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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42회 –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1

 

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마흔 두 번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민이가 진행합니다.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긴장도 풀리고 마음도 허해져서 약간의 후유증의 몰려온다는데

10주년 기념방송을 마치고나서는 오히려 마음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방송 뒤에 찾아와 온기를 더해주신 분들의 사연이 저희를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읽는 라디오 불량 청자 곰탱이입니다.^^ 10주년 방송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꾸준하게 방송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자기 수양, 또는 생산이라고 생각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10년 동안의 읽는 라디오는 쉬고 싶은 사람이 마음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자연휴양림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저의 공간은 거의 생산해내는 것이 없는 황무지입니다.^^). 그 휴양림 속에서 팔베게를 하고 누워 자기를 되돌아보고, 또 어떻게 생산해낼 것인지를 조용히 생각해보게 하는 힘이 읽는 라디오에게 있습니다, 저에게는. 늘 좋은 공간을 만들어주셔서 정말이지 참으로 고맙습니다!^^

요즘 사랑씨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ㅎㅎ 사랑씨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사랑씨 얼굴 못 봐서 아쉽고 서운하네요 ㅎㅎ.

그리고 여담이지만, 와이키키 브라더스 영화는 마음이 거시기하면 가끔 먹는 소주 한잔 같은 영화입니다. 매번 볼 때마다 마지막 오지혜 배우의 사랑밖엔 난 몰라는 언제나 또 한잔의 소주를 끌어당깁니다. 들풀님과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하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10주년 읽는 라디오 방송!!^^

가끔씩 혼잣말과 같은 흔적을 남기도록 최선을 다해볼게요!^^

 

 

방송이 나가자마자 곰탱이님이 애정이 듬뿍 담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읽는 라디오가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씀에 약간 놀랐습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건조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사적인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편하게 쉬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삼고 있다니 앞으로 그런 점도 염두를 두면서 방송을 이어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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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는 요즘 이 사진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보일러가 켜진 따뜻한 방안에서 하는 일 없이 그저 멍 때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하

겨울이라 밖에 자주 나갈 수 없고 하우스에서 일하는 시간도 많지 않다보니

저랑 둘이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저도 사랑이도 이 겨울이 춥지 않고 외롭지 않아서 너무 좋습니다.

 

 

들풀님 감사합니다.

지극한 나에 대한 얘기는 모두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늦었지만 읽는 라디오 10주년 방송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 건강연구소장 올림 -

 

 

득명님도 읽는 라디오 10주년 특집방송을 듣고 반가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들풀님이 이 댓글을 읽으시고는 “공명현상을 느끼는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정성스럽게 방송을 내보냈더니 그 마음이 거울에 비춰져서 되돌아오는 그런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주파수가 일치할 수 있음에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읽는 라디오 10주년 특집방송을 반대하기는 했었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내보낸 방송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확인했던 부족함이나 지금의 위치에 대해서도

지금의 우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들을 잘 모으고 정리해서 앞으로의 방송이 좀 더 풍성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소중한 의견을 보내주신 두 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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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2년여 동안 암 투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갑자기 증세가 나빠지셔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곧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돌아가시던 날 낮까지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찾아가서 밥도 떠드리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그랬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마지막 날 그럴 수 있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병원에 옮겨서도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고민들이 많았었는데

저희들을 다 보시고 나서 얼마 후에 돌아가신 것이라서 그것 역시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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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많이 빠져서 홀쭉한 모습으로 누워계신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는데

장례식장으로 옮긴 후 입관식을 거행하면서

온몸을 깨끗이 닦고 얼굴도 말끔하게 다듬고 나서 수의를 입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78년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풍파를 잘 넘어오셨고

마지막에 암 투병으로 고생하셨지만 극심한 고통 없이 삶을 마칠 수 있었고

자식들이 큰 부대낌 없이 한마음으로 마지막 돌봄과 배웅을 할 수 있었고

살아오면서 저와는 크고 작은 다툼이 많았지만 마지막에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 남았으니

그 삶을 마감하는 순간들이 편안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편안히 쉬면서 따뜻한 것들만 챙겨 가시길 바랍니다.

 

 

3

 

장례식장은 코로나 국면에도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동창들이나 옛 직장동료들이나 마을사람들은 거의 오지 않고

딸들이나 사위들 관계된 사람들로만 붐비더군요.

고인은 정작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을 지키면서

장례식은 망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산자를 위한 공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상주인데다가 딱히 연락할 사람들이 없어서 영정이 모셔진 곳에서 조문객들만을 맞을 뿐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아버지께 인사는 하지 않아도 동생과 매제들에게 돈봉투는 꼭 건네더군요.

심지어 사촌형제들은 저희 가족 모두에게 일일이 다 조의봉투를 건내서 놀랐습니다.

평소에 결혼식이나 돌잔치 장례식 같은 곳에 갈 때면 진심으로 축하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갖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는

그동안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들고 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조의문화가 이 정도로 심하다는 걸 느끼고는 무섭기기도 하고

돈봉투로 전해지는 그 마음속에서 조의의 뜻을 느낄 수 없는 제 자신이 싫더군요.

 

그렇게 분주하면서도 조금 고단한 삼일장을 마치고

마지막 날 아버지를 화장하고 장지로 향했습니다.

애초 장치는 도립납골당으로 정했었는데

친척분들이 운영하는 납골당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분들의 말만 믿고 아버지 유골함을 들고 찾은 납골당은

산간마을을 한참 달려야하는 외진 곳인데다가

주변은 잡풀로 어수선하고

납골당 안은 비가 새고 어둡고 좁았습니다.

그곳에 아버지 유골함을 올려놓고 나와서

마지막 제례를 드리고

친척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더니

몇몇 분들이 제게 앞으로 어떠어떠해야 한다며 한마디씩을 하시더군요.

그 분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나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마지막도 비교적 편안했고 사흘 동안 장례도 별 탈 없이 잘 지나갔는데

마지막에 와서 똥물을 끼얹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판자촌 같은 곳에 고려장하듯이 아버지를 버려두고 오는 듯한 이 기분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할까?

2년 여 동안 아버지에게 병문안은 고사하고 안부전화 한 번 없었던 친척분들이 사람들 앞에서 나의 부족함을 지적해주심에 화를 내는 속 좁은 나를 탓해야하는 걸까?”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저를 달래주는 동생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사흘의 장례식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쉬고 났는데도

피곤한 마음은 달래지지 않아서

그 마음 속 찌꺼기를 꺼내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다짐해봅니다.

 

“산자들에게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살고 있으니 죽은자들에게라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돈으로 모든 것을 주고받는 이 세상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자.”

“죽은 다음에 찾아가서 뻘소리나 지껄이지 말고 살아있을 때 한번이라도 찾아가서 눈이라도 맞추는 인간이 되자.”

 

 

4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기도 했던 아버지는

나중에 운전을 배워 평생 운수노동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서 자식들 낳고 기르면서 남들처럼 살았지요.

 

남들처럼 어려운 집안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많이 했고

남들처럼 남자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술 먹고 어머니를 때리기도 많이 했고

남들처럼 자식들에게 가능한 범위에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은 해주려고 노력했고

남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으면서 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고

남들처럼 형제들의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자기 가족들은 잘 챙기면서 살았습니다.

 

78년을 살면서 크고 작은 풍파가 있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왔던 삶이고

무난한 만큼 조용하게 사그라든 삶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 뒤를 제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무난하게 살아갔으면 좋겠고

역시 무난한 만큼 조용하게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요.

 

 

 

(범능스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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