며 고향에 돌아온 것과 헤어지는 감회를 서글프게 달랬다.


고향집에 돌아오니 냉기만이 감돌고

다음날 아침 여자들은 각자 자기가 탈 기차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당시에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고향집 근처에 다다르니 전염병이 도는 동네 어귀마다 새끼줄을 쳐놓고 출입을 막고 있었다. 길을 돌아 드디어 마산의 오빠집에 도착했다. 집에 딸린 참기름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기계는 모두 뜯겨져 없어지고, 썰렁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전쟁 말기에 일본이 조선에 있는 쓸 만한 쇠붙이를 공출해 갈 때 오빠 가게의 기계도 다 뜯어가고 놋그릇도 다 가져간 것이었다. 게다가 오빠는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가 올케언니와 여덟이나 되는 조카들은 양식도 없고 땔감도 없어서 굶주린 채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더구나 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정신이 나가서 집을 나가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듣자 나는 기가 탁 막혔다.

나는 수중에 남은 돈을 다 털어서 올케를 주며 양식을 사오라고 했다. 그것은 부산역전에서 받은 돈 중에서 차비로 쓰고 남은 돈이었다. 이제 수중에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카들은 저녁상에 오른 죽을 보자 서로 다투며 걸신들린듯 먹어치웠다.

얼마 후 징용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형편도 어려운 오빠집에 얹혀서 하는 일 없이 그렇게 밥을 얻어먹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식구들은 모두 내가 어디 갔다 왔다는 것을 눈치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자연 큰 조카들의 눈치가 좋지 않았고, 가뜩이나 먹을 것도 없는 집에 군식구가 늘어 양식을 축내고 있으니 올케도 궁시렁거리며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집에 앉아만 있어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올케와 말다툼이 생겼다. 나는 내가 밥을 많이 달라고 했느냐 뭣 때문에 그러느냐며 대들었고, 그 말을 들은 올케는 얼굴이 시뻘개지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큰 조카가 제 어미를 편들면서 내 옷가지가 든 보퉁이를 마당으로 내던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 길로 집을 나와버렸다. 고향에 돌아온 지 일 년 남짓 지난 후의 일이었다.

집을 나와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의 집에 들르니 어디를 가면 돈을 벌 수 있는데 그런데나 가지 그러냐며 한 곳을 소개해 주었다. 가보니 술집이었다. 얼굴이 반반한 처녀가 홀로 몸뚱이만으로 의탁할 수 있는 길은 결국 그 길밖에 없었다.


집을 나와 객지로 떠돌다 미군 상대 위안부가 되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창녕에 있는 작은 시골 술집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시골사람들이 나에게 달라붙어 술을 잔뜩 퍼먹이고 못 살게 굴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곳을 나와 밀양의 어느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집 주인 남자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내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나 막막했다.

나는 다시 부산의 영도로 갔다. 어릴 적에 야학에 함께 다녔던 친구가 돈을 벌러 가자고 하여 따라나선 것이다. '청춘관'이라는 이름의 술집었는데, 술만 팔아가지고는 장사가 시원치 않으니 월급은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했다. 한 일 년쯤 그 집에서 지내다가 그 집을 나와 해운대로 갔다. 돈을 벌자고 따라나섰는데 그 집에 계속 머물러 있어가지고는 돈을 벌 도리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때가 1948년 무렵, 내 나이 스무여덟 살 때였다.

그 때부터 나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안부가 되었다. 처음 시작한 곳은 해운대 바닷가의 헛간 같은 집이었다. 바닷가에 외떨어져 있는 집으로 원래는 뱃사람들이 쓰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다시 초량으로 가서 여러 군데를 옮겨다녔다. 돈을 벌려고 나선 것이니까 어디고를 가리지 않고 흘러다녔다.

그렇지만 영어를 잘 할 줄 모르니 미군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어서 곤란한 경우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군들 중에는 제맘대로 안된다고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총까지 겨누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한 미군이 제맘대로 안되니까 나를 논바닥으로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라고 위협하며 총을 겨눈 적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했다. 한밤중에 나는 벌벌 떨며 손을 들고 서있었다. 이제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그 미군은 한 번, 두 번, 세 번을 겨누더니 안되겠던지 나를 끌어잡아당기며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 떠돌아 다녔다.

대개 업소의 주인과 위안부는 수입을 반분했다. 돈을 벌려니 힘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힘이 닿는 대로 손님을 받았다. 얼마 지나 돈이 좀 모이자 나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장사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결국은 색시장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부산에 집을 하나 얻고 여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여자들에게 옷을 해 입히고 선금을 주었는데 모두 떼어먹고 달아나 버렸다. 그러니까 해보지도 못하고 거덜이 난 것이다. 처음에는 기가 막혔지만 곧 체념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딱한 처지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데 그 여자들을 어떻게 찾겠는가 생각하며 더 찾지 않았다.


흑인 혼혈아를 낳고 모진 고생을 겪고 살아

다시 미군들이 많이 주둔해 있는 평택으로 올라왔다. 평택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서른다섯 살 무렵에 한 흑인병사를 알게 되었다. 그 군인과 마음이 맞아 위안부를 그만두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 때까지는 한 번도 임신이 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을 만나고는 희한하게 아이가 생겼다. 그런데 한참 살림재미가 생길 무렵에 그는 만기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만삭의 몸이었다.

나는 고향인 마산의 석정리로 내려가 방을 하나 얻어 거기서 몸을 풀었다. 서른여섯 살의 초산이었다. 아기는 아버지를 닮아 검은 피부, 고수머리의 아들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 나는 다리가 퉁퉁 붓고 허리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게다가 요도까지 막히고, 변도 제대로 못 보면서 거의 3년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몸이 아파 고생을 하며 지냈지만 옆방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다행이 아이 아버지가 미국에서 편지도 보내고 조금씩 돈도 부쳐주어서 그것으로 아이의 우유값을 했다. 그 때는 한 집에 세든 사람들의 살림형편도 모두 어려웠는데 그래도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살았다. 없는 돈이지만 내가 조금 도와주면 그 집에서도 나를 도와주고 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아들이 첫돌이 지난 후 아이 아버지가 다시 한국에 나왔다. 아이를 데리고 그를 따라 그의 주둔지인 제주도로 갔다. 그런데 아이 아버지는 내 몸이 성치 않으니 다른 여자들에게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속을 썩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 술이 늘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술을 마시고 다른 여자에게 가서 귀대 시간에 맞춰 부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일이 생겼다. 한 일 년쯤 지낸 후였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그는 다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연락이 끊어졌다.


고혜정(조사정리·정신대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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