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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64회 – 끔찍한 폭력의 시대를 건너와서

 

 

 

1

 

10년쯤 전에 한종선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읽고 엄청 충격에 빠졌습니다.

1980년대 너무도 끔찍한 인권유린으로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의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책이라 영화 등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광주 인화학교, 삼청교육대 같은 살벌한 수용소의 얘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부산 형제복지원은 단연코 최강의 지옥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남아있습니다.

 

얼마 전에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고립된 빈곤’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한종선씨가 형제복지원 문제를 다시 세상에 드러낸 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왔던 10년의 기록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원장이 짧은 감옥살이 이후 다시 복지사업으로 복귀해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는 동안 인생이 망가진 피해자들은 세상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 이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여봤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데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세상입니다.

 

나이 어린 그들이 갑자기 잡혀가 생지옥을 경험할 동안

저는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편안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제가 20대 초반에 자원봉사 활동을 할 때 부랑인 수용시설에도 갔었는데

그런 수용시설의 현실에 대해 무지했던 저는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봉사활동을 하곤 했었습니다.

간혹 시설 청소를 할 때 교도소 독방보다 작은 밀폐된 방들을 보며 약간 오싹한 기운을 느끼기도 했고

그곳에서 일하고 계신 분이 많이 힘들어했었던 기억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그 속의 현실에 다가서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실상을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이후에도

그분들이 국회에서 격렬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가끔 전해 들었지만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투쟁에 힘을 보태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더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렇네요.

 

지금도 역시 이렇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투쟁과 삶에 손을 내밀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를 들어버린 이상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어도 틈이 날 때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자꾸 확인해야겠죠.

그래야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테니까요.

 

 

2

 

sns를 보는데 어느 분의 부고 소식이 떴습니다.

이름이 낯익은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봤더니 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이랑 비슷했습니다.

그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고등학교 졸업앨범까지 찾아봤더니 그분이 맞더군요.

 

1980년대 고등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대부분 그러셨겠지만

당시 고등학교는 폭력이 난무하는 군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교과목에 교련이 있어서 군사교육을 받기도 하고 전학년에 모여 사열을 하기도 했으며

선배들이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후배들 교실에 들어가서 기합 주며 군기잡고

선생들은 수틀리면 학생들 두들겨 패기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이는 미술선생이었는데

건물 맨 꼭대기에 있는 미술실에서 수업을 할 때면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직 미술 선생 혼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며

욕설과 폭력으로 수업을 대부분을 때우던 조폭의 아지트 같았습니다.

집안문제로 매우 심하게 방황을 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도살장 같은 미술실에서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미술 선생이 내 그림을 보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야, 내가 추상화를 그리는데, 니 그림은 내가 봐도 무슨 그림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분의 프로필을 살펴봤더니

지역 미술계에서 꽤 굵직한 활동을 해오셨고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장까지 역임을 하실 정도로

미술계와 교육계에서 꽤 영향력 있는 분이셨더군요.

만약에 그 분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돌아가셔서 그럴 수가 없게 됐습니다.

대신 이곳에서 못 다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욕설과 폭력 속에서 배움과 예술이 꽃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독설 한 마디가 오랜 세월 동안 잊히지 않는다면 그것도 예술의 힘인가요?”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끔찍하게도 변화가 더딘 곳 중의 하나가 학교입니다.

그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웹자보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애써 외면해버렸습니다.

최근에 뜻하지 않은 큰 지출이 연달아 있어서 재정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싸우고 있지만 주위에 도와주는 분들이 많을 거야.”

“부당한 사안을 알리려하기보다는 투쟁기금 모금만을 강조하는 건 좀...”

“해고도 아니고 부당전보인데 뭐...”

“내 여력이 안 될 때는 어쩔 수 없잖아.”

이런 말들로 저의 외면을 정당화해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자꾸 마음에 걸리적거리더군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투쟁 앞에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얘기하고

예전 학교의 부조리함을 되새기며 비판을 서슴없이 해대다가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투쟁하는 이를 애써 외면해버리는 것이 우스워보였습니다.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의 후원금을 보내는 것뿐인데도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늘어놓고 있으니...

 

끔찍한 폭력의 시대를 건너와서

살벌한 생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발버둥치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이겠죠.

 

 

 

(단편선과 선원들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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