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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19회

 

 

 

1

 

 

읽는 라디오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들풀입니다, 반갑습니다.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진 넉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4년은 된 것 같습니다.

성민씨의 제안을 받고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진행할수록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얘기들을 편안하게 펼쳐놓으면 되는 것인데

매주 꼬박꼬박 얘기들을 풀어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자유롭고 편안하잖아.

나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 면도 있지만... 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나를 드러내는 건 조절할 수 있으니까.

이런 방송이 익숙지 않아서?

이미 오랫동안 접해왔던 방송이고, 나름 매력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어. 초보 진행자로서의 어색함도 이미 극복했으니...

 

 

혼자서 고민을 해봤지만 딱히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민씨가 진행했던 지난 방송들을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별거 아닌 소소한 일상의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더군요.

어떤 때는 “비슷한 얘기를 또 한다”고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반복하기도 하고

자기가 뱉어놓은 얘기에 짓눌리다가도 자기 얘기를 남 얘기하듯이 살살 돌려놓기도 하고

별 의미 없는 얘기를 툭 던져 놓다가도 무거운 얘기를 간절하게 하기도 하고...

지난 방송들을 들여다봤지만

제 문제와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들다 보니까

해답은 보이지 않고 점점 고민만 커져버려서

급기야 ‘여기서 그만 둘까’ 하는 생각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성민씨와 상담을 했습니다.

제 얘기를 듣고 난 후 성민씨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이게 뭐 대단한 방송이라고 진이 빠지도록 고민하게 만들까? 힘들면 그만 두세요, 너무 고민에 빠져들지 말고.”

너무도 쿨한 답변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방송을 진행하다보면 할 얘기가 없어서 고민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 적 많았죠. 할 얘기 없으면 음악만으로 진행하기도 하고, 옛날 써놓았던 글을 옮겨오기도 하고, 아주 짧게 형식적인 방송을 하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적당히 때운 적도 많아요.”

“그러다보면 또 얘기가 떠오르던가요?”

“음... 그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가끔 막힐 때 한 두 번 그러다가 풀리기도 하지만 제 삶의 리듬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그런 식의 편법으로 풀리지 않더라고요. 그럴 때는 제 안에 있는 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해보죠. 제 고민을 그 녀석에게 털어놓는 게 아니라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고 귀를 쫑긋 세워보는 거죠. 그러면 그 녀석이 얼마나 수다스럽게 얘기를 늘어놓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 녀석의 얘기를 방송에서 풀어놓으면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나중에 그 녀석도 별로 할 얘기가 없다고 그러면 다시 제 얘기를 하고... 대강 그러면서 방송을 해왔던 것 같은데...”

 

 

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마음을 열수 있다는 거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귀와 마음을 열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겠죠?

앞으로 제 내면의 목소리에 좀 더 민감해질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2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

메리 올리버

 

 

 

 

아침에 바닷가로 내려가면

시간에 따라 파도가

밀려들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지,

내가 하는 말, 아, 비참해,

어쩌지-

나 어쩌면 좋아? 그러면 바다가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결한 시 한 편이

“징징대지마!”라고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아, 앞으로 정신 차리고 방송에 임해야겠네요.

 

 

 

3

 

 

음악을 시작한 이후엔 음악 외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알바를 경험 했다.

어려운 형편에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나는 늘 주머니가 비어 있었으니까.

85년 대학 1학년 봄 처음으로 했던 알바가 기억난다.

학교 게시판에 붙은 알바 공고를 보고 찾아가보니 신설동의 어느 작고 허름한 사무실이었다.

한 남자가 커다란 보스톤백 하나를 주는데 그 안에는 빨래집게, 냉장고 탈취제, 좀약...등의 생활용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것을 팔아오면 판 금액의 1/4을 나에게 주겠단다.

가방을 받아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주변의 주택가 골목을 배회하며 대문이 열린 집들을 찾았다.

닫힌 대문을 두드릴 용기는 차마 없었으니까.

쭈뼛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서서는 마루에 앉아 마늘을 까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힘겹게 말을 건넨다. "저...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인데 좀약 좀 사주세요..."

하루를 그렇게 돌아다닌 결과 매출은 처참했지만 한가지 깨우친게 있었다.

번듯하게 잘사는 동네일수록 열린 대문이 적고 물건값을 따지고 인심이 사납다.

반대로 좀 못사는 동네일수록 인정이 넘친다.

그래서 다음날 서울의 대표적인 허름한 동네라고 찾아나선게 미아리였다.

그곳의 좁은 골목에 들어서니 예상대로 거의 모든 대문이 열려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약간은 피곤한 표정의 누나뻘 여자가 속치마 차림으로 마루에 누워있다가 일어나 앉는다.

나는 용기를 내 마루에 물건을 펼쳐놓고 하나만 팔아달라고 한다.

여자는 "혹시 팬티나 스타킹은 없어요?"이런 짓궃은 질문을 던진 뒤 그 여자에게 별로 필요할것 같지도 않은 물건을 잔뜩 사준다. 심지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거스름돈 마저 받지 않았다.

그 동네에서 가방안의 물건을 몇시간만에 다 팔고 빈 가방으로 신설동의 사무실로 돌아왔을때 사무실의 남자는 무척 놀라워했다.

내가 갔던 동네가 미아리 텍사스라고 불리던 집창촌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서울 사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인정 많던 누나들은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부디 편안하게 잘살고 계시길.

 

 

 

 

김정균님의 페이스북에 올려왔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sns에서 이런 글을 발견하면 횡재한 기분이 듭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이어서 몇 번을 곱씹으며 읽었습니다.

가만히 곱씹다보니 약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누군가 제 집의 벨을 누르고

"저...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인데 좀약 좀 사주세요..."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집창촌에서 일하던 인정 많던 누나들이 저를 보고 알듯말듯한 미소를 짓는 것 같습니다.

 

 

 

 

(정밀아의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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