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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66회 – 숨 막히게 더운 여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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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밭에 빨간 깃발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꽤 넓은 폭으로 밭을 가로질러 수백 미터는 이어져 있었습니다.

깃발이 꽂힌 위치와 형태를 보아하니 이곳에 도로 확장공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밭들이 도로에 잠식되게 됐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집 마당까지 잠식되는 곳도 있고

심지어는 건물의 일부가 허물어져 도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곳도 있었습니다.

어떤 논의과정과 동의절차를 거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더군요.

 

작년에는 마을 위쪽 길이 이런 식으로 확장되더니

올해는 아래쪽으로 내려와 여기도 확장 공사를 하게 됐습니다.

차들도 많이 다니지 않는 고즈넉한 시골길이라서 사랑이랑 매일 편안하게 산책하곤 했었는데

이곳에 2차선 도로가 생기면 고즈넉한 편안함은 사라져버리겠죠.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길들을 넓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도로확장이 마을의 발전이라는 생각에서 진행하는 것이겠죠.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길들이

차들이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길들로 바뀌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더 먼 곳으로 나아갈 겁니다.

음... 숨 막히게 더운 여름입니다.

 

 

2

 

새벽 4시에 눈을 떴습니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았고 방안 열기는 그대로였습니다.

감귤나무에 약을 쳐야하기에 더 이상 뭉개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날씨를 확인했더니 맑은 날씨에 현재 기온은 28도였습니다.

 

용변을 보고

미숫가루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사랑이 산책까지 마치고 났더니

서서히 하늘이 밝아오더군요.

물통에 농약을 타고

작업복을 입고

그 위로 방제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면장갑과 고무장갑을 이중으로 끼고

하우스로 들어가서 약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방제는 응애를 잡기 위한 것이어서 이파리 뒤쪽까지 세밀하게 골고루 쳐야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 비해 시간도 두 배로 더 길고 힘도 많이 듭니다.

약을 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의 열기 때문에 안경이 뿌옇게 변해버렸습니다.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아 힘을 빼면서 약을 치면 다시 안경이 맑아집니다.

 

그렇게 수동으로 안경의 농도를 조절하며 30분쯤 약을 치다보면

방제하기 가장 힘든 구석 쪽 나무들이 끝나서 조금 수월해지고

굳었던 몸도 풀리면서 약을 치는 것이 한결 편해집니다.

그때부터는 나무의 상태도 살펴보면서 여유롭게 약을 칠 수 있습니다.

여름 순들이 많이 올라온 나뭇가지는 조금 어수선하지만 이파리는 풍성합니다.

이파리가 풍성하면 약을 치는데 시간이 더 걸리지만 열매를 키우는 데는 큰 힘이 되죠.

어떤 나무는 열매는 별로 없는데 이파리만 많아서 속상하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이파리는 많지 않은데 열매가 많아서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무와 대화하면서 약을 치다보니 서서히 해가 떠올라 하우스 안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눈부신 햇살을 요령껏 피하면서 약을 치고 있으면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몸은 서서히 땀으로 젖어가고

마스크로 가린 코와 입에서 호흡은 조금씩 거칠어지고

장화와 장갑 속에는 땀으로 물이 차오르는데

방제는 반도 못했습니다.

마음만 급해져서 조금 빨리하려고 하다보면 더 힘들어 지니

수시로 힘을 빼라고 주문을 넣어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그렇게 두 시간 반 정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약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겨우 반을 넘긴 상태에서

다시 물통에 물을 받고 약을 타서 두 시간을 더 해야 하는데

하우스 안의 온도는 35로를 향하고 있더군요.

잠시 고민하다가 방제를 중단하고 나머지는 다음날 하기로 했습니다.

 

한낮에는 40도를 훌쩍 넘는 끔찍한 조건에서도

건강하게 열매를 키워내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감귤농사를 하면서 여름철 방제가 제일 힘들기는 하지만

그 나무들이 병충해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제가 열심히 방제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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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전에 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오후에는 에어컨이 있는 방안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책도 읽고, 요가도 하고, 영화도 보고, 명상도 하자며 마음을 먹어보지만 더워서 귀찮다는 이유로 뒹굴뒹굴하며 시간만 축낼 뿐입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살며시 주변을 살펴보는데 주변 텃밭에 심어놓은 작물들이 메말라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우스 안에 있는 감귤나무들만 신경을 쓰느라 주변에 있는 작물들은 등한시 하고 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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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뜨거운 날씨에 보름 동안 비가 오지도 않았으니 작물들이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생각하니 미안하더군요.

물을 흠뻑 주면서 미안한 마음도 같이 전했습니다.

텃밭에 심어 놓은 것 중에도 요즘 따먹고 있는 여름작물들은 자주 살피며 물과 비료도 신경을 써서 주고 있었는데 가을에 수확할 작물들에게는 알아서 자라겠거니 하며 방임하고 있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내 마음 속에 은근히 필요에 따른 차별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도 했습니다.

에어컨 있는 방안에 있을 때는 ‘이 폭염을 힘들 게 견디고 있는 많은 이들’에 대해 생각을 하며 해답 없는 고민들을 이러 저리 해댔는데, 정작 제 주변에서 폭염을 힘들 게 견디고 있는 식물들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머릿속 관념으로 세상을 살피기 전에 제가 발 딛고 있는 주변부터 찬찬히 둘러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각성도 했습니다.

 

 

 

(찰리정의 ‘Land Of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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