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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97회 – 저는 ‘제주도에서 감귤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농부’입니다

 

 

 

1

 

한때 열풍을 일으켰던 제주 살이 열기가 사그라들고 이제는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편하게 장사하며 살겠다고 내려와서 카페, 펜션, 식당 등을 열었던 분들이 많은데, 경기가 나빠지고 관광객이 줄어드니까 버티지를 못하는 겁니다.

거기다 부동산 광풍으로 땅값과 집값은 전국 최고수준으로 올라버렸고, 물가도 만만치 않게 비싸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드는 돈이 적지 않게 부담이 됩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지역이어서 지역공동체가 끈끈한데 이런 공동체는 외지인들에 대해 은근히 배타적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소박하게 살아가려던 꿈을 안고 왔던 사람들은 도시와는 또 다른 고립감에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하지요.

 

중년의 남성분이 “퇴직하고 공기 좋은 이곳에서 감귤농사 지으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요”라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을 봤습니다.

그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떠밀려서 찾아온 곳이고, 지금도 수시로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면서 살아가는 삶인데 누군가에게는 이런 삶이 ‘꿈과 같은 삶’으로 그려지는 겁니다.

하긴 대도시에서 팍팍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이곳에서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삶이 몇 배는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사람들이 수시로 무시하는 것도 익숙해져야 하고

제게서 얻어갈 것이 있을 때만 사람들이 바라봐준다는 냉혹함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적은 수입에 씀씀이 줄이며 살아가는 삶을 편안함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먹으려 달려드는 이들이 있다는 무서움도 느껴봐야 합니다.

그런 현실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저는 ‘제주도에서 감귤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농부’가 됩니다.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으로 대표되는 그런 낭만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점심을 먹고 사랑이와 함께 산책을 하고 나서 하우스에 들어가 감귤나무들을 살펴봤습니다.

예년에 비해 달린 것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곱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흐뭇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하우스를 돌아보면 나무들을 살피고 있는데 ‘내 안의 성민이’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성민이 : 왜?

 

내 안의 성민이 : ......

 

성민이 : 야, 오래간만에 얼굴을 비추는데, 뭐 할 말 있어서 그러는 거 아냐?

 

내 안의 성민이 : ......

 

성민이 : 아이 씨, 얼굴에 ‘할 말 많음’이라고 쓰여 있거든.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내 안의 성민이 : 어느 시장에 말이야,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 있었어. 근데 벼락 맞은 돈이 좀 애매해서 자그마한 건물 하나 살 수 있는 정도였거든. 그래서 목 좋은데 있는 오래된 건물 하나를 샀어. 그동안 힘들게 하던 일을 그만두고 월세 받으면서 탱자탱자 살 수 있게 되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했거든. 평소에 자기에게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이 부러워서 뭐라고 하면 “내가 예전에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다”느니, “고작 이 건물 하나로 살아가려니까 씀씀이가 더 줄어들었다”느니, “건물이 오래돼서 여기저기 신경 써야 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느니, “부동산 가격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미래가 더 불안해졌다”느니 하는 말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거야.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는지 알아?

 

성민이 : 야, 무슨 말 하려는 지는 알겠는데, 비유가 좀 그렇지 않냐?

 

내 안의 성민이 : 왜, 찔려?

 

성민이 : 아이 씨, 그래! 나 지금 배부른 투정 하고 있다는 거 아냐!

 

내 안의 성민이 : 알기는 아네. ‘과거의 성민이’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며? ‘과거의 성민이’가 지금 너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 거 같냐?

 

성민이 : 항복! 배부른 투정임을 인정!

 

내 안의 성민이 : 그렇게 쉽게 항복하는 척하면서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생각해봐. 남들의 눈으로 너를 보지 말고 니 눈으로 너를 보라고. 그래서 부끄럽지 않다면 되는 거야.

 

 

오래간만에 나타난 ‘내 안의 성민이’가 한바탕 쏟아 붓고 가니

들쑥날쑥 하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3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드라마가 조만간 공개된다고 합니다.

톱 텔런트를 내세운 넷플릭스 드라마라니 전 세계 사람들이 보게 될 겁니다.

또 하나의 낭만적 이미지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겠네요.

 

이곳에서 개 한 마리 의지해서 살아가는 별 볼일 없는 제 삶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지만

‘제주도에서 감귤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농부’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부러워합니다.

제 삶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덧칠된 이미지가 부러운 것이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저는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되겠죠.

이 삶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밀려나 오갈 데 없는 저를 말없이 받아주고 도와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하고

보잘 것 없는 저를 의지하며 든든한 벗이 되어주는 사랑이에게 감사하고

자그마한 것들을 나누며 소소한 도움을 주고받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이웃에 감사하고

연민과 돌봄의 따뜻한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감귤선과장의 예쁜이에게 감사하고

감귤재배에 대해 귀찮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물어봐도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아버지 친구에게 감사하고

무수한 인연들이 끊어져 나갔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아직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형님에게 감사하고

아직도 제 마음 속에 남아 마음의 온기를 지펴주시는 어릴 적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천사 같은 온화함으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아껴주시는 친척 할머니에게 감사하고

서툰 저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매년 결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귤나무에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제 주위에 있는 것들에게 감사하며 살다보면

저는 정말로 ‘제주도에서 감귤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농부’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더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고니밴드의 ‘What a c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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