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신, 재판부에 보내는 편지

2009/05/22 00:59

행동하는 라디오 '언론재개발'

용산참사 구속자 이충연씨 부인이 재판부에 보내는 편지 (2009년 5월 21일 방송, 낭독 정소연)

 

*  mp3 파일은 http://www.archive.org/download/YongsanActionRadioJungyoungsinsLetter/jungyoungsin-letter-judge-01.mp3 에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파일을 내려받아 저장한 뒤 재생하면 됩니다.

 

 

 

용산참사 구속자 이충연씨 부인이 재판부에 보내는 편지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용산참사로 아버님을 잃고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혐의를 받고 구속 중인 이충연 씨의 처 정영신이라고 합니다. 제 글을 죄인의 아내가 쓴 글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한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아내로서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쓴 서툰 글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따뜻한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편과 6년을 연애했습니다. 연애를 하면서 가장 이 사람을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무엇보다도 남편의 성실함과 책임감이었습니다. 단 하루를 쉬지를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남편의 성실함을 느꼈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에 또 한 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주위 사람들의 경조사를 챙기면서도 자기 생일은 잊어버리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작은 노점상을 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강변역 근처에서 액세서리를, 남편은 용산 근처에서 테이프장사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먼저 강변역에 가서 저의 노점자리를 펴주고는 다시 용산으로 가서 자신의 노점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였습니다. 끝날 때도 남편이 먼저 자리를 접고 다시 강변으로 와서 저의 노점자리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우린 행복했습니다.

다 큰 처녀가 노점에서 장사를 한다니까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제 옆엔 남편이 있었기에, 이렇게 몇 년 만 고생하면 우리도 번듯한 가게라고 차려놓고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도시락도 싸가지고 다니며 노점 옆 구석에서 먹으면서도 우리의 꿈이 있기에, 힘들 때면 서로에게 용기주면서 어깨 도닥거리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들은 노점이라고 깔보기도 했지만 우리 둘은 행복했습니다. 우리에겐 꿈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중 남편이 아버님(고 이상림씨, 용산참사로 사명), 어머님 가게를 함께 해보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처음엔 결혼도 안한 제가 시어른들과 함께 장사를 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남편이 "엄마 가게가 예전처럼 장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엄마가 너무나 힘들어 보인다"며 함께 하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게수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워낙 낡은 건물이라 이쪽을 건드리니까 저쪽이 망가지고… 생각보다 가게수리가 커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건비라도 아껴야 한다며 아버님께서 데모도 일을 하시고 남편은 자재를 사오고 어머니는 인부들 밥을 해먹이시고 저는 페인트칠과 잡일을 하면 40일에 걸쳐 공사를 했습니다.

사람을 많이 사서 공사를 했더라면 공사기간이 단축 됐겠지만, 기술자 한명과 저희 가족 4명이 하다 보니 공사가 더뎌졌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변하는 가게는 저희 가족에겐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와, 가게가 정말 이쁘다. 무슨 가게일까? 문 열면 꼭 와야지" 할 때마다 저희 가족들은 힘든 줄도 모르게 일을 하곤 했습니다.

드디어 호프가게 오픈하는 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얼굴이 환해지시는걸 보니 저의 부부는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비록 많은 빚을 지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서 빚도 다 갚고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은 일어나시면 새벽기도 가시지 전 가게에 들르셔서 어제 못한 마무리를 해주시고 어머니는 장을 봐주시고 남편은 어머니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저는 홀일을 보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것 같아 미뤘던 결혼도 했습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로만 듣던 재개발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습니다. 7개월 만에 사업승인이 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용역이라는 인간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무렵 우리 가족에게도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용역,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정도 없고 오로지 무지막지한 폭력과 욕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님 앞에서 저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용역들은 제 앞에서 시어머니 뺨을 때리기도 하고 한번은 아버님이 동네 현수막을 달려고 사다리에 오르자마자 용역들이 와서는 욕을 하며 사다리 다리를 흔들며 내려오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며 막는 동네 어른들을 내동댕이치고 저에겐 욕을 하며 꺼지라고 하면서 사다리 위에 있는 아버님의 성기를 잡아당겨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마구 때리는 거였습니다. 너무도 놀라고 무서웠지만 아버님과 도망 오는 길밖에는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버님 다친 곳을 약을 발라 드리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법이 이런 건지, 힘없는 사람들은 아무 말 못하고 거리로 내쫓겨나야 하는 건지 정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집을 가려고 해도 길을 막고 이 "거지 같은 년 돌아서 다니라"며 욕을 해서 112에 신고를 해보지만 경찰은 오히려 저에게 돌아다니라며 저 사람들 건들지 말라며 오히려 그 사람들을 대변하기 일쑤고 저희에겐 어떠한 방법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흰 무서워서 도망 다니게 됐고, 혹시 길모퉁이에 용역들이 서 있을 때면 한참 피해 있다 용역들이 없어진 후에 길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1주일 동안 가게에 행패부리는 사람이 와서 가게를 못나간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 이사를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이사 간 공가엔 용역들이 상주를 하면서 협박을 하기 일쑤였고, 벽엔 말도 못하는 혐오스런 낙서를 휘갈겨 놓았습니다. 가게 앞에는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물들을 버리고, 죽은 짐승들을 가져다 놓고, 손님 들어올 시간에 돌아다니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갖은 욕설과 협박뿐이고… 정말 무법천지였습니다.

그래서 저흰 저희 나름대로 규찰이라는 걸 돌면서 서로를 지켜주었습니다. 전부 저녁에 장사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면 마음 편히 장사를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저희 아버님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사셨고 또 어른이시다 보니 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희 남편은 연세 드신 아버님이 매번 용역들에게 욕설과 폭력에 무방비상태로 당하게 할 수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맞아야지, 내가 책임져야지 하는 생각으로 본인이 위원장직을 맡게 됐던 것입니다.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차라리 내가 당해야지 어떻게 내 아들이 맞는 걸 보냐며 서로 책임지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걸 보면서 정말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너무나 속상해서 너무도 무섭고 겁이 나서 이사를 가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평가금액 가지고는 근처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한 평생 사신 부모님들이 어디를 가시겠습니까? 시골 가서 농사지으며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년을 한동네에서 아들, 딸들 시집 장가보내고 손주 학교도 이곳에서 보내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10년, 15년, 20년 한곳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 딸 키우며 욕심 없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 밥을 맛있게 먹으면 그것에 감사하고 행복해 하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것보단 자식들 입에 하나라도 더 물려주려고 노력하며 사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런 아버님 어머님 같은 분들을 위해 저의 남편은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가 불편한 건 없는지, 생활은 어떻게 하시는지, 함께 고민하며 함께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이 거리로 나가서 무엇을 하겠냐며 이분들이 살 곳은 여기라며 울부짖으며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테러리스트도 농성자도 아닌 힘없는 철거민의 아들이었고 철거민이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을 편하게 모시지는 못할지언정 이 같은 아픔을 함께 견디고 이겨내야만 했던 가난한 철거민이었습니다.

더 이상 쫓겨 다닐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맞을 수가 없어서 제 남편은 아버님과 손을 잡고 망루에 올랐습니다. 거대한 건설회사가 우리의 편에 한 번만 손을 내밀어주었더라면 제 남편과 아버님은 망루에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없는 철거민들이 용역들에게 시달리고 매를 맞을 때 한 번만 손을 내밀어주었더라면 그들은 옥상망루에 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가난한 철거민들이 살고 싶어서 옥상망루에 올라갔습니다. 결코 그들이 죽으려고 옥상망루에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자, 사랑하는 아내에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더 이상 길거리로 내쫓겨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한마디 외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살고 싶다고, 살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런 호소를 하기도 전에 우리 앞엔 무자비한 경찰이 막아서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관 한명과 철거민 다섯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 남편은 망루에서 떨어지면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 폐협의증으로 지금까지 약을 먹고 있습니다. 남들은 죽을 줄 알았던 제 남편은 기적적으로 살았지만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편은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저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다는 말밖에는….

이틀 후 일반병실로 옮기게 되었고 뉴스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남편은 울부짖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말도 안 돼. 죽긴 왜 죽어, 왜 죽냐고. 떨어지기만 했어도 다 살았는데. 아니야. 다시 한 번 찾아봐라, 다시 한 번 찾아보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에 다리 인대가 파열된 것도 모른 채 일주일을 병원에 있었습니다. 아프면서도 아프단 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체포 당일, 정형외과의사선생님이 무릎이 이상하다며 MRI를 찍어보자고 하여 영상학부 가서 사진을 찍고 나온 후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결과도 보지 못한 채 경찰서로 끌려가 결국 구속되었습니다.

형사들에게 아버지 영전에 문상 한 번만 드리고 가게 해달라며 애원했지만 검사가 끌고 오라고 했다며 제 손을 뿌리치며 데리고 갔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저의 남편은 목발을 딛고 있으며, 폐협의증 약도 계속 먹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지키지 못해 몇날 며칠을 통곡하는 남편을 보는 거였습니다.

제 소원은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그 순간만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영정 앞에서 소리 한 번 지르게 해주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디 가셨냐고 목 놓아 눈물이라도 한번 흘리게 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자기 옆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그렇게 쉽게 보내줬다고 생각하면 제 남편의 마음에 얼마나 한이 되겠습니까? 제 남편에게 아무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를 죽이려 불을 지피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용역들도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제 남편에게도 그런 관용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되는 건가요? 아버지 영정 한번 뵙고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지 잃은 슬픔을 달랠 기회를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요.

시어머니를 뵈면 가슴이 아려 옵니다. 넉 달, 120일 동안 시어머니를 지탱해준 건 제 남편입니다. 그래도 아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하루하루 상복을 입고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어머니는 내일이면 우리 아들이 나오겠지 하는 바람으로 매일 기도를 합니다.

제 남편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피하거나 변명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상주인 남편이 아버님 가시는 길만이라도 지키게 해주고 싶은 게 저의 마음입니다. 막내아들을 너무도 사랑하셨던 아버님, 결국 사랑하는 아들만 살리시고는 싸늘한 주검으로 우리 곁으로 오셨지만 마지막 가는 길 또한 막내아들과 함께 보내드리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가슴속에 큰 한을 품어 주고 싶지 않은 게 제 작은 바람입니다.

다음 주면 결혼일주년이 됩니다. 신혼의 단꿈을 꾸어보기도 전에 재개발이란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에 바빴습니다. 생일 한 번 챙겨주지 못한 걸 미안해했습니다. 어버이날 장인 장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지 못했다고 저에게 미안하다는 그런 작고 여린 제 남편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부디 제 남편을 풀어주세요. 어머니와 저에게 남편을 돌려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09년 5월 20일

이충연의 처 정영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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