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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17회

 

 

 

1

 

 

읽는 라디오 열일곱 번째 마이크를 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들풀입니다.

 

 

지난 5월 10일 방송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얘기를 곱씹으면서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수녀님 얘기가 너무 아름답고 깊이가 있어서 가슴에 남는 방송으로 기억되는데요

오늘은 그 뒤를 이어서 박완서 작가님의 얘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살아계셨을 때 이해인 수녀님과도 우정이 깊으셨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두 분이 함께 얘기를 나눴던 ‘대화’라는 책에서 몇 구절을 옮겨와 보려 합니다.

 

 

종교인인 이해인 수녀님이 영적인 심신으로 맑은 영혼을 드러내주셨다면

소설가인 박완서 작가님은 삶 속에 뒹굴면서 몸으로 깨달은 영혼의 울림을 전해주십니다.

서로 다른 결의 목소리가 어울리는 걸 보면서 아름다운 듀엣곡을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두 분의 대화 자체보다는 박완서 작가님의 얘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지난 10회 방송에서 들려드렸던 이해인 수녀님의 얘기와 함께 들어보시면 더 깊은 울림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2

 

 

작가님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1988년 암투병 중이던 남편이 죽었고, 얼마 후 아들이 사고로 죽게 됩니다.

몇 달 사이에 가족의 연이은 죽음을 맞닥트린 박완서는 무너지고 맙니다.

특히 젊은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의 열기로 전국민이 열광하던 때, 그는 홀로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해인 수녀님이 머물고 있던 수도원을 찾게 됩니다.

 

 

 

박완서 : 하느님이란 바로 이런 분이 아닌가 싶었어요. 대놓고 위로를 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무관심하면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 해운대 딸에 있을 때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어요. 도피하다시피 그리로 내려갔지만 저녁때만 되면 온 동네 아파트가 다 들썩였어요.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이길 때마다 일시에 와,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와요. 그건 분명히 즐겁고 행복한 소리인데, 그게 그렇게 견딜 수 없었으니...... 또 해운대만 해도 그래요. 피서 철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추운데도 여전히 벌거벗고 해변을 돌아다니고. 내 눈에는 그 모든 게 축제로 보였어요. 근데 수도원 들어가니까 그런 걸 볼 수 없었어요. 갑자기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어요. 조용한 가운데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모습들, 누군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그냥 견디는 것. 사람이란 이상도 하지, 그런 무관심이 되레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해인 : 슬플 땐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박완서 : 네 맘대로 있어라, 내버려 두는 거......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내버려 뒀던 게 사실은 큰 위로 됐어요. 그러니까 살겠더라고요.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선 듯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를 그저 내버려 두면 자기가 알아서 다시 일어난다는 것일까?

‘시간이 약이다’는 말처럼 그저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는 뜻일까?

그렇게 단순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은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하느님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침묵을 지킵니다.

그런 하느님을 향해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독하신 하느님”이라고 욕을 퍼붓기도 해보지만

하느님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 침묵이 경멸스럽기까지 한데 오히려 하느님의 침묵이 위로가 됐다고 하고 있으니...

 

 

 

3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고통을 호소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하고 고통의 와중에 있는 분들이 곳곳에서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분들은 공통적으로 제게 묻곤 했어요. 아픔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그런데 난 그 질문이 참 싫었어요. 아픔은, 슬픔은 절대로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 자식을, 사랑하는 남편을 보낸 슬픔을 어떻게 극복해요? 그건 극복이 아니죠. 어떻게 참고 더불어 사느냐의 문제일 뿐, 절대로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견디면서 사는 거죠.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으면서 위로를 바라는 사연을 보내왔던 이들에 대해

작가님은 살짝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얘기합니다.

“그냥 견디면서 살아가세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고통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라니...

매정해보일 정도로 단호한 어조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작가님은 더 단호하게 얘기하십니다.

“그 슬픔을 어떻게 극복한단 말입니까?”

 

 

이런 단호한 태도에 할 말을 잃고 돌아서게 됩니다.

그리고 더 단호하게 자신에게 다짐하죠.

“누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해도 기대하지 않을 거야. 다들 자기만 생각하니까. 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만 생각하며 살아갈 거야.”

 

 

발버둥 치면 칠수록 고통이 더욱 촘촘히 옥죄어 오는 현실에서

하느님은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그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작가님은 독설만 내뿜으니

의지하고 믿을 것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4

 

 

사실 저도 예전엔 그런 게 심했어요. 나이 듦이라는 것, 병든다는 것, 이 세상과 작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잊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되도록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하며 삽니다.

 

 

 

 

당시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던 박완서는 오늘만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면 더 힘드니까

그런 고민들은 잊어버리고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하며 살아가라고요.

 

 

그러고 보니 이해인 수녀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녀님도 ‘고통을 견디면서 겸손을 배워가야 한다’고 얘기하셨던 기억도 있습니다.

수녀님은 성직자답게 참으로 단아하고 편안하게 얘기하셨는데

작가님은 살짝 거친듯하면서도 직설적으로 얘기하십니다.

 

 

두 분은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계셨던 겁니다.

수녀님은 침묵하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겸손을 채워갔다면

작가님은 현실의 고통을 십자가처럼 간직하며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가셨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를 보면서

하느님은 침묵함으로서 스스로 견디고 일어나길 기다렸을지 모릅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위안을 얻고자 편지를 보냈던 이들을 향해

작가님은 모질게 쏘아붙이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약한 마음의 뿌리를 뽑아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듯이

그 고통의 깊이야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 심연을 헤쳐 나가는 힘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걸 얘기하는 거겠죠.

 

 

 

 

(인디언 수니의 ‘내 가슴에 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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