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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에 관한 개똥철학

사랑과 연애에 관한 개똥철학

정 지 영 | 정책부장

즐겨 읽는 만화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나나」라는 일본만화다. 거의 모든 순정만화가 그렇듯이, 이 만화의 중심테마도 ‘사랑’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등장하는 멋진 남성들이 모두 좋아하게 되는 여주인공’도, ‘온갖 고초에도 꿋꿋한 생활력으로 재벌 2세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주인공’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밝은 모습으로 주변 남성들의 애틋함을 한 몸에 받는 여주인공’도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모든 아픔 끝에 왕자님을 만나 행복해지는 신데렐라도 없다. 오히려 ‘사랑’을 하고 있어도 외롭고, 불안한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그녀들이 현재의 사랑이 아닌 또 다른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고 해서 그 외로움과 불안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듯, 「나나」는 늘 안타깝고 가슴 아픈 느낌을 준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지, 나는 순정만화를 보며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성공하는 커플을 보며 행복감(대리만족인가?)을 느끼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나나」를 보면, 갑자기 현실을 실감하듯, 신데렐라 이야기에 행복해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런 느낌이 이해될 수 있을까? 늘 누군가 ‘특별한’ 사람이 생겼으면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여전히 허전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 말이다. 얼마 전에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
“이상하지, 연애를 하는데도 외로워. 그 친구는 사람을 참 외롭게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
이 얘기를 들은 나와 내 친구는 그 선배에게 “그게 당연하죠. 연애가 모든 것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라고 대답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은 쉽게 했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사랑’에서, ‘연애’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사랑’이란 ‘아름답고, 소중한’ 감정이고 가치라는, 사회의 여러 관계와 문제들과 동떨어진 순수한 무엇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사랑’에 바라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듯하다. 힘들고, 괴로울 수 있는 사회와 삶의 여러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고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길 바랄 수도 있고, 나에게 부족한 절반을 채워줄 ‘반쪽’을 만나기를 바랄 수도 있다. 물론 성욕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어려움은 콜론타이의 말처럼 “사랑이 절대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만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사랑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사회의 요구와 이익에 맞춰 적합한 형태의 사랑이 배타적으로 조직되어왔다. 봉건제 시대에 기사와 귀족부인의 정신적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체적-정신적 사랑을 가족 내로 통합시키는 동반자적 사랑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그러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소유에 대한 상속과 노동력 재생산 시스템을 유지하기에 적합하도록 장려된 가족형태는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상화하는 사랑과 결부되어있다. 가족을 구성하는 두 당사자는 계약이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다. 집안간의 중매, 부모의 의지에 따라 추진되던 결혼이 당사자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자유연애를 통해 성사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평생을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 결혼이고 가족이란 생각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사이는 특권화되고, 그렇게 꾸려진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 관계가 투영되지 않는 포근한 안식처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사랑과 가족은 결코 사회에서 동떨어진, 사회적 관계가 투영되지 않는 어떤 섬이 아니다. 연애를 해도 외로울 수 있고, 내 반쪽을 찾아도 안정감을 못 느낄 수 있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도 사회적 관계가 투영되는 것이라면, 여성에게 주어진 부담과 억압 또한 비켜갈 수 없는 것 아닌가? 아까 말한 선배의 경험 또 한 가지. 연애를 해도 외로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선배는 여러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단다. 그 때 친구들이 보인 반응은 참으로 흥미로운데, 여성들은 대부분 수긍했고, 남성들은 대부분 ‘연애를 하는데 왜 외롭냐’는 반문을 했다고 한다. 일과 사랑을 당당히 병행할 수 있는 남성들은 연애 관계에서 여성에게 바라는 것은 ‘일’과 분리된 편안함, 안정감과 같은 순전히 ‘사적인’ 감정들인가 보다. 그리하여 그런 욕구를 받아줄 수 있는 대상이 생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들에게 그런 대상이 되어줄 여성들은 언제나 갈등적이지 않을까? 배려와 순종, 편안함을 미덕으로 배우고 자란 나는 늘 갈등한다. 내가 활동하고 운동하는 그 속에서도 늘 여성임을 자각하고,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항상 날카롭고, 예민해야 한다. 그리고 연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이런 예민함을, 그리고 예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얼마나 피곤하고, 외로울 것인가.

사랑에 목숨 걸고 싶지 않아서, 사랑이 나의 날개를 결박하는 족쇄가 되기를 원치 않아서 나는 늘 우선순위를 되뇌인다. 사랑과 애정이 두 사람만의 배타적인 감정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바라는 인간 해방, 여성 해방의 세상에서 새롭게 형성될 남녀의 관계를 위하여,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자 한다. 나 또한 사회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것은 늘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다시 만화 이야기. 「나나」에는 두 명의 나나가 나온다. 한 명은 사랑에 목숨 거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인 나나다. 그녀는 삶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면하기보다는 숨어버리는, 그래서 언제나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하는 여성이다. 하지만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결국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현모양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다지 기쁘지만은 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듯하다. 또 한 명의 나나는 프로 데뷔를 목표로 하는 밴드의 보컬이다. 사랑 ‘따위는’ 믿지 않지만, 집착과 소유욕은 대단하다. 사랑보다는 자신의 음악을 선택하는 자존감을 가진 여성이지만, 늘 어딘가 공허한 느낌을 느낀다. 둘은 서로에게 커다란 의지와 지지가 되지만, 서로의 선택에 대해선 침묵한다. 사랑에 목숨을 걸던 아니면 사랑을 믿지 않던, 그들이 처한 삶의 현실이 개인적인 선택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서로 간에 연대를 형성하고, 여성이 당당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결국 결론은 너무 뻔하지만,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다. 아직은 한참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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