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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이 흘러가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30대까지는 그 말을 그리 실감하지 못했는데 40대에 접어들고부터는 정말 실감하게 되더군요.
바쁘게 살다보면 한 해 한 해가 후다닥 지나버리는 것은 30대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40대에 접어드니까 3~4년이 지나가는 게 한 해가 허무하게 흘러가버리는 것처럼 금방이더라고요.
특히 저의 40대는 인생에서 가장 깊고 오랜 방황을 하던 고통스러운 시간이어서 삶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지나는 것이 일 년을 보내는 것처럼 힘들었는데도
막상 한 해 두 해 세월이 지나가는 것은 의외로 빠르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세월에 떠밀려서 세상에서 조금씩 멀어지다보니 각종 숫자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올해가 몇 년도인지 알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내 나이가 몇 살인지 헤아리지 않게 되고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않게 되고
무슨 일을 시작해서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 무감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느낀 것은
이것저것 헤아리며 살지 않다보니
세월이 흘러가는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나이듦을 멈추고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속도에서 아주 조금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습니다.
여름나기도 비슷합니다.
제가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어서 여름나기가 정말 고역입니다.
가뜩이나 기후위기 때문에 해마다 더워지고 있는데
폭염과 열대야가 밤낮없이 몰아치면 그저 더위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간절할수록 오히려 시간은 더 더디게 흘러가기만 하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감귤농사를 하게 되면서
여름이 가장 바쁘고 고된 시기가 됐습니다.
여름이면 열매가 급격하게 커지는 시기인 만큼 중요하기도 하고
병충해 방제에서부터 열매솎기, 물 관리, 가지 묶어주기 등 여름에 해야 될 일들도 많고
어느 하나 잘못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하우스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 속에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의 경험이 쌓이다보니
이제는 조금씩 나무의 생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일머리도 생기고 여유도 생겼습니다.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해야 될 일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조바심이나 노파심 없이 나무랑 대화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땀을 흠뻑 흘리고 난 후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에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있으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7월 한 달도 후다닥 지나가버렸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삶’에 대해 떠벌리면
제가 무슨 무림의 고수가 된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서 조금 쪽팔리기는 하지만
이 여름을 나는데 그 정도의 허세는 애교로 봐주시겠죠?
2
아침 5시에 눈을 뜨면 밖은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용변을 보고, 사랑이 산책을 하고, 아침을 먹고 하다보면 이미 해가 떠올라 있습니다.
아침부터 기온은 만만치 않지만 아직은 30도를 넘지 않기 때문에 하우스에 들어가 일을 시작합니다.
한 시간쯤 일을 하면 살짝 더위가 느껴지고, 온도계를 살펴보면 하우스 안은 벌써 30도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하우스를 나와 물을 한 잔 마시고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의자에 앉았는데
맑고 파란 하늘에 달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이미 떠올라서 그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데도
하얀 얼음 같이 생긴 달은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지난 밤 처리해야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해 잔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태양의 열기에 조금이라도 맞서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밤새도록 마신 술에 취해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린 것인지
그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이글거리는 태양을 뒤로 하고 바라보는 둥그런 달의 모습은 마음을 환하고 시원하게 해줬습니다.
아마도 저 달은 ‘더위에 지치지 말고 쉬엄쉬엄 일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3
여름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파랗습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온전히 받아서 곳곳에 뿌려내고 있죠.
그래서 숨이 막힐 정도로 맑고 파란 하늘입니다.
그 뜨거운 열기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는 나무들은 더없이 푸릅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푸르다 못해 거멓기까지 합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씨에도 지치지 않는 활력을 뿜어냅니다.
그 사이에 하얀 뭉게구름이 살포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가리지도 못하고 나무의 활력을 받아들이지도 못할 정도로 왜소하지만
이 여름을 잠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안겨줍니다.
하늘이어도 좋고, 나무여고 좋고, 구름이어도 좋은 날입니다.
(NbNew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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