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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러기가 주는 교훈 2009/05/01
  2.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2009/04/26
  3. 그까이꺼 아나토미 2009/04/26
  4.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2009/04/26
  5. 드라마처럼 살아라 3 2009/04/23
  6. 통속, 신파, 유치찬란 2009/04/23
  7.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2009/04/23
  8. 중독, 후유증 그리고 혼돈 2009/04/23
  9. 화이트아웃 2009/04/23
  10. 그의 한계 2009/04/23

기러기가 주는 교훈

기러기가 주는 교훈

여러분은 간혹 기러기의 무리들을 실제로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비행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의문을 품어 신적은 있습니까?

과연 이런 의문들,...


1) 기러기는 왜 무리를 지어서 비행을 할까 ?
 

2) 왜 저런 형태로 비행을 할까 ? 

3) 무리 중 맨 앞에 있는 기러기의 역할 은 무엇인가 ?

4) 비행하다 무리 중 부상자가 생긴다면 ? 

5) 비행하면서 대화는 하는 걸까 ? 


이상은 조류 학자들이 의문을 재기한 내용 들이 엇습니다. 그리고 의문을 풀 여고 연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1) 기러기는 왜 무리를 지어서 비행을 할까 ?

기러기는 겨울나기가 되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인간의 속도로는 따라 잡을 수 없는 속도와 쉴 새 없는 날개 짓으로 수천 킬로를 날아갑니다. 그리고 비행은 혼자가 아닌 꼭 무리를 지어서 날아갑니다. 무리를 지어서 비행을 하면 혼자 비행 할 때보다 훨씬 먼 곳 까지 비행 할 수 있다고 합니다.


2) 왜 저런 형태로 비행을 할까 ?

기러기가 진행 방향을 V자 형태로 그려서 날아가는 모습을 우린 간혹 보게 됩니다. 

간 혹 아닙니다. 기러기는 이 형태를 유지하며 수천 킬로미터를 비행 하여 목적지에 도착 합니다. 왜 ? 그렇게 무리지어 비행하는 걸까요? 기러기 무리 행렬 하나하나 의 날개 짓 으로 바람을 거스르는 풍력을 일으켜 보다 멀리 날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기러기들의 날개 짓 으로 바람에 힘을 싫어 앞의 기러기가 보다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기러기 무리들은 이러한 동력으로 여태껏 살아 갈수 있었습니다. 무리의 동력 그건 자율의 협력 심에 흐트러짐이 없기에 가능 했든 것 이라 봅니다. 무리중 하나가 나 혼자만 살겠다고 무리를 이탈 했다면 , 그 기러기는 영영 동료들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이고,  추위와 배고픔에 목숨을 잃어 갈 것이 분명 하기 때문 입니다.


3) 무리 중 맨 앞에 있는 기러기의 역할 은 무엇인가 ? 

기러기 무리 중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는 리더 입니다.

하지만 리더가 한명이 아닙니다. 무리 중 어느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뒤 에서 바람을 싫어줘서 리더가 멀리 날아 갈 수 있지만 앞에 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앞엔 공기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 입니다.즉, 오랜 비행 중 눈도 침침해 질 것 것이고 날개도 찢겨지는 고통을 감수 하고서 날아가니까요.

리더가 힘겨워 무리에서 치솟아 오르면 리더를 자진하는 무리 중 한마리가 치솟아 올라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맨 뒤에 기러기는 앞전 리더를 한 기러기에게 맨 뒷자리를 양보하면서, 빈자리를 채워 V자 형태를 계속 유지하며 목적지 까지 날아간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4) 비행하다 무리 중 부상자가 생긴다면 ? 

기러기는 무리 중 한명이 부상하면 무리 중 2마리가 부상당한 1마리를 따라서 육지로 안착하고, 부상당한 1마리가 완케될 때 까지 기다리고 보살핀 다고 합니다.

 

그리고 완케 되면 3마리가 협력하여 날아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 죽게 되면 다른 무리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무리가 보이면, 합세하여 목적지 까지 날아갑니다. 머나먼 여행 중 무리들이 무사히 함께 도착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바램이 모두의 바램과 같기 때문 입니다. 우리 모두 도착지에 무사히 도착 할 것 이라는 것 !
나 하나라도 무리에 자그마한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 !

이들은 공통의 목적을 품고서 날아가는 것 입니다. 도중에 힘이 들지만 주위엔 항상 동료들이 위안을 해주고 힘을 붇도다. 줍니다.

기러기의 리더는 무리를 보좌하는 역할 즉 코치의 역할을 한 것 입니다. 권력으로 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리고 기러기 무리 에서 리더 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러기 무리들은 자율적인 행동으로 서로를 보좌 하고 있음에 무리 그 자체가 리더 인 것 입니다. 

  리더는 내 동료 들이 바라는 뭔가를 알고 있어야 되고 이런 바램이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보조 해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리더는 경험으로 알고 있든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식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 달하여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받은 지식은 곧 지혜로 거듭 나는 것입니다.

 

5) 비행하면서 대화는 하는 걸까 ?  

기러기는 여행 중 대화를 합니다.

목적지가 어디야! 아이고 힘들어 ! 나 죽겠다 ! 하면서 대화를 진행한다면 이 무리가 목적지 까지 도착 할 수 있을까요 !

천만에 말씀 단 한 마디도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바람을 가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자아~ 다들 힘내 우린 꼭 목적지 까지 도착 한다. 다들 힘내자고 ! " 
비행 중 대부분이 이러 한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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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13:02 2009/05/01 13:02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한겨레  
 
 
»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Q 마흔살 독신 직장여성입니다, 혼자 노는 게 너무 싫어요

마흔살 독신 직장여성입니다.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책읽기와 여행이 취미입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 여행을 떠나고 취미생활을 할 마음 맞는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릴 직장동료·선후배·학교동창은 많지만 그냥 술친구거나 가정생활에 매여 외출을 못 나오죠. 운동도 함께하고, 산에도 같이 가고, 여행도 함께 떠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없어 너무 심심하고 답답합니다. 동호회 같은 데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쑥스럽고, 굳이 그래야 되나 싶고요. 한편, 저와 처지가 비슷한 직장동료이자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문제는 저와 성격이 딴판이라는 겁니다. 휴일에는 집에서 편히 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타입이라 억지로 함께 여행도 가고 이런저런 계획도 세워 봤지만, 어쩔 수 없이 좇아오는 친구도 불만이고, 저 역시 편치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함께 재미나는 일을 계획하고 나눌 마음에 맞는 친구를 구할 수는 없을까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요. 혼자 노는 것은 너무나 싫어요.

 

 

A 서점에 가면 오지여행이니 테마여행이니 하며 이런저런 잡다한 여행책이 많이 보입디다. 붐인가 봅니다. 나는 저런 책들이 갑자기 많아진 틈새적 이유가 실은 당신처럼 ‘여행갈 상황은 되는데, 같이 갈 인간이 마땅찮아서’가 아닐까 슬쩍 의심해 봅니다. ‘에라, 책이나 뚝딱 한 권 쓰자!’ 식의 이유있는 여행이면 혼자 용기내 들어간 식당에서도 밥 기다릴 동안 메모 끄적대는 흉내내면 왠지 좀 있어 보이고 외로움도 글빨로 승화되잖아요. 인세도 벌어 심지어 막 생산적이야. 어쨌든 나이 좀 잡수신 싱글녀 치고 만만한 여행친구 찾는 거 그거 누구에게나 보통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당신 같은 에너자이저 커리어우먼, 듣자하니 쉴 때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일 좀 한다는 여자분들, 대략 두 타입이시죠. 평소에 ‘달리니까’ 여가에는 시체놀이하시는 분(그 직장동료처럼), 아니면 당신처럼 ‘이 아깝고 소중한 시간’을 최고로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일’처럼 뽕을 빼시는 분. 후자들이 오버하면 잰걸음으로 여기저기 ‘찍고’ 돌아다니는 건 기본이요, 시간별 동선 짜고 될수록 사이사이 셀카는 부지런히 찍으시지요. 여행계획 짜기 위해 기본 여행서 세 권은 비교분석해 줘야 직성도 풀리시죠. 퇴근 후, 재즈댄스 중급반 같은 곳에서 만났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 맨앞 중간 자리 사수하며 땀 뻘뻘 팔 훠이훠이 휘두르며 추실 그 분들이시죠. 팔 닿을까봐 옆 사람 더 저리 비키라고 눈치주고 …. 본인들은 그저 열심일 따름이지만 옆사람 좀 피곤하겠죠?

그렇다고, 보아하니 당신 좀 피곤한 스타일 같은데, 대충 그 나이면 혼자 알아서 좀 놀아, 이 말을 “현대의 성숙한 여성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스타일리시하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싶진 않습니다. 동반자 없이도 너끈히 활개치며 잘 살 것 같은 이런 분들이 실은 타인을, 혹은 관객을 더더욱 필요로 하니깐요. 다만 그 진심을 보이는 것에 인색할 뿐 - 잘난 내가 초라해 보이는 게 싫거든요.

사실 ‘여가친구 찾기’의 가능성은 널려 있지만 일일이 가능성 타진하는 게 치사하고 번거로워서 못해먹는 겁니다. 절박하게 정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운 거지요. 꼭 올드미스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우리 모두의 딜레마. 평소엔 혼자서도 멀쩡하다가 꼭 무슨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이브나 휴가 같은 특별할 때만 사람 찾는 공황발작을 일으키지요. 당신이 처음부터 가능성을 배제한 그 직장동료·동창·선후배들에게도 엇비슷한 경우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종종 묻지 않고 지나가기에 그냥 늘 나 빼고 남들은 즐겁게, 바쁘게 보낸다고 착각하며 지레 토라지곤 합니다. 그간 당신을 동반해 준 그 직장동료도 조금만 그녀의 취향을 반영해 본다면 창의적인 절충안 나올 수 있습니다. 동호회요? 오프라인에서 잘 자리잡으신 분들, 굳이 수평적 관계를 가장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태생도 모르는 연하 것들에게 ‘님’자 붙여가며 맞춰주는 거 솔직히 짜증나죠. 그렇다면 아예 직접 동호회나 클럽을 만들어서 본인 위주로 하우스룰을 설정해서 이기적으로 운영해 볼 수 있잖아요! 당신과 유사한 에너자이저 골드미스 언니들(더불어 운 좋으면 골드미스터들), 오프라인으로 서로 접점 찾기가 힘들어 곳곳에 안쓰럽게 센 척 서식하고 있으니 평소의 업무 추진력으로 단결시켜 볼 만합니다.





번거로워 보이나요? 인간관계, 그거 원래 좀 번거롭습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의 마흔 전후 싱글 언니들에게 휴가여행에 대해 물어보니 죄다 번거로워서 ‘걍 혼자 갔다’고 토로하더군요. 다만 덜 초라해 보이려고 이 언니들 꾀 써서 일거리를 일부러 만들어 ‘출장’으로 둔갑시켜 휴가갔다 합디다. 저에겐 이런 꼼수가 훨씬 더 번거로워 보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내가 남들을 먼저 소외시켜 놓고서는 내가 외롭다고 징징대는 거지요. 외롭다는 그 말도 대부분 직접 못하고 기껏해야 엄한 개인홈피에서나 불특정 다수에게 어리광을 부려보며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에게 맞춰주길 바라지요. 원스톱 효율성(이거 순전 당신의 직업병)으로 운동·등산·여행의 팔방미인 짝궁이 돼 주면서도 내 입맞에 맞는 사람이라니! 당신이 예의 적극성을 발휘해 먼저 팔을 뻗어본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겠죠? ‘사람찾기’도 ‘노는 것’처럼 해 보시길. 겉으로 우아해 보이려면 물밑에선 더 와일드하게 들이대야 하는 겁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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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3:53 2009/04/26 23:53

그까이꺼 아나토미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물론 부모 욕망에 응답코자 하는 건 모든 아이의 숙명이다. 그리고 거기 부응치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자도 없고. 거기까진 정상이다. 사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욕망에 호응하느라 부산하다. 삶 자체가 인정 투쟁이라고.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밸런스의 문제다.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길은 당신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다만, 결코 친절해지진 말라는 거.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어느 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덧붙임-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아니 사실은 애정까지도, 그 선을 넘어선 안 되는 법이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선이 없단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런 인간들, 고민상담 안한다. 사람들이 자기 고충을 털어 놓는 건 문제를 대신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해 달라는, 일종의 투정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그러는 거 엄살이라 여긴다. 하여 이런 자들, 혼자 간다. 동지로 든든하다. 인장강도 대단하니까. 근데 당신은 바로 그게 야속하다. 연인이라면, 주요한 삶의 결정들과 자신에 대한 애정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고 믿으니까. 그녀가 중요한 결정을 혼자 했다는 데서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연인의 삶이 나와 별개로 진행된다는 건 사랑이 온전하지 않다는 방증이니까. 그래서 당신은 신뢰와 존중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그쳐봐야 그녀는 그런 말을 할 필요의 유무와 타이밍의 적절성에 대해 논증할 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냐. 당신이 그녀의 문제해결방식을, 당신에 대한 본질적 애정과 연결해버린 지점부터. 그랬다는 건, 당신은 그녀가 그렇게 생겨먹었단 자체를, 당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는 소리다. 듣고 보니 웃기지 않나. 근데 당신 같은 사람, 적지 않다. 왜 그런 구린 오판들을 하는 걸까.

 

인간들이 그만큼 사랑의 합일성과 완전성을 신화화해온 덕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어떤 ‘별개’도 존재해선 안 되고,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만유인력에 필적할 무슨 우주적 정당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오해는 풀고 가자.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그저 다른 모두의 감정만큼만, 딱 그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완전하기는커녕 가장 불완전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제발 유난 좀 떨지 마시라.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때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니까.

 

결혼, 그 사람이 아니라, 아차 그 사람인 줄 안 자와 하는 거다. 제 욕망이 영사한 홀로그램에 지가 넘어가는 거지. 하여 사기당했단 결혼 후 원망은 애초 자신의 착시에 그 본원적 귀책사유 있는 거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런 쌍방 오판 없인 결혼의 성사 빈도 자체가 현격히 낮아질 게다. 불완전한 인간이 제한된 정보와 시간 안에 다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평생 동지로 간택하는 일대 도박을 감행하는 데 그 정도 착시조차 없다면 대체 어느 간 큰 인간이 결혼을 하겠나. (그 맥락에서 이 착오는 그저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종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진화된 인간 심리의 능동적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 결국 제 수용한계 안에 있는 착시였냐 하는 문제만 남는 거다.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건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자신의 대응뿐이다.

 

첫째, 연애는, 능력이다.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습득하고 연마해 획득하는 능력이라고. 그러니 닥치는 대로 연애하시라. 왕자가 우박이냐. 하늘에서 떨어지게. 모집단을 확대하시라.
둘째, 연애는, 연애 자체가 목적이다. 두근대는 기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 사랑받고 있단 포만, 뜻대로 안 될 때의 탄식, 섹스하는 격동…. 그 모든 걸 오감으로 누리는 거다. 그 외는 다 잡소리.
셋째, 결혼은 운명이 아니라 제도다. 당신, 재산세 내러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결혼하러 태어난 게 아니라고. 관계의 목표가 결혼인 자들, 기껏 결혼밖에 못한다. 대다수가 결혼하고서야 그걸 깨닫는다만.

 

 

자신감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패배의식을 동반한다. 외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 제시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예를 들어 공부 잘해 남에게 인정받아 만들어진 자신감은 나보다 공부 잘하는 놈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스스로 구축한 자존감은 남의 승인이 필요 없다. 물론 남이 날 좋게 봐 줬으면 하는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니어도 자존감이 튼튼하면 나는 그대로다.

 

 

컴퓨터의 세계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이진수 0과 1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다. 자연의 인간은 그렇게 단속적일 수가 없다. 인간 자체가 유전적 연속성의 산물이다. 0과 1 사이에도, 무수한 관계, 촘촘히 실재한다. 그저 그 사이 존재하는 관계들에 각각의 제목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왜? 무서우니까.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 남다른 관심 주는 자와의 관계, 불확실하다. 그러니 두렵다. 그러다 상처 받으면 어쩌고 나만 손해 보면 어떡해. 그렇게 보호본능에 본전의식으로, 인간들, 0과 1에만 제목 달아뒀다. 제목 달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위협 자체를 부정하고, 넉넉한 안전거리를 확보해두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배타적 단어, 연인, 실제 사고 자체를 그리 속박하는 힘, 분명 있다. 모든 애정 관계는 모름지기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니거나, 그 확고한 이분의 범주 내에 있는 게 마땅하다 믿게 하는 힘, 그렇게 제목의 유무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제목을 달지 않았다 해서, 그렇게 외면해버린다 해서, 그런 속성의 관계까지 자동 소멸해버리는 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따로 정해진 항목이 없어 대략 0.64짜리 연인이라 해야 할 관계, 세상에 실재한단 말이지. 서로 아끼고 때론 섹스 하지만 1짜리 연인은 딱히 아닌 관계, 혹은 섹스는 없되 연인 이상 소통 연대하는, 결코 0이 아닌 관계, 존재한단 말이지. 실재하는데, 이거 대체 어쩔 거냐고.


기실 이거, 단순한 연애의 문제,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 나를 얼마나 열어둘 것인가, 그 위험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잠글 것인가. 그렇게 삶의 공포와 대면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 문제인 게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옳고 그름 따윈 없는 거다. 0과 1로만 한정해도,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그 리스크를 누가 대신 감당해 줄 건가.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0.64도, 스스로 그 비용을 감당해 가는 한, 그저 제목 없단 이유만으로,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는 거다. 그 관계로 향유할 수 있었던 환희와 탄식, 기쁨과 절망, 그 삶의 풍성함은 누가 보상해줄 건가


하여, 두 사례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그 관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제 나름의 생명력으로 자라가는 데까지, 한번 따라가 보라고. 제목이 없단 건,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설명할 방도, 찾기 어렵단 소리다. 있는 제목에 욱여넣으란 사회 압력도 작용한다. 쉽지 않단 말이다. 허나 익숙하지 않을 뿐, 0.64도 그 나름의 엄연한 관계규범 가진, 1짜리만큼이나 온전한, 하나의 관계다. 애초부터 출발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1짜리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맺는 게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계의 방정식 아니라고.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하나.


그러니 그 불안,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요량이라면, 가 보는 거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관계의 궤도를, 둘이서만 돌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그 관계는 나름의 내적 완성 이룬 거다. 그리고 그로 인한 즐거움은, 1짜리에,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생겨지더냐.

 

스킨십 없지만 연인 이상으로 소통 연대 집착하는 관계, 있을 수 있다. 반대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린 그런 관계, 연인이거나 혹은 연인이 아니거나, 양단간에 하나로만 판정하려는 조바심 있다 했다. 왜. 적확한 제목, 명료히 안 떠오르니까. 불편해서. 두려워서. 그러나 그렇게 낯설다 해서 관계가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그 관계가 불완전하거나 비정상이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제목 없는 관계’는, 그저 제목만 없을 뿐, 그 나름의 내재적 논리와 생명 가진 하나의 완성된 관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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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2:52 2009/04/26 22:52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먼저 야박한 소리부터. 누굴 탓하리. 다 큰 어른들 자유연애의 원천 귀책사유, 언제나 본인에게 있는 법. 사후에 대형 하자 적발하고 하소연해 봐야 사람들, 관심 없다. 애초 지 선택인데 뭐. 그리고 그게 그 바닥에서 제3자로서 마땅한 자세. 그러니 해당 사안으로 사회생활 동료들로부터 위로나 이해받겠단 작정은 버리시라. 당신이 억울하다 해서 그들에게 당신을 이해해줘야 할 의무없다. 혹여 그들이 던질 몇 마디, 적선이다. 그러니 창졸간 불우이웃 되기 싫거든 그들 붙들고 호소 따위 절대 마시라. 그렇게 자기 상처 사방에 문대봐야 지 털만 빠진다. 연애로 말미암은 희열이 온전히 당신 것이었듯 그로 비롯된 비탄도 고스란히 당신 몫이다. 그게 어른들 연애의 기본 이치다.

 

 

‘내짝독점’+‘남짝찬탈’ 욕망이 ‘제짝피탈’ 공포와 합의 본 절충안, ‘한번에 한넘만’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 주류 규범일 순 있어도 절대선은 아니다. 안전과 안정 대신 불안과 이별 위험 감수하며 맥시멈 쾌락에 베팅하는 선택 자체는, 곰곰이 따지고 보면, 세계관의 영역이다. 다만 연애라는 도전에 응하는 제 방식이 그러하다면 상대에게 충분히 미리 고지하고 합의를 봤어야 했고, 저간의 사정으로 고지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사후 발각되는 결례는 저지르지 말아야 했다. 사전고지 생략은 비겁하고, 사후발각은 무능하다 하겠다. 그러나 비겁과 무능을 비난할 순 있어도 그 선택 자체가 옳고 그르고의 범주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일부일처도 인류 경험칙에 따른 합의일 뿐.

 

 

성이란 게 다 권력의 문제라는 거예요. 힘있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를 신화화해 불변의 질서인 양 유포하는 거죠. 종교도 동원되고 문학도 동원되고. 상징체계는 다 동원돼요. 그래서 남자들의 욕심이 합법, 율법, 도덕으로 변장을 하죠. 생각해 봐요. 여자가 불편한 걸 여자가 왜 만들었겠어요. 여자가 불편한 건 다 남자들이 발명한 거예요.

 

 

중요한 건 섹스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삶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온전히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예요. 삶에 대한 통제권에 밑줄 쫙. 남들이 강요하는 규범에 대해선 힘차게 팍뀨를 외쳐주세요.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이야. 당신만 불안한 게 아냐. 그걸 스스로 감당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어른이 돼. 그게 무서워 질질 짜는 것까진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남이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진 말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종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지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어른들 연애, 범죄 상황 아닌 한, 누구도 개입 권한, 없다. 그게 어른들 연애의 기본이야. 주변인들, 의견개진 조언권고 할 수 있어. 때론 경고의무도 있고. 하지만 거기까지야. 분노 표출, 진도 방해, 이별 강요 누구도 못해.

 

 


건강한 연애 관계의 요체는 밸런스다. 그 관계추만 균형 잡는다면, 채찍 휘두르며 에스엠(SM) 하든 말든 그거 건강한 관계다. 그리고 그 균형 가름하는 건 물리법칙, 아니다. 상대에게 99 주고 1만 가져도 스스로 손해라 감각되지 않으면, 누가 뭐라 하든, 그 연애, 내재적 형평 이룬 거다. 원래 대차대조 생략하고 미련 없이 주는 게 연애 미학의 정수다. 근데 당신은 이미 불량 재무제표와 자본 잠식이 심히 억울하다. 그걸로 말 다한 거다. 밸런스, 무너진 거다. 이게 다 그녀 탓이냐. 이 병든 관계, 귀책사유 절반은 당신 몫이다. 모든 관계는 상호 학습이며 교섭이다. 일방의 규범, 결국 수용했다면, 그 결과도 나눠 가져야 한다.

 

 

관습·법률·윤리의 전방위 보호를 받는 유일한 공식 커플시스템-결혼, 그 이후의 사랑. 어찌하오리까. 이 거 참, 어려운 문제다. 존재하는 모든 사회규범이 이 행위, 규탄한다. 사회 제 규범이 일심이란 건 그로 인한 ‘질서’의 붕괴를 모두들, 그만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그 위반의 대가, HUGE, 할 수밖에. 한편으론 그렇게 모든 규범이 죄다 동원되어 금기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다반사라는 방증이기도 하고. 금기만큼 충동 역시 파워풀하단 소리다. 이런 사안, 구체적 정황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런 경운 되고 저런 경운 안 된다 풀어보려는 시도, 소용, 안 닿는다. 사연, 안 중요하다고. 따져야 하는 건, 사회규범과 개인욕망의 정면충돌 시 선택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거 다. 그게 본질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난 이런저런 사람이라 단정적으로 말들 한다. 착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했던 무수한 선택들이 하나하나 모여 결국 자신이 누군지 결정하는 거다.

 

 

자기 선택이 곧 자신이란 거, 이거, 사실, 곧이곧대로, 수용키 어렵다. 누구나 야비하고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선택,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 대다수는 사연부터 구한다. 그 선택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그리고 그 속에 숨는다. 그리고 공감해줄 사람 찾는다. 피치 못 할 사연 있었단 거지. 자긴 원래 그런 사람 아니란 거지. 그런데.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객관화의 임계점이란 게 있다. 그랬으면 하는 자기가 아니라 생겨 먹은 대로의 자신을, 덤덤하게,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 있다. 자신이 멋지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 멋질 수는 결코 없는 법이란 걸 깨닫는. 이거 절로 안 온다. 도달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단한 분량의 용기가 지성과 함께 요구된다.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내 결론은 그렇다. 자기 선택과 그 결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비용 감당하겠다면, 그렇다면, 그 지점부터, 세상 누구 말도 들을 필요 없다. 다 조까라 그래. 타인 규범이 당신 삶에 우선할 수 없다. 당신, 생겨 먹은 대로 사시라. 그래도 된다.

 

 

그리고 애인, 남이다.
그리 말하면 사랑에 대한 모독으로 들리나. 아니다. 애인이 남인 걸 인정 않고 어른의 사랑, 못한다. 남, 자기 뜻대로 못 하는 거다. 사랑, 단점과 차이를 없애는 거, 아니다. 그에 개의치 않는 거지. 게다가 사랑이란 게 영원도 완벽도, 않다. 불완전한 인간끼리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그게 된다는 상상까진 좋다. 그러나 그 판타지를 상대더러 실제 구현해 내라는 강요, 그거 폭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 수용할 수 없는 자,
사랑 말할 자격도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거든, 당신 수용한계 초과하거든, 헤어지는 게, 옳다. 사람, 고쳐 쓰는 물건 아니다.

 

 

당신의 그 ‘평생 한 사람과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강령, 미안하게도, 당신이 믿는 만큼 고결한 동기에서 출발한 이데올로기 아니라고. 생물학적 목표 위해 궁리해 낸 방어 이데올로기라고. 못 믿겠나. 당신이 한다는 그 ‘나쁜 상상’ 말야. 그건 당신 연인이 다른 수컷과 경험 통해 혹여 당신 남성성의 열등함을 인지할까봐 갖게 되는 공포가 발동시킨 거라고. 그래서 비교당하지도 발각되지도 않는 밀봉된 관계 속에 안주하고픈 거라. 그러니 당신 강령은 ‘한 사람과만 섹스하게 해 주세요’라고 번역하는 게 훨씬 더 진실에 근사해요. 역시 방어용이지. 어때. 조또, 잔인하지.

 

 

사랑에 대한 신화화, 사회적 기능, 분명 있어요. 낭만적이잖아. 스스로 속물성에 학을 뗀, 외로운 우리 모두, 기댈 덴 있어야지. 근데 그 신화화된 가치 신봉하는 당신의 사랑 강령, 사실은 공포에 대처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 유용하긴 해도, 절대가치는 아니란 거. 거기 의지해 상대에게 정당하다며 요구하는 포기, 그거야말로 이기적이란 거. 희생? 사랑의 희생 말하는 자들, 결국 본전 찾아요. 희생한단 의식엔 이미 계산이 전제된 거야. 자기기만적 사기지.

 

 

그렇게 구축된 우정, 일종의 ‘관계’ 판타지다. 안전거리 확보한 채 거절 공포 없이 누리는 유사 애정행각. 다들 눈치 챘는데 왜 본인만 몰랐나. 관계는 제목을 따른다. 우정이라 제목 달면 또 우정인 양, 제목 부합되게, 관계 작동한다. 그 제목만으론 더 이상 스스로에게 사기 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지점에 덜컥, 도달할 때까진. 바로 지금 당신처럼.

 

 

사랑했다, 통보하고, 떠나시라. 물론, 결혼한다니, 아까워서, 감정 폭주 하는 걸 수 있다. 또한, 말이란 게 자기실현성이 있어, ‘사랑’, 뱉어놓으면 실제론 그렇지만도 않았건만 그리로만 드라이브하는 힘, 있다. 그리하여 당신을 그 관계에 더 얽어맬 리스크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 당신에게 절대 필요한 건, 처절한, 자기고백이다. 자기기만적 유사연애였다고 인정하시라. 그렇게, 친구 아니라, 연인으로,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일단락, 지어야 한다. 그리고 엉엉 슬퍼하시라. 그 다음, 진짜, 시작하시라.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행복 위에 이 땅에 온 거다. 자기 인생 갖고 소설 쓰는 거 아니다.


PS - 나이 들어 가장 비참할 땐 결정이 잘못됐었다는 걸 알았을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단 걸 깨달았을 때다.

 

 

낭패불감일 땐, 기본부터 되짚자. 자, 대체, 결혼이 뭐냐. 두 어른이 하나의 독립 채산 가족, 창설하는 거다. 부모 가족에 인수합병, 아니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 시스템, 이 ‘어른’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 삶의 불확실성, 제 힘으로 맞서는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런데 우리 시스템, 그 대면, 부모가, 최대한, 지연시킨다. 부모의,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채권, 그리 확보된다. 그리고 그렇게 삶 자체를 위탁한 아이들, 결혼하고도, 평생 누군가의 자식으로 산다.

 

 

PS-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

 

 

자자, 그만 비통해하고, 차근차근 짚어보자. 우선, 개 따위가 연적일 수 있냐, 물론이다. 상대 관심의 배타적 점유, 연인의 기본 욕망이자 권리다. 연인이라면 마땅히 요구할 관심의 절대량, 있는 법. 그런데 그 귀중한 자원의 대부분이 그 개들에 의해 소진되고 있다. 열, 받지. 게다가 그녀, 그 사실 인지 못하고 있다. 낭패다. 당신이 항의하면 동물 사랑이 죄냐 항변할 게야. 물론 그 자체가 죄일 순 없지. 다만 그게 연인에 대한 무례에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 연인으로서, 큰, 폭력이다.

 

 

존재를 질식하게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세상엔 두 종류의 자신감이 있다. 내가 쟤보다 키 커서, 돈 많아서, 잘 생겨서, 그런 비교우위 통해 획득하는 자신감. 이건 나보나 키 크거나, 돈 많거나 잘 생긴 상대 앞에서 바로 죽는다. 상대적 자신감. 반면, 상대가 돈 많거나 잘 생긴 게 내가 보유한 자신감의 총량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유형이 있다. 왕자병과 차이는 상대가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겼단 자체는 인정한다는 거. 하지만 그게 그래서 난 못났다, 로 연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분을 스스로 농담거리로 만든다는 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산을 만족스럽게 긍정한다는 거지. 이거, 절대적 자신감. 그렇게 스스로의 취약점과 하자에 개의치 않는 건, 결국, 섹시하기까지 하다. 다 섹시하자고, 이 지랄들인데 말이다

 

 

먼저 일반론 하나. 결혼, 잡소리 다 걷어치우고 알맹이만 보자. 대체 왜 하나. 혼자서는, 불완전해서, 하는 거다. 정서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사회경제적으로든. 그 맥락에서 결혼은 본질적으로 거래다. 제 존재의 불완전을 상대의 자산으로 보정하는 거다. 하여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대차 대조 한다. 상대의 보유 자산이 과연 내게 교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타산을 속물적이라 타박하는 건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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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1:39 2009/04/26 21:39

드라마처럼 살아라 3

 

나는 결코 인생이 만만하지 않은 것인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화해와 갈등, 원망과 그리움, 이상과 현실, 시작과 끝, 그런 모든 반어적인 것들이 결코 정리되지 않고, 결국엔 한 몸으로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가는 게 인생이란 것쯤은, 나는 정말이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착각했다.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뎠는데, 이제 이 정도쯤이면, 이제 인생이란 놈도 한번쯤은 잠잠해져 주겠지, 또다시 무슨 일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섣부른 기대를 했나보다.

이런 순간에, 또다시 한없이 막막해지는 걸 보면.

 

그래 드라마처럼 못살 것도 없지. 끝날 것 같은 인생에도 드라마처럼 반전이란 건 있는 법이니까. 그날 그 순간 그 생각이 든 건 얼마나  다행인가.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 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그걸 왜 굳이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을 꿈꾸는 역설인줄을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말한 선배 너는 지금 어떠냐고. 희망을 믿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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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20:18 2009/04/23 20:18

통속, 신파, 유치찬란

 

이쯤에서 우린 어쩌면 모두 백기를 들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 사랑이란 건 차라리 철없는 유치찬란임을,

가십이 필요한 사람들 앞에서 이해를 바라는 건 더더욱 구차한 신파가 되는 것을,

세련되고, 쿨하고, 멋진 인생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조차도, 우린 이제 인정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한 건지. 아직도 너무 어린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 어느 한쪽에서 여전히 드라마처럼 인생의 반전을, 그와 나의 반전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연인들의 화해란 게 이렇게 싱거울 수 있다니, 이젠 다시 헤어지지 말자는 맹세, 참으로 그리웠다는 고백,

너만을 사랑한다는 다짐도 없이, 이렇게 시시하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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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20:13 2009/04/23 20:13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번 두 번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길이 들여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번 천 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대체 다른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어떻게 헤어지는 걸까? 연희와도 준영과도 이번이 처음 이별이 아닌데, 왜 이렇게 매순간이 처음처럼 당황스러운 건지.

 

모든 사랑이 첫사랑인 것처럼 모든 이별도 첫이별처럼 낯설고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나만 이런 건가? 준영인 너무나도 괜찮아 보인다.

 

사랑을 하면서 알게 되는 내 이런 뒤틀린 모습들은 정말이지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만하자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첨엔 알았는데 이젠 나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안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왜 나는 자꾸 이상한 말만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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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20:07 2009/04/23 20:07

중독, 후유증 그리고 혼돈

 

중독이란,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또는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이 헤어지고나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예상치 못한 이별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난무한다.

 

혼란과 혼돈, 무질서로 불리는 카오스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지금의 이런 말도 안되는 행위를 한마디로 정의할 만한 규칙은 무엇이 있을까?

그냥..혼돈, 그 자체?  젤 끔직한 일은 이미 마음이 변해버린 애인에게 구걸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렇게 살지 않겠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그렇게 첫구절과 마지막구절 한구절만 생각이 난다. 마지막은 이렇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이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내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나는 저 아일 버렸는데, 그럼 지켜진 내 자존심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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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20:02 2009/04/23 20:02

화이트아웃

 

내가 가는 길이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르는 상태. 우리는 가끔  이런 화이트 아웃 현상을 곳곳에서 만난다.

절대 예상치 못하는 단 한순간.

자신의 힘으로 피해갈 수 없는 그 순간, 현실인지 꿈인지 절대 알 수 없는,

 

 

그렇게 눈앞이 하애지는 화이트아웃을 인생에서 경험하게 될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하던 행동을 멈춰야만 한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이 울음을 멈춰야한다. 근데 나는 멈출 수가 없다. 그가 틀렸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6년 전 그와 헤어질 때는 솔직히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때 그는 단지 날 설레게 하는 애인일 뿐이었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와 함께 웃고 싶고, 그런 걸 못하는 건  힘은 들어도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젊은 연인들의 이별이란게 다 그런 거니까.

미련하게도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다. 그게 잘못이다. 그는 나의 애인이었고, 내 인생의 멘토였고,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가는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욕조에 떨어지는 물보다 더 따뜻했다.  이건 분명한 배신이다.

 

그런데, 그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고작 두어 가진데, 그와  헤어져선 안되는 이유들은 왜 이렇게 셀 수도 없이 무차별 폭격처럼 쏟아지는 건가.

이렇게 외로울 때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 것조차 그에게서 배웠는데, 친구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져도, 된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는데, 날 이렇게 작고 약하게 만들어놓고, 그가 잔인하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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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9:55 2009/04/23 19:55

그의 한계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배신당하고 상처받는 존재에서 배신을 하고 상처를 주는 존재인걸 알아채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인가? 나는 내가 배신하고  상처 주었던 때를 분명히 기억한다.

어른이 된 나는 그때처럼 어리석게 표 나는 배신은 하지 않는다. 배신의 기술이 더욱 교묘해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 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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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9:49 2009/04/23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