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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만난 거미

 

26일 오후 5시 광안리 바다 앞 도로에서

 

군대가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왔던 날.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건물 밑에서
까만 거미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곤충의 움직임을 관심있게 지켜봤던 나는 
유독 거미만큼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워했다. 

 

어쩌면 거미는 나에게 있어 
세상 어느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 중에 하나였다.


10분 가량 지켜봤을까?


거미는 거미줄 위에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옆에 있던 작은 거미는 줄을 치느라 부산했지만,
오직 검은 거미만큼은 조용했다.

 

아니 자세히 말해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심한 나는 
그것을 사진에 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비가 오는 바다에 거미의 모습이라..
좋은 피사체였다.

 

조용히 카메라를 들여다 댔다.


혹시나 거미가 놀라지 않을까 걱정도 있었지만.

디카 접사모드로 조금씩 거미곁으로 다가갔다.

주먹 한개 들어갈 정도의 거리까지.

조바심도 들었고 두려움도 한층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다가가지는 못했다.
결국 근거리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데 그쳤다.

 

지금까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라고 해야할까?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여운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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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종교를 넘어

 

부처님 오시기 며칠 전 부산역


난 명목상 기독교다.

어릴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온 나는,

유치원도 교회 부설 유치원을 다녔고 대학때도 호기심에
기독교 서클에 들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종교에 몰두한 적은 없다.

어머니가 아시면 실망하시겠지만,
요즘은 밥 먹을 때조차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물론 종교에 대해서 물어보면 기독교라고 얘기하지만,
난 내 자신을 더 믿는 경향이 많다.


그러다 차즘 관심이 간 종교가 불교였다.
어쩌면 난 다종교주의자일수도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과연 종교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아졌다.


갈등과 번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종교가
어느덧 갈등과 번민을 조장하는 경우를 많아졌다.


희망과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종교단체들을 보면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이 든다.


가까운 예로 부산의 어느 불교사찰에서는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투쟁을 벌인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스님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또 부산역의 경우, 어느 목사님이 노숙인을 상대로
무일푼에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벌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들이 그걸 믿는 종교인들에 의해
상처받고 있는 것이다.


슬픈 현실이다.
아니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한번쯤 우리는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믿는 종교라서 해서 그것이
100%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신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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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거리

 

13일 오후 7시 사무실 앞 마당에서


어제는 비가 오더니
오늘은 평화롭게 해가 지는 풍경이다.


이런 날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정원에서  
음악이나 들으면서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로 뒤덮힌 도시에서도
이런 작은 여유를 느낄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하고 싶다.


아, 오랜만에 해가 지는 풍경을 보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들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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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대화


 

7월 9일 오후 7시 광안리 바닷가 뒤

 

천년의 약속 1병을 나눠마셨다.

오랜만에 먹는 술이라 3잔 째 마시니 취기가 돈다.

 

오늘 술을 마시기 전부터 친구와 한미FTA(무역협정)문제부터

시시콜콜한 일상얘기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결국 얘기의 결말은 돈의 문제로 끝난다.

예전에도 그랬다.

 

나도 얘기의 결말이 이렇게까지 오면,

'돈은 벌어야 겠구나'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 나이 벌써 서른이구나'라고 실감한다.

 

더 나아가 결혼이라는 문제에까지

신경이 쓰여진다. 골치아픈 문제다.

 

그렇다고 엄밀히 따져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게 이런 우유부단 성격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를

나는 10년 동안이나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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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광안리에서 만난 노(老) 기타연주가


 

2005년 3월의 어느날 광안리 바닷가에서..

"아직도 음악을 배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었다. 1년 전 광안리 바닷가에서 만난 한 노(老) 기타연주가가 내게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음악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분의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하지만 연세가 족히 70살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손자뻘인 나에게 존댓말을 쓰시면서 자신의 음악을 들어달라며 부탁했다.

 

그 분은 평생 음악만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분은 아직도 음악의 길은 멀었다며 연주가 끝난 뒤 자신의 연주를 솔직하게 평가해 달라고 했다.

 


 

그 분이 내게 들려준 곡은 락이었다.

 

통기타와 연결된 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단조롭고 조악스러웠지만,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겨 왔다. 역시 연륜의 힘은 무시 못하는 것이었다.

 

당시 10분간의 짧은 만남이지만, 

난 그분이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분에게 있어 음악은 단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일부였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그때 그 음악이 생각난다.
멜로디는 잊혀졌지만, 그때 느낌 때문에 아직도 가슴 한켠이 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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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함

 

며칠전 사무실 마당에서 바라본 건물

 

몇년만에 술에 취했다.

오랜만에 기분좋게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막 들뜨기 시작했다.

 

실로 참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시야의 초점이 맞지 않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기분.

 

살다보면 이렇게 기분좋게 취하는 날도 있나 보다.

그동안 술을 마셨지만 취하지 못한 날이 더 많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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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변했던 것일까?

 

해운대 바닷가에서..


한 사람과의 진지한 만남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얼마전 난 다니는 곳의 사무실 개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곳은 진보매체의 지역사무실이고, 
난 그곳에서 글을 쓰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날 개소식이 무사히 끝나고 뒷풀이가 벌어졌다.
난 평소 집회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상천씨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상천씨는 케이블방송국을 다니다 해고당한 사람이었다.
상천씨를 몇 번 농성천막에서 만났지만,

그날만큼은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떠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2살 연상이다.그래도 그는 나를 형이라 불렀다.
부담스러웠지만, 자기한테는 그게 편하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그가 예전 나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을 얘기해 줬다.

 

"그날 형님, 그냥 기사거리를 찾으러 온 기자같았어요"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아무생각없이 컴퓨터화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얘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 정말 그런 존재였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모습이 예전과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실에 순응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지만,
이제 어느정도 안전망을 치고 얘기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기사를 쓰기 위한 
수단으로써 만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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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중재씨 이야기


 

노숙인들에게 줄 수제비를 만드는 호준이형(오른쪽)
반죽하다 남은 밀가루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호준이형은 부산역 거리의 음악가이다.
옆에서 돕고 있는 분은 부산역에서 만난 노숙인 중재씨.

중재씨는 이제 노숙인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자활하려고 노력중이다.

자활하던 그에게 도움이 됐던 것은
"스스로 일어나라"라는 따뜻한 동료의 한마디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할 수 있다는 의지.
이제 일도 얻어다는 그를 보면서 나는 오늘 그의 사진을 남긴다.

수제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점 하나는,
멸치의 역할이었다.

부산역에서 노숙인을 만나다 보면
그들 중 일부가 이가 상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노숙생활때문에 영양분이 불충분했던 것 같았다.
중재씨도 그랬다. 시꺼먹게 썩은 그의 이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언제 같이 치과에라도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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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두려움에 대해서



 

1월의 어느날 부산역에서 노숙인과 같이 라면 먹었던 때..

노숙인들을 취재하려면 우선 그들과 친구가 되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시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역시 일(활동)이란 쉬운게 아니다.

 

전에는 혼자 일하고 터치를 거의 받지 않아

별달리 힘든 걸 느끼지 못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주간취재계획이니, 콘텐츠생산기획이니 등등,

보고도 할 게 많고 내가 맡은 부분도 있어 고민도 많았다.

 

요즘은 좀 나아졌다.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음..

 

어렸을 때부터 난 스트레스에 민감한 편이었다.

마음에 작은 부담이 있는 날이면 그날은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두려웠고 귀찮아졌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생각이 조금씩 변해갔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앞으로 난 무엇을 할 것인가"

 

특히 침대에 누운 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천장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더 든다.

 

처음에는 막막해 보이지만,이내 기분이 묘해진다.

가슴도 가라앉고 편안해지는게..

 

그러면 정말 하루하루 무엇을 쓸것인가에

고민하는 내가 좀 우스워진다.

 

이제 글 앞에서 가벼워지고 솔직해 지고 싶다.

덧붙이지 않은 그런 표현을 하고 싶다. 

 

이제 다시 글을 쓰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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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식대로 살아가기


 

어느날 오후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와 정반대인 친구와 술을 마시며
깊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현실적인 사람이 되라고 한다.
좋은 직장, 결혼, 돈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한다

나는 뜬 구름 잡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나는 10대 후반부터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과 다른 삶을 원하고 있기에
남들과 다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의 모습은
타인에게 비치는 겉모습을 신경쓴다.

 

아직도 난 멀었다.

멀었어.

 

친구에게 현실적인 삶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얘기했다.

 

그렇지만 난 좀 더 자연스러운
나를 추구하고 싶다. 나만이라도.

일탈이 아닌 습관처럼 흘러나오는
그런 나의 모습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얘기했다.

나는 나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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