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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좌파5] 하이젠 베르크의 불확실(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I
물리학자들은 입자가 움직인다는 것을 운동량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는데, 이것은 움직이는 입자의 질량과 속도를 곱한 값으로 정의한다. 반면에 파동은 다른 형태의 물리적 과정이다. 예를 들어 잔잔한 물 표면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발생하는 왜란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가 된다. 파동의 경우 파장으로 나타내는데, 그림에서와 같이 파장의 가장 큰 값(마루)에서부터 다음 마루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의 이론적, 실험적 연구결과 이후 물리학자들은 운동량과 파장이 서로 직접적으로 관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입자의 운동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특정 순간에 입자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속도(운동량)와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 이 두 물리량이 정확하게 측정되면 입자의 운동에 대한 원인과 결과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중슬릿 실험의 이상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 결과를 1927년에 불확실성원리(*)로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불확실성 원리는 인과론을 부정한다고들 하는데,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실성의 '원인'을 상상실험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전자와 같은 미세 입자의 운동을 실험적으로 측정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에 머릿속 생각으로 실험을 하곤 했는데, 그것을 "상상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고 한다.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는 강력한 현미경이 있다고 해보자. 이 현미경은 전자에 빛(광자)을 쪼여 전자와 충돌해서 나오는 빛으로 전자의 움직임을 알아낸다. 먼저 전자로부터 반사되어 나온 빛을 다시 렌즈로 집속하면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 또 반사되어 나온 빛으로 전자의 속도도 측정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경찰관이 레이저 총으로 자동차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반사되어 나온 빛의 파장을 측정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렌즈로 작은 전자에서 반사되어 나온 빛을 집속해서 위치를 측정하기에는 전자가 너무 작다. 일반적으로 빛을 집속해서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해상도는 빛의 파장 길이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전자의 위치는 빛의 파장 길이만큼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미경의 해상도는 아주 큰 렌즈를 사용하거나 짧은 파장을 갖는 빛을 이용하면 증가한다.
현실적으로 무한히 큰 렌즈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파장이 아주 짧은 빛을 쪼여야 한다. 그런데 빛이 파장이 짧다는 것은 아주 높은 에너지를 가졌다는 뜻이다. 높은 에너지의 빛을(광자를) 전자와 충돌시키면 전자의 속도는 변하게 된다. 그러면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만약 정확하게 속도를 측정하고 싶다면 낮은 에너지의 빛(광자)을 충동시켜야 하는데, 이때에는 파장이 길어져서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종류의 현미경을 개발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이젠베르크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모든 에너지는 양자로 나타나고 또 모든 물질은 미시 세계에서 입자와 파동성을 뛰기 때문에 어떤 측정 장치를 가져와도 같은 문제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 상상실험에서는 측정 장치(현미경)와 측정대상(전자)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타난다. 이 결과는 고전적으로 보더라도 이상한 결론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이중슬릿 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측정 장치로 전자를 측정하지 않으면 전자는 어떤 상호작용도 없으므로 전자는 명확한 속도와 운동량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이중 슬릿실험에서도 전자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입자특성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고 파동 특성인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결국 측정하지 않을 때에도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고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아무튼 위치와 운동량은 거시적인 측정 장치에서 관측되는 고전적인 개념이며 이 개념을 미시 세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희한한 점은 위치와 운동량 각각은 명확하게 측정되지만 동시에 측정할 때 불확실성이 나타난다. 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할 수 없다는 것은 입자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온 결정론은 위기를 맞는다.
그러면 두 가지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먼저 전자는 측정 장치와 무관하게 비결정론적으로 랜덤하거나 운동하거나 아니면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변수(숨은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측정할 수 없는 숨은 변수에 대한 설명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불확실성의 원리가 인간이 측정(경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한계이며, 그리고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기저에 인과론적인 진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형이 상학(metaphysics)일 뿐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한계가 불확실성의 원리이며, 그 이상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과 무관한 객관적인 자연이 존재한다는 설명을 반박할 수 는 없다. 이것을 부정하기 위한 유일한 종착지는 측정되지 않는 것(경험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경험주의, 실증주의). 하이젠베르크는 이 입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전자의 운동은 비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자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부족이라는 의미에서 불확실성이라는 용어 보다는 대신 결코 결정할 수 없는, 즉 비-결정성(indeterminism)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하며, 그것은 자연현상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우연에 의해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불확실성 원리는 과학자들로부터 새로운 발견을 이끌어 내게 한다. 이 원리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불확실성 원리가 자연이 완전한 우연에 지배받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법칙은 아니다. 그런 해석은 변증법을 거부한 물리학자의 해석일 뿐이다. 만약 전자의 운동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입자의 운동이란 위치의 부정을 말한다. 변증법에 따르면 입자가 운동 중에 있을 때는 입자의 움직이는 경로는 존재하지만 어떤 특정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가 혼란에 빠진 이유는 비변증법적으로 전자의 운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특정 시간에 특정위치에서 입자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하이젠베르크는 결국 전자가 움직이는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비 실재론으로 치닫고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다음에 계속)
(*) 비 결정론적(indeterminism)이라는 뜻과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 보다 불확실성의 원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노동자도 배아복제 논란에 뛰어 들어가 보자.
현장에서 미래를 제 111호
지난 5월 20일 서울대 황우석ㆍ문신용 교수팀과 미국 피츠버그대 제럴드 섀튼 교수팀은 18명의 여성에게서 기증받은 난자 185개로 31개의 배반포기 배아를 복제하고 여기서 11개의 복제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배아줄기세포 11개는 남성과 사춘기 전 여성, 폐경기 이후 여성 등 연구 참여자(남성 8명, 여성 3명)의 체세포를 이용한 것으로 이 중에는 3명의 난치병 환자도 포함돼 있다
이번 배아 복제의 성과는 불의의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댄스그룹 클론의 구성원인 강원래씨 와 슈퍼맨의 크리스토프 리브,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와 모하메드 알리의 파킨슨 병, 로날드 레이건의 알츠하이머(치매)나 선천적인 (제 1형) 당뇨병 등 치료약이 없어 고생하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3년 12월 마리아 생명공학 연구소의 박세필 박사팀은 인간 배아줄기 세포로 쥐의 파킨슨병 치료에 성공했고, 황우석 교수도 척수를 다친 개의 치료에 성공한 바 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싱가포르, 이스라엘, 영국에서는 비교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소위 좌파정권인 브라질 정부는 줄기세포 연구 지원계획을 공식 발표했으며, 스페인의 좌파 정부 역시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지원을 발표했다. 이 연구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찮은데, 미국의 부시정권을 포함하는 종교적 우파와 그리고 일부 녹색당이 여기에 속한다. 스위스에서는 줄기세포 관련 법안이 당초 2003년 12월 의회에서 채택됐으나 가톨릭교회와 녹색당, 의료윤리단체들이 반발로 인해 국민투표에 붙여지기도 했다. 독일의 녹색당의 볼커 벡 하원 원내총무는 줄기세포 관련 정책을 바꾸는 일은 `위장한 식인(食人)주의'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했다.(2005.06.16 연합) 이 처럼 배아복제를 둘러싸고 그 양상이 복잡하게 나타나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복제 ‘화려한’ 성공과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거대 제약회사의 움직임은 아직 둔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본의 욕구는 ‘돈(자본증식)’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황교수의 연구결과에서 돈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각종 반자본주의 투쟁에 지쳐 있는 우리 노동자들에게도 배아복제 문제를 신중하게 고민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배아복제란 무엇인가?
우리 몸에 세포는 크게 두 가지 종료가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체세포가 있고 정자와 난자의 생식세포가 있다. 세포의 종류와 같이 세포 복제도 두 가지 종류 즉, 생식세포 복제와 체세포 복제가 있다.
생식세포 복제는 정자와 난자를 이용한다.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키면 세포 분열이 일어난다. 이때 분열할 때 마다 난세포 크기가 작아지므로 ‘난할’이라고 하며 이 작은 난세포를 ‘할구’라고 부른다. 복제의 핵심은 분열과정이 있는 이 할구와 수정되지 않은 난자의 핵과 치환하는 것이다.
(a) 생식세포 복제
(b) 체세포 복제
그림. 생식세포 복제와 체세포 복제
(그림 출처 : http://www.cfe.org/parkup/t_ecodemia_4/HYS.hwp)
만약 수정란이 8개의 할구로 분열했다고 하면, 난자 8개로 염색체가 동일한 8개의 복제 난자를 만들 수 있다. 즉, 1개의 수정란으로 8개의 일란성 쌍둥이를 낳게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에 비해 체세포 복제는 수정란의 세포가 아니라 몸을 구성하는 세포(체세포)를 떼어내어 난자의 핵과 치환하는 방법을 말한다. 현재까지는 난자는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두 복제과정(생식세포 복제와 체세포 복제) 모두 여성들로 부터 새로운 난자를 제공 받아야 한다.
할구나 체세포는 핵이 제거된 난자에 주입된 후 세포융합과정을 거치고 인큐베이터에서 체외배양 과정을 거친 후 복제 난자로 성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장한 복제 난자를 대리모의 자궁에 주입해,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쳐 복제 생명체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일반 적으로 배아란 정자와 난자가 만나 결합된 후 조직과 기관으로 분화가 마무리되는 8주까지의 수정란을 뜻한다.
복제양 돌리가 유명했던 이유는 생식세포 복제가 아니라 처음으로 체세포 복제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황우석교수의 연구가 주목받은 이유는 역시 최초(2003년 2월(논문 발표는 2004년 2월))로 ‘인간’의 체세포 복제를 성공시켰고 복제 수정란을 4∼5일 배양한 배아(배반포기 단계)에서 ‘줄기세포’라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배아줄기 세포와 성체 줄기 세포
줄기 세포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나 조직의 근간이 되는 세포로 몇 번이나 반복하여 분열할 수 있는 자기-재생산(self-renewal)기능과 여러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다분화 능력을 가진 세포로 정의된다.
식물의 줄기에서 자기-재생산과정을 거쳐 가지와 잎이 나오듯이, 배아시기에 줄기 세포는 대량으로 존재하며 자기-재생산 과정을 통해 근육, 신경, 심장 그리고 혈액 등 모든 조직과 장기로 다-분화된다. 성장 후에도 이 줄기 세포는 소량 남아 상처를 치유하는데 이용된다. 이때 배아시기에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조직과 장기로 분화될 수 있는 줄기 세포를 배아 줄기 세포라 하고 성인이 된 후 남아 있는 미량의 줄기 세포를 성체 줄기 세포라고 한다.
배아줄기 세포는 모든 장기를 재생할 수 있는 잠재 능력 때문에 ‘상품’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재 기술로써 그 능력을 통제할 수 없다. 반면 성체 줄기세포는 주로 본래 자신이 있던 조직과는 성격이 같은 세포를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체줄기세포는 그 양이 적기 때문에 ‘상품’으로 매력은 떨어진다. 그러나 특정 조직이 손상되면 치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통제가능하기 때문에 현재 현실화된 치료 방법이다. 대표적으로 백혈병 치료로 사용되는 골수 이식이 바로 성체 줄기세포인 골수 세포를 이식하는 것이다. 골수 세포에서는 혈구 세로를 끊임없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체줄기세포를 가지고 있는 기관으로 뇌, 골수, 말초혈액, 혈관, 근육, 피부와 간 등이 있다. 학자들은 성체줄기세포를 세포배양을 통해서 증식 시키고, 특정세포로 분화를 유도하여 우리 몸이 상처를 받거나 질병에 걸리면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인간인가 세포 덩어리인가?
가톨릭이나 반-낙태주의자들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즉시 한 영혼을 가진 생명주체인 태아로 간주한다. 체세포 복제의 경우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것이 아니지만 자궁 내에 착상시키면 인간으로 자라기 때문에 역시 예외일 수 없다고 한다. 영국의 반-낙태주의자 단체 Life는 배아세포 연구를 신종-학살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미국의 가족 연구위원회라는 보수주의 단체는 “나치는 일부 인간들을 ‘종속 인간’으로 분류해서 그들을 소모해도 된다고 했다. ... 사람들은 배아를 종속 인간으로 보고 있다.”라고 나치의 학살에 비유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수정란은 수정 후 두 배수씩 분열해 16개가 되면 딸기 모양의 세포가 되는데, 이때가 14일쯤 되는 시점이다. 이때부터 인체의 근본이 되는 척추와 신경 등 구체적인 신체기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14일 이전 단계의 세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세포 덩어리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배아 세포 조작을 통해 치료에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아를 인간이냐 세포덩어리냐의 논쟁을 인간중심(배아=세포덩어리) vs 생태중심(배아=인간)적 사고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큰 의미는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맑스주의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 포함시키며, 인신론적 전환을 요구한다. 만약 생태 중심적 사고와 인간중심적 사고가 다르다면 생태계에는 이로우나 인간에게는 불리한 것들이나 생태계에는 불리하나 인간에게 이로운 것 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또 배아의 구분을 인간-비인간으로 구별하지 말고, 새로운 지위를 설정해서 배아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김환석, 배아의 사회학, 한겨레신문) 이 주장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연구는 신중에 신중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경우라도 민주적 통제가 용의해야 하고 연구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의미 있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배아를 둘러싼 논쟁에서 같이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낙태와 여성의 권리를 어떻게 볼 것이며, 불임부부를 위해 인공 수정 후 남은 대량의 잉여 배아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현재 불임시료를 위한 인공수정에서 과배란을 유도하고 있고, 배아를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이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10만에서 50만 이상의 잉여배아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잉여 배아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폐기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렇게 버려지는 잉여 배아를 대상으로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허용하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논쟁의 한가운데 기독교로 무장한 부시정권이 있고 그가 배아의 인권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라크 전쟁의 주범인 부시 정권은 전쟁으로 인해 수천 명의 아이들이 부상당하고 있는 이라크를 위해 의료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그가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배아 복제에 반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배아줄기 세포의 경제학
치료 목적의 배아 복제 기술은 환자들에게 유전적으로 특별한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장점은 일반 환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범용 치료제가 아니라는 뜻이므로 자본의 입장에서 큰 매력이 없다. 올해 황우석 교수팀은 배아 복제의 효율을 10배 증가시켰다. 작년에는 1개의 배아를 복제하기 위해 242개의 여성 난자를 필요로 했는데 이번에 기술을 더욱 정교화해서 올해는 10개 이하로 성공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배아 줄기 세포를 통해 개발된 약이 모든 대중 약국의 선반에 진열될 정도의 상품으로 될 가능성은 아직까지 희박해 보인다.
특히 여성에게서 난자를 많이 얻기 위해서 과배란 처방을 해야 하는데, 한명의 환자 치료를 위해서 여성들에게 한번 혹은 두 번 정도 인공 수정시와 유사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처리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이 배아 복제 기술은 백만장자들을 위한 치료방법으로 전락할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배아복제 기술에 노다지가 보인다면 자본은 엄청난 투자를 감행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관심에는 수백만 명의 고통 받는 환자들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주요 제약회사는 10년에서 20년 후에나 배아복제 기술이 상품화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명확한 상품화 가능성이 보일 때 까지 공적자금을 이용하기하거나 중소 벤처기업들이 그러한 위험을 떠안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의 전략은 원천기술의 특허를 확보해 놓는 것이다. 원천기술만 확보 해놓으면, 혹시 모를 누군가가 치료약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 EGE(European Group in Ethics in Science and New Technologies)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줄기세포 관련 출원이 2000건이 넘고, 그 중 1/4이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배아복제 실험을 거부하던 부시도 초기 배아줄기 세포에 투자한 자본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 최대의 생명공학회사인 제론 (Geron)사 등이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배아줄기 세포에 대해서만 연구를 허용했다.
문제는 여성의 보호와 상품화
이미 한국에서는 불임부부들에게 정자·난자를 판매하는 회사가 영업 중이며 법적으로 이들을 규제하는 법은 없다. 인간배아복제 기술이 성공해서 치료 기술로 이용된다고 해보자. 이 과정에서도 여전히 필요한 것은 난자 기증자일 것이다. 어떤 경우든 배아복제 기술이 자본주의 상품에 가까워질수록 여성 몸의 상품화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황우석 교수 연구에서도 여성 기증자에 대한 논란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황교수는 올해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 미국과 같은 수준의 윤리 기준을 준수했음을 밝히고 그때 사용된 [동의서]까지 실었다. 그런데 그의 연구를 조사한 두 명의 미국의 생명윤리학자들은 황 교수에서 D-의 성적, 그러니까 수우미양가로 따지만 ‘양‘의 점수를 주었다. 이들은 스탠포드 대학 생물학 윤리센터 소속의 데이비드 매그너스(소장)와 밀드레드-초인데, 보수적인 성향의 학자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에 대해 매우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실험 참여자들에게 위험성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동의서]에서 환자들과 기증자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환자 자신의 난자를 실험에 기증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음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기술이 환자 당사자의 치료약 개발로 단기간 내에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 교수가 기증받은 난자 중에는 30이하의 여성으로부터도 기증받은 것도 있다. 30대의 여성으로부터 받은 난자의 경우 한 개의 줄기세포를 얻기 위해 30번의 처리를 해야 하는데 30대 이하의 여성으로부터 받은 난자는 평균 13번의 처리를 거치면 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선호한다. 이러한 사실은 작년 [네이처]지가 황 교수 팀에 제기한 연구실 대학원생의 난자를 사용했다는 의혹과 함께, 배아 복제 연구는 보다 공개적이고 엄격한 통제의 필요성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시사한다.
배아 복제 기술 정말 안전한가?
2001년 초 미국에서 파킨슨병을 치료하기 위해 태아 뇌세포를 환자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실험이 있었다. 파킨슨병은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의 하나인 도파민(dopamine)의 결핍으로 인해 나타나는 병인데, 태아의 뇌세포가 도파민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이루어진 실험이었다. 물론 이 실험은 배아 줄기세포와는 같은 실험은 아니지만 원리상 유사하다. 처음 1년 동안은 60세 이하의 환자들에게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그들 중 몇 사람은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고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심하게 몸을 뜨는 증세가 나타나는 등 치료 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줄기세포 연구 결과로 얻을 수 있다고 기대되는 가능성과 세포치료의 현실과는 아직도 많은 기술적인 괴리가 있다. 줄기 세포에서 조직 세포로 어떻게 분화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또 통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작정 주입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성공적으로 착상된 복제배아들 가운데 출산 뒤까지 정상적으로 자란 동물은 25%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유산(33%), 기형(12%), 급사증후군(22%), 거대체중증후군(8%)로 죽었다. 이러한 부작용이 복제된 배아의 줄기세포 치료에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한 영국의 유명한 줄기 세포 과학자는 영국 의학 논문지에 배아줄기 세포로 “치료에 성급한 이용은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질병 혹은 프리온 질병과 같이 뇌에 독성 단백질이 모여 발생하는 질환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배아복제의 마지막 종착지; 인간복제
배아복제 기술에서 항상 나타나는 것은 인간 복제의 유령이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에서도 어떠한 인간 복제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명목으로 연구되고 있는 수많은 복제기술들이 하나씩 성공할 때마다 인간 복제의 유령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실천윤리학 교수이면서, 의료윤리에 관한 유명 논문지에 영향력 있는 편집인이기도 한 사부레스쿠(J. Savulescu) 교수는 ‘복제 기술은 가장 위대한 과학 기술진보 중의 하나이다. 복제기술은 인간의 운명에 기회와 힘을 준다. 점차적으로 인공 번식이 자연 번식보다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사회학자 이진경교수도 황우석 교수에게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인위적인 변이’가 가능해졌다면 이제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이’의 가능성을 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사회학자나 윤리학자뿐만 아니라 DNA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 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복제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사회는..
대체적으로 배아복제연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인공 수정기술 발전시키고, 치명적인 질병치료를 위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연구과정에서의 오용가능성이나 위험으로부터 배아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는 적극적 우생학으로의 길을 열 수 있으며, 출산과 가족의 가치를 경시하고, 낙태를 조장하는 심각한 윤리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부시정부가 배아 복제를 굳건하게 반대하고 그의 종교적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 배아복제 기술에서 돈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자본가들에게 세금 감면 정책을 쓰고 있고 무엇보다도 이라크 전쟁으로 공적자금이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한국이나 기타 자본주의 국가에서 배아 줄기 연구는 정부 주도로 공적자금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 결과의 공공성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하에서 공적 자금은 단지 자본가들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기능만 할 뿐이다. 투자 위험이 높거나 미래에 상품화가 불분명한 곳에 공적자금의 연구비가 투여된다. 또 자본주의 기술 혁신은 상품화를 전제로 한다. 아무리 공적 자금이 투여되었다고 하더라도 연구 방향은 자본이 소유하기 쉬운 고수익의 상품 개발로 향해져 있다. 즉 개발된 치료 방법은 특허로 소유하거나 비밀로 포장할 궁리만 하지 환자들의 고통과 그 기술의 사회적 이용에 대한 고민은 그들의 대차대조표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결국 공적자금이 투여되어 배아복제 기술의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을 즈음, 이미 이 기술은 상당부분 사적으로 소유된 고가의 상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신체의 상품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배아 복제 기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고 일부는 새로운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사회에서 배아 복제 연구는 과학기술의 생산, 분배와 함께 내용까지 다를 것이다. 배아 복제 과정에서 모든 윤리적-철학적 문제는 투명한 토론할 것이며 어떤 내용, 어떤 방법으로 연구할 것인지를 합의해 나갈 것이다. 합의하기까지 시간이 길어져도 결코 비효율적이지 않다. 모든 연구는 공동으로 상호 협력 하에 진행되기 때문에 한번 시작된 연구는 매우 효율적이며 빠르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과는 모든 통신수단을 통해 빠르게 공유될 것이다. 이를 위해 제약 산업과 바이오산업은 민주적으로 통제될 것이며, 이들은 주주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약을 개발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될 것이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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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이 적합한것인지 자신은 없지만, 이 블로그가 너무 맘에 들어서 솔직한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우선, 불확실성의 원리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한 단락은 솔직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회과학하시는 분들이 자연과학의 개념을 사용할때, 그 개념 본연의 의미로 사용하기 보다는 은유의 한 방법으로 사용해놓고, 과학적인 논의인것처럼 이야기하시는 것을 종종 봅니다. 열역학에서 엔트로피가 대표적인 예인 듯합니다...만,, 어째든.
이 단락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는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아니라, 비슷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네요... 입자의 위치와 운동이 변증법의 적용대상인지도 의문이네요... 정은 위치이고, 반은 운동이면, 합은 뭘까요?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에 대해 조금만 부연해보겠습니다.
비결정, 불확실, 불확정..등 양자역학에 따르는 수식어는 사실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동시에 정확한 관측을 할 수 없는 량들이 있다.'와 '관찰 대상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입니다. 고전역학은 둘다 할 수 있다였는데, 양자 역학은 전자만 할 수 없다..후자는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로 생각합니다. 즉, 시간에 따른 예측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양자역학 역시 고전역학과 마찬가리로 결정론적 세계관입니다.... 다만 결정되는 것이 고전역학에서처럼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량, 파동함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파동함수는 우리의 경험에서 나온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량이 아니라 양자역학에서 완전히 새로 도입된 량이기때문에,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힘든 이론으로 만들죠.
양자역학에서도 슈뢰딩거 방정식을 사용하여 이 파동함수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기술합니다. 이 파동함수를 그나마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파동함수를 제곱하면, 발견 확률과 대응하는 량이 된다는 정도입니다...
어째든 양자역학의 이 결과는, 고전역학에서 초기값을 알면 그 입자의 미래의 움직임을 다 알 수 있다고 주장하던 자신만만하던 입장을 크게 후퇴시켰습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가 그 계의 현재 상태를 알면 미래의 변화를 미리 알수 있긴 하지만,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파동함수라는 량이고, 이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인 파동함수를 구하기란 매우매우 어려운데다, 그 입자가 발견될 확률이라는 애매모호하게까지 느껴지는 통계적인 량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으로 과연 이게 쓸모있을지 의문스러운 이론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상식 선에서 보면, 이 이론은 도대체 명쾌하게 말해주는게 하나도 없는 이론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양자역학은 고전역학 시절의 과학자들이 자신하던, 미래가 결정된다는 입장을 크게 후퇴시켰습니다.
결국, 파동함수의 미래가 결정되긴 하는데, 도대체 이건 써먹기도 힘들고, 현재의 수학 능력으로는 대부분 그 해를 구하기 조차 너무너무 힘든 지경이니.... 그전처럼 자신만만함을 과시하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있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시간에 대한 예측도 더이상 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게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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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가 죽어가는줄 알았는데,YJ님께서 이런 설명을 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의견은 사실 비판이라기 보다는 제 글에 대한 보충이라고 생각됩니다. 파동함수의 시간 변화는 결정론을 따른다는 주제에 대해서 따로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요즘은 게을르서, 변명을 하자면 바빠서 글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더 지적하고 싶은 점은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원리를 통해 인과론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양자역학 형식주의에 의존합니다. 이 이론의 위험성은 이 것으로 부터 도출되는 다양한 관념론적인 이론들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우주론이라든지, 관찰의 문제(관찰에서 인간의 의식 의존성, 유명한 슈레딩거의 고양이관련 내용) 등등... 이부분에서 이후 다룰 예정입니다만(게을러서..)
마지막으로 운동과 위치의 변증법은 무엇이든 정지된 순간의 연속으로 보는 비변증법적인 논리(형식논리학)에 대한 비판입니다(이를 테면 Zeno's paradox).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 원리도 이 논리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변증법은 운동의 관점입니다.즉 위치를 측정하고자 하는 행위는 입자가 그 위치에 정지해 있을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순간 정지 상태의 연속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실제 입자는 그렇지 않죠.
YJ님께서 주신 의견으로 인해 다시 글을 이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좋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많이
가르켜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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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과학하는 사람의 사회 속에서의 위치와 가치에 대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어제 해민님의 블로그를 알게 되어서, 틈틈이 쓰신 글을 재미있게 읽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써주세요.그런데,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인과론을 부정한다는 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감이 잘 안옵니다. 제가 인과론을 이해하는 방법이 좀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인과론을 사건 전후의 필연성을 중시하는 입장이라고 여긴다면, 그래도 자연 과학만틈이나 인과론을 훌륭하게 구현한 것은 없어보이거든요.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자연을 관찰할 때에는 인과론의 형식을 갖출만큼 충분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이와 이어지는 부분들은 필연성이 결여된 성격을 띄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필연성을 갖춘 이론이라도 그 이론이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정보를 우리가 채워줄 수 없다면, 그 이론을 현장에서 쓰기는 어렵지요.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가 제시한 우리의 관찰의 한계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강제성을 가지고 있고, 비록 그것이 필연성이 다소 결여된 이론을 만들어낸다하더라도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운동과 위치의 변증법은 조금 이해가 되지만서도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요. 일단, 해민님의 글을 보면, 변증법적인 논리는 형식논리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에겐 형식논리학이 더 익숙하니까, 변증법적인 논리를 잘 이해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것 같습니다. 제논의 역설은 시간에 대해 명료하게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에 대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버린 경우이지만,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이동에 관한 형식논리를 조금만 수정해서 시간에 대해 제대로 표현해주면, 아킬레스는 어떤 시간 이내에는 절대로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가 결론이 되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지르는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해내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변증법을 잘 모르니까 함부로 말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혹시 시간나시면, 변증법적인 논리학에 대해서도 언제 한번 다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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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학과 사회에 대해 고민 수준은 초보적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시작한 것도 사실 그 고민을 표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야지만 지금 YJ님과 같은 분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인과론에 대한 부정에 대해
인과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YJ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YJ님이 말씀하신 '알지 못하는 부분'은 인간의 인식능력 한계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에 있어 역사성, 공간제약성 등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고, 경험하지 못한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기 훨씬 이전에도 지구는 존재했으니까요.
하이젠베르크 등 코펜하겐 해석은 '우리'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의 완결성을 위해서 인과론을 부정합니다. 이에 대해 두번째 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입자의 경로‘는 입자를 관찰할 때만 나타난다(실재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돌맹이를 유리창에 던질때 돌맹이의 t1의 상태와 t2 상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도 역시 전자의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측정과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이러한 관계는 "파동함수의 오그라듦(collapse of wave function)"로 설명합니다.
변증법에 대해
변증법이 형식논리학과 대립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형식논리학도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현대 과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한계 지점에서 변증법적 철학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데 좋은 지침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증법적 논리학"이라는 것도 있기는 한데, 저도 아직 변증법이 논리학 범주로 볼 수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저도 이 부분은 공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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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론에 대한 부정에 대해..이중슬릿 실험에서 전자의 경로를 관측하기 위해 이중 슬릿 중간에 센서를 달면, 파동성이 사라지고, 센서를 떼버리고, 이중슬릿 이후에 스크린에서 전자의 위치를 관찰하면, 파동성이 되살아 나는.. 그 묘한 실험으로 돌아가는군요. 그렇다면, 인과론의 부정이란, 마치 '입자의 인과 논리를 따르지 않는 파동성의 논리'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째든 이 문제로 귀결된다니 참 재미있습니다. 어째거나, 불확성정의 원리가 인과론을 부정한다는 기술은 결국, '파동성이 갖는 필연성이 입자성이 보여주는 인과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를 암시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오히려 파동함수의 도입은 필연성을 확장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고전역학에서는, 입자에 관한 정보는 입자의 시간에 따른 궤적을 앎으로써 완전해집니다. 하지만, 파동성에 대한 정보는 이런 종류의 궤적을 특정지워주질 않아서, 우리에게 익숙한 입자에 관해 사용하는 논리가 먹히질 않습니다. 파동성은 파동성 고유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이 논리만을 사용해서 어떤 인과에 따른 추론을 해야합니다. 이 논리는 대체로 통계적인 표현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에, 전자가 어느시점에서 어디를 지나고 있다..고는 이야기 해주질 못하고, 전자가 어느시점에서 발견될 확률이 요만큼이다는 식으로밖에 표현을 못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과론의 부정이라는 것이 입자의 파동성을 기존의 입자를 다루던 방식으로는 다룰 수 없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는 것이죠...... 이런 것이라면, 저라면, 인과론의 부정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인과론의 확장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기존과는 다른 종류의 대상을 기존과는 다른 방법으로 다루는 인과론...이랄까....어째든 좀더 구체적인 예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해를 받을 만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군요... 저는 이 정도로 제 의견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변증법에 대해서..
아. 그렇군요. 저도 기회되면 한번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해민님 덕분에 재미있는 토론을 하게 ?營윱求? 공부할때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고, 막연하게 넘어가던 것을 이제와서 수습하려고 하니, 좀 벅찹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던 방식은 기술적인 면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철학적인 면을 같이 고려해보니 새로운 측면이 많이 있군요. 틈틈이 해민님의 다른 글도 보면서, 궁금하거나 잘 와닷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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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론의부정을 파동성에서 찾는 것은 잘 못 이해하신 듯합니다. YJ님의 입장은 입자로 설명할 수없는 부분을 파동성을 도입하면 설명이 된다는 것이며, 그것의 존재에대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YJ님께서 지적하신 바 인과론의 확장입니다. 그러니까 YJ님의 설명 방식은 사실 아직 우리가 고전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숨은 변수' 혹은 또 다른 새로운 개념이(파동과 입자를 동시에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 더 발전된다면 인과론적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가 됩니다. 맞나요?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아인슈타인-슈레딩거-드모르강-데이비드 봄->으로 이어지는 양자역학을 인과론적으로 해석하는 비주류 해석방식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저의 입장과 유사하기도 합니다.인과론을 부정하는 해석은(제가 비판하고자하는 해석은) 바로 주류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측정하지 못한것/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슈레딩거의 고양이 아시죠? 그 예에서 고양이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있다가 상자 문을 여는 동시에 죽은 고양이 상태와 살은 고양이 상태 중 하나가 눈깜짝할 새(광속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고 하나로 정해진다는 바로 그러한 주류해석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태에서 완결시켜 버리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재미있네요. 오랜만에 제 블로그가 살아나는 듯합니다. 계속 YJ님의 의견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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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음글에 답글을 달았다가 논의가 중복되는 것 같아서 지우고 여기다 씁니다.우선 인과론의 부정이란 파동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여전히 코펜하겐의 해석이 인과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견해에는 솔직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제 견해가 코펜하겐의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제가 이부분이 혼란이있는듯 합니다.
찾아보니까, 코펜하겐의 해석을 비판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군요.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생각해보가 제가 갖는 불편함을 하나둘 정리해보겠습니다.
1. 제일 먼저드는 생각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고양이 한마리만 가지고는 양자역학을 쓸 수 없습니다. 이건 마치 주사위를 한번 더지고 나서, 그 주사위의 숫자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때 비로서 값을 갖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군요. 물론 주사위는 우리가 보지 않더라도 값을 가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때 비로서 어떤 값을 가진다'는 통계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네요. 오히려 통계의 결과를 한번의 시도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다 보니까 나타나는 현상같군요. 통계는 여러번 했을때 비로서 의미를 같는, 분포에 관한 이야기이지 한번만 던지고 나서 말하고자 한다면, 그건 매우 부정확한 통계가 됩니다.
2. 제 생각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통한 코펜하겐식 해석의 비판은 일종의 범주론의 오류를 범한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은, 지금 우리가 입자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입자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입자 하나는 이런 행동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다른 행동을 하는데, 그 입자를 모두 모아서 행동 패턴을 보았더니 어떤 통계적인 성격이 나타나더라. 개별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이 통계적 성격은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 양자역학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양자역학적인 결과의 형식을 갖추려면, 수많은 고양이를 데려다가 실험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해서 분포를 그리면 예측했던대로의 확률 분포가 얻어집니다. 이게 올바른 사용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하나의 상자안에 고양이가 살았을까 죽었을까를 굳이 답하기 위해 양자역학을 사용한다면, 마치 지동설을 설명하기 위해, 열역학을 쓰는 것마냥 적합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동설과 열역학은 멀긴 해도 서로 연관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열역학은 천체의 움직임을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은 확률로 기술해줄뿐 이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에 대해 yes/no로 대답해주진 못하고요, 눈으로 확인할때야 비로소 우리는 고양이를 생사를 알게 되죠. 이건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통계적 결과를 하나의 사건에 적용시킬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3. 또한, 고양이를 측정할때 비로서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엇갈린다는 것은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가진 논리적인 함정인 것 같네요. 마치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려 뚜껑을 여는것이 불확정성의 원리가 이야기한 측정에 의한 계의 변화에 대응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건 바른 대응관계가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미시세계에 대한 측정에 대한 간섭은 방사선을 검출할때 이미 완료된 것입니다. 검출기 이후에 작용하는 독가스 장치라던가, 독가스에의해 고양이가 죽는다던가 하는 것은 일종의 정보전달 과정이네요. 마치, 이중슬릿 실험에서 이중 슬릿 뒤에 형광판을 설치해서 빛이 나는 위치를 사진으로 기록했다가, 그 사진을 사람이 볼때에야 비로서 전자가 형광면에 부딧힌 위치가 결정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군요. 여기서 미시세계에 대한 측정의 간섭은 형광면에 전자가 부딪치게한 측정방식에 따른 것이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뚜껑을 여는 행위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측정에 의한 계의 간섭과는 구별되는 것인데, 정보의 전달과 측정의 간섭 시점을 이 고양이 이야기에서는 혼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거시세계에서는 고양이의 삶과 죽음에는 광자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의 측정행위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외에 비록 거시적인 사건이라도 측정이 영향을 미치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양자역학이 밟았던 과정을 한번 밟아보는 것도 좋겠죠. 예를 들어, 심리학이라던가, 사회과학이라던가에서, 우리가 대상의 정보를 얻기 위해 하는 질문, 조사 자체가 조사대상 자체와 상호작용을 해서 우리는 그 영향을 받은 결과만을 보는 것이라면 말이죠.
4. 따라서, 요약하면, 제 견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을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은 광자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자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개의 광자의 행동 이나 한입자의 행동을 여러번 측정했을때 나타나는 성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론이 제공하던 방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그 사용의 불편함과 논리적인 접근방식의 차이때문에 아인슈타인과 같은 기존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하나의 완결된 이론으로 보기보다는 그것이 아무리 유용하다 하더라도 이론으로서의 자격이 미달인 것으로 여긴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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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님께서 제기하신 해석은 통계적 해석방식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제가 비판하고자 하는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불확정성원리에 대해 초기 하이젠베르크는 분명히 측정행위의 교란으로 설명하고 있읍니다만, 이후 측정행위의 교란이 아니라 바로 물질의 본질(즉 파동성의 본질)로(보어가 설득했죠)보고 있지요. 여기까지는 이견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불확정성원리는 측정장치의 교란이상의 의미를 함축합니다.그리고 더 확장해서 측정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않는다는 식의 결론을 내립니다. 어떻게 보면 특정한 존재방식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결론이 바로 여러개 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상태를 주장합니다. 이 중첩된 상태는 측정과 동시에 오그라 들어 하나로 된다고 해석합니다(파동함수의 오그라듦). 이것을 비꼬아 슈레딩거의 고양이 역설이 나오게 됩니다.
통계적 해석에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분명 주류 코펜하겐해석에서는 전자 하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락은 이중 슬릿 실험을언급하면서 전자를 하나만 이중 슬릿에 통과 시켜도 간습무늬가 나타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자 하나가 두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어 역시 전자 하나에 대해 파동성과 입자성은 동시에 측정할 수없다고 하고 있고, 이 것 역시 현재논란 중에 있습니다(아스파 실험인가? .. 여기에 반대되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죠..) 아무튼 이 부분은 통계적 해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급입니다.
여기서 슈레딩거의 고양이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측정장치의 교란과는 무관하게 논쟁이 되고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파동함수의 오그라듦' 역시 측정장치의 교란과는 무관하며,
제 생각은 수학적인 것(추상적인것)을 '그대로' 현실에(구체적인 것)에 끼어 맞춘 결과로 생각됩니다.
아직 안주무셨네요. 저는 보통 새벽에 일어나서 작업을 하는 편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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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충 써놓고 틈틈이 편집하고 있었는데, 금방 댓글을 다시네요. 저는 유학생이라 지금 미국에 있고, 여기는 낮입니다. 해민님께서는 매우 부지런하시군요.우선, 저는 그 '측정'에 많은 함축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측정 자체가 물질 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엄밀하게 에너지의 교환이 없이 물질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주장한다면, 측정은 결국 물질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죠. 측정을 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다른 물질과의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식을 해석했죠... 그런 점에서 저는 '관측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좀 거칠긴 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제 생각이 과연 맞는지 다시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통계적 해석에서...
이중 슬릿 실험이 통계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자 하나만 이중 슬릿에 통과 시켜도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것은 전자 하나만을 보내고 나서 얻은 결과가 아니고요, '전자를 하나씩 여러번 보냈더니 형광면에 나타난 분포가 간섭의 분포를 갖더라'로 알고 있습니다. 전자를 하나 보내서 형광면을 보면, 그냥 아무데나 한 점이 나타납니다. 두번째 전자를 보내서 형광면을 모면, 또 그냥 다른 곳에 한 점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여러번 반복했더니, 어디에서는 좀더 많이 나타나고, 다른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간섭무늬를 보이는 것이죠. 저는 이런식으로 이해해서, 통계적 성질의 근간이 바로 이 이중 슬릿 실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음.. 역시 이부분도 제대로 한번 살펴봐야겠군요.
해민님의 생각은 정리가 정말 잘 되어 있군요. 전공이 무엇인가요? 저는 화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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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미국에 계셨군요. 저도 YJ님과 같은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양자역학 해석은 여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는 고전 양자역학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엄청나게 많은 해석과 논쟁들이 나오더군요.(예를 들어 앞의 논쟁은 EPR 논쟁으로 이어지죠.). 개인적으로 소화해내기 벅찬 부분이 많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저는 한국에서 공대를 대충 졸업하고 대충 학위 받고 회사도 대충 다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해야할 일을 찾다가 문득 현대 과학을 한번 정리해보자는 욕심이 생겨, 새벽에 잠깐씩 공부하고 있어요. 암튼 무지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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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런 논쟁이 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만 알다가 이 기회에 양자역학과 관련된 여러 논쟁을 접하게 되는군요. 제가 이 논쟁에 관한 어느 정도의 사전지식을 가졌다면, 용어 사용의 혼란도 줄고, 괜히 이런 저린 이야기를 할 것 없었을텐데, 그냥 제가 접했던 양자화학의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니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해민님께서 진지하게 답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종종 놀러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