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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72회 – 고민을 해결하니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나지만

 

 

 

1

 

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일흔 두 번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성민이가 진행합니다.

 

두 달 동안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일이 해결됐습니다.

그리 심각한 고민거리도 아니었고

아주 말끔하게 해결된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속앓이 하지 않아도 되니 좋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작은 숙제가 생겨버렸습니다.

하나는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했다는 점이고

하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받아든 숙제는 그래도 마음이 편합니다.

내가 부족했던 점이 무엇이고 잘해왔던 점이 무엇인지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두 달 동안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기저기 들쑤시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고민들이 많았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지금에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남았지만

이제는 그 고민도 흘려보내려 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 고민을 다시 만나게 되면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장점을 살리며 키워낸 내공으로 맞이하면 되겠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나서

시원한 냉국으로 점심을 먹고는

오래간만에 따뜻한 차를 마시니

속이 편안해지네요.

 

 

2

 

 

‘분노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라는 좌파의 구호가 있다. 모든 구호가 그렇듯이, 이 구호도 너무 많이 쓰이는 바람에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하지만 이 구호는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세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안할 수 있다. 일단 주의를 기울여 세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분노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

 

 

‘밀레니얼 사회주의선언’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솔직히 이 구절을 접하면서 조금 불편했습니다.

분노를 바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자세도 불편했고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중성도 불편했고

투쟁 현장으로 달려가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위는 돌아보지 않는 이들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읽는 라디오를 진행해오면서 편안함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이곳이기에

뭔가를 주장하기보다는 조용히 세상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충우돌하며 그 편안함의 길을 알아가다 보니 조금씩 안주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안할 수 있다”라고 저를 꾸짖는 듯한 문구를 접하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의 편안함이 세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세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며,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편안함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10년 동안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발버둥 칠 때 좌파들은 나를 외면한 채 투쟁의 현장으로만 달려가지 않았는가.’

 

불편한 생각을 곱씹다보니 마음이 더 불편해져서 눈을 돌려 그들이 있는 곳을 봤습니다.

오랜 세월 앞만 보면 투쟁해왔는데 이제는 병든 몸으로 누워있는 이

수년을 거리에서 투쟁하면서도 전망이 쉽게 보이지 않는 비정규직들

아직도 바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세월호 희생자들

도돌이표처럼 변하지 않는 현실에 맞서 투쟁하는 장애인들

쉼 없이 파헤쳐지고 호시탐탐 밀어붙이려는 자본에 맞서 환경을 지키려는 사람들

 

여전히 그곳에서 투쟁을 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절박함을 외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들의 절박함을 봐버린 이상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편안함이 정당하듯이 그들의 분노 역시 정당하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텃밭에 상추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상추가 이렇게 풍성하지만 손이 잘 가지 않습니다.

참외, 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같은 것들이 풍족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같이 이것들로 식사를 하지만 질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상추는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 아까운 걸 주위에 나눠주면 좋으련만

딱히 나눠먹을 이웃도 없습니다.

상추 옆에는 얼갈이배추가 잡초에 덥혀 있기도 합니다.

욕심 없이 자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지만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이렇게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이 낭비를 없애는 것이 저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고래야의 ‘박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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