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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치며 요트나 타볼까

골프치며 요트나 타볼까

-이효석과 '낙엽을 태우면서'


박준성

이효석은 식민지 그 어렵고 혹독한 시절에도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눈이 오면 스키 탈 생각을 했다지. 나도 한창 푸르디 푸른 잔디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다에가 요트를 타볼까. 봉평(蓬坪)이 어디인가
"봉평이 어디인지 아나?"하고 물어보면 바로 안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 왜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있잖아, 이효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면 "아 거기·"하는 사람이 제법된다.
평창군 봉평은 내 고향 강원도 홍천군 서석에서 구목령이라는 몇십리 고갯길을 걸어 넘으면 바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막상 나는 구목령을 넘어 봉평을 가보지 못했다. 차를 타고 가본지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봉평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도 죽 몰랐는데, 지지난해 배항섭씨가 {역사비평}에 쓴 '강원도에 서린 동학농민군의 발자취'를 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원래 이름 평촌(坪村)에서 한 글자를 따고 150여년전에 강릉부사로 부임한 양사언(楊士彦)이 이곳에 자주 놀러와 그의 호 봉래(蓬萊)에서 한 글자를 따 이름을 봉평이라고 다시 지었다는 설명이다.
내가 봉평에 처음 가본 때는 1989년 추석 바로 전이다. 마침 그 때 역사문제연구소'동학농민전쟁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강원도로 농민전쟁 역사기행을 갔다. 처음엔 서석도 지나간다길래 남는 자리 빌어 집에나 편안히 내려가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서석가서 생각이 바뀌어 강릉, 봉평, 원주까지 함께 돌아보았다.
그게 인연이 되어 그 뒤 두차례 더 봉평엘 갔다. 한번은 역사문제연구소가 주관하고 여강출판사에서 1894년 농민전쟁 유적지 역사기행 안내서를 내기로 했는데 거기서 내가 강원도 지역을 맡았기 때문에 사진 찍을 곳 안내하러 간 것이다.
지난 겨울에는 동아대학교 사학과 '역사철학반' 학생들과 강원도 농민전쟁터를 답사하다가 봉평에 또 한번 들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강원도에서도 9월부터 농민군이 힘차게 싸웠다. 봉평도 강원도 농민전쟁이 일어난 곳 가운데 중요한 싸움터였다. 허지만 그 사실을 알려주는 흔적이나 표지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간첩신고' '산불조심' 표지판과 '88올림픽 기념비'는 안보려고 해도 숱하게 눈에 띄었다.
봉평에는 봉평중학교 뒤 개울건너 길목에 이효석 문학비도 있다. 1989년 10월 16일 문교부에서 돈들여 큼직하게 세운 것이다. 이효석 문학비를 지나 그가 태어난 집을 찾는 사람들이 1년에 1천여명이 넘는단다. 그에 비해 한아름 꽃조차 놓을 곳 없는 민중의 싸움터를 찾아 지금까지 봉평에 와본 사람들이 백명이나 되었을까?

  
'낙엽을 태우면서'
가을이되면 쓸어도 쓸어도 나뭇잎은 자꾸만 떨어진다. 떨어지는 대로 쌓이고 밟혀 가루가 되더라도 그대로 두면 좋으련만. 청소해야 하는 사람 마음은 그게 아닐테지. 성질급한 사람들은 나무 밑둥을 차다가 그것도 답답하면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마구 흔든다. 그러한 가을이면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가 이따금 생각났다. 좋은 수필의 모범이라면서 배운 덕인가.
그런정도로 떠오르던 '낙엽을 태우면서'를 요즘은 "우물안 개구리 하늘 넓은 줄 모른다"는 속담과 함께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예로 종종 써먹는다. 바로 이 귀절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코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 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써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이를 시작해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식민지와 이효석
이효석이 죽은 때가 1942년이니까 '낙엽을 태우면서'는 당연히 1942년 이전에 쓰였겠지. 그 때가 어떤 때 인가? 1930년대 1940년대 초기에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나.
일제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식민지 농업정책에 따라 쌀 생산량은 계속 늘어났다. 쌀 수출량도 늘어났다. 그러면 당연히 먹고 살기가 좀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게 먹고 사는 문제다. 생산량이 늘어나고 수출량도 늘어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인 1인당 쌀 소비량은 줄어들었다.
"아니 언제 조선의 백성들이 기름 반지르 흐르는 쌀밥에 고기반찬해서 밥상 받아 본적이 있소?" '쌀밥'이 아니라 잡곡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족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리라. 그런데 이것 저것 조사를 해보니 잡곡 소비량도 다 줄어들었다. 이것이 식민지 민중이 겪게되는 가장 커다란 불행이다.
1932년 전라도 어느 농촌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농부가 하도 배가 고파 지주집 뽕나무 밭에 거름으로 묻은 콩깻묵을 밤에 몰래 파먹다가 걸려서 문제가 된 사건. 아무리 뼈가 휘어지게 일해도 더욱 가난해지고 어려워져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게 빼앗긴 나라 식민지 민중의 삶이다.
그러나 식민지라고 모두가 그렇게 산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일제하의 민족 반역자나 친일파도 크게 보면 사실 피해자다"고 하는 바다같이 넉넉한 마음씨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1백-2백년동안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들 생각하고 있었으니까..."하고 변명하면서 "나에게 친일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 서정주의 말도 후련하게 받아들이질 못하겠다. 그가 역사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해서 한 말일까. "마쓰이 히데오!" 하면서 '송정오장송가'를 읊었던 시인과 "미국이 아니면 다 망하게 된 걸 살려준게 누군데"하며 민족문학 민중문학하는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6공화국이 출범하기 바로전에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인가 하는 데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들이 총을 쏜 것은 정당했다고 강변하던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5공화국 때 영부인께서 존경한다던 末堂, 未堂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제식민지 시기는 그 시기만 떼어져 역사의 바다에서 따로 떠도는 섬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과 생각과 글이 어찌 따로 따로 일 수 있겠는가. 이효석은 그럴만 했으므로 겨울이 온다고 크리스 마스 트리를 만들고 눈이 온다고 스키탈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 콩깨묵 파먹던 전라도 그 농민이 이효석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백설이 쌓인 만주 평원에서 백마의 갈기를 휘날리며 말밥굽 소리도 요란하게 싸우다'가는 얼어죽거나 총맞아 죽기 십상인 혹한의 만주 산악지대, 그 곳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사람들. 민족해방운동의 불씨조차 말려버리려 눈이 벌개있던 1930-40년대 국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민족해방을 모색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눈이 온다고 스키를 즐길 생각을 하고 그런 생각으로 글을 써서 남길 수 있었을까?
내가 '이효석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려고 이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삶은 삶대로 문학은 문학대로 따로 떼어서 볼 수 있는 문학적 안목과 소양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낙엽을 태우면서' 대신 국어교과서에 '메밀꽃 필 무렵'이 실렸다거나, 젖무덤 부드럽게 부조로 조각한 흰 화강암 대리석에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귀절을 새겨 우아한 문학비를 세웠다해서 '교육정책' '문화정책'이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북한에서 이효석의 1930년대 '순수문학'을 "작품의 주제 설정과 소재 선택에서 그리고 인물들의 성격묘사에서 사회적 관계를 떠나 '본능적인 순수성'을 추구하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발로시켰으나 재치있는 구성수법과 묘사력 등으로 소설가로서의 기량을 보여주었다"({조선문학개관}2,1986)고 좋게 평가해도 솔깃 할 수가 없다.
내용과 형식이 어찌 따로 놀 수 있는가.
이효석의 작품을 교과서에 싣는다면 '메밀꽃 필 무렵'보다는 오히려 일선통혼(日鮮通婚)을 소재로 한 [아자미(계)의 장(章)]을 택하는 것이 어떨까?(동녘출판사, {교과서와 친일문학}에 실려 있다). 약혼자를 팽개쳐 둔 채 일본인 술집여자하고 정을 나누며 헤어나지 못하는 내용을 통해 '순수'를 지향하는 허약한 지식인이 어떻게 일제의 '민족멸종정책'을 교묘하게 정당화하는가를 살피는 편이 교육 효과가 더 클 듯하다.

  
골프치고 요트 탈까?
이효석이 죽은지 50년이 지났다. 1990년대 전반 이 시대의 역사를 50년 뒤에는 어떻게 평가할까?
작년 겨울엔 '어떻게 사는 길이 올바른 삶인가' '비록 이 길이 험난하고 멀지라도 절대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던 권미경 양이 30M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물세살 꽃다운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주오' 하는 부탁을 팔뚝에 써서 남긴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미경이 다니던 공장 칠판에는 관리자가 "목표량을 달성 못하면 함께 죽자"고 크게 써놓고, PQM인가 하는 방식을 적용하여 초시계를 들이대고 그렇게 족쳐댔다지.
올 봄엔 해태제과 영등포공장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여덟 김미영 양이 과자를 실은 컨베이어 톱니바퀴에 왼쪽 손이 빨려들어가 기계에 머리가 부딪혀 숨졌다. 미영이는 '단추만 누르면 되는 편안한 일'이라는 말만 믿고 일하다 회사에 들어온지 두주만에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아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 아/ 산다는 것은 살아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박노해, <그해 겨울나무>에서).
한 해에 산재로 죽어가는 노동자가 1년에 2천여명이 넘는 1990년대 이 현실(1990년 : 2천 2백36명, 1991년 : 2천 2백 98명)에서 골프칠 생각을 하고 요트탈 계획을 세운다면 50년 뒤에 '역사에세이'는 뭐라고 쓸까. 1990
년대 전반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국가보안법'에 얽혀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그러한 때도 그렇게 살만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 하는 식일까?
(199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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