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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젠쉬타인의 '이반뇌제'

 

‘전함포템킨’과 ‘1917년 10월혁명’의 감독 러시아 아니 영화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의 ‘이반 뇌제’를 보았다.

2차 대전이후 피폐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물적 정신적 토대에서 탄생한 또하나의 역작!


16세기 러시아의 대공작인 이반이 러시아 전체의 짜르가 되기 위한 과정과 과정에서의 다른 왕족과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극의 대개를 이룬다.

1부에서는 타타르족(동양계 몽고족)과 동유럽 국가와의 전쟁을 통한 민족국가 성립과정을 그리고 2부에서는 전제군주제 확립을 위한 평민계급의 친위군대(오프라치니)를 통한 귀족과 왕족의 숙청을 그리고 있다.


전쟁이후 독일제국주의 침략을 이겨낸 스탈린 대원수는 1부에 크게 만족을 할 만하지만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자신의 일인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트로츠키 등의 ‘반대파’에 대한 처절한 숙청을 자행했던 그는 2부에서 당연히 노발대발할 수밖에....

결국 2부는 58년에 스탈린 사후 5년이 지나 상영이 되었다고 한다.

2부 마지막 이반의 연회장면은 갑자기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데 화려한 러시아 춤과 음악등이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이반의 역을 맡은 세르게이 쉐르카초프의 괴기스러우면서도 고뇌하는 연기가 일품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

1898-1948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에이젠쉬타인은 1세기의 영화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이자 이론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반세기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초기 무성영화의 혼돈스런 상황을 정리하고 예술과 선동으로서 영화역사를 개척하여 영화의 질적 비약을 가 능하게 하였던 감독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은 1898년 1월 23일 라트비아 Latvia 공화국의 리가 Riga 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인인 어머니와 독일계 유태인으로 건축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둔 부르주아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11살이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고 그는 혼자 지내는 시 간이 많아졌다. 에이젠쉬테인은 아버지가 졸업한 페테스부르그 Petesbrug(제정 러시아의 수도)의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페테스부르그의 신문 <가제타 Gazetta>에 필명으로 전쟁 상황을 스케치하여 게 재하였다. 그리고 1918년 그는 페테스부르그의 민간 엔지니어 연구소를 떠나 적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그는 페테스부르그 부근 요새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다음 그는 이른바 선동 열차의 선동 일꾼으로 투입된다. 그가 학교를 마치기 위해 군에서 제대한 것은 선동 열차에서 포스터와 삽화를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엔지니어를 그만두었던 1920년 여름에, 그는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 때문에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그림 대신에 흥미로운 새로운 노동자 극단인 <프롤레쿨트 Proletkult >에서 일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영화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무대 감독 및 연출가로 일하였다. 여 기서 에이젠쉬테인은 영화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의 은사로 여기게 되는 메이어홀드 Vsevolod Meyerhold를 만나게 된다. 메이어홀드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영화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기량을 닦을 수 있었다.

 1923년 이 극장에서 그는 오스트롭스키 Ostrovsky의 19세기 고전인 <모든 현인들은 소박하다 Enough Folly in a Wise Man >을 연출하면서 극 중간에 삽입할 단편 영화 <글루모프의 영화 일기 Kinodnevik Glumova>를 제작한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좌파 예술지인 <레프 LEF>에 몽따쥬 이론의 기초가 되는 '견인 몽따쥬 Montage of Attractions'를 발표한다.

그리고 1925년 에이젠쉬테인은 <프롤레쿨트 극단>에서 디자이너 및 감독으로 그동안 수행해 오던 실험적 혁신을 벗어 던지고, 또한 쿨레쇼프와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하여'라는 15편의 영화 시리즈 중의 한 편을 에이젠쉬테인이 맡았다. (15편 중 완성된 것은 에이젠 쉬테인의 것과 발레리 플레트노프 Valeri Pletnyov의 작품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첫작품 <파업 Strachka:Strike>이 만들어졌다. 그는 이 영화에서 부르주아 영화의 개인주의 대신에 대중의 집단적 행동을 담아 내는 집단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최초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러시아 영화계의 충격이었으며 , 세계 영화사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파업>은 그의 연극 원리인 '견인의 몽따쥬'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극장 속의 관객이 매순간 삽화와 삽화 사이, 혹 은 그 삽화 안에서 최고의 충격과 긴장을 느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파업>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의 영화 적 은유와 이미지로 충만해 있으며, 실제의 일들과 상황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 영화는 투철한 장인 정신의 예술가인 촬영 기사 에두와르 찌세 Eduard Tisse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는 러시아 내전에서 뉴스 릴 카메라맨으로 일했으며, <파업> 이후 많은 감독들과 작업하며 그의 재능을 발전시켰다.

<파업>은 소비에트 영화 작업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 작품에 직접 참여한 작업자들에게도 대단한 감명을 주었다. 이 로써 에이젠쉬테인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영화라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프롤레쿨트>에 머무르는 한 그는 연극 작업과 영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최초의 영화가 완성되자마자 에이젠쉬테인은 <프롤레쿨트 중앙 극 장>의 감독직을 사임하고, 세브잡끼노의 <모스크바 영화촬영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에이젠쉬테인의 두 번째 영화<전함 포템킨 Pronenosets Potemkin>('25)은 <파업>에서 실험한 형식들이 더욱더 발 전하여 미학적으로 완벽한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파업>을 제작하면서 에이젠쉬테인은 놀라운 속도로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서, <파업>과 <전함 포템킨>을 동시에 보아야만 그 성숙과정을 가늠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프로이드의 에세이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뒤로 자신에게 항상 중요한 문제였던, 예술 창조의 심 리학적 연구 작업에서 맑스와 레닌이 철학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했으며, 또 <파업>은 다음 작품을 걸작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동기로써, 자신의 이론적 발전 단계의 적절한 시기에 출현했다고 말했다.


 1926년 여름 영농 집단화에 관한 공산당의 정책이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 <총노선 Generalnaia Linnia> 을 제작하게 되나 당은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를 제작하라는 요구를 전달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에이젠쉬 테인의 세 번째 작품이자 1917년 혁명 10주년 기념작인 <시월 Oktibar>('28)이다. <시월>은 제작된 뉴스 릴이나 혁 명과정중의 다큐멘터리 필름 등을 사용한 대담한 지적 몽따쥬 실험을 하여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혁명군 내부의 이견 과 알력이 그대로 묘사되어 당사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몇 번의 재편집과 선택 과정을 거쳐 대중에 공개된 <시 월>은 대중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들었다. <시월>이 소비에트 영화 예술의 시조라는 극찬과, 노동 대중이 이해하기에 는 너무 관념적이라는 비난이 동시에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시각 이미지의 지적 몽따쥬를 적절히 사용한 이 영화는 에이 젠쉬테인 영화 미학의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월> 발표 후 에이젠쉬테인은 1926년도에 작업하였던 <총노선>을 <옛것과 새것 Staroie i Novoie : Old and New>('29)으로 개명하여 1929년에 공개하였다. <전함 포템킨>의 해외에서의 성공으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Douglas Fa irbanks등 외국의 유력한 영화인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였다. 1930년 헐리우드 로 건너가 <파라마운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미국인의 비극>등 3편의 대본 각색에 들어갔으나 모두 기획 단계에 서 무산되었다. 싱클레어 루이스 Sinclair Lewis 가 자본을 대주어 멕시코 문화와 혁명 정신을 담은 <멕시코 만세 Que Viva M exico!>는 예산 초과로 제작이 중단되어 편집을 마치지 못한 채 소비에트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Social Realism이 당의 공식적인 예술 노선으로 공표 되자 1935년 작가 동맹에서 형식주의자로 공 식적인 비난을 받고 에이젠쉬테인은 자기 비판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1936년 <베진 초원>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려 했으나 독감으로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1938년 그는 13세기 독일의 침공에 쐐기를 박은 국가적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영웅 담을 영화화한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r Nevskii>를 완성한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몽따쥬 이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수직적 몽따쥬 Vertical Montage'를 완성시킨다. 음악과 화면의 완벽한 일치를 꾀하였던 이 영화로 그는 1939년 레닌 훈장 을 받는다.


 그리고 1944년 러시아 제국의 최초 황제인 이반 4세가 러시아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3부작 영화를 기획하 여 그 첫 번째 영화인 <폭군 이반 Ivan Groxny>1부를 완성한다. 1945년 이 영화가 개봉되자 스탈린은 그에게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최고상인 스탈린상 1등급을 수여한다. 수상 축하 행사 때 그는 <폭군 이반> 2부를 완성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추다 가 심장 마비로 쓰러지고 이후 줄곧 병상에 누워 있게 된다. 그러나 <폭군 이반> 2부를 본 스탈린은 자신의 모습이 암시적 으로 묘사되었다고 판단하여 개봉을 금지시킨다. 이 영화는 1958년 스탈린 사후에 개봉되었다.

에이젠쉬테인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개봉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8년 2월 11일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심장 마비로 숨을 거 두었다.


 위대한 감독이자 이론가로서의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그의 영화는 매 일 상영되고 있다. 고작해야 7편의 완성된 작품과 4편의 미완성작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계적인 감독의 대열에 당당 히 오를 수 있는 것은 그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영화 이론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1898년 : 1월 23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남.

1923년 : 단편 <글루모프의 영화 일기 Kinodnevik Glumova>

1925년 : <파업 Strachka>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emkin>

1926년 : <총노선 Generalnaia Linnia> 개봉 안됨.

1928년 : <시월 Oktibar>

1929년 : <총노선>을 개명하여 <옛것과 새것 Staroie i Novoie>으로 공개.

1903-31년 : <멕시코 만세 Que Viva Mexico!> 미완성.

1979년 공동 연출가였던 알렉산드로프 Alexandrov에 의해 완성.

1935-37년 : <벤진초원 Bezhin Lug> 미완성.

1966년 나움 클레이만 Nahum Kleimann에 의해 사진 편집 영화로 완성.

1938년 : <알렉산더 네프스키 Alexandr Nevskii>

1944년 : <폭군 이반 Ivan Grazny>1부 완성.

1947년 : <폭군 이반 Ivan Grazny II : Boyarskii>완성. (1958년 공개>

1947년 : <폭군 이반 Ivan Grazny III> 미완성.

1948년 : 2월 11일 심장 마비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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