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아, 이렇게는 난 더 못살아 ~ 불량사회에서는 못살아~

 

여러분들은 불량사회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 불량사회에서는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원성은 하늘로 치솟고 땅을 찾아 파고든다. 그런데 나머지는 막힌 거 투성이다. 귀와 눈을 틀어막고 마음을 닫아버려서 남의 소리라고는 도통 듣지를 않는다. 마치 ‘소귀에 경을 읽듯이’ 천지가 막히고 소통이 막힌 세상이 돼버렸다. 누구 이야기인가? 대통령이 그런 사람이다. 바로 삼천리금수강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대통령이 막아버리니 온 세상이 막히고 대한민국이 막히고, 젊은이 취직자리가 막히고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 막혀버린다. 대통령은 국민의 머슴이고 우리는 그의 하늘이다. 그런데 국민은 왜 자포자기인가,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가, 넋이 나간 것인가?

 

두루두루 짬뽕, 구색 갖춰 모두 섞인 거 같다. 짬봉, 짬뽕이 기가 막혀 도무지 못살겠다. 무엇이 짬뽕인가 하면, 염치와 뻔뻔함과 무대뽀와 파렴치가 온통 짬뽕이 돼버려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막 가는 줄도 모른다.  동서남북이 막히고 강과 산이 막혀서 차마 아니 쉬어지는 숨을 조금이라도 쉬어 보려고 꺽꺽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다. 지금 삽질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강과 산도, 더불어서 사람도 기가 막혀 통곡을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사자후를 토해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바로 ‘불량사회’에서는 더는 못산다고, 우리 아이들이, 자식세대의 젊은이들이 살 수 없다고, 그래서 우린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김광수경제연구소와 선대인부소장님의 소리가 있다.

 

왜 광야의 소리인가? 저 옛날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 만을 먹으며 광야에서 외치던 이스라엘의 선지자 세례자 요한처럼 꽉 막힌 가슴을 뚫고 한줄기 빛처럼 내리 꽂히는 소리이기에 그렇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절망에 신음하던 이스라엘민족에게 머지않아 메시아가 올 것임을 외치던 선지자의 소리처럼 신선한 사자후가 우리의 가슴 속을 소나기처럼 파고든다.

  

선대인님의 절절한 강의는, 오랜 건기 속에서 산천이 메마르고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대지에도 머지않아 단비는 쏟아져서,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대지로 변하리. 우리가 제대로 알고 대처만 한다면 부자들만 잘 살고 그들만의 리그처럼 권력을 독점하는 그런 일은 없으리. 고소영과 강부자를 이겨낼 세상이 올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알고 배우고 관심을 가져 그들만의 리그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 거침없이 말한다.

 

이러한 꿈과 희망을 말하는 이, 그는 누구인가?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선대인 부소장이다. 그를 아는가.

  

2주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김광수소장님의 강연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선대인 부소장님의 강의다. 강의 제목은 <미래세대를 위한 한국경제의 길>이었다.

  

강의 내용과 강연장 분위기를 전하기 전에 선대인부소장님의 이력을 잠깐 보자. 선부소장님은 6년 동안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기자생활 중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4차례 받은 아주 유능하고 의욕적인 젊은 기자였다.

 

         

 

98년도 IMF 기획보도 (일주일 동안 서울역에서 노숙체험)

99년 1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은 없다)

99년 1월 (공정과세로 가는 길) 등.....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는 기자생활을 접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문의 왜곡보도문제였다고 한다. 선부소장님이 취재한 기사가 사주나 정권의 입맛에 맞게 각색연출 축소왜곡 등의 난리 부루스를 한바탕 추고 나서야 기사화 되는 거였다. 신문사 기자 생활은 이런 이유 때문에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경제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왜 하고 많은 분야 중에서 경제문제인가 말이다.

 

동아일보 기자생활 6년 동안 사회부룰 거쳐서 정치부기자를 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정치부에서도 특종을 많이 냈다고 한다. 이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공공부분에서든 민간부분에서든 건설과 삽질은 대놓고 국민의 등골을 빼먹는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선부소장님은, 이때 두 분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 첫 번 째 스승은 김광수소장님이다. 소장님으로부터는 부동산문제의 전반적이고도 거시적인 것. 한국경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다가 경실연의 김은동 공공사업팀장님으로부터는 아파트의 원가계산에서부터 건설업체들의 담합과 폭리의 카르텔과 정경유착의 깊고도 굵은 먹이사슬에 대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였다. 이러한 경제문제에 대한 천착과 깨달음은 오늘날의 선부소장님의 길을 결정했다.

  

“1년 4개월 동안에 두 분 스승으로부터 T자형으로 자양분을 흡수한 거죠. 소장님으로부터는 폭넓고 다양하게, 나머지 한분한테는 집중적으로 꼼꼼하게...”

 

이때가 미디어 다음에서였다. 미디어 다음에 오니 그렇게 많던 간섭과 제약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공부에 천착하며 마음껏 기사를 쓰면서 수많은 특종기사를 쓸 수 있었다. 동아일보 6년 동안에 쓴 기사의 양보다 이때 쓴 기사의 양이 더 많았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발로 뛰니까 좋은 기사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의적 능동성은 이렇게 좋은 것이여!’

  

 

           

(강의가 끝나고 선 부소장님께 다가온 어르신은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를 과연 개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또하나의 사진은 아래 제시된 질문, 바로 김광수소장님께서 2012년 우리나라의 모든 국회의원의 지역구에 후보를 낸다고 했는데 이에 관한 지속적인 방안이 있는지 묻는 모습입니다. )

  

그 다음으로 하버드대학의 케네디대학원에서 공공정책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서울시 정책전문관 1년을 거쳐서 우리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일원이 됐다. 선대인 부소장님의 이런 이력을 알만 한 사람들은 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연구소에서의 활약이다. 왜냐면 바로 삽질 토건장이 대통령이 이 나라를 삽질로 시작해서 삽질로 날밤을 새우는 삽질행정으로 토건재벌과의 밀월을 시작한 것과 활약의 눈부심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철벽 카르텔을 뚫고 ‘나는 너희를 회개시켜 주의 길을 닦아, 오시는 이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김광수연구소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광야란 어디인가. 광야정신이란 무엇인가?

 

광야는 거칠고 험하기에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다. 광야정신은 어렵고 힘들기에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을 외치는 정신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저 ‘어둠이 한줄기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했듯이 한줄기 광야정신은 반드시 승리의 빛줄기로 살아나게 하고야 말리라.

  

거두절미하고 이쯤에서 선대인부소장님의 ‘오마이뉴스’에서의 강연 동정을 말한다. 경제지식이며 경제상식은 포럼과 공부방에 드나들며 수시로 익히고 공부하며 우리의 의견을 실어 글로 남기고 댓글로 응원하며 반론을 펼치는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메꿔 나가자. 본 글에서는 선대인부소장님의 특강의에 응답하는 청중들의 면모에 비중을 맞춘다.

  

선대인부소장님의 블로그 이름을 아시나요? 네, 아신다고요? ‘정말요?

“그러면 불로그 이름을 왜 불량사회라고 했대요?”

 

한국사회는 부가 편중된 사회라서 그렇다.

조중동 메이저 신문의 여론왜곡이 심해서 그렇다.

공정한 게임 룰이 없는 사회라서 그렇다.

독재와 수구꼴통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서 그렇다.

  

갖가지 의견이 난무했다. 여기서 선대인부송장님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불량사회인 이유는국민이라면 공정하게 교육 받을 권리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돈 지르기 게임이다. 능력과 노력으로 나의 지위가 개선되어야 하는데 게임의 룰이 적용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 아니 불량사회인가?

  

국가가 경제성장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경제성장을 이루면 좋은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 747 경제공약, 지표상에 나타난 수출호조 이런 거 다 소용이 없다.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면 허상이다. 일자리가 많아서 나의 임금소득으로 나의 삶의 질이 좋아져야 한다. 그런데

 

‘빚이라면 황소도 잡아먹는다고?’ 빚내서 강바닥에 쏟아 부어 온 국민들을 빚에 허덕이게 하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등록금은 세계에서 제일 비싸고, 비정규직은 800만이 넘고, 자유는 속박당하고, 같은 민족을 향해서는 무자비할 정도여서 털끝만한 인정도 없고, 강부자 고소영을 위한 세금감면은 할망정 늙고 병들고 나약한 약자의 복지기금은 가차 없이 삭감하는 이런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불량불량불량불..............불불불 불량....................불, 량, 사, 회이다.

 

            

 

(분위기가 숙연할 정도로, 열강을 마친 후 오마이의 김기쁨님이 다가와 사인을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부소장님 표정 좀 보세요! 김기쁨님 참 예쁜 모습이지요. 감동 먹은 후의 어쩔 줄 모르는 순수함? 우리시대의 아름다운 모습 하나, 저도 감동먹었습니다.)

 

하나 더 묻는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보았는가? ”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53년 프랑스 작가 장지오노에 의해서 쓰여졌다. 이글의 주인공인 엘자아르 부피에는 프랑스 남부 알자스로렌 지방에 나무를 심는다. 한 고결한 인격을 가진 엘자아르 부피에의 불굴의 정신과 실천으로 인해 싸움과 반목만 있던 황무지를 옥토로 복원하고, 새와 짐승이 찾아들게 하고, 시냇물이 다시 흐르게 한다. 이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 새로운 삼림의 탄생-> 수자원(水資源)의 회복 -> 희망과 행복의 부활이 그것이다.

 

아까 어느 분이 연구소에서 지속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어떤 방안이 있는가 물어오셨다. 지난 번 강의에서 소장님이 249개 지역에서 모두 후보를 내겠다고 천명하셨다는 소리를 나도 들었다. 여담이지만 그 소리를 듣고 ‘소장님, 되게 세게 말씀하셨구나!’하고 웃었다.

 

순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나오는 주인공처럼 굉장히 순수한 분이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하는 숭고한 뜻인 거다. 누구라도 서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씨를 뿌리기 시작해야 2012년도 있는 거고, 2017년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까이서 본 그 많은 정치인과 보좌관들,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그 자리에 앉게 되어서 자리가 사람을 말해준 것이다. 정치는 대단한 사람이 하는 것인 것처럼 인식 돼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치는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사처럼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일상사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진흙탕 싸움이라는 둥 정치혐오증을 조장시켜서 접근할 마음조차 갖지 못하도록 정치혐오증을 불러온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풍토는 독재와 부패가 싹을 틀 수 있는 빌미가 될 것이다.

 

소장님 이하 연구소의 모든 식구들은 저희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으로 이 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기득권의, 기득권에 의한, 기득권을 위한 나라에서 모든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로 바꾸기 위한 의지로 똘똘 뭉쳐져 있다. 연구소는 금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맞서 제 권리와 목소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서민들을 위해 정보를 생산, 발신하고 목소리를 높이고자 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사람이 꾸는 꿈은 몽상이지만, 만인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연구소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데 동참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깊이 고개 숙여 인사드리며 많은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001년 4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이미 그는 마음의 사표를 써놓았다.

왜 그랬을까? 진실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답이 있다.

 

탱큐 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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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8 15:19 2010/05/2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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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카페, 미사리에서 강촌 라이브 카페까지~

 

  

나는 전철 족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자나 깨나 두발로(!) 족인 것이다. 웬만한 곳은 걷고, 정이나 먼 곳이면 버스나 전철을 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다. 전철족이기 때문에 볼 수 있고 겪을 수 있는 그런 일에 가끔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 적잖게 생긴다.

  

일요일이었다. 6호선 전철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갈 목적지는 석계역, 차를 탄 곳은 망원역이다. 망원역은 비교적 출발점에 가까운 지점이기 때문인지 일찌감치 빈자리를 찾아 앉을 수가 있었다. 방금 끝난 철학 강좌에서 받아 쓴 ‘강의노트나 읽으면서 가야겠군.’하고 노트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7080 라이브 카페’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통기타 반주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래가 차안 가득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흔히 있는 전철 안 잡상인이었다. ‘난 해당 사항 없는 사람이니까........’하고 하던 일에나 집중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내 앞에서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뭐지?’하는 순간, 분홍색으로 된 CD 하나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어? 아저씨~’

안 산다는 말을 되도록 빨리 한마디 던질 요량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얼굴은 싱글벙글인 데다가 입은 흥얼거리기에 너무 바쁜 모습이다. 그 모습이 하도 재밌고 웃기게 생겨서 나도 모르게 귀밑까지 찢어지게 웃고 말았다. 걸렸다. 마주보고 웃었으니 내 비위 장으로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상품권도 받나요?”

언제부턴가 현금이나 카드결제 대신에 문화상품권도 받게 되면서부터 동생은 책을 사보라면서 자신의 가게에서 받은 상품권을 간간이 내게 주는 것이었다. 퍼뜩 그 생각이 났다.

 

“아, 그럼요! 받죠오~”

 

상품권도 받는다는 말에 CD는 꼼짝없이 사게 된 거 이왕이면 나도 한 건 하자 싶었다. 전철을 타다 보면 가끔은 정말 말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고 특이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난

 

“저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하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 그럼요! 되죠오~”

“아저씨 상품권 여기요!”

CD를 받아들고 카메라를 찾아서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이 일 얼마나 되셨어요?”

“3년요!”

“사는데 지장은 없으시고요?”

“저축도 하면서 살아요!”

“네에~ 많이 파시나 봐요?”

“ㅎㅎㅎ.........”

“즐거우시고요?”

“그럼요~”

 

스치듯이 금세 지나가면 그만인 아저씨를 향하여 부지런히 질문을 던졌다. 이름 하여 ‘미사리 카페에서 강촌 라이브 카페까지’ 여기다 ‘통기타 70.80 카페’라고 쓰여 있는 CD 장수 다. 이 CD가 잘 팔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축까지 하면서 산다니 듣는 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그러는지, 옷 입은 모양새로 봐서는 영락없는 b-boy 스타일이었다. 생업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지도 모른다. 아저씨가 명랑하고 흥미롭게 보여서 나쁠 건 없다. 궁색하고 답답한 모습을 하고서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가는 장사 공치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전철 안은 아차 하면 혼잡하고 비좁은 상황이 돼버린다. 이 틈을 비집고 존재감을 들어내야 물건 하나라도 판매할 수가 있을 것이다. 승객들은, 차 안에서 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단 몇 초 이내에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장사 공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전동차 안에서도 이런 진풍경이 벌어지는 걸까?

 

 

케이스에는 CD가 6장이 들어 있었다. CD 하나에 18곡이 실려 있으니까, 모두 108곡 쯤 된다. 미사리에 가면 카페가 많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강촌도 이에 뒤지지 않는 그 어디인 곳인가 보다. 오늘 집에 가면 나도 한번 미사리에서 강촌 라이브 카페까지 음악으로나마 섭렵해 볼까 싶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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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0 10:31 2010/05/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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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이는 잊어버리세요!

어머니, 나이는 잊어버리세요!

  

 카네이션 꽃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어버이날을 맞는 거리의 모습이다. 특히 전철역이나 동네 초입에는 꽃을 파는 가판대가 분주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이 형성해 놓은 5월의 기호들이 지금 철을 잊지 않고 목청껏 깜빡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잊고 지내던 기억이 솟아나고 가라앉았던 생각이 다시 일어난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정의 끈은 이처럼 서로 화답하며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덩달아서 해마다 이만 때쯤이면 나에게도 크고 작은 감회가 뒤따르고 나부낀다. 공교롭게도 바로 얼마 전에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뵈었던 차다. 귀향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나를 뒤따르고 있었다. 이와 함께 1호선 대방역사 안에서 맞닥뜨린 꽃집은 특히나 강한 인상으로 다가 왔다.

  

그날은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 주최하는 10주년 기념세미나가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전문건설인회관이었다. 제 시간에 도착해야하는 것에 여부가 있겠는가. 공동대표로서 맡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지 않게 도착해야한다는 생각만을 앞세운 채 걷고 있었다. 그러니 목적지를 향한 다급한 발걸음만을 내디디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빨리 2번 출구를 찾아야지.”하며 움직였다. 그런데 역사 안에 있는 꽃집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꽃 잔치가 또 있을까?’ 꽃바구니와 꽃다발이 층을 이루며 놓여있고, 코사지로 만들어진 카네이션도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안되겠다 싶었다. 잘 살자고 사는 세상인데, 이곳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추지도 못하고 목적지만을 향해서 또닥거리며 가는 난 뭔가 싶었다.

  

걸음을 멈추고 “이 꽃 얼마에요?” 하고 물었다. 지나가던 젊은이들도 덩달아서 관심을 보였다. 한 사람의 멈춘 발길은 또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꽃집은 사람으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이 틈에 꽃 한 송이를 사들고 역사를 빠져나왔다. 역사 밖에도 꽃을 파는 좌판이 꽤나 여럿 눈에 띄었다.

  

아하! 5월이구나!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석가탄일이 들어있는, 5월이구나. 이 순간 5월의 꽃들은 귀향의 잔상에 힘겨워하는 내게 잠재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먼저 어머니의 모습이다. 오래 전에 군산을 떠나온 후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게 찾아가는 귀향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서울 나들이를 겸해서 아들, 딸네 집을 자주 오셨다. 그러니 1년 내내 어머니의 얼굴 한번 못 보고 지낼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같은 패턴도 바뀌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렇게 어머니가 서울 나들이를 자주 하셨을망정 지금은 아니다. 어느덧 고향에 칩거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어머니 역시 세월과 나이는 속이지 못하고 그리도 처연하게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푹 쉬고 월요일에 갈 거지?”

“어머니, 저 겸사겸사 왔어요. 오늘 밤밖에 못 자요. 낼은 전주에서 볼일 봐야 돼요.”

 

딸이 찾아 온 것은 금요일 오후다. 딸애가 주말은 이 어미랑 같이 보내주겠지. 오늘은 저녁 먹고 이야기나 하자. 그리고 내일은 같이 꽃구경 가고, 일요일에는 성당에 가는 거다. 나란히 앉아서 같이 미사를 보자. 그 다음부터는 딸네미가 일찍 떠나든 조금 늦게 떠나가든 상관 안 할란다. 이런 어머니의 희망사항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볼일 보러 온 김에 들렸다 하지 않은가?

  

“볼일 보러 왔다고?”

“네에~ 안 뵈면 서운하니까 들린 거예요.”

“그렇구나........”

“낼 은파로 가실래요? 공원부터 가실래요? 일찍 서둘러서 꽃구경 가요.”

 

         

 

며칠 전에는 눈까지 내렸단다. 해변 바람이 유명한 곳이다. 금강이 도도히 흐르는 항구 도시 군산, 쌀쌀한 바람기를 도시 가득 품고 있는 4월이었다. 변덕스런 날씨와 황사바람이 특징인 곳이다. 거기다가 전국적으로 유난히 긴 봄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올 봄 날씨 말이다. 이런 추위 속에서 우리 모녀는 꽃구경에 나섰다.

 

어머니는 40여 년 전부터 자가용, 어머니 문자로는 승용차를 타던 계층이었다. 같이 길을 나서는 것도 오랜만이려니와 길을 가면서 그놈의 승용차 타령을 또 하면 어쩌나 싶었다.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이것이다. 내 맘 속에 어머니가 불편한 이유는 늘 이런 것이었다.

 

“내 몸 상태로 봐서는 누가 승용차를 척~ 대기시켜 놓고 꽃구경이든 강구경이든 해야 맞어.”

‘어머니, 장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사는 날까지 그저 내 발로 돌아다니시는 분들이래요. 걷는 것 좋은 일이에요! 천천히 감당이 되는 속도로 걷고 또 걸으셔야 해요.’

  

“남도 아니고, 딸인데 좀 어떠냐? 이야기 좀 하고 살자!”

“딸이니까 더 문제예요. 남 얘기라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릴 수도 있어요. 근데 어머니가 당한 일이다보니까 이 딸의 가슴이 쓰리고 아린 거예요.”

 

같이 살고 있는 아들 내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며,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차편이 마당하지 않다는 얘기, 이런 거, 안 들으면 몰라도 들으면 신경 쓰이고 속상한 거 투성이다. 어머니의 걱정과 푸념이 내게 전염될까봐 경계심부터 앞선다. 어머니와 부딪치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은파유원지에서 내렸다. 벚꽃이 만개하다 못해서 앞섶을 풀어 헤친 풍장 꾼처럼 절정의 신명을 풀어내놓고 있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꽃비라고 했던가. 비교적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얘 저거 봐라! 꽃은 이쪽이 더 좋아!”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이던 아버지랑 같이 승용차를 타고 철철이 꽃구경하시던 어머니였다. 그 때 봐뒀던 눈썰미로 꽃이 탐스러운 쪽을 가리키며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 군산 이야기를 하자. 군산은 벚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벚꽃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길다. 군산의 벚꽃 이야기는 일제시대 까지 거슬러 가야 하니 말이다. 그 당시에 군산은 드물게 계획된 신도시로서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시내 곳곳에 벚꽃이 심어졌다. 여기다가 70년대에는 백리나 되는 전군도로(전주~군산)의 가로수를 온통 벚꽃 길로 조성하게 되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 되면 전군도로 백리 길마저 온통 꽃 천지였다. 황홀하게 핀 벚꽃사태로 흥겨운 도시 그것이 군산이었다.

  

군산공원이며 은파유원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특히나 공원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툭하면 달음박질 쳐서 올라가 놀던 곳이 벚꽃동산이었다.

 

호수와 어우러진 은파유원지도 물안개 속에서 갖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수 가에 벚꽃이라? 자연히 내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걷고 싶었고 호수가로 다가가고 싶었다. 어머니를 돌아보니 벤치를 찾아서 덥석 앉으시는 것이었다.

 

“어머니? 왜 안 걸으세요?”

“여기서도 잘 보인다. 나, 앉아서 그냥........ 사람 구경이랑 이것저것 할게.......”

“그럼, 저어~기까지......., 전 좀 걷다가 올게요.”

 

          

 

 보폭을 정리하며 발을 뻗었다. 순간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는 꽃잎을 머리위에서 맞게 되었으니 맵맴거리며 돌고 싶어졌다.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한 장면 찰칵, 어머니에게 사진 한 장 찍어드려야지 싶었다. ‘어어?’ 그런데 도시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얼굴도 들지 않으신다. 사진 찍기 좋아하고, 나들이 좋아하시는 어머닌데...... 셔터를 누르는 걸 알면서도 왜 저러실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여전히 그냥 계신다.

 

봄볕에 몸단속을 잘도 하셨다. 모자 쓰고, 장갑 끼고, 추울까봐 가볍게 숄까지 두르셨다. 나를 보시더니 어서 걸으라고 손짓을 하신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다시 숙이고 생각에 잠기는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예전과 달라 보인다. 힘이 없어 보였다. 어깨를 축 쳐지게 늘이고 그저 앉아계신다. 뒷걸음질 치면서 어머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호수 한 바퀴를 날을 듯이 금방이라도 다 걸을 것 같았는데, 왠지 걸음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자꾸만 어머니 쪽으로 고개가 간다. 햇볕을 즐기며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이다. 온 몸을 이완시키고 있는 벤치위의 어머니, 편안해 보여서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냥 그렇게 계시라고 비켜줘야 할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왔다. 헌데도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고 밟혔다. 시시 때때로 내 곁에서 맴돈다. 그때 마다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그러나 보자. 다시 생각해보자. 군산을 찾아가서 어머니를 만난 그 잔상이 왜 나를 놓아주지 않고 내 곁에서 서성거리는 거야.

 

그때 나는 어머니 곁에 다가가 앉지 않았다. 어머니 혼자서 따스한 햇볕을 마음껏 즐기시라는 이유였지만 알고 보면 은근슬쩍 어머니와 거리를 두는 행동이었다. 그래,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어머니 그러네요. 이제와 생각하니 꽃구경이니 산보니 보다 어머니 곁에 다가가 나란히 앉았어야 했어요. 그 봄볕을 같이 맞고 어머니가 하시는 몇 마디 말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여 줬어야 하는 것이었어요. 전 어머니의 소박한 바람을 외면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 마음을 다해 말할 게요. 봄날이 어머니의 어깨위에 걸쳐 있네요. 그것은 오랜 세월의 겹인가요. 그러니 어머니, 저랑 같이 은파 유원지를 찾은 그날로 돌아가서 말하겠습니다. 나이는 잊으시고 아름다운 꽃그늘 밑에서 봄볕을 만끽하셨기를 바랍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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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13:21 2010/05/1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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